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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버린 자유인(갈라디아서 5 : 13~18)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36년 동안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이하여 8․15의 감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제의 압박에서 36년 동안이나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유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할 자격이 없으며, 사실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자유를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양심의 자유, 진실의 자유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이지러진 자유가 아니라 온 인격이 온전하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입니다.
기독교의 자유의 개념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사회 제도인 노예 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노예와 자유인, 종과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노예와 자유인은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었습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노예는 말을 할 수 있고 당나귀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뿐이라고까지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함으로써 비인도적인 종교라는 오해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노예는 물건이지 결코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소유할 자유도 없습니다. 노예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 들여도 주인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재능과 기술과 사상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생사권은 오직 주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도덕을 지킬 자유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가려서 행할 자유가 없습니다. 다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완전히 그 주인의 소유물로서 자유는 전연 생각할 수 없는 속박된 존재 이것이 노예입니다.
노예가 되는 경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에서 패할 때에 노예가 됩니다. 옛날에는 작은 도시 국가들이 많은 전쟁을 했었는데, 이 전쟁에서 패하면 승리한 민족에게 끌려가서 그대로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패전이란 비참한 것입니다. 완전히 빼앗긴 상태이며 인간적 가치에서 볼 때에는 이미 죽은 것으로서 육체만이 하나의 짐승처럼 끌려 다닐 뿐입니다.
이 노예의 상태를 우리는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싸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의 정욕과 싸워야 하며 여러 가지 환난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되어 자유함을 얻지 못하며, 인격을 상실한 노예의 상태에 이르게 되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비참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서 이런 여러 가지 싸움에서 패함이 없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 팔리므로 노예가 됩니다. 옛날에는 노예 매매 제도가 있었으며, 팔리는 이유는 빚 때문입니다. 사업이 잘못 됐든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빚진 것만큼 가족이 팔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빚진 과거가 우리로 하여금 노예로 살도록 합니다. 죄라고 하는 빚, 허물이라고 하는 빚,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한 것들로 인하여 나는 빚진 노예가 되며 이 빚을 다 갚기까지는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래적인 노예가 있습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노예입니다. 본인에게 잘못이 있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입니다.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자신도 모르게 비굴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방탕이라고 하는 타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한 세상을 어둡게만 보는 그런 세계관 속에서 태어나서 일생 동안 세상을 삐뚤어지게 보는 비관적인 잠재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본래적이며 근본적인 타고난 노예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미신이라고 하는 것이 뿌리 박혀 있어 자기도 모르게 이 미신적인 세계관 속에 사로잡혀서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도 상당한 지성인들까지도 점을 치러 다니며, 이사를 하게 되면 날을 잡아야 되고, 결혼을 하려면 궁합을 보아야 하며, 사업을 시작하려면 돼지머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잠재 의식 속에서 정신적으로 미신적 노예 상태에 있는 본질적인 노예입니다. 이런 우상과 미신에 사로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끌려 다니는 모습이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국가적 혹은 정치적으로 부자유한 상태의 노예가 있으며, 가난에 매인 노예가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노예란 모두 비참한 것입니다. 국가가 약하면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며 경제적으로 가난하면 부득불 빵을 위하여 부유한 사람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풀려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독립하여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 알게 모르게 다시 일본에 매이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못하면 결코 진정한 독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경제적인 자유인이 못되면 양심의 자유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 직장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동부 여자 기술 학교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창녀들을 데려다가 기술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기술을 배워 직장으로 나간 그들이 몇 달이 못 되어 다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옛날의 생활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가난은 사람의 자유를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도 참 자유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육체가 연약해지면 마음도 함께 약해져서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무지입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며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언젠가 대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영어를 하게 되면 거의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대만의 어느 변두리에 갔더니 상대편에서 전혀 영어를 못하여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음식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답답하여 무지라는 것이 바로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다.
