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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도 됨의 자격! (행 1:21-26)

by 【고동엽】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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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됨의 자격! (행 1:21-26)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저들은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갈릴리사람들이지만 이
예루살렘에서 저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부활 승천 하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말씀
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는지 모릅니다. 몇 날을 기다려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다리라" 하셨
기에 저들은 한데 모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문도는 기다리는 가운데
세 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첫째로, 저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저들은 마
음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 가룟 유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
를 가리켜 제 갈 곳으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유다가 우리 가운데 있었다고는 하지만
진정 우리의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와 동행은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함께 행세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유다는 우리와 함께한 사람이 아니었다 - 이렇듯 유다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해석을 내리려 했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유다는 제 갈 곳으로 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언된 바요 이미 주신 말씀 안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유다 문제에 대하
여 성서적으로 해답을 얻으려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 안에서 저들의 마음속에 있는,
가룟 유다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불식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
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공동적인, 집단적인 참회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들은 가룟 유다로 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서적인 해답을 내린 것입니다. 있을 일이 있은 것이니 마땅하다, 유감스
러울 것도 없고 크게 잘못된 것처럼 그렇게 마음 아파할 것도 없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예언을 찾아서 성경대로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립니다. 그렇게 함으
로써 저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제하려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어떻게 자기 제
자에게 팔릴 수 있느냐, 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는 부
정적 시각을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통하여 종식시키려 했습니다. 부활사건을 통하여 저들은
밝은 아침을 맞았고, 기쁨과 영광을 누렸습니다마는, 그래도 메시야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
실과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팔렸다는 사실이 저들의 마음에 무척이나 언짢은 앙금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 안에서 찾습니다.
셋째로 저들은 유다가 빠진 열두 사도의 반열에 한 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고 했
습니다. 본디 이 열두 제자는 열두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교회의 질서와 구조를 위하여 한 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 했습니다.
그것은 열둘이라는 숫자가 열두 지파와 보좌를 상징하기에 그것을 채우자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심리적인 목적이 더욱 컸습니다. 보십시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자리가 비어있음으로 어쩔수없이 가룟 유다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
다. 따라서 저들은 이 문제를 소극적으로, 임시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영구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저들은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열두 사도라고 하는 것이 아주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요 영원한 지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채울 수도 있고 감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빠진 열두 사도이니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빈 자리로 해서 가룟 유다의 그림자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채
우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요, 사도 못지 않은 사람이 얼마든
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열두 사람이 대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
에서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그것이 절대지위라고 한다면 누가 감히 채
우려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사도들의 겸손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겸손이 있습니
다. 그리고 여기에 평등의식이 있습니다. 보편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나만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만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저들 가운데 부활의 증인이 있고, 얼마든지
저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을 일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겸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일백이십 문도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열둘을 채우려고 합니
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가룟 유다의 문제에 대한
소극적 방법으로서 성서적 이해를 바로 했고, 적극적 방법으로서 빈 자리를 채워서 다시는
가룟 유다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사도(使徒)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사람입니다. 다만 주님께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았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
씀에 사도의 직능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
리라(22절)."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것이 사도의 절대사명입니다. 이것이 전
부입니다. 물론 이밖에도 사도의 사명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
의 부활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진리를 창출해내는 사람도 아니요, 진리
를 가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
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역사 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
다. 문제는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그 역사의 효력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개개인의
마음속에 사실로 믿어지게 하는 것-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actualization이라고 합니다. 여
러분,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아무리 엄연한 사건일지라도, 확실한 사건일지라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것이 내게는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사건이 되고 맙
니다. 믿을 때에야 그 사건은 나와 관계 있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믿게 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증인이 필요합니다. 제가 평양에 다녀와서 우리
교인들에게 평양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
게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평양이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하는 방송이나 신문의 이야기
를 늘 들어왔습니다만, 설마 그렇게 까지야, 하고 의심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이 직접 보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니 이제는 믿겠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 동안은
안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리고 안믿으니까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
요. 그런데 이제 제가 직접 다녀와서 이야기를 하니 제 체면을 봐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저
를 믿고 믿겠다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믿게 하는 데에 제가 증인된 것입니다. 그분이 직접
보지를 못했지만 저의 말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부터 지식이 성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 확실한 사건이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야 그것
이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
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천양지차입니다. 하기야 같을 수가 없지요. 부활을
믿는 사람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인사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마는,
부활을 안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을 의미합니다. 지옥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
지만, 있다면 틀림없이 지옥 갈 것이라며 두려워합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이렇
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서
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이 그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해야 합니다. 사실 직접 만나고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증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
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
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 우리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사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증거 하는 것입니다. Co-witness입니다.
혼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열한 제자가 더불어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선된 한 사람이 더불어 증거합니다.
