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사마리아 선교! (행 8:5-13)
이제 사마리아 선교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선교는 예루살렘의 교회에 선교
전략을 세우고, 그리고 요샛말로 선교회를 조직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
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이 사마리아 선교가 예루살렘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선교의 첫 발입
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파송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것입니다. 누
가 자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
아 죽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
지게 됩니다. 저들이 흩어져서 간 곳이 바로 제일 가까운 사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교전략
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이루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
제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 저렇게 전도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세우고 합니다.
물론 그런 전략이 필요합니다마는, 때때로 별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의 사람을 보내시기도 하
고,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것을 이모저모로 친히 주장하시고, 전략을 세우시어 선교를 이루
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저들은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핍박으로 말
미암아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그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땅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
다. 원래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를 싫어했습니다. 더럽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죽을 지경에
처한지라 하는 수 없이 사마리아 땅으로 피난 갑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강권적 역사로 말
미암아 사마리아에 선교가 이루어졌다-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밖
으로 선교사를 보낸 이 첫 선교역사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선교전략이었다고 하는 놀라운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이룩된 선교의 신학적 의미가, 그 선교신학 적 의미가 또한 중요합니
다. 보십시오, 예루살렘은 지정학적으로 사 마리아와 인접해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가장
가까운 나라부터 먼 저 전도했다는 말이 됩니다. 선교는 멀리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마는, 그
보다는 가장 가까운 내 이웃, 내 친척, 내 손이 미치는,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세계
부터 먼저 전도하는 것이 전략상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이스라엘과 유사한 문화권
에 있었습니다. 문화권이 전혀 다른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는, 선교사가 들어가기는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야말로 특별한 훈련을 받고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령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해봅시다. 풍속과 문화가 전혀 다르기에 겪는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갔을 때에 원주민선교 현
황을 살피기 위하여 일부러 두세 시간여 동안 차를 몰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원
주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나니 선교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겠다 싶더군요. 원주민들은 그
저 간신히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리고 원두막 같은 집에서 살아갑니다. 집안에 들어
가 보니 아무 것도 없어 기본적인 이불보따리나 밥그릇도 없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과일이
나 따먹고, 그리고 거기서 그냥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옷이나 밥그릇이 필요 없지요. 게다
가 날씨도 내내 더우니까요. 이런 문화 속에 들어가 전도하자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 나라, 일본, 중국, 이 세나라는 비슷한 문화권에 있습니다.
여러 모로 유사하기에 선교가 쉽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안 목사님이 몽고에 선교사로
갔습니다마는, 그 몽고 역시 선교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래 우리가 몽
골리안이거든요. 우리가 그쪽에서 이쪽으로 이동해온 것입니다. 그 종자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한글도 몽고글과 유사합니다. 거기서 많이 따와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얼굴 생김새도 같습니다. 몽고반점이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엉덩이를
보십시오. 시퍼렇습니다. 그래야 몽골리안 순종입니다. 몽고반점은 몽고사람과 한국사람 에
게만 있는 것입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순종' 알아보기가 아
주 쉽습니다.
이렇듯 유사문화권 안에서 선교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입니다.
또한 이것이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사람들의 사마리아 선
교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원래가 한 조상인데다 가 언어도 같거든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사마리아로 먼저 선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마리아로 먼저 보내신 것
입니다. 특별히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연못에 파문이 번져나가듯이 그 중심에서부터 점차로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그 다음에 유대 전체로, 그 다음에 사마리아
로, 나아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문화의 벽을 넘어서 다른 문화권으
로 선교가 이루어진다 는 것입니다. 먼저 동질문화권으로, 그 다음에 유사문화권으로, 그 다
음에 타문화 권으로 선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선교학적인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
도 충분히 일 수 있지 않습니까? 먼저 나와 같은 사람, 그 다음에 나와 비슷한 사람, 그 다
음에 나와 전혀 다른 사람---복음은 이렇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선교전략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가 첫번 선교지로 꼽히게 된 것입니다.
