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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자(눅 18 : 9~14)

by 【고동엽】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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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자(눅 18 : 9~14)

 

어느 땐가 한번 서양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휘황 찬란하게 장식해 놓은 굉장히 값비싼 샨데리아등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샨데리아등은 꺼져 있고 식탁마다 조그만 촛불을 하나씩 켜 놓았는데 그 촛불마저도 빨간 갓으로 씌워서 식탁 분위기를 아주 어둡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나치게 어두워서 불편할 정도여서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왜 좋은 샨데리아등은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어둡게 해 놓고 식사를 하게 하느냐니까 그 웨이터가 아주 재미있는 두 마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몇 십 년 동안 밥 먹는 연습을 했으니 아무리 어두워도 남의 입에 떠 넣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고, 둘째는 이렇게 어두컴컴한 촛불에 비춰 보면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미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얼굴에 무엇을 바르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는데 어두컴컴한 촛불에다 비추어 보면 아주 훤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밝은 햇살 아래서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어두운 불빛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조금 못 생긴 모습도 감추어질 수 있으나 밝은 햇빛 아래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묻혀 사는 사람은 자기만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자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죄가 없으며, 자기만한 의인도 없으며, 또 진실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불평을 하게 되고, 또한 자기 같은 사람에게 복을 안 주시고 엉뚱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향하여서까지 원망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평가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이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감사와 원망의 조건이 잘살고 못 사는 것과 성공과 실패 혹은 건강하고 병들고 하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작게 보는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 살아도 감사할 수 있고, 자기를 크게 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에서도 결코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평가의 기준에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감사도 원망도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작게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작게 보았고, 죄인의 괴수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이 자기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떠한 핍박을 받든지 부조리한 대우를 받아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하여 더 큰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평가 기준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기준을 정해 놓고

다른 사람이 그 기준 이하로 평가해 주면 불만스러워 하고, 또 조금 높이 보아주면 그 부족한 점이 폭로될까봐 불안해합니다.

불만이나 불안이나 어차피 모두 괴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높이 평가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평가 기준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평가에 있어서 대표적인 두 인물이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란 당시의 의인이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의 대표이며 세리는 죄인으로서 가장 멸시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세리는 가난하거나 병들어서 멸시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사회적 지위로 가장 낮고 천하게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창기와 세리와 죄인은 한 묶음으로 묶어서 죄인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그러한 사람이며, 어떤 긍휼도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원래 헬라말로 파리사이오스(pharisaios), 곧 구별한다는 뜻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구별되게 섬긴다고 하여 바리새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당의 당원이 되기는 매우 어려우며 또 당원이 되어서 그 규례를 따라 살기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몇 가지 단체가 있었습니다. 헤롯당이라고 하는 정치에 야합하는 사람들의 단체와 세대의 물결에 적당히 맞추어 가며 사는 사람들로서 요즘말로 자유파 혹은 진보파인 사두개당과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지켜 나가는 바리새당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바리새당은 가장 높이 존경을 받으며 유대의 전통적인 어려운 종교 의식을 전문적으로 이행하는 사람들로서 긴 옷을 입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구제하며 천천히 걷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지 않으며 음식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는 아주 전형적인 거룩한 생활의 표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속죄일에만 금식을 하라고 엄격히 명령을 하고 있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월요일과 목요일, 일 주일에 이틀씩 더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깨끗하고 의롭게 살며 미쉬나에서 가르치는 전통 종교 의식을 따라 살아 가는 나무랄 데 없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실제로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세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비민족주의자요, 친 로마파요, 로마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악랄한 방법으로 세금을 착취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정된 금액을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세금을 거두는 자가 마음대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 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소외당하여 세리들끼리 뭉쳐서 완전히 소외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걸하는 거지들까지도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소외당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종교 의식을 따라 사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외롭게 여기며 기도를 했습니다. 규례에 따라 흠없이 살며 인간이 이 정도라면 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세우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기도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인은 세리를 가리켜 이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감사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 기도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 앞에 서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시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니 하나님도 자기를 높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진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자기편에 서서 축복하여 주시는 것 같아서 의인인 척 하게 되고 일이 잘 되지 않거나 건강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조금 멸시를 받게 되면 하나님도 자기를 버린 것 같이 생각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이런 인간적 기준, 즉 사람으로부터 받는 평가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평가를 혼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써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며 그 사람들과 자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여 따로 서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행함을 열심히 자랑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칭 의롭게 여기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게 비교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조금 늦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들어오면 아주 반갑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하는 것이 인간적인 심리입니다. 자기보다 더 늦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제 시간에 온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다고 하여 이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모셔다 놓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진실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거짓된 모습만을 가지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무릎을 끓고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외마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원망이나 환경을 탓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받는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누가 더 진실하냐고 묻지도 않았고, 죄인 취급받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어떠하든지 누가 거짓을 말하든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죄인인 것만 고했습니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음으로써 자기의 진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기 진실을 볼 줄 아는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바리새인이 훨씬 깨끗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비록 인간으로부터는 멸시를 받으나 하나님 앞에서 가기의 진실을 볼 줄 아는 그 중심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은 교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너무 많이 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신경을 쓰다가 자기 진실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위선을 탓하고 남의 경건을 평가하기에 바빠서 자기의 경건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와 비교하여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중심 깊은 곳을 보십니다.

