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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을 새롭게! (엡 4:17-24)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Fixation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거의 종래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무조건 변화는 싫어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란 없는 겁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안 변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퇴보라고 하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가 속도를 내서 여러 대의 차가 화악 물밀 듯이 밀려갑니다. 거기 한 길 가운데 서있어 보면 차들이 무지하게 빨리 달립니다. 그럴 때에 나는 서있습니다. 그게 내가 서 있는 겁니까? 이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내가 지금 뒤로 물러가고 있는 것이에요.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의 속도가 중요한 거예요. 계속 변화하는 것과 속도를 맞추지 아니하면 그 순간 나는 지금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결과가 되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리석게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은 정지 상태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지금 뒤로 물러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 차를 몰고 갈 때, 저 빨리 가는 차하고 내가 속도를 맞추면 말이에요. 특별히 그 캘리포니아 사막 넓은 곳에 깜깜한 밤에 아무 불빛도 없는 사막을 갈 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상하더만요. 혼자 가는 게 싫어서 저 차에 누가 탔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같이 가길 원해요. 그래서 하나의 군단을 이루어 가지고 한 열대의 차가 같이 갑니다. 그 갈 때 보면은 깜깜하죠. 차가 정지상태를 유지하고요. 길이 그냥 앞으로 오는 거 같아요. 차가 딱 서있는 거 같은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되는 사회에 있어서 생각의 변화의 속도를 맞추면 정지상태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안정이 오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생명적으로 사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즐깁니다. 변화를 타고 넘으면서 거기서 창조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고착상태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다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그러고 심장이 터져서 죽어요. 이것은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오. 당신이 잘못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어리석은 고착상태라고 하는 병에 빠져서 스스로 퇴보하고 거꾸로 변화된 거예요. 그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와서 유독 담배에 대한 광고가 많이 나오데요, 담배 피우면 나쁘다고. 그 이주일씨가 폐암으로 고생을 하면서 이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아주 금연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담배 피우지 마라. 아주 굉장한 증거를 댑니다. 어쨌든 담배 피우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60배나 폐암 걸릴 가능성이 많다. 어디는 보니까 또 담배 피는 사람은 젊은 사람도 정력이 50% 감퇴된다. 그 효과 있을 거 같아요. 그 말은 무서워하거든요. 자, 이렇게 멀쩡하게 알아요. 지금 담배가 유익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멍청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왜 못 끊는 겁니까? 옛날 것에 안주하고 싶었어요. 변화가 싫은 거예요. 그게 문제예요. 제가 요새 음식점이나 뭐 이런데서 광고하는 걸 좀 보면서도요 좀 못 마땅해요. 그게 뭐냐하면 어떤 음식이나 물건을 만들었을 때도 '이건 새 거입니다. 이건 이건 21세기적인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질 않고요 "이것은 30년 전통, 이것은 200년 전통" 이라고 해요. 이 전통이 망쳤다는 걸 몰라요? 그렇게 낡은 걸 좋아하니 이게 어떻게 새로운 세계가 오겠노? 입맛도 바꿔야지. 그 30년 전통음식만 좋아하니 이게 되겠어요 이게. 그게 바로 문제라고요. 제가 음식점에 갈 때마다 제일 괴로운 게 뭐냐하면 땅에 앉으라는 거예요. 무릎이 아파 못 견디겠던데. 그 의자에 앉으면 좋으련만 그 질벅하게 앉아 가지고 그렇게 해야만 좋다고 하니 이게 언제나 이게, 북한말로 할까요, 골통을 바꿀 수 있을까.