종교심리학적으로 보더라도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사람들을 아주 미워했습니다. 그러는데
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사람들과 형
제처럼 가까이 지내야 할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편협한 생각에 매여 사마리아사람들을 시기 질투하고 더럽다 여겼습니다. 그 땅을 지나치는
것도 꺼릴 정도였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어째서 사마리아사람들을 미워하고 더러워했을까 요?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일찍이 저들은 다같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 바벨
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노예로 삼았다가 도로 풀어주었습니다 마
는, 앗수르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정책을 쓴 건입니다. 잡혼정책을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을 앗수르 남자들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습니다. 그들 사이에 아
이가 태어남으로 자연히 민족의 씨가 없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렇듯 잡혼 하는
아주 비열한 인종정책을 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사람은
자신들의 종자를 유지했으나,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쪽 이스라엘 땅의 많은 사람들은
혼혈이 되었습니다. 유대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얼굴이 다르고, 그 종자가 다릅니다. 그래
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사람들은 더럽고 음란하다 여기게 되었으며, 사마리아 땅은 더러
워진 땅이라고 여겨 그쪽으로는 지나가기조차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이 같은 편견을 초월하여 많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
아사람에 대하여 그리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 같은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암시적으로 가
르쳐주신 바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실 뿐더러 사마리아사람 가운데서도가장 부끄러운 여인을 만나
일대 일로 전도하십니다. 얼마나 아름다 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유대사람이 사마리아사람
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마저도 예수님께 "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 라 하나이까"라고 묻지 않
습니까?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좋지 않은 관계, 불편한 관계이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
를 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나온 열 명의 문둥병자를 다 고 쳐주십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그 사람들은 어디
론가 다 가버리고 단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리라"하고 크게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뺏기고 맞아 여리고로 향하는 길에 쓰러
져 있는 것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고 그냥 지나쳐갑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사
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이기 이 전에
사실입니다. 그 얼마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돌에 맞아 죽으셨을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불쌍한 사람이 누워 있는데 이를 보고도 목사님이나 장로님
은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지나가던 창녀 가 그를 도와주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할말이 없
겠지만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야말로 교회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아 마도 예
수님께서는 정보에 밝으셨던가봅니다. 사실이 사실이니 만큼 저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말씀에 담긴 주제는 따로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여기에는 사마리아사
람을 유대사람 과 같이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생각을, 사마리아사람 과는 상종하지 않으려 하는
못된 마음을, 그 자기 우월감을 무엇으로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선교적 정열만으로는 깨뜨
릴 수 없습니다.
신앙만으로는 안됩니다. 저들의 교회생활이나 경건으로도 부족합니다. 결국 이것은 핍박만
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핍박과 환난이 못된 생각을 품을 겨를 없이, 편협한 생각
을 다질 겨를 없이 저들을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피동적으로 이루어
진 여행입니다 마는, 그 환난과 핍박이 여기에 선교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피난길이 전도
길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의미가 주어진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로 본문은 빌립을 말씀합니다. 빌립은 사도가 아
닙니다. 사도들이 세운 일곱 집사의 하나입니다. 일곱 집사는 원래 구제와 봉사를 위하여 세
워놓은 것입니다.
그 일곱 집사 가운데 스데반은 전도하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빌립도 사마리아에 와
서 전도를 합니다. 빌립이 집사로 감당해야 할 직책은 구제와 봉사입니다 마는, 빌립이 어디
서 어떻게 구제했다는 이 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다만 전도의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사실
핍박으로 쫓겨다니는 신세에 무슨 구제를 하겠습니까? 구제는 끝났습니다. 이제 할 일은 전
도인 것입니다.
빌립이 첫번 선교사로 사마리아에 가게 된다-아주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야말로 평신도라
할 수 있는 그가 첫번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의 선교 역사는 이렇습니다. 먼저 그는 복음
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전했습니다.
