본문 바로가기
◑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네 보물이 있는 곳(마태복음 6장 19절~21절)

by 【고동엽】 2022. 12. 2.
목차로 돌아가기

 

 

네 보물이 있는 곳(마태복음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본문 21절의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뜻깊은 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보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유형(有形)이든 무형(無形)이든, 남들이 보아서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소간에 보물이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귀한 보물인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의 군대가 한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그 군대의 장수가 마을사람들에게 포고합니다. "남자들은 모조리 우리의 포로로 잡아가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모두를 방면할 것이니 마을을 떠나되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한 가지씩만은 지니고 나가도 좋다." 이리하여 여자들은 그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금반지며 은수저며, 저마다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여기던 물건을 하나씩 지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이상하게도 허약한 몸이면서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메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검문하던 자가 보따리를 헤쳐보니 사람인 남자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이건?" "제 남편입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왜 명령을 어기는가? 보물을 가져가라 했거늘 사람을 왜 메고 나가는가?" 적군의 장수가 을러메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제 남편입니다." 글쎄요, 남편을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뭣합니다마는 아무튼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라 하겠습니다. 적군의 장수는 여인의 지혜와 그 마음에 감동하여 남편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화가 내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들여다보고 애지중지 다듬고 아끼는 내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 같은 것이 내 보화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가있는 것, 그것이 보화입니다. 거기 내 마음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물질적인 보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돈이라 하겠습니다. 돈이 있으면 가지고 싶은 물질을 살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돈은 물질적인 안정(安定)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이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으면 곤란합니다. 보금자리로 살아갈 집도 돈이 있어야 주어집니다. 한마디로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돈에 연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돈은 곧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보화입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비가 있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돈은 명예가 되기도 합니다. 상당한 명예를 보장해줍니다. 사람이 너무 가난하다보면 때로는 자신의 명예를 내놓는 수가 있습니다. 비굴해질 수가 있습니다. 일찍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말한 바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나는 자유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 명예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하기에 마음에 없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비굴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그 꼴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로는 경제력이 있어야 명예도 지켜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 명예를 지켜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돈이 주는 안정은 결코 절대적 안정이 못됩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명예에도 제한성이 있습니다. 돈으로 명예를 추구하다가 그 돈 때문에 부끄러움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돈이 명예를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내 보물입니다. 내 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내 보물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산다. 내게는 그것이 제일 소중하다. 내 가치관의 기준이 되고 내 성공과 실패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면 성공이요 얻지 못하면 실패다. 다른 것을 다 가졌다 해도 그것을 얻지 못하면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얻으면 행복하지만 얻지 못하면 나는 불행하다'라고 하는 '그것'이 보물입니다. 보화입니다. 늘 먹기를 탐하는 미식가(美食家)는 자신의 뱃속이 보화입니다. 맛있으면 으뜸이요 배부르면 만족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잔치를 좋아합니다. 먹고 마시는 파티를 좋아하므로 잔치가 보화입니다.

음탕한 사람은 난잡한 쇼가 보화요 방탕한 사람은 사치가 보화입니다.

인생이 그 욕망, 보화의 노예가 될 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가지고자 지향하는 보화를 얻기 위하여 고생합니다. 지키느라고 힘이 듭니다. 빼앗기면 슬퍼하고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억울해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죽기를 바라다가 죽는 것이기에 죽는 고통조차 못 느낍니다. 그러나 보물을 벌어놓고 쓰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두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무척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편하게 죽으려면 일찌감치 보화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분명 사람은 그가 가진 욕망에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려고 하는, 또한 이미 가진 그 보물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따라 살려는 데에 두 가지 질병이 있다. 하나는 거짓설교요, 둘은 욕망이다." 거짓설교는 참진리를 망치고, 욕망은 참다운 삶을 그르칩니다. 거짓설교 때문에 영적인 신앙이 죽고 육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열매가 죽는다고 하는 귀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바른 진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습니다. 또한 욕망을 올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이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마저 없어져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해도 아직도 마음속의 끓어오르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면 바른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한바 욕망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힌 기도는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바른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에 기도할 때마다 '주세요, 주세요' 한다면 급기야는 이미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도 없고 자기를 살피지도 못하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빼앗겼다면 억울하고 분해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기도도 바로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 : 2, 3)"-욕망이 있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바른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욕망은 결코 만족을 모르며, 만족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크리소스토무르도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첫째, 욕망은 취한다 하더라도 안정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일시적일 뿐입니다.

