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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수(요한복음 4장 1절~14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헬라철학의 비조(鼻祖)'라 불리는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 곧 만물의 아르케(arkhe)는 물이라 생각하여 자연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최초로 시도하였습니다. 미상불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입니다.
바다와 빙하, 호수, 하천이 지구의 거반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도 7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물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물 없이는 하루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물의 고마움을 잊고 삽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얼마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오후에 시간이 좀 나길래 무엇을 할까 하다가 박물관을 가보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습니다. 근방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자고 하고 탔더니, 마침 택시기사가 재미동포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는데 극구 안 받겠다고 사양을 합니다. 전부터 안 받기로 스스로 맹세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택시를 운전하다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다 태우게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동포들을 많이 태우게 되는데 가자는 데가 한결같이 이상한 곳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못된 곳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곳만 골라서 가자고 하니 기분이 영 좋지가 않더랍니다. 이후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을 가자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요금을 받지 않겠다'라고 다짐해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1호로 걸려서 공짜 택시를 타게 되는 행운(?)을 안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박물관이 페이지박물관입니다. 좀은 특수한 박물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스앤젤레스 근방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사막이 아닌, 수목이 우거진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짐승과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입니까? 날이 갈수록 비가 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이란 물은 모두 말라버리고 땅바닥이 쩍쩍 갈라집니다. 짐승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마지막 남은 호숫가로만 몰려듭니다. 그 호수마저 말라 물이 점점 줄어서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땅을 파서 마실 물을 구합니다. 자꾸만 깊이 파 내려갑니다. 결국 짐승과 사람이 그 구덩이 속에서 뒤섞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사람과 짐승의 뼈가 무수하게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박물관에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지구가 아무리 넓다 해도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살지 못합니다. 물이 없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도 그곳에 모여 살아갑니다. 물을 중심으로, 물을 따라 살아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물, 그러나 우리는 그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근본을 잊고 삽니다. 본질적인 것에 무관심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건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벌겠다고 바등바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덜컥 몸져눕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만, 그 때는 이미 엎지른 물입니다. 며칠전, 관광안내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회를 하는 것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재미있습디다. 외국 관광객들은 관광을 하면서 안내자가 하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반드시 메모를 한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 관광객들은 메모는커녕 설명조차 듣지 않고 저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외국사람들은 관광을 해도 하루에 한 군데만 보고 나머지 시간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휴가가 끝난 다음에는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재충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으로 관광을 한 나머지 휴가를 다녀오면 녹초가 되고 맙니다. 한 일주일간은 피로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고 비실비실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휴가가 있는지 모를 형편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그렇다고 합니다. 외국사람들은 강이든 나무든 바위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것을 먼저 찍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 얼굴을 찍으려고 난리들입니다. 경치는 아랑곳없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왜 여행을 갔습니까? 어차피 다 보지도 못하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대충 보아두고 배울 것만 배웁시다. 볼 것만 골라서 보고 쉬고 하면서 건강을 챙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버리고 쓸데없는 것만 찾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물은 필요합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물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NO substitute입니다. 물이 필요할 때에는 물을 먹어야 합니다. 물을 대용할 음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도 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할 때에 쥬스라든가 커피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며 마셔보았습니다마는 다 필요 없습니다. 요즈음은 생수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 제일입니다. 돈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생수라야 합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납니다.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생수에 비유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 ----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깊고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참으로 좋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온 사람에게 "육체를 위한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네게 주마" 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하여 일단 관심을 모으게 하시고 내가 주는 물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육체를 위하여 마시는 물은 잠깐 후면 다시 갈증을 느끼지만 내가 주는 영원한 생수는 거듭 솟아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영적인 갈증이 더 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 자신을 깨닫게 하시고 해갈시켜주시는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조지 엘리어트(George Eliot)는 인간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의 감옥에 갇혀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의 감옥입니다. 자기 사랑, 곧 이기주의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함입니다마는 잘못 깊이 빠져들어 가면 정신없어집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안중에 없어집니다.