다섯 명의 자녀를 가진 어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의 부인이 몇 달씩 집을 나가서 도박도 하고 술을 마시며 뭇 남자들과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자고 하다가 빚을 잔뜩 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집사님이 갚아 줍니다. 또 나가서 빚을 지고 돌아옵니다. 또 갚아 줍니다.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머리를 짤라 버리면 수건을 쓰고 나가 버립니다. 그래도 돌아오면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맞아줍니다.

언젠가 그 아내가 또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시냐고 위로를 했더니, 그 집사님이 회개하기가 참으로 힘든다고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기 이전에 하루 저녁도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와 본 적이 없으며, 들어오면 아내를 때리고 괴롭혔기 때문에 이제 그 아내가 아무리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와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구속해 주셨는데 어찌 자기가 그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예수 믿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이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참회하고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또 하나의 거짓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피곤이 없습니다. 거짓된 사랑이기에 피곤이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진실을 가지고 형제와 이웃을 볼 때 존경과 함께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오직 이 회개하는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진실을 찾고 참회와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와 이웃을 보십시다. 그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시고 또한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지만 거짓이었고, 진실을 말한다고 하나 참회가 없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서 나는 죄인이라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세리와 같은 진실을 주시옵소서.

그같은 참회와 그 같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시고, 내 이웃을 사랑하며 어떤 굴욕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자기를 낮추는 자(눅 18 : 9~14)

 

어느 땐가 한번 서양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휘황 찬란하게 장식해 놓은 굉장히 값비싼 샨데리아등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샨데리아등은 꺼져 있고 식탁마다 조그만 촛불을 하나씩 켜 놓았는데 그 촛불마저도 빨간 갓으로 씌워서 식탁 분위기를 아주 어둡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나치게 어두워서 불편할 정도여서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왜 좋은 샨데리아등은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어둡게 해 놓고 식사를 하게 하느냐니까 그 웨이터가 아주 재미있는 두 마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몇 십 년 동안 밥 먹는 연습을 했으니 아무리 어두워도 남의 입에 떠 넣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고, 둘째는 이렇게 어두컴컴한 촛불에 비춰 보면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미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얼굴에 무엇을 바르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는데 어두컴컴한 촛불에다 비추어 보면 아주 훤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밝은 햇살 아래서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어두운 불빛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조금 못 생긴 모습도 감추어질 수 있으나 밝은 햇빛 아래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묻혀 사는 사람은 자기만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자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죄가 없으며, 자기만한 의인도 없으며, 또 진실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불평을 하게 되고, 또한 자기 같은 사람에게 복을 안 주시고 엉뚱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향하여서까지 원망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평가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이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감사와 원망의 조건이 잘살고 못 사는 것과 성공과 실패 혹은 건강하고 병들고 하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작게 보는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 살아도 감사할 수 있고, 자기를 크게 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에서도 결코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평가의 기준에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감사도 원망도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작게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작게 보았고, 죄인의 괴수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이 자기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떠한 핍박을 받든지 부조리한 대우를 받아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하여 더 큰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평가 기준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기준을 정해 놓고

다른 사람이 그 기준 이하로 평가해 주면 불만스러워 하고, 또 조금 높이 보아주면 그 부족한 점이 폭로될까봐 불안해합니다.