헬렌켈러 여사에 대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의 어린 시절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발악하는 그 모습에서 우리의 무지의 감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라는 것도 하나의 불쌍한 노예의 모습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생각해 볼 문제는 도덕적 자유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방종, 방탕, 방임, 미움, 과욕 등 이러한 죄의 타성에 이끌려 항상 가책에 눌려 있음으로써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돈 한번 마음대로 써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인격을 바로 갖추기 전에 많은 돈을 갖게 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얻었지만 양심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주어진 경제적인 자유도 바로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도덕적 자유가 없는 자에게 주어진 경제적 자유 혹은 정치적 자유는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부유하지 못한 것과 권력을 갖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적 자유입니다. 불 신앙, 의심, 우상숭배 교만 이런 것은 사탄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나 아닌 다른 것이 나를 사로잡아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의심과 불 신앙으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마귀의 노예가 되었는데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부자유를 아는 자유마저도 빼앗긴 상태는 그가 벌써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으며 자유의 고귀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자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자유와 자유 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벌써 마귀에게 패했고, 그리고 팔려 갔으므로 이제는 본질적인 노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러 주지 않으면 영원히 자유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값을 치러 주시고 우리를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분이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6:20에서 말씀하시기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높은 값을 치루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삶을 위해서는 죽음의 값이 지불되어야 했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는 귀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자유는 내가 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저 얻은 자유는 곧 잃어버리기 쉬운 자유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자유라면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쉽게 지켜질 수가 있으나, 그저 얻은 자유는 그 가치를 알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이 자유를 지키기란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8․15해방을 그저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6․25라고 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자유의 고귀함을 미쳐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6․25의 댓가로 우리는 이제 가장 강한 반공 국가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만일 6․25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가는 아니지만 예측해 보는 대로는 아마도 월남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6․25라고 하는 큰 희생의 값을 치르므로써 자유의 고귀함을 알았고 오늘의 이만한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얻은 자유는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의 재벌 2세들이 방종 하는 것은 너무 쉽게 출세함으로써 그 가치를 미쳐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받은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얻은 것이지만 주님은 너무나 많은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5:1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면 가장 값비싼 것을 먼저 손에 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재확인하여 이 자유를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의미 없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신 자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종, 진리의 종, 말씀의 종, 그리고 본문의 말씀대로 성령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것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참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선물로 받은 로렉스 시계를 가져 본 적이 있었는데, 짧은 옷을 입은 여름에는 이 시계를 누가 채어 갈까 보아 차고 다닐 수가 없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결국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벗어버리고, 값이 싼 시계를 하나 사서 차니까 그렇게 편하고 좋은 수가 없었습니다.
옷도 너무 고급으로 입으면 부자유합니다. 우리가 옷이나 소지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감투도 자유할 수 있는 정도가 좋을 것이며 너무 크면 괴롭고 부자유스럽습니다. 지식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부자유스러운 것은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자유, 이것이 귀중한 것이며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을 미워할 자유, 죄를 지을 자유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의와 진리를 따라갈 자유 외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 자기에게는 조그만 자유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직 자기를 포로한 자를 위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안에서 포로된 자로서 자유가 없다는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진리 안에 있게 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말씀과 진리와 성령을 쫓아 행하므로 내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스스로 버리고 주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저희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된 것을 확신하며 나에게 주신 이 자유를 주님께 온전히 부탁함으로써 의를 이루게 하시고 주님을 위해 삶으로써 이 고귀한 자유를 지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자유를 버린 자유인(갈라디아서 5 : 13~18)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36년 동안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이하여 8․15의 감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제의 압박에서 36년 동안이나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유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할 자격이 없으며, 사실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자유를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양심의 자유, 진실의 자유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이지러진 자유가 아니라 온 인격이 온전하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입니다.
기독교의 자유의 개념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사회 제도인 노예 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노예와 자유인, 종과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노예와 자유인은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었습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노예는 말을 할 수 있고 당나귀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뿐이라고까지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함으로써 비인도적인 종교라는 오해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노예는 물건이지 결코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소유할 자유도 없습니다. 노예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 들여도 주인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재능과 기술과 사상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생사권은 오직 주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도덕을 지킬 자유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가려서 행할 자유가 없습니다. 다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완전히 그 주인의 소유물로서 자유는 전연 생각할 수 없는 속박된 존재 이것이 노예입니다.
노예가 되는 경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에서 패할 때에 노예가 됩니다. 옛날에는 작은 도시 국가들이 많은 전쟁을 했었는데, 이 전쟁에서 패하면 승리한 민족에게 끌려가서 그대로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패전이란 비참한 것입니다. 완전히 빼앗긴 상태이며 인간적 가치에서 볼 때에는 이미 죽은 것으로서 육체만이 하나의 짐승처럼 끌려 다닐 뿐입니다.