아무리 욕심대로 가져봐도 그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내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내 마음속의 충족감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 만원이 있었으면 했는데 만 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그러나 얻을 때의 그 기쁨은 얻는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를 탐하여 거기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일구월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마침내 거기에 다다르고 보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지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염려가 됩니다. 그 지위에 따르는 의무가 어깨를 누릅니다. 더 큰일이 닥친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며칠 전에 신문에 났었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여러 해를 두고 신춘문예에 당선하려고 소설을 썼습니다. 선생님을 하면서 소설을 쓰려니 어렵게 시간을 내어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결국 10년만에 당선이 됩니다. 이제 큰상을 받고 작가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다음날로 그는 뜻밖에도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작가된 위치를 지켜나갈 자신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거기까지 이른 것만으로도 족하다면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욕망이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달성됐다고 하는 그 체험적 만족감은 실로 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욕망이 충족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더 가지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만 원을 가지면 백만 원을, 백만 원을 가지면 천만 원을, 천만 원을 가지면 일억을 가지려고 합니다. 욕망이 더 큰 욕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요즘 셋방살이하는 분들은 그저 전세라도, 전세로 사는 분들은 그저 집 한 채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얻게 되면 처음에는 좋아서 기뻐합니다마는 후에는 그 집이 작다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느 순간에는 욕망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행복을 모르는 것, 이것이 욕망입니다. 이상하게도 없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있는 것에는 흥미가 없어합니다. 가진 것에는 흥미 없고 가지지 못한 것에만 흥미가 있는, 이런 사람은 불행하다 하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가장 귀한 줄로 압니다. 옷을 입었다면 가장 좋은 옷인 줄로, 집을 가졌으면 제일 좋은 집인 줄로 압니다.

차를 타도 그 차가 가장 좋은 차인 줄로 아는 것, 이런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을 가져도 행복할 줄 모릅니다.

아는 것은 소중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만 흥미를 가집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소중히 여길 줄 모릅니다. 할 수 없는 것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안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화(聖火)한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을 성화 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욕망을 거부하시지 않았습니다.

욕망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망 그 자체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 자체에 대하여 우선 감사한 다음에는 제한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욕망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결코 욕망을 다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극히 제한적입니다. 물질도 모두를 가질 수는 없으며, 쓰지를 못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모든 지식을 얻을 수는 없으며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철학자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철학자입니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가지고 있으나마나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꼭 가져야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안가져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행도 그렇습니다. 구경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다닙니다마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일생토록 자기가 사는 마을 밖을 나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권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더 다니려고 야단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나가려고 합니다. 오히려 문밖에 안나가본 사람은 마음이 편합니다. 입는 것,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주도 가기를 소원합니다마는 가보나마나 한 것입니다.

가본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욕망은 한시바삐 제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지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욕망을 선한 방법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방향으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욕망에 도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성 안에서 욕망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도 가지겠다,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대학을 나왔지만 취직을 못한 사람이 차마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해서 직장에 다니는 행세를 하다가 사고를 쳤습니다. 직장에 다닌다고 했으니 가족들은 그가 가져올 월급을 기다릴 것이 뻔합니다. 이윽고 월급 때쯤 되자 급기야 강도 짓을 저질렀습니다.

동정은 가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깊이 병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선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욕망에 도덕성이 필요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

물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물질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과 물질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물질과 욕망에 대하여 제한성과 도덕성을 바로 찾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물질과 욕망에 대하여 종교성을 깨닫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하게 사는 길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도 그렇습니다.