나만 생각하는 비참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에는 주위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을 성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챙기다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둘째는, '근심'의 감옥입니다. 걱정처럼 불필요한 일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걱정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맙니다. 잊지 못해서 하는 근심이 감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근심으로 감옥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셋째는,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젊었을 때에 그러지 말 것을, 그때 공부 좀 열심히 하는 건데, 그때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이제 와서 생각이 많습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입니다. 과거에 매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잘됐든 못됐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난날에 매여서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그 감옥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남의 것만 좋게 보이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처지는 나쁘고 남의 처지만이 좋게 보입니다. 내 아내는 못났고 남의 아내는 잘났습니다. 내 자식은 못났고 남의 자식은 잘나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내가 가진 것이 좋고, 내가 처한 환경이 좋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족해 할 줄 모르고 남의 처지와 형편만 선망하는 것, 무서운 감옥입니다. 고질병입니다.
다섯째는 '증오'의 감옥입니다. 시기와 증오, 참으로 무섭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신문에 났었습니다. 한 여인이 아홉 살 때에 어떤 나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합니다. 나이 서른이 된 오늘에 와서 자신을 강간했던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여인이 재판정에 서서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인 것이다." 동정이 갑니다.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을 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홉 살부터 서른 살이 되기까지 한 사람을 그토록 증오하며 살아야 했던, 그 '증오'의 감옥생활을 누가 보상하겠습니까? 참으로 불행합니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이 여자,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4장 전체에 걸쳐서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스스로 이방사람이라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대사람들이 멸시하고 상종치도 않는 이방 여자다 하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기 행복만을 평생 추구해온 사람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결혼을 여러 번 했던 모양입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고서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다섯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사별한 경우도 있었겠고, 배반당한 경우도 있었겠고, 저가 배반한 경우도 있었겠습니다. 아무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가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여자의 행복은 남자에게 달렸다는, 소위 종속적인 행복관을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다. 진정한 행복은 남자에게 달린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달린 것도 아닙니다. 물질이나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본문의 이 여자는 행복이 남자에게 있다고 믿고 무려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하였지만 끝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남의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내 남편을 빼앗겼으니 나도 남의 남편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불행한 여자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을 찾아 평생을 헤매었건만 비참한 인간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여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 육 시쯤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여섯 시는 유대 시간법으로 정오를 가리킵니다. 유대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지역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서늘할 때에 물을 긷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 물 긷는 대열에 이 여자가 끼기라도 할라치면 남편을 몇 번이나 바꾼 여자라는 둥, 지금은 누구하고 산다는 둥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남들이 없는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햇볕이 뜨거운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올 수밖에 없을 만큼 부끄러움이 많았던 여자입니다. 참으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물은 마셔야 하겠기에 하는 수없이 길으러 오기는 하였지만 영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에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하게 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멀리 있는 물도 마다 않고 가져다 드리는 판국인데 이 여자는 코앞에 있는 우물에서 물 한 그릇 떠드리는 것도 예사로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비뚤어진 성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다. 지금도 툭 건드리기만 하면 싸우려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요즈음은 불쾌지수가 높아서 그런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집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접촉사고라도 나보십시오. 조금 스치기만 해도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놓은 채 서로 삿대질을 해가며 아웅다웅합니다. 자동차라는 것이 사람의 신발과 같아서 깨끗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한심스러운 광경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세태에 어느 만큼 면역이 되었습니까? 좀 여유가 생겼습니까? 이 여자는 우물가에서 물 한 그릇도 선뜻 내주지 못할 만큼 꼬장해져 있습니다. 물을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과 시비를 벌이려듭니다.