고착상태에 빠지면 구제불능입니다. 게다가 영적 고착상태가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Spiritual Fixation 그것이 문제입니다. 벌써 영적 주도권을 육체의 욕망에 빼앗긴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바울의 논조대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처음에는 순수한, 아주 구원받은 은총에 감격하는 신앙으로 출발했는데 신앙생활 해 가면서가면서 자기 나름으로 자기가 율법이 되어서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돼버렸어요. 그걸 자기가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오히려 생생한 생명력 넘치는 영적 상태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요. 이 또한 비참한 것이올시다. 어떤 분이 그러대요. 장로님인데 "목사님, 나는 신앙생활 하는 거 다 좋아요. 교회 봉사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문제예요. 그거 좀 가르쳐 주세요."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그 새벽기도 꼭 나가야 됩니까?" 그러더라구요. "아 이거 장로라 안 나갈 수도 없고 나갔다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그랬어요. "꼭 나갈라고 그러지 마세요. 그거 나가야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꼭 잘 믿는 것도 아닙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나 소망교회 나가겠습니다." "그거 조심하세요. 소망교회 나오면 새벽기도 나오게 됩니다" 내 그랬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분의 얘기는 이래요. 꼭 일어나야겠다 생각을 했다가도 새벽만 되면은 생각이 달라진대요. 어떻게 달라지느냐. '아, 하루에 여덟시간 자야된다는데, 내가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은 건강상 좋지 않을텐데……' 이런 생각을 한데요. 그러면 또 생각을 합니다. "아 이거 곽 목사님은 평생 새벽기도 인도하고도 건강한데 내가 그 분보다도 건강한 것도 아닌데……"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덟시간 자야 좋은지 다섯시간 자야 좋은지, 그런 중에 새벽만 되면은 어느 이론에 지는고 하니 '여덟시간 이상 자야 좋으니라.' 이렇게 이 이론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아요. 그렇게 하기를 한 평생이라 하는 것이죠. 몸이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육체의 욕망을 그의 이성으로 합리화하면서 그의 영이 그 합리적 이론 앞에 굴복하고 말아요. 아시겠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에 성령은 탄식합니다.
로마서 8장 있는 말씀대로 보면 성령이 탄식합니다. 아, 쓰러지는구나. 아시겠어요? 이 바울의 신학을 연구해보면 인간을 상징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 뜨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성전은 뜰입니다.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 전부 마당에 서서 예배드리는 거지 성전 안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게 아닙니다. 가끔 카톨릭에서 신년미사 같은 거 할 때 봐도 마당에서 서있지 않았습니까? 마당에서 예배를 드려요. 이게 성전입니다. 성전 뜰이 성전이고 그 다음에는 그 성전 뜰 안에 성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성소가 바로 제사들이 드리는 기구가 있고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 곳입니다. 이게 성소고, 그 다음에 성소 안에 지성소라고 있습니다. 거룩한 중에 더 거룩한 곳이다, 그 지성소,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괘가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합시다. 성전 안에 성소, 성소 안에 지성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몸이라는 것이 있고 혼이라는 것이 있고 혼 안에 다시 영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이게 바로 핵입니다. 성전이 성전되는 것은 지성소 때문입니다. 지성소가 없다면 성소도 없고, 그 넓은 뜰은 운동장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문제는 그 지성소 때문에 이 성전 전체가 거룩해 지는 것이올시다. 이 이론에 의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푸뉴마, 바로 영을 말하는 것이요,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요. 우리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 다음에 우리의 이성이 있어요. 그 이성이나 지성이나 양심이 뒤따릅니다. 그래 이게 성소올시다. 그 다음에 그를 싸고 있는 몸이 있습니다. 그건 육체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육체는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하고, 이성은 영의 주도하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그때에 멸망이 오는 것이올시다. 자, 보세요. 요새 심령의학에서 하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육체가 병들면 정신이 치료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육체가 병든 줄 알지만 병은 정신에서 오는 거예요. 정신력이 약해져서 생긴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원인은 정신이에요. 여러분, 하룻밤만 고민하면서 잠을 못 자보세요. 다음날 아침에 콜록거리는 거 아니에요. 그거 잊지 말아야 되요. 암 환자들도 보면 내과의사의 기록대로 보면 3년 전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충격이 오늘에 와서 Cancer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 고로 정신이 건강할 때에 육체가 건강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신은 영이 건강할 때 그 정신이 건강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육체가 병들면 정신으로 치료합니다. 정신이 잘못되면 영으로 치료합니다. 영이 병들면 무엇으로 치료합니까? 이게 끝이라는 거예요. 그런 고로 육신 혹은 육체의 정욕 주도적 인간과 또 이성이 병들고 영도 잠들어 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 병든 이성이 영을 지배하게 될 때 영은 잠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 옛 영겁에 속한 옛사람. 오늘 본문에 누누이 설명을 합니다. 옛사람, 이것은 그 속성이 영 주도적 인간에서 떠나서 육체 주도적 인간으로 타락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허망하다 그랬어요. 목적을 상실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 지를 모르겠어요. 사업을 하나 결혼을 하나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디아노이아라고 하는 말은 지성적 결여,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다 그랬어요. 판단하는 능력, 총명이 흐려져서 어두워졌어요.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졌어요.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다 그랬어요. 아그노이안 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지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지고 그랬습니다. 