이 노예의 상태를 우리는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싸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의 정욕과 싸워야 하며 여러 가지 환난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되어 자유함을 얻지 못하며, 인격을 상실한 노예의 상태에 이르게 되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비참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서 이런 여러 가지 싸움에서 패함이 없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 팔리므로 노예가 됩니다. 옛날에는 노예 매매 제도가 있었으며, 팔리는 이유는 빚 때문입니다. 사업이 잘못 됐든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빚진 것만큼 가족이 팔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빚진 과거가 우리로 하여금 노예로 살도록 합니다. 죄라고 하는 빚, 허물이라고 하는 빚,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한 것들로 인하여 나는 빚진 노예가 되며 이 빚을 다 갚기까지는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래적인 노예가 있습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노예입니다. 본인에게 잘못이 있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입니다.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자신도 모르게 비굴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방탕이라고 하는 타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한 세상을 어둡게만 보는 그런 세계관 속에서 태어나서 일생 동안 세상을 삐뚤어지게 보는 비관적인 잠재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본래적이며 근본적인 타고난 노예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미신이라고 하는 것이 뿌리 박혀 있어 자기도 모르게 이 미신적인 세계관 속에 사로잡혀서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도 상당한 지성인들까지도 점을 치러 다니며, 이사를 하게 되면 날을 잡아야 되고, 결혼을 하려면 궁합을 보아야 하며, 사업을 시작하려면 돼지머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잠재 의식 속에서 정신적으로 미신적 노예 상태에 있는 본질적인 노예입니다. 이런 우상과 미신에 사로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끌려 다니는 모습이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국가적 혹은 정치적으로 부자유한 상태의 노예가 있으며, 가난에 매인 노예가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노예란 모두 비참한 것입니다. 국가가 약하면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며 경제적으로 가난하면 부득불 빵을 위하여 부유한 사람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으로 풀려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독립하여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 알게 모르게 다시 일본에 매이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못하면 결코 진정한 독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경제적인 자유인이 못되면 양심의 자유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 직장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동부 여자 기술 학교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창녀들을 데려다가 기술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기술을 배워 직장으로 나간 그들이 몇 달이 못 되어 다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옛날의 생활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가난은 사람의 자유를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도 참 자유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육체가 연약해지면 마음도 함께 약해져서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무지입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며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언젠가 대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영어를 하게 되면 거의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대만의 어느 변두리에 갔더니 상대편에서 전혀 영어를 못하여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음식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답답하여 무지라는 것이 바로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다.
헬렌켈러 여사에 대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의 어린 시절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발악하는 그 모습에서 우리의 무지의 감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라는 것도 하나의 불쌍한 노예의 모습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생각해 볼 문제는 도덕적 자유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방종, 방탕, 방임, 미움, 과욕 등 이러한 죄의 타성에 이끌려 항상 가책에 눌려 있음으로써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돈 한번 마음대로 써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인격을 바로 갖추기 전에 많은 돈을 갖게 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얻었지만 양심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주어진 경제적인 자유도 바로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도덕적 자유가 없는 자에게 주어진 경제적 자유 혹은 정치적 자유는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부유하지 못한 것과 권력을 갖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적 자유입니다. 불 신앙, 의심, 우상숭배 교만 이런 것은 사탄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나 아닌 다른 것이 나를 사로잡아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의심과 불 신앙으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마귀의 노예가 되었는데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부자유를 아는 자유마저도 빼앗긴 상태는 그가 벌써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으며 자유의 고귀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자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자유와 자유 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벌써 마귀에게 패했고, 그리고 팔려 갔으므로 이제는 본질적인 노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러 주지 않으면 영원히 자유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값을 치러 주시고 우리를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분이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6:20에서 말씀하시기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높은 값을 치루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삶을 위해서는 죽음의 값이 지불되어야 했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는 귀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자유는 내가 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저 얻은 자유는 곧 잃어버리기 쉬운 자유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자유라면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쉽게 지켜질 수가 있으나, 그저 얻은 자유는 그 가치를 알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이 자유를 지키기란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8․15해방을 그저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6․25라고 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자유의 고귀함을 미쳐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6․25의 댓가로 우리는 이제 가장 강한 반공 국가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만일 6․25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가는 아니지만 예측해 보는 대로는 아마도 월남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6․25라고 하는 큰 희생의 값을 치르므로써 자유의 고귀함을 알았고 오늘의 이만한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얻은 자유는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의 재벌 2세들이 방종 하는 것은 너무 쉽게 출세함으로써 그 가치를 미쳐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받은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얻은 것이지만 주님은 너무나 많은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5:1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면 가장 값비싼 것을 먼저 손에 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재확인하여 이 자유를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의미 없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신 자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종, 진리의 종, 말씀의 종, 그리고 본문의 말씀대로 성령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것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참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선물로 받은 로렉스 시계를 가져 본 적이 있었는데, 짧은 옷을 입은 여름에는 이 시계를 누가 채어 갈까 보아 차고 다닐 수가 없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결국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벗어버리고, 값이 싼 시계를 하나 사서 차니까 그렇게 편하고 좋은 수가 없었습니다.
옷도 너무 고급으로 입으면 부자유합니다. 우리가 옷이나 소지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감투도 자유할 수 있는 정도가 좋을 것이며 너무 크면 괴롭고 부자유스럽습니다. 지식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부자유스러운 것은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자유, 이것이 귀중한 것이며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을 미워할 자유, 죄를 지을 자유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의와 진리를 따라갈 자유 외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 자기에게는 조그만 자유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직 자기를 포로한 자를 위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안에서 포로된 자로서 자유가 없다는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진리 안에 있게 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말씀과 진리와 성령을 쫓아 행하므로 내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스스로 버리고 주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저희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된 것을 확신하며 나에게 주신 이 자유를 주님께 온전히 부탁함으로써 의를 이루게 하시고 주님을 위해 삶으로써 이 고귀한 자유를 지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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