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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소명! (요 21:1-14)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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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소명! (요 21:1-14)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일까요? 나름대로 행복의 기준이 있겠지만 첫 번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 이다'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재 산을 다 잃었다 해도 그것은 부덕을 잃은 것 이지만 건강을 잃었으면 다 잃은 것이기 때 문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때에 긴강의 고마 움을 미처 다 모르고 살지만 병들어 렁원에 입윈하게 되떤 "아무것도 소용 없다"고 말 하게 됩니다. 지식도 명예도 재산도, 심지 어는 가정도 의미가 없다고들 합니다. 다시
한번만 건강해져서 교회에 나가보고 죽었 으면 한이 없겠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건강 에 대해서 절박하게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고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면 이제 아무것도 원망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 다. 건강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충분한 행복을 여러분은 얼 마나 느끼고 살아가십니까? 건강이 행복의 제 1조건입니다,
두 번째는 일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요새 '조기'니 '명태'니 하는 -O-행어가 있지 만 실상 조기퇴직, 멍예퇴직한 사람들이 말 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제는 보상이나 댓가 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일하고, 싶다"라고 한니다. 그 동안 너무 보상과 출세, 아무 의 미도 없는 명예, 지위, 여기에 매달렸던 일 이 몹시도 후회스럽다고 말합니다. 일한다 는 것, 일터가 있어서 나갈수 있다는 것, 출 근을 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지 모릅니다. 일거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의미가 없는 일, 뜻이 없는 일, 허망한 일에 시달리는 것처럼 괴로운 노릇이 없습니다.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일에 나의 생을 기울이핀 산다면 더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먼 자기 진실을 믿어푸 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랄 사이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신뢰입 니디,. 우리가 바라는 깃은 오직 하나, 진실 을 누군가가 믿어주는 것입니다, 의심은 인 격에 대한살인 행위입니다, 서로 의심하면 서 한평생을 산다먼 같이 살아도 그것은 원 수와 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봐 능력을 믿고 그의 진실을 믿어주는 한 사 람만 있미도 세상은 샅만한 것입니다,
오늘 니-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 도 눈물이 겹도록 참 고마운 분입니다 어 떤 사람은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예수는 믿어달만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 혈둘인데 열한 사람이 순쵸했습니다. 그
들은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었습 니다, 이것 한 가지 사건만 보아도 예수는 믿어볼만하다는 겁너다, 자식을 낳아서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면서 가진 정성을다 해 키우고 공부시키고 해놓아도 부모의 뜻 을 따라주는 자식이 있을까 말까 한데, 도대 체 3년밖에 가르친 바가 없는데도 얼한 제 자가 예수와 생을같이 하고 예수를 위해 죽 었다니,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인 바에야 더 할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는 참 훈릉 한 분이십니다.
제가 근자에 중국에 가서 중축 현역 대령하 초 북한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하게 되었습 니다, 그분하고 여러 시간 같이 차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얘기하는 중에 그가 이린 말윽 했습니다. "공산푸의가 무섭고 공산당 원.이 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갈하다 면서요? 공산주의자들은 배신하는 사람도 있고 떤절하는 사람도 있고 탈당하는 사람 도 있고 한데 예수믿는 사람들은 한 번 믿떴 다 하면 죽을 때까지 믿고, 예수를 위해 순 교한다면서요? 그래서 네가 한마디 했습니 다, "떠보 최대령, 조심하시오. 나와 같이 있다가는 예수믿게 됩니다. 당신도 예수믿 으면 이제 예수를 위해 죽게 될거요." 정말 예수를 알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 예수 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놀 랍고 매력있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서서 30년 준비하 시고 3년 전도생활을 하셨습니다. 될과 3 널, 그 공생에 기간에 참으로 많은 교훈의
말씀을 하셨지만 복음서가 증거하는대로 예수님의 가르치신 교훈은 3분의 2가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 로 전체적으로 볼 때에 열두 제자를 가르치 신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유감스럽 게도 예수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예수 넘과 함께 십자가를 지거나 그 십자가를 대 신 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글 떠났고, 예수를 버렸고, 예수를 부인했고,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러 나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같이 저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 고, 제자된 참 모습을 찾아 높은 차원에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다가 예수를 위하여 죽는 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그 전환점에 어떤 려사파 있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를 버 렸던 사람플이 다시 돌아오게 피었을까요? 9_늘의 본문에서 아추 조용하게 이 문제에 대하띠 말씀하고 있슴니다, 재창조의 역사, 재용기, 재사멍 충족의 려사가 나타나고 있 습니다.

