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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14-21)

by 【고동엽】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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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14-2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오순절사건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
일백이십 문도가 일시에 다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만, 누구누
구만 충만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의로운 사람만 충만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만 권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하게 충
만함을 받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일백이십 명이 일시에 다같이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오순절사건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문도에게만 나타난 일이기
는 하지만, 그 사건의 영향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보십시오. 방언은 일백이십 명이 하
는데, 듣기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함께 들었습
니다. 각 나라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네 방언으로 그 말을 들은 것입니다. 말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방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누가 들었건 저마다 자기네 방언으로 듣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
니다. 먼저, 오순절사건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복음전파의 초자연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순절사건은 누군가 특별하게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서 이
같은 큰 은혜를 입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쨌든 이 오순절사건은 굉장한 사건이었
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놀랄 수 밖에요. 오늘날에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것입니다. 오순절사건, 굉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 귀한 사건 속에도 비방이 있고, 비난이 있고, 조롱하는
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왜 남의 좋은 일에
좋은 말을 못해줄까요? 왜 그 좋은 일을 두고 좋은 말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옆에서 비꼬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나쁘게 말하는, 비방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쁜 말
듣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요. 나쁜 사람으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선한 일
도 나쁜 사람 앞에서는 비방 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비방을 받지 않
았다면 그 일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좋아하는 일은 악한
일뿐이니까요.
보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방언으로 말하고 방언으로 듣고 하는 은혜스러운 그 시
각에도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말을 지어서까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
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그냥 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새 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
니다. 그리고 여기서 '취하다'라는 말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을 표현하는 말입니
다. '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 사도행전 26장에도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사건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합니다. 본디 바울은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총독 앞에서 거침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베스도가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절)."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학문이 아닌
새 술이 취하게 했다는, 미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알 수 없는 신비로
운 능력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문도는
거의가 갈릴리에서 온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불학무식하거든요. 그래서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아그라마토이'라고 거침없이 조롱한 것입니다.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유식한
말을 하고 굉장한 말을 하고 담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미쳤다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흔히들 유식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아, 이 사람, 공부 많이 하더니 잘도 아는구먼'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학무
식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전할라치면 '좌우간 뭐에 씌워도 단단히 씌웠구먼'하고 부정적
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도 방언을 하는 일백이십 문도를 두고 새 술에 취했다고 코웃
음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첫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사건 이후에
있은 첫번째 설교일 뿐더러 베드로의 첫번째 설교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
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
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절)." 그런데 이 말씀대로라면 베드로 한 사람만이
아닌 열두 사도가 다함께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대표격으로 설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다함께 서서 설교하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어떻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이 말씀의 분위기와 성
격으로 봐서는 열두 사도가 다같이 말씀했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실 설교를 한 것
은 베드로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서 스물네 편의 설교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의 기사를 연대적으로
따져보면, 그 사건들은 30년 동안에 되어진 일들입니다. 30년 동안에 되어진 일들을 간추려
서 사도행전에 기록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전도하고,
무슨 핍박을 받고 하는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 속에 스물네 편의
짧고 긴 설교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 야고보의 설교, 바울의 설교
가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분량을 한번 비교해보면 그들의 설교가 전체 사도행전
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사도행전 7장은 전체가 스
데반의 설교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단 한번의 설교일 뿐
더러, 순교하기 직전에 한 설교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 한 편의 설교를
남기고 그는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설교까지 합쳐서 따져본다면 설교의 분량
이 전체 사도행전의 25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말씀이기도 한 베드로
의 설교말씀이 그 첫번째를 장식합니다.
