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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감사

힘을 헤아려 드리는 감사 (신명기 16:9~12)

by 【고동엽】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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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헤아려 드리는 감사   (신명기 16:9~12)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세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명하신 절기를 지키 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가나안에 들어가서 얻은 곡식농사의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절과, 일년간의 모든 결실을 감사하는 수장절입니다. 이 세 절기의 특징은 모두가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감사의 기본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가 그 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과 사망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장차 심판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1999년도 반년동안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 는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 있는데 유월절이 끝나는 날부터 7주가 지난 다음 날에 드려지는 절기라고 하여 "칠칠절"이라는 이름이 있고, 밀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라는 의미로 "초실절"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드리는 절기로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하며 신약에서는 이 날에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들은 해마다 일년에 두 차례씩 감사절로 지키고 있고 매년 7월 첫주일을 맥추감사절로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감사란 하나님의 뜻이요 항상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하나님이 특별히 명하여 감사절로 지키라고 하신 날이기 때문에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감사절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참된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감사의 절기를 행하려면 먼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할 때 자연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감사의 절기를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 감사의 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감사한다는 영어의 thank는 생각한다는 think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 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까? 정말 저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저들의 생활은 정반대 로 불평과 원망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감사하지 못하는 저들을 향하여 소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금년 상반기를 지나오면서 잊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솔직히 감사한 일들이 기억에 남아있기 보다는 어렵고 원망할 일들이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는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셔서 이 시간까지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줄 압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동하며 말씀을 거스려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책망을 하였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여러분 이 시간 솔직히 생각하여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다 주신 것이지 우리가 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의 하나라도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나의 힘과 공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감사가 나올 수 없고 교만한 마음뿐이요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을 보십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이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들의 생명을 지켜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들의 자식들과 재산들을 지켜주신 줄 믿습니다. 누가 병원에 가서 산소 마스크를 쓰고 치료를 받게 되면 상당한 돈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지난번 페루에 갔을 때에 공항 응급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쓰고 나음을 입었는데 이 어리석은 자는 그냥 가라고 할 줄 알고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는데 15솔을(약 6,000원) 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 사용료나 산소 마시는 사용료를 하나님께 지불하지는 않습니다. 20분 정도 마셨는데 6,000원이면 하루 마시려면 얼마입니까? 전기료나 수도료는 매달 사용한 양에 따라서 사용료를 지불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기를 마시는 분량만큼 값을 지불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가난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공기는 안 마시고 살 수 없을테니 값을 지불하라고 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페루식으로 계산을 하면 하루에 1,440x300=432,000원)

더군다나 우리들은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죄악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누리면서 하늘나라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우리들의 영혼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쌍한 자이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거지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니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아무 공로가 없는 자들인데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진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러므로 까마귀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신자가 되지 말고 비둘기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 참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을 헤아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3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공통적으로 주시는 말 씀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물을 드리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사에는 반드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물을 드릴 때 우리들의 마음이 거기에 있게되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예물이 따르지 않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사랑의 수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척도가 감사로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내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늘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가지고 스스로 측정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원리를 곡해하지 말고 바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대로 돈만 많이 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하게되고 물질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상처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경우,막10:17-22). 분문에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능력의 범위 안에서 정도껏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힘껏 예물을 드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는 말씀 앞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비례대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와 여러분들 자신이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에 비하여 우리의 감사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년도 반년을 살아왔지만 정말로 경제적으로 힘에 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아직도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며 설령 직장이 있고 사업장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곤난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어려운 일만 기억을 하고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보세요, 우리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외적인 환경입니다. 조금이라도 일이 잘 되면 그럴만한 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환경에 돌립니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하는 잘못된 습성입니다.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왜 인정을 하지 않으시냐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거기에 합당한 영광과 감사를 올리는 것입니다(렘3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10절에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는 말씀이며, 또 하나는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이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복을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형편이 넘치는 감사를 드릴만한 형편은 안되지만, 앞으로 넘치는 감사를 할 수 있는 복을 주실 줄 믿고 감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드릴 말씀은 1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15절에서도 복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놓고서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즐거움이 없으면 참된 감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복을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행한 궁극적 관심사는 즐겁고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고 우리가 당한 현실적인 고통만 생각하고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습니까? 이 시간 참석하신 성도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왕이면 부부가 즐겁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가족식구들끼리 즐겁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왜 즐겁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즐거움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움의 대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즐거움이 달라집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윗과 솔로몬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즐거움의 대상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힘이 되었고 말씀이 즐거움이 되었고 찬양이 즐거움이 되었고 기도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즐거움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낙을 누리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말년에 후회하였으며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였으며 참된 즐거움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데서 온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의 대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관도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들은 역경 중에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참된 평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 예수님을 친구삼아 그분이 위로부터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여 비록 죄악이 관영하고 살기가 힘이 들지만 헤아려 넘치는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홍근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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