본능에 대한 욕망은 다 거룩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의 제한성을 바로 깨달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 욕망을 바르게 쓸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질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목적(非目的)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물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여기서 마음이란 사랑과 그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욕망과 행복이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보물로 말해지는 물질은 인생관, 가치관, 신앙관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사람의 됨됨이를 두 가지의 기준으로 평가했습니다. 칭찬과 돈이 그것입니다. 칭찬을 했을 때에 교만해지면 몹쓸 사람이요, 겸손해지면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공돈을 주고 그것을 어디에 쓰는지 보았습니다. 돈을 주었을 때에 그것을 좋은 일에 쓰면 된 사람이요, 자신의 쾌락을 찾아 쓰면 몹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듯 돈이란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인생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내가 돈을 주로 어디에 쓰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요새 흔해빠진 신용카드(credit card), 되도록 사용하지 마십시오. 카드로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대금의 영수증이 돌아오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어디에 이렇듯 많은 돈을 썼는지 이상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듯 카드란 과소비를 부추기는 장본(張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 성가대 임원들이 제게 와서 성가대 활동비를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작년에 쓴 내용을 평가하고 인상해줄 터이니, 그 내역이 담긴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 영수증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보니 90퍼센트가 식비였고, 나머지 10퍼센트만이 문구 비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가대 임원들을 보고 성가대 경비를 올려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식비를 인상해달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한마디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쓰고 받은 영수증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도대체 내가 어디에다 돈을 쓰고 사는지, 그리고 돈을 제일 많이 쓰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살펴보십시오. 대개 보면 알뜰한 척 인색한 척하면서도 엉뚱한 데에 가서 풍덩풍덩 돈을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돈주머니를 꽉 쥐고 풀지 않으면서 전혀 쓸 필요가 없는 곳에 가서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고도 신앙을 운위합니다. 효를 논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효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효자는 자녀를 위해서 돈을 쓰는 데에 아끼는 반면에 부모님을 위하여 돈을 쓰는 데는 아낌이 없습니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만 원 십만 원 쓰고, 부모님을 위해서는 천 원 이천 원 쓰는 사람이 불효자인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효자일 수도 있고 불효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돈을 버는 자세, 돈을 보관하는 자세, 돈을 쓰는 자세가 모두 중요한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은 돈을 어디에다 써야 하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23장도 돈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4, 5)." 신학은 이 세상을 이분(二分)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적이며 신앙적인 것과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것으로 만물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이를 증거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마음은 신령한 것이요, 보화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물질과 보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적 사상입니다.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적 사상입니다. 우리는 간혹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내가 가진 물질은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틀린 소리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돈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없이 마음만 어떻고 정신만 어떻다고 하는 것은 죄다 거짓말입니다. 정신과 물질, 신령한 것

물질적인 것은 절대로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의미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네 보화가 있는 그곳에 네 신앙이 있으며, 네 인격이 있느니라, 라고 바꿔 놓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윌리엄 템플이 기독교를 가장 물질적인 종교라고 일컬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베버(Weber, Max)는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연결하여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혹자는 기독교를 칼비니즘(Calvinism)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지적입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정신을 별개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제사로 나타나고,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기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사랑하심을 마음으로만 나타내시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그 사랑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이를 증거 합니다. 이렇듯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연결하여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바쳐라, 첫것을 바쳐라…… 라고. 이 말씀들은 모두 물질에 대한 구체적 표현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가는 데로 마음이 간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신앙의 구체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바로 드리면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진실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린 사람이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 좀먹는다고 함은 옷을 못쓰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보화가 옷이었습니다. 동록은 구리에 생기는 녹을 말합니다. 파랗게 녹이 스는 것을 동록이라고 합니다. 좀먹는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두어도 자연적으로 상실된다는 말이고, 동록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변질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도둑이 가지고 간다는 것은 상황과 함께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내 것이지만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시간적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건강한 동안, 내 정신이 맑은 동안은 내 소유이지만 내 정신이 희미해지고 보면 그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임시적이고 순간적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 청지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고 오늘의 본문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적 용어로는 '선행을 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써라,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쌓아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 손에서 떠난다는 뜻입니다. 내가 물질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 내가 보관할 뿐만 아니라 내가 쓴다는 것입니다. '쓴다'라고 하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보면 과소비를 추방한다는 견지에서 저축을 장려합니다마는 만약 모든 사람이 가진 돈을 몽땅 저금통장에 집어넣고 만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산해놓은 물건이 팔려야만 국가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축만 한다면 물건을 살 사람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경제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순환이 되지 않으면 공장이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팔리지도 않을 물건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따라서 돈을 쓴다고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온전한 내 소유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제가 간혹 '먹어버린 것만 내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내 창고에 먹을 것이 쌓여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입니까, 내 냉장고에 음식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고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미 먹은 것만이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저금통장에 있는 돈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내 것일지라도 죽고 나면 남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옷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입은 옷이라 해도 내일은 다른 사람이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내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쓴 것만이 온전한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빼앗긴 것과 내가 기쁜 마음으로 준 것과는 다릅니다. 주기는 했으되 억지로 주었다면 결국은 빼앗긴 것입니다. 부득이해서 준 것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썼습니다. 내가 주었습니다. 내 의지대로 내 손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히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을 동안에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떠나기 전에 모두 써버리는 것입니다. 무언가 남겨놓고 죽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진 물건은 세상에서 다 써버리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물질을 남겨놓고 가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부하지 못하면서도 백만장자 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산이 꽤 많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쓸 줄 모르고 움켜쥐고 있다가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놓고 죽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각자 가진 물질의 쓰임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20)"-네가 가진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네 마음도 거기에 있게 된다고 말씀함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내가 가진 재물을 선한 곳에 쓰면 내 마음도 선해집니다. 의로운 일에 쓰면 내 마음도 그에 따라서 의로워집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마는 여러분은 오늘도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를 보십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을 여기에 놓기 위하여 헌금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서슴지 않고 내놓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은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헌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융자를 받아서 내놓고 그것을 갚느라고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위해 모이신 분들이 모두 이 오르간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오르간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여느 분들이 듣는 오르간 소리와 이것을 위하여 헌금하신 분들이 듣는 오르간 소리는 다릅니다.