이렇듯 괴로운 날을 살아가는 여자이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동문에 서답을 합니다. 영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습니다. 감정이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만난다고 하는 종합적 인식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서너 시간 토론을 벌인 것도 아닙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시원함을 얻게 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속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까지, 남편이 다섯 있는 것까지, 마음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예수님을 뵈온 것입니다.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예수님께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배하는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소중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절)." 예배는 장소나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요,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예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여자는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개별적인 사랑을 확증 받는 은혜를 입습니다. 사죄의 기쁨이 넘칠 때에 즉시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가책도 없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갑니다. 저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갔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물길으러 왔던 여자가 물동이를 내버려두면서까지 예수님을 증거 하러 갑니다. 영적인 시원함을 얻는 순간 목마름도, 육체의 피로도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대로 동네로 뛰어들어가, 보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돌아다닙니다. 비로소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는 이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순간입니까? 여러분, 혹 사람 만나는 것이 싫습니까? 꺼려집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반가워야 합니다. 누구라도 반가워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지치고 괴롭고 짜증이 난다면 일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 병들었기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생수가 필요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새로운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밝은 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인 존 뉴턴(J. Newton)은 본래 선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잔학무도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목사가 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평생 찬양하며 삽니다. 그는 죽기 전에 스스로 만든 묘비에 이런 글귀를 남겼습니다. '존 뉴던, 그는 한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방탕에 빠졌으며, 노예를 매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보호되고 회복되고 죄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절대공간이 있다.' 여러분, 마음이 허전하십니까? 허무감이 드십니까?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돈으로, 지위로, 누구의 칭찬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기 전에는 이 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시원함이 없는 생활, 불쌍한 생입니다. 목마름과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여 그만 두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하기 전에 그에게 말합니다. "수술을 하지만 자네는 아마도 보지 못하게 될 걸세."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장님으로 살아서 뭐하느냐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발악을 합니다. 억지로 붙들어다 수술을 했습니다. 회복된 다음, 붕대를 풀면서 의사가 조용히 말합니다. "자네는 분명 두 눈을 다 잃었지만 자네를 위해서 한쪽 눈을 기증한 사람이 있어서 다시 앞을 볼 수가 있게 되었네." 그러자 또 발악을 합니다. 애꾸눈으로 살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장님이 될 것인데 한 눈으로나마 보게 된 것에 감사해야지." 의사는 그를 책망하면서 붕대를 풉니다. 다 풀자 앞이 뿌옇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니의 한쪽 눈에 안대가 덮여 있습니다. 그제야 깨닫습니다. 통회의 눈물로 어머니한테 매달리어 울부짖습니다. "어머니,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잘못되어 짜증이 나는 것입니까? 왜 피곤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 십자가의 사랑을 똑바로 아는 길,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침내 이후로는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하고 생기 넘치는 밝고 건강한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수(요한복음 4장 1절~14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헬라철학의 비조(鼻祖)'라 불리는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 곧 만물의 아르케(arkhe)는 물이라 생각하여 자연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최초로 시도하였습니다. 미상불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입니다.
바다와 빙하, 호수, 하천이 지구의 거반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도 7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물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물 없이는 하루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물의 고마움을 잊고 삽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얼마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오후에 시간이 좀 나길래 무엇을 할까 하다가 박물관을 가보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습니다. 근방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자고 하고 탔더니, 마침 택시기사가 재미동포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는데 극구 안 받겠다고 사양을 합니다. 전부터 안 받기로 스스로 맹세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택시를 운전하다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다 태우게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동포들을 많이 태우게 되는데 가자는 데가 한결같이 이상한 곳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못된 곳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곳만 골라서 가자고 하니 기분이 영 좋지가 않더랍니다. 이후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을 가자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요금을 받지 않겠다'라고 다짐해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1호로 걸려서 공짜 택시를 타게 되는 행운(?)을 안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박물관이 페이지박물관입니다. 좀은 특수한 박물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스앤젤레스 근방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사막이 아닌, 수목이 우거진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짐승과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입니까? 날이 갈수록 비가 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이란 물은 모두 말라버리고 땅바닥이 쩍쩍 갈라집니다. 짐승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마지막 남은 호숫가로만 몰려듭니다. 그 호수마저 말라 물이 점점 줄어서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땅을 파서 마실 물을 구합니다. 자꾸만 깊이 파 내려갑니다. 결국 짐승과 사람이 그 구덩이 속에서 뒤섞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사람과 짐승의 뼈가 무수하게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박물관에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지구가 아무리 넓다 해도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살지 못합니다. 