이제, 베드로가 행한 설교말씀의 성격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먼저, 이 설교는 오순절사건
을 구약의 말씀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사건이 이루어짐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그리고 듣는 사람들 역시 자기네 말로 그 방언을 들으면서 깜짝들 놀랍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술렁거립니다. 이렇듯 굉장한 사건이로구나 하며 모두가 놀라고 있는 그
시각, 베드로가 이 사건에 대하여 일장 설교를 합니다. 이 오순절사건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
다. 저러한 뜻이 있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는 오순절사건에 대한 해석
이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입을 엽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도대체 무엇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
미 다 보고 들은 일입니다. 깜짝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에 담긴 뜻은 모르고
있습니다. 보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했다고 아는 것
이 아닙니다. 해설자가 있어서 그 사건을 설명해줘야 합니다. 성서적인 해석을 내려줘야 합
니다. 바른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해 있지만, 내가
이 사건에 대하여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설명을 해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에는 증거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순절사건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그 구조적 의미를 성경 안에서 해석합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자
세입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을 놓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내게 이득이 있을 것인가 손해가 있을 것인가, 과거는
어떠했으며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이렇게 설명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 사건에 대한 성
경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성
경적 의미는 무엇인지, 성경의 어디에 의미를 두고 생각해야 하는지, 성경의 어느 말씀을 가
지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가정일이건 개인일이건,
신앙이건 정치건 간에 무슨 문제든지 성경 안에서 해답을 구해야 합니다. 성서적으로 풀이
하는 이 자세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성서적 맥락 안에서 바른 해석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 그 예언이 오늘에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
다. 이 사건을 예언과 성취의 긴장관계 속에서 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예언되어 내려온 말씀이 오늘날에 성취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반
드시 심판적 요소가 있고 구원적 요소가 있고 예언적 요소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약속의 말
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약속이 오늘날에 성취된 것이라고 오순절사건을 성취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나아가 베드로는 오순절사건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 사건이 아닙니다. 성서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오순절사건을 하나님
의 말씀으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사건을 성경적 사건으로 받아들임
으로 회개하라, 새로운 결단을 하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로운 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고 호소하는 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주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말씀의 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란 어느 때에
찾아가더라도 말씀을 듣고, 말씀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늘 말씀의 은혜로 충만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십니까?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말씀에 있습니
다. 말씀을 들으려고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집입니다.
말씀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 나타난 사건의 특징을 요약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 있습니다.
그 성서적 해석 속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실천적 요강을 말씀합니
다. 이렇게 하시오 하고 설교 끝에 가서 명령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
로의 설교말씀의 첫머리를 보십시오. 그 서론이 재미있습니다. 서로 방언을 하고 방언을 듣
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하는 무리를 향하여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절)"라고 말씀합니다. 삼 시라고 하면 우
리의 시간으로는 대략 오전 아홉 시가 됩니다. 아침 아홉 시에 술취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
냐 하는 말씀입니다. 취한 것이 아니다, 멀쩡하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설교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마
는, 인간적 용기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적 담력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
다. 어떤 지식에 의존하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적 확증 안에서 용기를 얻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응답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구나 하는
확신이 그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을 공부했다거나 자기 경험이 있다거나 해
서 나온 용기가 아닙니다.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믿어질 때에 생기
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의지만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호언장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이 시간에는
장담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겸손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신령한 담력에 의지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실로 당당하게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렇듯 기탄없이 거침없
이 말씀할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자기를 믿는 마음으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자
기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내 입을 통하여 전파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
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자기인식
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팔로 쓰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
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통해서, 나를 고용하시어 오늘 이 자리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특별하신 섭리 안에서 소중하게 하나의
그릇으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격한 마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은 조롱하여 말하기를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 기분이 좀 나빴을 것
같아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 문제에 대하여 자기를 비웃는 자를 전혀 비방하지 않습니다. 정
신나간 소리하지 말라,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야말로 한심하다는 식의 이야기
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을 전혀 비방하지 않고, 그에 대항하지도 않고 여유
만만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삼 시는 오전 아홉 시입니다. 그 시간에 술취해
있다니 말이 안됩니다. 취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것을 믿었기에
비방하는 자들을 조금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이 사건이 실은 엄청나게 큰 사건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좋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에 그 사람을 비방하려고 듭니다. 비방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무척 섭섭해합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비방을 받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슬퍼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지금 이 시간,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뿐입니다.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진리다, 라고 담대하게 냉정한 마음
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교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베드로는 이 사건의 필연성을, 성경적 당위성
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세가 오리라는 성경의 예언이 여기에 이루어졌으니 당연한 것이다,
있을 일이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놀랄 것 없다고 설교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요엘서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오
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될 일이지 놀라긴 왜 놀랍니까? 바로 그 싯점에 우리가 있다고 하
는 것을 다행히 여기고 감사하면 될 일이지 놀라긴 왜 놀랍니까? 있을 일이 있는 것일 뿐입
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환난이 있겠고 재난이 있겠
고 핍박이 있겠다, 그리고 사랑이 식어질 것이요 배신이 있을 것이다, 많은 전쟁이 있을 것
이다, 라고 죽 말씀하시고 나서 이 일들이 있어야 하되 그것이 끝은 아니라고,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의 곳곳에서는 지진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도처에 환난과 죄악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랄 것 없습니다. 주님
께서 말씀하신대로 있을 일이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적어도 믿는 사람은, 성경
을 믿는 사람은 이 모든 일을 늘 필연적 사건으로 수용합니다.