예배 때마다 늘 오르간 가까이에 앉는 분이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리가 좋아서랍니다. 그 사람은 오르간을 위해 헌금하신 분으로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성경말씀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이렇듯 제가 오르간을 위해서 헌금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내주신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헌금을 하신 그분들의 마음은 여느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간혹 보면 이 교회 저 교회로 휘적휘적 옮겨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느 교회에서건 헌금을 안한 사람들입니다. 헌금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한 교회를 위해서 많이 헌금하고 헌신한 사람은 절대로 그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희생하고 헌금했는데 딴데로 간단 말입니까?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렸기 때문에 설사 교역자가 바뀌더라도 그 사람들은 옮겨가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교인들 가운데는 "헌금 좀 했어요"라고 자랑삼아 떠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낸 헌금은 보화가 아닙니다.

쓰고 남은 푼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정착됨이 없이 떠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화를 들인 사람은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보화를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회사든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그 회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보물을 두어야 합니까? 어디에 바쳐야 합니까? 우리의 보물을 바쳐놓고 항상 그리워할 수 있는 그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네 보물이 있는 곳(마태복음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본문 21절의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뜻깊은 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보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유형(有形)이든 무형(無形)이든, 남들이 보아서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소간에 보물이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귀한 보물인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의 군대가 한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그 군대의 장수가 마을사람들에게 포고합니다. "남자들은 모조리 우리의 포로로 잡아가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모두를 방면할 것이니 마을을 떠나되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한 가지씩만은 지니고 나가도 좋다." 이리하여 여자들은 그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금반지며 은수저며, 저마다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여기던 물건을 하나씩 지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이상하게도 허약한 몸이면서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메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검문하던 자가 보따리를 헤쳐보니 사람인 남자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이건?" "제 남편입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왜 명령을 어기는가? 보물을 가져가라 했거늘 사람을 왜 메고 나가는가?" 적군의 장수가 을러메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제 남편입니다." 글쎄요, 남편을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뭣합니다마는 아무튼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라 하겠습니다. 적군의 장수는 여인의 지혜와 그 마음에 감동하여 남편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화가 내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들여다보고 애지중지 다듬고 아끼는 내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 같은 것이 내 보화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가있는 것, 그것이 보화입니다. 거기 내 마음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물질적인 보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돈이라 하겠습니다. 돈이 있으면 가지고 싶은 물질을 살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돈은 물질적인 안정(安定)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이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으면 곤란합니다. 보금자리로 살아갈 집도 돈이 있어야 주어집니다. 한마디로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돈에 연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돈은 곧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보화입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비가 있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돈은 명예가 되기도 합니다. 상당한 명예를 보장해줍니다. 사람이 너무 가난하다보면 때로는 자신의 명예를 내놓는 수가 있습니다. 비굴해질 수가 있습니다. 일찍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말한 바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나는 자유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 명예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하기에 마음에 없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비굴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그 꼴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로는 경제력이 있어야 명예도 지켜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 명예를 지켜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돈이 주는 안정은 결코 절대적 안정이 못됩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명예에도 제한성이 있습니다. 돈으로 명예를 추구하다가 그 돈 때문에 부끄러움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돈이 명예를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내 보물입니다. 내 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내 보물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산다. 내게는 그것이 제일 소중하다. 내 가치관의 기준이 되고 내 성공과 실패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면 성공이요 얻지 못하면 실패다. 다른 것을 다 가졌다 해도 그것을 얻지 못하면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얻으면 행복하지만 얻지 못하면 나는 불행하다'라고 하는 '그것'이 보물입니다. 보화입니다. 늘 먹기를 탐하는 미식가(美食家)는 자신의 뱃속이 보화입니다. 맛있으면 으뜸이요 배부르면 만족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잔치를 좋아합니다. 먹고 마시는 파티를 좋아하므로 잔치가 보화입니다.