물이 없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도 그곳에 모여 살아갑니다. 물을 중심으로, 물을 따라 살아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물, 그러나 우리는 그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근본을 잊고 삽니다. 본질적인 것에 무관심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건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벌겠다고 바등바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덜컥 몸져눕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만, 그 때는 이미 엎지른 물입니다. 며칠전, 관광안내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회를 하는 것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재미있습디다. 외국 관광객들은 관광을 하면서 안내자가 하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반드시 메모를 한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 관광객들은 메모는커녕 설명조차 듣지 않고 저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외국사람들은 관광을 해도 하루에 한 군데만 보고 나머지 시간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휴가가 끝난 다음에는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재충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으로 관광을 한 나머지 휴가를 다녀오면 녹초가 되고 맙니다. 한 일주일간은 피로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고 비실비실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휴가가 있는지 모를 형편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그렇다고 합니다. 외국사람들은 강이든 나무든 바위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것을 먼저 찍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 얼굴을 찍으려고 난리들입니다. 경치는 아랑곳없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왜 여행을 갔습니까? 어차피 다 보지도 못하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대충 보아두고 배울 것만 배웁시다. 볼 것만 골라서 보고 쉬고 하면서 건강을 챙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버리고 쓸데없는 것만 찾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물은 필요합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물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NO substitute입니다. 물이 필요할 때에는 물을 먹어야 합니다. 물을 대용할 음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도 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할 때에 쥬스라든가 커피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며 마셔보았습니다마는 다 필요 없습니다. 요즈음은 생수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 제일입니다. 돈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생수라야 합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납니다.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생수에 비유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 ----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깊고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참으로 좋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온 사람에게 "육체를 위한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네게 주마" 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하여 일단 관심을 모으게 하시고 내가 주는 물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육체를 위하여 마시는 물은 잠깐 후면 다시 갈증을 느끼지만 내가 주는 영원한 생수는 거듭 솟아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영적인 갈증이 더 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 자신을 깨닫게 하시고 해갈시켜주시는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조지 엘리어트(George Eliot)는 인간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의 감옥에 갇혀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의 감옥입니다. 자기 사랑, 곧 이기주의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함입니다마는 잘못 깊이 빠져들어 가면 정신없어집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안중에 없어집니다.
나만 생각하는 비참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에는 주위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을 성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챙기다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둘째는, '근심'의 감옥입니다. 걱정처럼 불필요한 일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걱정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맙니다. 잊지 못해서 하는 근심이 감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근심으로 감옥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셋째는,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젊었을 때에 그러지 말 것을, 그때 공부 좀 열심히 하는 건데, 그때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이제 와서 생각이 많습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입니다. 과거에 매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잘됐든 못됐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난날에 매여서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그 감옥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남의 것만 좋게 보이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처지는 나쁘고 남의 처지만이 좋게 보입니다. 내 아내는 못났고 남의 아내는 잘났습니다. 내 자식은 못났고 남의 자식은 잘나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내가 가진 것이 좋고, 내가 처한 환경이 좋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족해 할 줄 모르고 남의 처지와 형편만 선망하는 것, 무서운 감옥입니다. 고질병입니다.
다섯째는 '증오'의 감옥입니다. 시기와 증오, 참으로 무섭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신문에 났었습니다. 한 여인이 아홉 살 때에 어떤 나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합니다. 나이 서른이 된 오늘에 와서 자신을 강간했던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여인이 재판정에 서서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인 것이다." 동정이 갑니다.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을 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홉 살부터 서른 살이 되기까지 한 사람을 그토록 증오하며 살아야 했던, 그 '증오'의 감옥생활을 누가 보상하겠습니까? 참으로 불행합니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이 여자,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4장 전체에 걸쳐서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스스로 이방사람이라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대사람들이 멸시하고 상종치도 않는 이방 여자다 하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기 행복만을 평생 추구해온 사람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결혼을 여러 번 했던 모양입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고서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다섯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사별한 경우도 있었겠고, 배반당한 경우도 있었겠고, 저가 배반한 경우도 있었겠습니다. 아무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가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여자의 행복은 남자에게 달렸다는, 소위 종속적인 행복관을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다. 