강퍅해지는 거요. 고집만 남아요.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어요. 이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무감각해요.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여섯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방임,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포기상태입니다. 거기다 기대를 걸 수가 없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존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들을 재판할 때 그 재판 판결문에 사형을, 사형을 선언하는 판결문에서 마지막 말을 제가 자세히 들었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하였으므로 사형한다' 그랬어요.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인간들이요.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갔어요.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이거는 좌충우돌이요. 이런 방임 상태에 빠져 버린 거예요. 그런 고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조금 원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프뉴마티툼 누스휴몬" 입니다. 프뉴마 누스라고 하는 두 단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누스' 의 '프뉴마' 라고 말합니다. 우리말에는 이거 둘을 합쳐서 심령이라고 그랬어요. 영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심령. 다시 말하면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라. 너희 마음 안에 있는 영을, 마음 안에 있는 영, 그 핵심 그것을 새롭게 하라. 그것은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에요.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를 새롭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중세기 신학자들은 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 길이 어디 있을까 해서 수도원 적으로 이 문제를 풀이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는 Purgation 입니다. 청결입니다. 세속을 떠나야 한다. 아무래도 먹는 거 자는 거 문제가 다 있다. 이 세상에 문제 있다. 그런 고로 세속된 것을 떠나야 하겠다. 그 수도원적으로 이 문제를 풀이해 보려고 했고 또 한가지는 Illumination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마치 태양 빛을 받아서 우리 식물들 모든 생물이 소생함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시는 빛을 받아야겠다. 영적인 빛을 받아들여야 되겠다. 그리고 세 번째가 Union 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마음과 나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는 가운데서 이것이 이웃사랑으로 이어질 때 거기에 영적인 온전함이 있다, 라고 중세기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선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를 말합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고 너무 많이 타락돼서 나는 아들자격이 없다. "머슴꾼의 하나로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굶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이런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만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하고 만납니다. 그 때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는 순간, 나의 더러운 과거 부끄러운 모습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영광된 잔치에 참여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으로 덮었습니다. 사랑으로 감쌉니다. 거기서 녹아져서 그는 아들의 정체의식을 가지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아버지와 만나는 관계에서 새사람이 된 것이에요.
여러분, 사람을 물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질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구조조정, 구조조정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몸부림쳐왔습니다마는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됐어요. 사람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100번 바꿔도 안됩니다. 그걸 우리가 보았습니다. 또한 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가치관이 바뀌기 전에는 안됩니다. 구조를 바꾸고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고로 외적문제에선 내적문제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적인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도 변하는 것이요. 중생은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사람이 사람이 됩니다. 근본은 영적 문제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문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올시다.
1990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엘리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은 '노인의 어머니'라 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양로원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었습니다. 이분은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중국선교사로 일 하려고 했는데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 불결한 환경 속에서 폐결핵 걸려가지고 각혈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여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 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겸손한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불모지 넓은 땅이 있습니다. 이걸 개간을 해서 농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농사해서 얻어지는 수확을 가지고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자기 대신 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농사하다가 또 추수하면서 탈곡을 하던 중에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가면서 손이 부러지고 손을 자르게 됐습니다. 오른손을 짤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사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는 내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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