음탕한 사람은 난잡한 쇼가 보화요 방탕한 사람은 사치가 보화입니다.

인생이 그 욕망, 보화의 노예가 될 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가지고자 지향하는 보화를 얻기 위하여 고생합니다. 지키느라고 힘이 듭니다. 빼앗기면 슬퍼하고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억울해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죽기를 바라다가 죽는 것이기에 죽는 고통조차 못 느낍니다. 그러나 보물을 벌어놓고 쓰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두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무척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편하게 죽으려면 일찌감치 보화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분명 사람은 그가 가진 욕망에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려고 하는, 또한 이미 가진 그 보물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따라 살려는 데에 두 가지 질병이 있다. 하나는 거짓설교요, 둘은 욕망이다." 거짓설교는 참진리를 망치고, 욕망은 참다운 삶을 그르칩니다. 거짓설교 때문에 영적인 신앙이 죽고 육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열매가 죽는다고 하는 귀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바른 진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습니다. 또한 욕망을 올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이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마저 없어져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해도 아직도 마음속의 끓어오르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면 바른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한바 욕망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힌 기도는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바른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에 기도할 때마다 '주세요, 주세요' 한다면 급기야는 이미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도 없고 자기를 살피지도 못하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빼앗겼다면 억울하고 분해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기도도 바로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 : 2, 3)"-욕망이 있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바른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욕망은 결코 만족을 모르며, 만족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크리소스토무르도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첫째, 욕망은 취한다 하더라도 안정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일시적일 뿐입니다.

아무리 욕심대로 가져봐도 그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내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내 마음속의 충족감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 만원이 있었으면 했는데 만 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그러나 얻을 때의 그 기쁨은 얻는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를 탐하여 거기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일구월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마침내 거기에 다다르고 보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지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염려가 됩니다. 그 지위에 따르는 의무가 어깨를 누릅니다. 더 큰일이 닥친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며칠 전에 신문에 났었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여러 해를 두고 신춘문예에 당선하려고 소설을 썼습니다. 선생님을 하면서 소설을 쓰려니 어렵게 시간을 내어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결국 10년만에 당선이 됩니다. 이제 큰상을 받고 작가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다음날로 그는 뜻밖에도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작가된 위치를 지켜나갈 자신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거기까지 이른 것만으로도 족하다면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욕망이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달성됐다고 하는 그 체험적 만족감은 실로 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욕망이 충족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더 가지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만 원을 가지면 백만 원을, 백만 원을 가지면 천만 원을, 천만 원을 가지면 일억을 가지려고 합니다. 욕망이 더 큰 욕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요즘 셋방살이하는 분들은 그저 전세라도, 전세로 사는 분들은 그저 집 한 채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얻게 되면 처음에는 좋아서 기뻐합니다마는 후에는 그 집이 작다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느 순간에는 욕망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행복을 모르는 것, 이것이 욕망입니다. 이상하게도 없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있는 것에는 흥미가 없어합니다. 가진 것에는 흥미 없고 가지지 못한 것에만 흥미가 있는, 이런 사람은 불행하다 하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가장 귀한 줄로 압니다. 옷을 입었다면 가장 좋은 옷인 줄로, 집을 가졌으면 제일 좋은 집인 줄로 압니다.

차를 타도 그 차가 가장 좋은 차인 줄로 아는 것, 이런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을 가져도 행복할 줄 모릅니다.

아는 것은 소중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만 흥미를 가집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소중히 여길 줄 모릅니다. 할 수 없는 것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안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화(聖火)한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을 성화 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욕망을 거부하시지 않았습니다.