이제, 저들은 유다가 빠진 그 자리에 한 사람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득불 사도의 자격을 논할 수 밖에요. 사도의 자격은 엄격하게 신
학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
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
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복음을 증거하시기 시작한 그 삼 년 동안을 늘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
생애에 동참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사
람은 열두 제자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몇 번 만났
다든가 며칠 동행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과 동행한 것같이
줄곧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본 사람, 모든 것을 들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하는 성경의 말씀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을 함께 한 사람만이 사도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세운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삼을 열두 사람을 친히 지명하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이렇게 불러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친히 이
름을 불러 지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동행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는 안됩니다. 예수님과 삼 년 동안 같이 다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
께서 지명하셔야 합니다. 사도의 자격은 시험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명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너는 내 제자다, 나와 함께 하자'하고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이름을 부르셔 지명한 사람만이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뵌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는 부
활의 증인이 될 사람들이니까 마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
활하신 뒤에 꼭 열한 번 사람들 앞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해서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
수님을 만나뵌 사람에게라야 사도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도가 될 수 있고,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하
신 예수님을 못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생애를 같이했습니다. 리고 예수님께
지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는
사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또 한 사람,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 역시 자격이 의심스럽고 아
리송해서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도 이를 의식했던 것인지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
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
희라(고전 9 :1, 2)"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 미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
점수가 모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주님께로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사도의 두 가지 요건은 지녔는데, 딱 하나가 모자랍니다. 그는 예수님 살아생
전에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는 가끔 사도 바울이 못
마땅하게 여겨질 때면 이 점을 들추어 그를 섭섭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진정한 사도일 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누이 예수님께서 내 이
름을 불러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 뵈었다고 별명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
은 예수님의 삼 년 동안의 공생애에는 동참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드러내
놓고 사도임을 자처했습니다. 보십시오. 같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요한은 자신을 사도라고 내
세우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장로된 자'라고 점잖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
면 편지를 쓸 때에도 반드시 '파울로스 둘로스 그리스도 예수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을 집어
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말로 편지의 첫머리를 시
작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스스로 사도임을, 아포스톨로스임을 자꾸 강조한 것은 스스로 그
자격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사도의 세 가지 자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선은 체험적 신앙이 필
요합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주님을 만났어야 합니다. 병중에서 만났든, 사업을 하면서 만났
든, 길을 가다가 만났든 분명한 체험적 신앙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
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체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지명하셨다고 하는 개인적 소명의식이 필요합
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종말론적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운데서 늘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인식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룟 유다가 빠진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보선하는 모습을 말
씀하고 있습니다. 일백이십 문도는 사도의 요건 세 가지에 합당한 사람은 선택하여 사도로
세우려 합니다. 먼저, 예수님과 삼 년 동안의 모든 생활을 함께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을 사
도로 세우려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사
람 가운데서 사도를 선택하려 합니다. 이 요건에 합당한 사람으로 바사바와 맛디아가 천거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친히 지명을 하심으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지명을 해주셔야 합니다. 결국 저들은 주님의 뜻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선택합니다.
보십시오. 바사바와 맛디아, 두 사람 모두 훌륭합니다. 사도로서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
제는 주님의 뜻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일백이십 문도는 이 두 사람을 세워놓고 하나를 사
도로 지명해주십사 하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나서 맛디아를 제비로 뽑아 열두
제자의 반열에 함께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여기
서 우리는 개인적인 소명에 대하여 주님 앞에 묻고 있는 저들의 진지한 자세를 볼 수 있습
니다.
이제, 우리는 제비뽑는 절차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들의 제비뽑기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단계를 거칩니다. 첫째는, 성경적 근거에 준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문제만도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적 맥락에 따라서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식-common sence에 준합니다. 저들은 바사바와 맛
디아, 이 두 사람을 사도의 후보로 천거합니다. 이것은 아무나 마구잡이로 선택하여 세우고
그저 투표나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
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쓰실 것이다 하고 주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상식을 다 동원하여
천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한 사람, 우리와 함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
나 뵌 사람 - 이렇듯 저들은 상식적인 문제를 충분히 고려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을 추천해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천거한 즉시 투표를 한 것
이 아닙니다. 이제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역사가 함께하시기
를, 주님께서 합당한 사람으로 지명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연후에야 제비
를 뽑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도 투표를 할 때면 언제든지 기도를 먼저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
의 이 마음에 감동해주시기를, 이 투표를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지명해주시기 바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대로 투표한다고 생각하
지 말 것입니다. 투표의 결과 역시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교회
의 모든 구조와 질서가 바로잡힐 줄로 믿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뜻을 제비뽑기로 물었습니다. 제비뽑기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비뽑기'는 헬라어로 '순카테페피스데'라고 합니다. 이것은 '순' '카다
' '푸세이로스'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여기서 '순'과 '카타'는 전치사요, '푸세이로스'
는 '조약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하고 매끈매끈한 조약돌을 의미합니다. 이제,
제비뽑기 하는 과정을 보십시다. 먼저, 천거된 두 사람의 이름을 각기 조약돌에 써넣습니다.