그러니 없을 일이 있는 것처럼 놀랄 것 없습니다.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베드로의 설교말씀은 말세에 대한 결정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세의 개념은 시한부적 개념이 아닙니다. 긴 설명 다 할
것 없이 초대교회에서 이해한 말세는 창조의 기간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기간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이 예언되는 기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언된 바가 성취되는 기간, 이것이 말세입니
다.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 승천하신 다음부터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가
바로 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세를 너무 협소한 의미로, 자기중심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요새
는 이 말세라는 말로는 성이 안차서인지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도 말하더군요. 말세 중의
말세라는 말을 쓰더군요. 그러나 대개들 보면 젊었을 때에는 말세 이야기를 안하다가도 늙
었을 때에는 말세 이야기를 잘합니다. 건강할 때에는 하지 않다가도 병들면 합니다. 자기중
심적인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씀하는 말세의 개념은
주님 승천하신 때부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입니다. 그것이 이천 년이 될지 삼천 년이 될지
모릅니다. 몇월 며칠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오늘날에 와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내
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18절)……" 그래서
요즘도 어디서 성령의 역사가 있고 방언을 하고 하면 꼭 이 말씀을 들먹입니다. 이것은 좀
지나친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벌써 써먹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이미 한 말
씀입니다. 일찍이 베드로가 오순절사건을 놓고 요엘서에 예언된 것이 오늘 여기에 응한 것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새삼 그 말씀을 오늘에 다시 끌고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이천 년이나 지난 지금에 말입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아전인수적인 해석입니다. 분명
히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놓고 요엘서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에 와서 이미 성취된 요엘서의 그 예언을 끌어다가 풀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역사적
사건에 적용시키려고 할 때일지라도 무리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늘의 설교에 나타난 주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설교말씀의 주
제는 성령입니다. 성령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말씀이 얼마나 오묘한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절)."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
원을 얻을 것이요, 성령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방언을 하겠고, 성
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을 하겠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보겠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도록 역사하십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성령을 부어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소나기처럼 쏟아주겠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이르러 풍부하게 보편적으로 최종적
으로 성령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의 본문은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주겠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
린 바와 같이 이 오순절사건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있은 사건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
타난 보편적 역사입니다. 성별의 차이가 없습니다. 연령의 차이도, 노소의 차이도, 신분의 차
이도 없습니다. 귀족이건 종이건 간에 다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시겠다
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이요, 우리 인간의 의나 지식이나 신분
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
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정인이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존재하
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깊이 감격했는지 모릅
니다. 특별히 공산주의가 강하게 뿌리 박혀 있는 중국의 어느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서 몰래
예배를 드리는데 느닷없이 문둥병환자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나가랄 수도 없고 들어오랄
수도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 참에 믿음으로 문둥병환자를 고칠 수 있다는 성경말씀이 떠오르
더랍니다. 집사도 없이 장로도 없이 모인 그 순진한 교인들이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문둥
병자를 맞아들여 가운데에 앉히고 전부가 손을 잡고 둘러앉아서 그 병을 낫게 해주십사 간
절하게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을 전체
에 알려졌습니다. 여기에다 대고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이 마을은 믿어도
괜찮다' 할 밖에요. 그래서 그 사건이 있은 뒤, 비록 교회는 없지만 마음놓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끝에 그분들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우리
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세례도 못 받았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
어 주실까요?" "물론 들어주시지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역사 하십니다. 말세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필요하신 시간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 강권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받게 하실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신다면 세상은 당연
히 편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
다.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奇事)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
다(19절)". 주님 재림이 이르기 전에, 그 크고 놀랍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
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아주 무서운 일이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많
은 환난과 전쟁과 함께 역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편안하기만을 바라고, 잘살
기만을 바라고, 무사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하실 그 말세에는 그렇게 되지 않
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는 모든 질서가 뒤집히는 무서
운 사건들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
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촛점을 맞추어서 설교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베드로와 및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절)……"
보십시오.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으라-이것이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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