욕망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망 그 자체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 자체에 대하여 우선 감사한 다음에는 제한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욕망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결코 욕망을 다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극히 제한적입니다. 물질도 모두를 가질 수는 없으며, 쓰지를 못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모든 지식을 얻을 수는 없으며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철학자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철학자입니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가지고 있으나마나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꼭 가져야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안가져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행도 그렇습니다. 구경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다닙니다마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일생토록 자기가 사는 마을 밖을 나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권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더 다니려고 야단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나가려고 합니다. 오히려 문밖에 안나가본 사람은 마음이 편합니다. 입는 것,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주도 가기를 소원합니다마는 가보나마나 한 것입니다.

가본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욕망은 한시바삐 제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지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욕망을 선한 방법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방향으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욕망에 도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성 안에서 욕망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도 가지겠다,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대학을 나왔지만 취직을 못한 사람이 차마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해서 직장에 다니는 행세를 하다가 사고를 쳤습니다. 직장에 다닌다고 했으니 가족들은 그가 가져올 월급을 기다릴 것이 뻔합니다. 이윽고 월급 때쯤 되자 급기야 강도 짓을 저질렀습니다.

동정은 가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깊이 병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선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욕망에 도덕성이 필요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

물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물질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과 물질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물질과 욕망에 대하여 제한성과 도덕성을 바로 찾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물질과 욕망에 대하여 종교성을 깨닫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하게 사는 길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도 그렇습니다.

본능에 대한 욕망은 다 거룩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의 제한성을 바로 깨달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 욕망을 바르게 쓸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질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목적(非目的)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물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여기서 마음이란 사랑과 그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욕망과 행복이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보물로 말해지는 물질은 인생관, 가치관, 신앙관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사람의 됨됨이를 두 가지의 기준으로 평가했습니다. 칭찬과 돈이 그것입니다. 칭찬을 했을 때에 교만해지면 몹쓸 사람이요, 겸손해지면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공돈을 주고 그것을 어디에 쓰는지 보았습니다. 돈을 주었을 때에 그것을 좋은 일에 쓰면 된 사람이요, 자신의 쾌락을 찾아 쓰면 몹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듯 돈이란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인생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내가 돈을 주로 어디에 쓰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요새 흔해빠진 신용카드(credit card), 되도록 사용하지 마십시오. 카드로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대금의 영수증이 돌아오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어디에 이렇듯 많은 돈을 썼는지 이상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듯 카드란 과소비를 부추기는 장본(張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 성가대 임원들이 제게 와서 성가대 활동비를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작년에 쓴 내용을 평가하고 인상해줄 터이니, 그 내역이 담긴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 영수증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보니 90퍼센트가 식비였고, 나머지 10퍼센트만이 문구 비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가대 임원들을 보고 성가대 경비를 올려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식비를 인상해달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한마디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쓰고 받은 영수증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도대체 내가 어디에다 돈을 쓰고 사는지, 그리고 돈을 제일 많이 쓰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살펴보십시오. 대개 보면 알뜰한 척 인색한 척하면서도 엉뚱한 데에 가서 풍덩풍덩 돈을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돈주머니를 꽉 쥐고 풀지 않으면서 전혀 쓸 필요가 없는 곳에 가서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고도 신앙을 운위합니다. 효를 논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효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효자는 자녀를 위해서 돈을 쓰는 데에 아끼는 반면에 부모님을 위하여 돈을 쓰는 데는 아낌이 없습니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만 원 십만 원 쓰고, 부모님을 위해서는 천 원 이천 원 쓰는 사람이 불효자인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효자일 수도 있고 불효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돈을 버는 자세, 돈을 보관하는 자세, 돈을 쓰는 자세가 모두 중요한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은 돈을 어디에다 써야 하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23장도 돈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4, 5)." 신학은 이 세상을 이분(二分)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적이며 신앙적인 것과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것으로 만물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이를 증거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마음은 신령한 것이요, 보화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물질과 보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적 사상입니다.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적 사상입니다. 우리는 간혹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내가 가진 물질은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틀린 소리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돈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없이 마음만 어떻고 정신만 어떻다고 하는 것은 죄다 거짓말입니다. 정신과 물질, 신령한 것