그저 간단히 '예수 믿으세요'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이
야기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하나님나라의 임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하나님나라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이라는 몇 마디 안 되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빌립의 아주 신
학적인 설교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5 절)"라고 본문은 말씀합
니다. 이것은 구제, 봉사의 이야기가 아니요 정치, 경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전파했고, 예수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과는 어
떤 관계가 있는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나라와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전도라는 것은 물론 여러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잘못하면 전도가 하
나의 윤리강령 설파가 되기 쉽습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에 머물기 쉽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수 믿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야 잘살 수 있습니다,
복 받을 수 있습니다-이런 이야기로 전도하는 것은 그리 합당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 가운데 전도도 많이 하고, 평생을 교회에 봉사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
데 그분이 병으로 입원했습니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기도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다
호흡파이프를 심고 공기를 주입해서 살아갑니다. 지금도 입이나 코로는 숨을 못 쉬고, 목에
연결된 이 파이프로 공기가 푹푹 들어갔다 나갔다 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오래인 채 그
런 처지에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병 문안을 가 보았더니 그 권사님,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
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어요. 말을 할 수 없으니 글로 써가면서 열심히 전도합
니다. 그런데 그 전도 내용이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을 좀 하게 되었을 때에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하
늘나라 갔었던 이야기를 30분 동안 하는데 장황합니다. 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분의 이야기인즉 자기가 지금까지 쉰 살이 넘도록 '교 회 나오세요. 교회 다니
면 집안이 평안해져요'하고 전도는 해봤어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는 못해봤다고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
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일과 하나님나라를 믿는 일을 빼고는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일찍이 최권능 목사님 같은 분은 여기 가서 '예수'하고, 저기
가서 '천당'하면서 전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문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
요 - 이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요새는 '예수 믿으면 감기
안 걸려요. 예수 믿으면 장사 잘돼요'하고 전도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퇴색해버리고 말았습
니다.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나라
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나 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바 빌립의 전도 내용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그 표적이 다양
합니다.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무리들 이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7절)"-빌립이 보여준 표적만큼이나 그 환자도 다양합니다. 귀
신들린 사람, 앉은뱅이, 중풍환자…… 어쨌든 빌립에게는 그들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
습니다. 능력 있는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한 권세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특별히 사마리아사람들은 이 표적에 대하여 흥미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표적에 말미암아 바로 믿었다든 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
다. 다만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놀라 다, 좇
다'라는 묘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은 빌립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빌립의 말을 듣고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를 좇아 다니며 그의 말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특별히 표적을 보고 는 깜짝들 놀랐습니
다. 귀신 쫓아내는 것을 봤지요, 앉은뱅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봤지요, 그러니 '굉장하다'하
고는 모여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심으로 빌립을 좇았습니다. 한마음으로 좇았습니다. 그러나 거기
까지는 아직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했으니 세례를 받을 밖에요.
그렇다고 해도 성령의 역사와는 아직 관계가 없습니다. 진실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는 받았어요. 이적을 보고 놀라기도 했어요. 기뻐하기도 했어요. 이렇듯
빌립의 역사 속에 표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의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시적으로, 혹은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말씀이 입증되는 표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그대로 여 기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
나님나라의 복음을 전 하시고, 권능을 보이심으로 저들은 복음의 신빙성, 복음의 진실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러나 사실은 빌립을 통하여 주님께서 그러한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빌립의 입을 통하
여 말씀하시고, 빌립의 손을 통하여 권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이루신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보니 모든 사람들이 듣고 보고 일심으로 좇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절)"합니다. 빌립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고, 빌립의 이
적을 보면서 마음속에 임마누엘을 경험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메시야가 우리 와 함께 계시다, 선지자가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 동네가 법석을 떨 정도의 큰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능
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
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기쁨은 아직 성령
으로 말미암은 기쁨은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에 따르는 기쁨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표
적을 보고 감격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병이 나아서 기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고 기
도하는 가운데 병이 나았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큰 기쁨은 이
런 수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성격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시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 야기입니다. 사마리아에 시
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데 시몬은 마술사입니다. 마술을 학술적인 용어로는
magic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귀신이나, 혹은 초능력을 힘입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모두 가 자기를 우러러보게 하고, 마
지막에는 자기를 숭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술사(magician)의 특징입니다.