진정한 행복은 남자에게 달린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달린 것도 아닙니다. 물질이나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본문의 이 여자는 행복이 남자에게 있다고 믿고 무려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하였지만 끝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남의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내 남편을 빼앗겼으니 나도 남의 남편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불행한 여자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을 찾아 평생을 헤매었건만 비참한 인간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여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 육 시쯤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여섯 시는 유대 시간법으로 정오를 가리킵니다. 유대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지역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서늘할 때에 물을 긷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 물 긷는 대열에 이 여자가 끼기라도 할라치면 남편을 몇 번이나 바꾼 여자라는 둥, 지금은 누구하고 산다는 둥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남들이 없는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햇볕이 뜨거운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올 수밖에 없을 만큼 부끄러움이 많았던 여자입니다. 참으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물은 마셔야 하겠기에 하는 수없이 길으러 오기는 하였지만 영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에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하게 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멀리 있는 물도 마다 않고 가져다 드리는 판국인데 이 여자는 코앞에 있는 우물에서 물 한 그릇 떠드리는 것도 예사로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비뚤어진 성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다. 지금도 툭 건드리기만 하면 싸우려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요즈음은 불쾌지수가 높아서 그런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집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접촉사고라도 나보십시오. 조금 스치기만 해도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놓은 채 서로 삿대질을 해가며 아웅다웅합니다. 자동차라는 것이 사람의 신발과 같아서 깨끗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한심스러운 광경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세태에 어느 만큼 면역이 되었습니까? 좀 여유가 생겼습니까? 이 여자는 우물가에서 물 한 그릇도 선뜻 내주지 못할 만큼 꼬장해져 있습니다. 물을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과 시비를 벌이려듭니다.
이렇듯 괴로운 날을 살아가는 여자이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동문에 서답을 합니다. 영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습니다. 감정이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만난다고 하는 종합적 인식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서너 시간 토론을 벌인 것도 아닙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시원함을 얻게 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속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까지, 남편이 다섯 있는 것까지, 마음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예수님을 뵈온 것입니다.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예수님께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배하는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소중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절)." 예배는 장소나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요,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예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여자는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개별적인 사랑을 확증 받는 은혜를 입습니다. 사죄의 기쁨이 넘칠 때에 즉시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가책도 없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갑니다. 저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갔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물길으러 왔던 여자가 물동이를 내버려두면서까지 예수님을 증거 하러 갑니다. 영적인 시원함을 얻는 순간 목마름도, 육체의 피로도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대로 동네로 뛰어들어가, 보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돌아다닙니다. 비로소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는 이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순간입니까? 여러분, 혹 사람 만나는 것이 싫습니까? 꺼려집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반가워야 합니다. 누구라도 반가워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지치고 괴롭고 짜증이 난다면 일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 병들었기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생수가 필요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새로운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밝은 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인 존 뉴턴(J. Newton)은 본래 선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잔학무도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목사가 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평생 찬양하며 삽니다. 그는 죽기 전에 스스로 만든 묘비에 이런 글귀를 남겼습니다. '존 뉴던, 그는 한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방탕에 빠졌으며, 노예를 매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보호되고 회복되고 죄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절대공간이 있다.' 여러분, 마음이 허전하십니까? 허무감이 드십니까?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돈으로, 지위로, 누구의 칭찬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기 전에는 이 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시원함이 없는 생활, 불쌍한 생입니다. 목마름과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여 그만 두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하기 전에 그에게 말합니다. "수술을 하지만 자네는 아마도 보지 못하게 될 걸세."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장님으로 살아서 뭐하느냐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발악을 합니다. 억지로 붙들어다 수술을 했습니다. 회복된 다음, 붕대를 풀면서 의사가 조용히 말합니다. "자네는 분명 두 눈을 다 잃었지만 자네를 위해서 한쪽 눈을 기증한 사람이 있어서 다시 앞을 볼 수가 있게 되었네." 그러자 또 발악을 합니다. 애꾸눈으로 살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장님이 될 것인데 한 눈으로나마 보게 된 것에 감사해야지." 의사는 그를 책망하면서 붕대를 풉니다. 다 풀자 앞이 뿌옇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니의 한쪽 눈에 안대가 덮여 있습니다. 그제야 깨닫습니다. 통회의 눈물로 어머니한테 매달리어 울부짖습니다. "어머니,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잘못되어 짜증이 나는 것입니까? 왜 피곤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 십자가의 사랑을 똑바로 아는 길,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침내 이후로는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하고 생기 넘치는 밝고 건강한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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