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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승리의 의미(고린도전서 15:50-58)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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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승리의 의미(고린도전서 15:50-58)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 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 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 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여러분은 '신비(神秘)'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영어로는 'mystery'라고 하는 이 말의 어원은 헬라어 '무스테리온'입니다. 우리말로는 '비밀' 혹은 '신비'라고도 번역합니다. 도대체 '신비'라는 말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고 비(非)사실이다'라고 자기관심 밖으로 밀어버립니다. 아예 모르니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가 알고 모른다는 것과,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반드시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여도, 없다고 하여도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있는 사실과 내 이해, 내 지식을 별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내가 이해하는 세계란 아주 부족하고 내 이해의 한계란 형편없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합리적이기에 사실이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더 확실하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생명입니다. '나'라는 이 생명체를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입니까?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닳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실이 엄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아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다. 생명이 떠나가는 것이다. 생명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변화'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죽음의 신비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죽음의 신비는 존재합니다. 부활생명도 확실한 것입니다.

부활사건을 특수한 기적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신비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이적도 없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역사가 하나님께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의 삶도 출생도 죽음도 부활도 하나님 앞에는 조금도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적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나 이적으로 여겨지고 깜짝 놀랄 일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만이 안다 모른다,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적이요 기적이다, 놀랍다 할뿐이지 하나님께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설명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적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 자체를 설명하고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원래 조그마한 유충(幼蟲)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버러지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라게소메다----생명의 변화와 변화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You shall be changed.---바뀐다는 말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변화, 이것을 깊이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인간의 최후의 적은 죽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한국에도 '안구(眼球)은행'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미리 이 은행과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 죽은 후 24시간 이내에 그 눈을 빼어서 다른 시각장애자에게 넣어줍니다. 그리함으로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안구가 없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안구를 기증 받고 눈을 뜬 사람은 이제까지 약 삼백 명 정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는 기독교인만 해도 무려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안구은행에 자기 사후(死後)에 눈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육천 명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할 때에 장님으로 부활할까봐 기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요즈음 땅이 모자라서 매장으로 인한 문제가 시끄럽습니다만 부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장(火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쭈글쭈글 늙은 채로 부활한다면 별로 반갑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 자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없던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생명이 성장했습니다. 생명이 죽습니다. 다음 단계로 '부활'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에 대한 신앙은 없고,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만이 팽배 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을 추상적 진리로만 생각하려듭니다.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 피우지 않고, 거짓된 사람이 진실해지고 새사람 되는 것을 보고 아, 그 사람 부활했다고 하는 등, 부활사건을 논리, 교리, 철학으로만 생각하려 하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이 사실이듯이,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해나 지식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죽어야 하는 것처럼 준비가 있거나 없거나 죽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 그 계시적 사건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총 주제, 성경이 말씀하는 총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복음 전파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줄 알고 열심히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들이 기대하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개념이 달랐습니다. 아무튼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두 번째 총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가 실망했습니다.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졌구나 싶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13)"하고 실망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도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제자들은 끈질기게 여쭈어봅니다. 마음속으로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 세속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개념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제자들은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누가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엄청난 갭(cap)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 24)"하셨는데 십자가에 속절없이 죽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세 번째 총 주제는 '예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총 주제는 오직 하나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십자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합니다. '예수 부활'이 있고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나라의 의미, 하나님나라의 방법,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말씀 전부가 십자가와 부활사건 안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사망 권세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사망이 얼마나 무서운 권세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쫓기고 있습니다.

죽음을 어느만큼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옛날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할 때에 지금처럼 '안녕하십니까'라고 하지 않고 심각하게 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이 나의 죽는 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의 이 시각이 내 죽음의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모든 것을 소멸합니다. 여러분, 많이 배웠습니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열심히 배웠던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많이 벌어놓았습니까? 죽음과 함께 그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됩니다. 명성이 높습니까? 그것도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다 소멸합니다. 모든 가치관이 죽음에 걸려 있고 모든 도덕관이 죽음에 걸려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사는 멍텅구리들이 있어 축재(蓄財)를 하고 부정을 저지릅니다. 멍청한 짓들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더 지혜스러웠다면 그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이 문제를 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이 모든 가치관의 근본입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이고 다 시끄러운 일일뿐이다. 그저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 또한 큰 착각입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더 무서운 사람도 있습니다.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운 사람, 눈에 거슬리는 것 다 쓸어버리고 증거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이렇게 생각하는 불한당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음이라는 문제에 다 걸려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죽을 것이니 '노세 노세 젊어 노세'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을 목숨이니 아까워할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역시 죽음이라는 문제에 걸려 있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연유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소중한 문제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망 권세는 정말 엄청난 위력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저들은 이제 소망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제자들도 당연히 죽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확신의 사람들이 됩니다. 환희의 사람들이 됩니다. 특별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하고 당당하게 갈파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안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큰 생명의 빛 안에서 죽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하나의 필연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집사님 한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母胎)는 세태(世胎)다'라고 말입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해 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태---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제건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한 생명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군인도, 가룟 유다도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곧 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적 변화가 아닙니다. 한낱 자연현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요, 변화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죄와 율법과 사망을 다 이길 수 있고도 넉넉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생명과 연결된 일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모든 신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바로 '너희 수고가 부활신앙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진정한 삶의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  