불만이나 불안이나 어차피 모두 괴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높이 평가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평가 기준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평가에 있어서 대표적인 두 인물이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란 당시의 의인이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의 대표이며 세리는 죄인으로서 가장 멸시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세리는 가난하거나 병들어서 멸시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사회적 지위로 가장 낮고 천하게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창기와 세리와 죄인은 한 묶음으로 묶어서 죄인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그러한 사람이며, 어떤 긍휼도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원래 헬라말로 파리사이오스(pharisaios), 곧 구별한다는 뜻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구별되게 섬긴다고 하여 바리새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당의 당원이 되기는 매우 어려우며 또 당원이 되어서 그 규례를 따라 살기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몇 가지 단체가 있었습니다. 헤롯당이라고 하는 정치에 야합하는 사람들의 단체와 세대의 물결에 적당히 맞추어 가며 사는 사람들로서 요즘말로 자유파 혹은 진보파인 사두개당과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지켜 나가는 바리새당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바리새당은 가장 높이 존경을 받으며 유대의 전통적인 어려운 종교 의식을 전문적으로 이행하는 사람들로서 긴 옷을 입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구제하며 천천히 걷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지 않으며 음식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는 아주 전형적인 거룩한 생활의 표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속죄일에만 금식을 하라고 엄격히 명령을 하고 있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월요일과 목요일, 일 주일에 이틀씩 더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깨끗하고 의롭게 살며 미쉬나에서 가르치는 전통 종교 의식을 따라 살아 가는 나무랄 데 없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실제로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세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비민족주의자요, 친 로마파요, 로마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악랄한 방법으로 세금을 착취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정된 금액을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세금을 거두는 자가 마음대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 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소외당하여 세리들끼리 뭉쳐서 완전히 소외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걸하는 거지들까지도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소외당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종교 의식을 따라 사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외롭게 여기며 기도를 했습니다. 규례에 따라 흠없이 살며 인간이 이 정도라면 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세우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기도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인은 세리를 가리켜 이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감사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 기도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 앞에 서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시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니 하나님도 자기를 높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진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자기편에 서서 축복하여 주시는 것 같아서 의인인 척 하게 되고 일이 잘 되지 않거나 건강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조금 멸시를 받게 되면 하나님도 자기를 버린 것 같이 생각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이런 인간적 기준, 즉 사람으로부터 받는 평가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평가를 혼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써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며 그 사람들과 자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여 따로 서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행함을 열심히 자랑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칭 의롭게 여기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게 비교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조금 늦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들어오면 아주 반갑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하는 것이 인간적인 심리입니다. 자기보다 더 늦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제 시간에 온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다고 하여 이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모셔다 놓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진실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거짓된 모습만을 가지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무릎을 끓고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외마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원망이나 환경을 탓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받는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누가 더 진실하냐고 묻지도 않았고, 죄인 취급받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어떠하든지 누가 거짓을 말하든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죄인인 것만 고했습니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음으로써 자기의 진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기 진실을 볼 줄 아는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바리새인이 훨씬 깨끗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비록 인간으로부터는 멸시를 받으나 하나님 앞에서 가기의 진실을 볼 줄 아는 그 중심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은 교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너무 많이 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신경을 쓰다가 자기 진실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위선을 탓하고 남의 경건을 평가하기에 바빠서 자기의 경건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와 비교하여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중심 깊은 곳을 보십니다.

다섯 명의 자녀를 가진 어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의 부인이 몇 달씩 집을 나가서 도박도 하고 술을 마시며 뭇 남자들과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자고 하다가 빚을 잔뜩 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집사님이 갚아 줍니다. 또 나가서 빚을 지고 돌아옵니다. 또 갚아 줍니다.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머리를 짤라 버리면 수건을 쓰고 나가 버립니다. 그래도 돌아오면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맞아줍니다.

언젠가 그 아내가 또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시냐고 위로를 했더니, 그 집사님이 회개하기가 참으로 힘든다고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기 이전에 하루 저녁도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와 본 적이 없으며, 들어오면 아내를 때리고 괴롭혔기 때문에 이제 그 아내가 아무리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와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구속해 주셨는데 어찌 자기가 그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예수 믿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이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참회하고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또 하나의 거짓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피곤이 없습니다. 거짓된 사랑이기에 피곤이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진실을 가지고 형제와 이웃을 볼 때 존경과 함께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오직 이 회개하는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진실을 찾고 참회와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와 이웃을 보십시다. 그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시고 또한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지만 거짓이었고, 진실을 말한다고 하나 참회가 없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서 나는 죄인이라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세리와 같은 진실을 주시옵소서.

그같은 참회와 그 같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시고, 내 이웃을 사랑하며 어떤 굴욕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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