소명의 의미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신차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공로나 자 편, 의나 거룩함 같은 것과 관계 없이 일방 적으로 선택해서 부르시는 것이 소명입니 다,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네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대적 은혜를 생각하게 됨
니다, 첫째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습니까? 무슨 대단한 거룩함이 있습니까? 깨끗한들 얼마나 깨끗 하며, 진실한들 멀마나 진실합니까? 아무것 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을 보시고 의롭다 하십니다, 그가 의롭다 하심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사랑의 데상으로 삼으신 것 입니다. 이 사랑에는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 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의 사람으로 불러서 일을 맡기실 때에 다시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능격이 있느냐 없느 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식한 자라도 부 르셔서 지식을 주십니다. 불가능한 사람을 부르셔서 가능케 하시는 것입니다. 소명 자 체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 고 소명과 함께 운명이 바꾸어집너다,
모세는 8O세에 호렙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 시나무 떨기 앞에서 하나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모세라는 사람 은 하찮은 사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 나 그가 주넘을 만나서 소명을 듣는 순간에 그의 운명이 바뀔 뿐만 아니라 지난날 버려 졌다고 생각했던 80년이라고 하는 자거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훌릉한 훈련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소명을 받는 순간에 새 로운 의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소명 을 듣는 사람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버려 진 과거도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제 2의 소명

예수님의 제자들,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나 잡다가 그렇게 죽어갈 사람들을 예수님 께서 물고기 잡는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 라"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같은 갈 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에서 예수림께서 저 들을 부르십니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해 보 면 두 경우 모두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물고기를 못잡고 허탈한 중에 나타나 셨습니다. 밤새껏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 았으므로 참 피곤한 시간인데 이 때 나타나 셨습니다. 또하나 참 재미있는 것은, 물고 기를 잡게 하시고 부친셨습니다. "깊은 데 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바로 옆에다 던져 라" 하십니다. 그리하여 가득 잡게 된 다음 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 고 다 안되니까 주의 일이나 해야 되겠다고 합너다,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쓰신 말씀을 보니까 물고기를 가득 잡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잡아나간다면 괜찮은 사업이 뵉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주님은 만족 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파
그물과 물고기를 다 버리고 따르라고 하십 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3년 전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3次 동 안 가르치시고나서 다시 부르십니다. 도망 간 제자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 나고도 물고기를 잡으러 간 그들을 다시 부 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꺾인 후, 철저한 좌절을 맛보고 난 후 주넘 의 부르심을 듣게 됨니다,
오늘 본문에 제 2의 소명이 나옵니다, 예수 님께서 저들을 찾아가십니다. 예수넘께서 비유하신 말씀 중에 보면 하나님을 주인으 로, 하나넘을 주제로 말씀하신 것이 많습니 다. 그 중 '탕자 비유에서만 기다리시는 하 나님으로 나타나실 뿐, 그 밖의 모든 비유는 하나님은 다 찾아가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 습니다. 'Waiting God'이 아니라 'Seeking God'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은 현장으로 찾아가십터 다, 기도실이나 회당이 아닌, 은밀한 명상 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아닌, 물고기 잡으러 간 현장을 찾아가십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 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보니 "와서 먹으라" 하시고 조반을 만득어 놓으 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대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 침묵이야말로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충닥 히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일일이 구구하게
물으시겠습니까?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잔치를 하 는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한 마디쯤 할 것도 같고 "그래,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왜 돌아왔냐? 무얼 바라고 왔냐? 돈은 얼마 나 남겼냐? 할만도 한데 아버지는 말이 없 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 "제자들이 주 님터러 누구시냐고 묻는 자가 없더라" 했습
니다, 예수님인 줄 알고 있으니까요. 말은 없습니다. 묻지도 않고 대닫하는 말씀도 없 지만 그저 만족할 따름입니다, 필요 충족이 다 된 상태입니다. 만족하게 앉아서 조반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좀 뻔뻔스럽 기는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은혜가 아니겠습 니까? 많은 배신감으로 인해서 갈등을 잎으 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것도 물으 시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하십니다, "조반 먹으라,"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내 양 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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