마술이라니 생각납니다마는 부흥회를 인도하러 미국에 갔을 때입니다. 먼저 첫 주간에 부
흥회를 인도하고, 교역자 수양회에 참석하고, 다시 나흘 동안 부흥회를 인도하고 나니 이틀
정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이틀 동안 어디 한번 푹 쉬어보자 하고 목사님 몇 분과 작당을 해
서 편안하게 드라이브나 즐기며 라스베이가스나 한번 갔다오기로 했습니다. 우리야 도박을
할 줄 모르니 돈 잃을 염려도 없고 해서 마음놓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가보니 대형 클럽
여기저기서 잡다한 쇼를 하는데 굉장하더군요. 일반적인 쇼의 입장료가 한 25달러 합니다.
그런데 '미라지 쇼'라는 것이 있어 보니 그 입장료가 80달러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하니 보
기로 했습니다. 막상 보고 나니 그 80달러 가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오히려 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2시간 반 동안 사람을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어요. 호랑이 몇 마리를 단 위에 세워놓고
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나 곰도 순식간에 없어져요.
현대공학을 최대한도로 이용한 마술입니다. 사실 마술이라는 것이 눈속임이 아닙니 까? 그
러나 어쨌든 한눈 안 팔고 열심히 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가 없습니다. 깜짝 놀랄 뿐
입니다. 눈속임에는 틀림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여자를 뉘여 놓고 반으로 딱 잘
랐는데도 발은 발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움직입니다. 도로 붙이면 다시 붙습니다. '분명히
눈속임일 텐데, 진짜 자른 것은 아닐 텐데'하고 생각은 합니다마는, 그렇다해도 대놓고 아니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한데 2천 년 전의 시몬은 어땠겠습니까? 시몬의 마술에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사람 저스틴의 말에 따르면 이 시몬이라는 삶의 놀라운 마술을 보고 사람
들이 그를 신으로 숭배했다고 합니다. 시몬을 앉혀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몬은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
습니다. 저들은 시몬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시몬이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0 절)"
하는 본문말씀대로 저들은 시몬의 마술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이 라고 믿고 놀랐습니다.
여러분, 마술은 분명히 사실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눈속임입니다. 그러나 이 눈속임은
속았다고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사실처럼 보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함
으로 쾌락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술은 자기를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숭배하게 만드는 것이 마술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동안 시몬을 따르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빌립의 능력을 보고는 그를 따릅니다. 빌립의 행하는 그 능력은 가짜가 아니
거든요.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키지요. 귀신을 쫓아내지요.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하지요.
그러니까 시몬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만 확 돌아서가지고 빌립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빌
립을 따르고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예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시몬입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술사 시몬마저도 빌립을 믿었다고
하는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
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그렇다면 왜 시몬이 빌립을 믿었
겠습니까? 사실 시몬은 자신이 보인 표적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그만은 자기가 하는
일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미라지 쇼를 보고 속았지만 실제로 그 마술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거든요. 그 스스로도 쇼를 하기 전에 이것은 사실이 아니니
놀라지 말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합디다. 자기가 지금 이 여자를 반으로 자르겠는데,
톱으로 두 동강을 내겠는데 진짜는 아니니 기절할 것은 없다고, 너무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
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시몬만은 알고 있어요. 자
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추앙하고 신으로 모시고 있지만 자기만
은 그 일이 거짓이요 가짜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빌립을 보니 진짜란 말입니다. 빌립이 하는 일이 마술이라고 한다면 이 마술
은 진짜 마술이거든요. 눈속임이 아니거든 요. 그래서 시몬도 빌립을 믿은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만은 진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거짓됨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 마술을 포기하고 빌립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
라"라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 참 권능이 중요합니다. 큰 권능이 중요합니다. 가짜 능력 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깜짝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인간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참된 능력은 빌립이 행한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능력만이 참 능력입니다. 이 참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사람들 이 예수님을 좇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득이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까지 이어나가야 하겠습
니다. 어쨌든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을 좇았습니다. 빌립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놀랐습니다.
열심으로 따랐습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교인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
음 시간에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자의 윤리! (행 4:32-37) (0) | 2022.11.22 |
---|---|
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14-21) (0) | 2022.11.21 |
사도 됨의 자격! (행 1:21-26) (0) | 2022.11.21 |
부흥과 새 질서! (행 6:1-6) (0) | 2022.11.21 |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9-11) (0) | 2022.11.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