물질적인 것은 절대로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의미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네 보화가 있는 그곳에 네 신앙이 있으며, 네 인격이 있느니라, 라고 바꿔 놓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윌리엄 템플이 기독교를 가장 물질적인 종교라고 일컬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베버(Weber, Max)는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연결하여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혹자는 기독교를 칼비니즘(Calvinism)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지적입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정신을 별개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제사로 나타나고,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기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사랑하심을 마음으로만 나타내시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그 사랑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이를 증거 합니다. 이렇듯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연결하여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바쳐라, 첫것을 바쳐라…… 라고. 이 말씀들은 모두 물질에 대한 구체적 표현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가는 데로 마음이 간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신앙의 구체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바로 드리면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진실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린 사람이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 좀먹는다고 함은 옷을 못쓰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보화가 옷이었습니다. 동록은 구리에 생기는 녹을 말합니다. 파랗게 녹이 스는 것을 동록이라고 합니다. 좀먹는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두어도 자연적으로 상실된다는 말이고, 동록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변질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도둑이 가지고 간다는 것은 상황과 함께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내 것이지만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시간적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건강한 동안, 내 정신이 맑은 동안은 내 소유이지만 내 정신이 희미해지고 보면 그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임시적이고 순간적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 청지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고 오늘의 본문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적 용어로는 '선행을 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써라,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쌓아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 손에서 떠난다는 뜻입니다. 내가 물질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 내가 보관할 뿐만 아니라 내가 쓴다는 것입니다. '쓴다'라고 하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보면 과소비를 추방한다는 견지에서 저축을 장려합니다마는 만약 모든 사람이 가진 돈을 몽땅 저금통장에 집어넣고 만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산해놓은 물건이 팔려야만 국가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축만 한다면 물건을 살 사람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경제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순환이 되지 않으면 공장이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팔리지도 않을 물건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따라서 돈을 쓴다고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온전한 내 소유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제가 간혹 '먹어버린 것만 내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내 창고에 먹을 것이 쌓여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입니까, 내 냉장고에 음식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고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미 먹은 것만이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저금통장에 있는 돈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내 것일지라도 죽고 나면 남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옷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입은 옷이라 해도 내일은 다른 사람이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내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쓴 것만이 온전한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빼앗긴 것과 내가 기쁜 마음으로 준 것과는 다릅니다. 주기는 했으되 억지로 주었다면 결국은 빼앗긴 것입니다. 부득이해서 준 것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썼습니다. 내가 주었습니다. 내 의지대로 내 손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히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을 동안에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떠나기 전에 모두 써버리는 것입니다. 무언가 남겨놓고 죽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진 물건은 세상에서 다 써버리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물질을 남겨놓고 가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부하지 못하면서도 백만장자 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산이 꽤 많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쓸 줄 모르고 움켜쥐고 있다가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놓고 죽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각자 가진 물질의 쓰임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20)"-네가 가진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네 마음도 거기에 있게 된다고 말씀함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내가 가진 재물을 선한 곳에 쓰면 내 마음도 선해집니다. 의로운 일에 쓰면 내 마음도 그에 따라서 의로워집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마는 여러분은 오늘도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를 보십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을 여기에 놓기 위하여 헌금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서슴지 않고 내놓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은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헌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융자를 받아서 내놓고 그것을 갚느라고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위해 모이신 분들이 모두 이 오르간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오르간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여느 분들이 듣는 오르간 소리와 이것을 위하여 헌금하신 분들이 듣는 오르간 소리는 다릅니다.

예배 때마다 늘 오르간 가까이에 앉는 분이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리가 좋아서랍니다. 그 사람은 오르간을 위해 헌금하신 분으로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성경말씀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이렇듯 제가 오르간을 위해서 헌금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내주신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헌금을 하신 그분들의 마음은 여느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간혹 보면 이 교회 저 교회로 휘적휘적 옮겨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느 교회에서건 헌금을 안한 사람들입니다. 헌금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한 교회를 위해서 많이 헌금하고 헌신한 사람은 절대로 그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희생하고 헌금했는데 딴데로 간단 말입니까?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렸기 때문에 설사 교역자가 바뀌더라도 그 사람들은 옮겨가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교인들 가운데는 "헌금 좀 했어요"라고 자랑삼아 떠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낸 헌금은 보화가 아닙니다.

쓰고 남은 푼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정착됨이 없이 떠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화를 들인 사람은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보화를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회사든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그 회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보물을 두어야 합니까? 어디에 바쳐야 합니까? 우리의 보물을 바쳐놓고 항상 그리워할 수 있는 그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