이름을 쓴 조약돌 두 개를 둥그런 그릇에 담은 뒤에 기도를 드립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사도로 지명해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조약돌이 담긴 그 그릇을 한참 흔듭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툭 튀어나오면, 그 조약돌에 적힌
사람이 뽑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있었던, 저들이 사용했던 제비뽑기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이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는 그저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그것이 무조건 옳은 줄로 생각합니다마는, 그것은 잘못된 생
각입니다. 우리는 나라에 필요한 일꾼을 투표를 통해서 선출합니다. 그런데 그 선거라고 하
는 것은 사실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되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선거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옳은지 선한 사람
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것을 투표로 결정하겠다 -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온 백성이 다 지지한다 하더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만이 지지한다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는 무조건하고 대세에 기준하여 좇
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
가 아닙니다.
먼저, 민주주의에는 일반적 상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 그들의 도덕
성도 보고, 정치성도 보고, 능력도 보고, 선악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생각해보
십시오. 그 후보들 모두 자격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면 나라가 흥하고 저 사람이 하면 나
라가 망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가끔 선거 유세할 때에 보면 자기가 하면 나라가 흥
하고 다른 사람이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합니다마는, 그것은 잠시 내뱉는 선거용에 지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흥하고 저가 하면 망할 것이라면 그 선거는 하
나마나 아닙니까? 민주주의란 어디까지나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다는 그 신뢰성 아래
서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선거를 할 때에도 보면 여러 후보를 놓고 투
표를 합니다마는 실은 대체로 두 사람의 후보를 놓고 그 중의 한 사람을 뽑습니다. 엄밀하
게 따진다면, 그것이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민주주의라면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써내야지
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거하여 세워진 사람 중에서 누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충분한 두 사람을 세워놓고 국민에게 그
뜻을 물어보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거요 민주주의입니다.
여러분, 민주주의는 수(數)의 우세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의와 불의를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내용도 가만히 보십시오. 바사바와 맛디
아, 두 사람을 놓고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훌륭한 사람이요, 사도로서 자격
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되어도 좋습니다. 저들은 그 선택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
님께서 당신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지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투표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투표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선과 악도 투표로 결정하고, 옳고 그른 것도 투표로 결정하고, 진리와 비진리마저 투표로 결
정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다 옳고, 지
지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다 그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선되지 못했을 뿐, 그른 것은
아닙니다. 그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선과 악이 여기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은 사도를 세우는 데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상식을 동원했습니다. 사도의 자격
에는 이런저런 기준이 있다 하고, 거기에 맞춰 두 사람을 천거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
는 그 마지막 결정을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주님께 결정해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
후에 제비뽑기를 합니다. 누가 당선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은 사도로 맛디아가 당선됩
니다. 저들은 맛디아를 주님께서 지명하신 사도로 믿고 열두 사도의 반열에 서게 합니다. 이
렇듯 저들에게는 상당한 겸손과 신앙과 합리적인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는 이러한 선을 잊어버리고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불합리하게 선택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운명을 다 걸고는 도덕성까
지 물으려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를 선택한다거나 직업을 선택한다거나 배우자를 선택한다거나 할 때에도 보
십시오. 그다지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여러 명의 배우자감을 놓고 무작정 '주여, 한 사람을
지명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그 계시가 꿈속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마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가 있고 상식
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건강한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 나아가 이기적인 즐거움보다는 남을 섬기면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 교회생활 속
에서 봉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해야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격을 모
두 갖춘 사람이 두 사람이라서 고민이 되거든 저에게 오십시오. 제비뽑아드릴 테니까요. 실
제로 두 명의 배우자감을 놓고 고민하다가 저에게 와서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아서
도저히 정할 수가 없다고,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도움을 청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제가
이 사람의 어떤 점이 좋고 저 사람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 좋은 점을 줄줄 늘
어놓더군요. 다시 "어느 쪽과 결혼하는 것이 당신 자신에게 좀더 이롭겠습니까?"라고 물었
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과 하는 것이 저에게는 좀더 이로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 대답을 듣고 제가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과 하지 말고 저 사람과
하십시오. 당신에게 좀 손해가 되는 사람과 하십시오."
여러분,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거든 좁은 길로 가십시오. 똑같이 선한 사람이 있거든 자
신이 조금 손해본다 싶은 쪽을 택하십시오.
자신의 이(利)에만 연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같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애
초부터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가 한쪽에만 점수를 주어서 합리화하고 동등하게 만
든 것일 뿐, 그실 진정으로 동등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개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큰 것, 좋은
것, 이로운 것만 택해나가다가 결국에는 큰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게 이롭고 남
에게 이로운 것이 있거든 남에게 이로운 편을 택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첫째
로 주님을 위하고, 둘째로 남을 위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의 기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유다를 대신하여 열두 제자의 반열을 채운 사도를 제비뽑기로 세우
는 일백이십 문도-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근대 민주주의의 선거방
법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나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
다. 간혹 우리는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을 때가 있습
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 지혜를 얻습니다. 맛디아를 선택하는 그 절차나
기준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지혜를 다해서 옳은 일, 선한 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둘이 남고 셋이 남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는 기도하고 정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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