부활 승리의 의미(고린도전서 15:50-58)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 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 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 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여러분은 '신비(神秘)'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영어로는 'mystery'라고 하는 이 말의 어원은 헬라어 '무스테리온'입니다. 우리말로는 '비밀' 혹은 '신비'라고도 번역합니다. 도대체 '신비'라는 말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고 비(非)사실이다'라고 자기관심 밖으로 밀어버립니다. 아예 모르니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가 알고 모른다는 것과,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반드시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여도, 없다고 하여도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있는 사실과 내 이해, 내 지식을 별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내가 이해하는 세계란 아주 부족하고 내 이해의 한계란 형편없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합리적이기에 사실이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더 확실하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생명입니다. '나'라는 이 생명체를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입니까?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닳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실이 엄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아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다. 생명이 떠나가는 것이다. 생명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변화'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죽음의 신비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죽음의 신비는 존재합니다. 부활생명도 확실한 것입니다.

부활사건을 특수한 기적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신비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이적도 없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역사가 하나님께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의 삶도 출생도 죽음도 부활도 하나님 앞에는 조금도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적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나 이적으로 여겨지고 깜짝 놀랄 일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만이 안다 모른다,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적이요 기적이다, 놀랍다 할뿐이지 하나님께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설명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적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 자체를 설명하고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원래 조그마한 유충(幼蟲)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버러지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라게소메다----생명의 변화와 변화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You shall be changed.---바뀐다는 말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변화, 이것을 깊이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인간의 최후의 적은 죽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한국에도 '안구(眼球)은행'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미리 이 은행과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 죽은 후 24시간 이내에 그 눈을 빼어서 다른 시각장애자에게 넣어줍니다. 그리함으로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안구가 없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안구를 기증 받고 눈을 뜬 사람은 이제까지 약 삼백 명 정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는 기독교인만 해도 무려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안구은행에 자기 사후(死後)에 눈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육천 명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할 때에 장님으로 부활할까봐 기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요즈음 땅이 모자라서 매장으로 인한 문제가 시끄럽습니다만 부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장(火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쭈글쭈글 늙은 채로 부활한다면 별로 반갑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 자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없던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생명이 성장했습니다. 생명이 죽습니다. 다음 단계로 '부활'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에 대한 신앙은 없고,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만이 팽배 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을 추상적 진리로만 생각하려듭니다.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 피우지 않고, 거짓된 사람이 진실해지고 새사람 되는 것을 보고 아, 그 사람 부활했다고 하는 등, 부활사건을 논리, 교리, 철학으로만 생각하려 하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이 사실이듯이,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해나 지식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죽어야 하는 것처럼 준비가 있거나 없거나 죽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 그 계시적 사건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총 주제, 성경이 말씀하는 총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복음 전파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줄 알고 열심히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들이 기대하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개념이 달랐습니다. 아무튼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두 번째 총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가 실망했습니다.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졌구나 싶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13)"하고 실망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도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제자들은 끈질기게 여쭈어봅니다. 마음속으로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 세속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개념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제자들은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누가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엄청난 갭(cap)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 24)"하셨는데 십자가에 속절없이 죽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세 번째 총 주제는 '예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총 주제는 오직 하나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십자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합니다. '예수 부활'이 있고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나라의 의미, 하나님나라의 방법,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말씀 전부가 십자가와 부활사건 안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사망 권세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사망이 얼마나 무서운 권세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쫓기고 있습니다.

죽음을 어느만큼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옛날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할 때에 지금처럼 '안녕하십니까'라고 하지 않고 심각하게 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이 나의 죽는 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의 이 시각이 내 죽음의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모든 것을 소멸합니다. 여러분, 많이 배웠습니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열심히 배웠던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많이 벌어놓았습니까? 죽음과 함께 그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됩니다. 명성이 높습니까? 그것도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다 소멸합니다. 모든 가치관이 죽음에 걸려 있고 모든 도덕관이 죽음에 걸려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사는 멍텅구리들이 있어 축재(蓄財)를 하고 부정을 저지릅니다. 멍청한 짓들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더 지혜스러웠다면 그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이 문제를 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이 모든 가치관의 근본입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이고 다 시끄러운 일일뿐이다. 그저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 또한 큰 착각입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더 무서운 사람도 있습니다.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운 사람, 눈에 거슬리는 것 다 쓸어버리고 증거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이렇게 생각하는 불한당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음이라는 문제에 다 걸려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죽을 것이니 '노세 노세 젊어 노세'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을 목숨이니 아까워할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역시 죽음이라는 문제에 걸려 있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연유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소중한 문제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망 권세는 정말 엄청난 위력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저들은 이제 소망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제자들도 당연히 죽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확신의 사람들이 됩니다. 환희의 사람들이 됩니다. 특별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하고 당당하게 갈파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안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큰 생명의 빛 안에서 죽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하나의 필연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집사님 한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母胎)는 세태(世胎)다'라고 말입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해 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태---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제건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한 생명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군인도, 가룟 유다도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곧 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적 변화가 아닙니다. 한낱 자연현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요, 변화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죄와 율법과 사망을 다 이길 수 있고도 넉넉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생명과 연결된 일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모든 신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바로 '너희 수고가 부활신앙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진정한 삶의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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