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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히브리서 10 : 32~39)

by 【고동엽】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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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히브리서 10 : 32~39)

 

 

매해 시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이 날을 종교개혁 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이유는 우리의 순수한 처음 믿음이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점점 변질되어가므로 다시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서 그 신앙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서, 믿음이 관념화되어 가는 경향으로 인하여 생각은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에 능력이 없어서 실제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이제 그 믿음에 살아서 역사 하는 능력을 공급받아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며, 또한 믿음의 현실적 의미를 찾자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같은 내용의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이해하는 문화적 현상과 믿음을 따라 사는 방법은 각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방법에 있어서 현실적 입장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변하는 세대와 여러 차원의 문화적 현상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계속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마다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날을 당하여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근본 정신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며, 둘째로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며, 셋째로 만인 제사장설로서 모든 사람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위의 세 가지 내용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면, 먼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인간적인 의를 부정한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선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고 다만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개혁적 신앙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오늘 우리의 생활이나 의식 속에 혹시라도 자기의 의나 공로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을 개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둔다는 것은 교권이나 어느 인간에다 권위를 두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권위의 소재를 오직 성경에만 두고,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그 말씀에만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말로 설교를 했을지라도 성경 말씀에서 떠난 것이라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정론을 주장했던 칼빈 선생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시고 배워 왔지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이중 예정론만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선생님께 묻고 서로 토론도 하며 의심을 가졌다가 칼빈 선생님의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제라도 그 비합리적인 이중 예정론을 취소할 마음이 없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숨이 넘어 가시는 순간에 칼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Bible said so)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스스로 합리적인 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의 귀에 좋게 들리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대로는 성경이 그같이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믿고 따르거나 또는 병든 자를 고치고 이상한 능력을 나타내게 되면 그 사건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따라가는 그러한 신앙 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서 순수한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신앙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만 순종하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이 말은 인간이 중간적 입장에서 하나님께 중보의 역할 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2천 년 역사상 교황 베드로를 비롯하여 존경받을 만한 많은 성자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분들의 이름을 빌려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는 적이 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개혁 정신의 신앙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믿음만을 주장하고 행함을 부정하여 관념주의로 흐르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믿고 실제 행동은 믿음에 미치지 못하여 이원론적으로 의식을 전개하여 나아가게 되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신앙인이 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불 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적입니다.

둘째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여 무슨 다른 일로써 믿음에 보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여 자기의 선행을 믿음과 병행시키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도 믿음의 적입니다.

믿음만을 주장하는 관념주의와 자기의 선행을 믿음에다 보충하려고 하는 율법주의, 이 둘은 모두 우리 신앙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음에서 떠나면 교만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교만과 절망은 모두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에서 조금이라도 치우치면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곧 교만하여지고, 무슨 일이 조금 잘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유명한 신앙에 대한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실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휴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하는데, 이 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헬라의 한 여인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았는데 토지 문제가 잘못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번 재판에서 실패를 한 이 여인이 알렉산드리아의 고등법원에다 상소를 하기 위하여 모든 법적 증거 서류를 모아서 돌 항아리에다 넣고 뚜껑을 닫아서 자기 집의 노예를 시켜서 고등법원으로 보내었는데, 이 노예가 가다가 숙박하던 어느 여인숙에 불이 나게 되어 모두 불에 타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사건 이후 2천 년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 돌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때의 모든 문서와 함께 재판장 앞으로 보내는 한 장의 긴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 마지막 부분에 "재판장님으로 하여금 내 고소가 참된 것임을 알게 하고자 여기에 내 Hypostasis를 보내 드립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Hypostasis란 바로 증거물에 대한 확실한 신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세계관을 유출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가지고 그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계성입니다. 지나치게 미래를 지향하는 환상적 신앙에 치우쳐서 현실성을 부인하여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전연 생각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지 성서적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약속이 있으면 반드시 실현이 있고, 영원한 미래가 있는가 하면 현재적 성취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입니다.

이와 반대로 또 하나의 잘못된 신앙은 현재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오늘의 생활 속에서 실현된 소망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전부라고 믿고 그것에만 만족하는 지나친 현실주의적 신앙으로서 이것 또한 성경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성서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사십 년 동안 광야의 고생을 겪고 나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 왔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며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 땅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소망을 끈질기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 소망의 결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소망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아브라함이 얻은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했으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며 풍랑도 잔잔하게 하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을 감사하다는 것으로 그치면 예수님은 좋은 의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는 것은 신령한 눈을 뜨게 하는 상징이며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것은 죄를 씻는 표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셨지만 그 사람은 결국 또 죽었습니다. 살리셨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우리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지고 복을 받고 하는 경험은 모두 상징적 사건의 역사입니다.

실제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영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영원한 축복의 조그마한 그림자로서 문자 그대로 Hypostasis입니다. 결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생으로 세계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양적인 면과 하나는 질적인 면입니다. 생을 물량적인 면으로만 보면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에 성공했다거나 혹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질적인 면을 생각하는 사람은 돈은 많이 벌었는데 인간의 진실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여 손해보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질적인 면으로 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이 말하는 세계관으로써 세계를 보게 되므로 언제나 깊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바를 믿고 그 결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의 열매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항상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의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산업을 빼앗겼어도 더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고, 재물을 잃었어도 가장 귀한 믿음을 얻은 것을 기쁘게 여기며, 건강을 잃었어도 진실을 얻었다면 이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 곧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둘 중에 우리는 항상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보이는 물량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자와 순교자를 존경하며 의의 고난을 부러워합니다. 헛된 영광을 바라지 않고 진실한 가난을 택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보는 세계관이며 여기에는 결코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잊히지 않는 책 한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City of God)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쳐들어오는 만족에 의해 대 신성로마제국이 그대로 무너져 버릴 때 모든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어거스틴도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세워 놓은 세상 나라 인간의 의와 인간의 영광을 자랑하던 이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며 그는 이것을 신의 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교만이 무너지고 자신이 세웠던 바벨탑이 무너지는 순간에 새롭게 세워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눈입니다. 믿음은 다시 믿음으로 연결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담력과 인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피어리라고 하는 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플로리다에서 뉴욕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기 위하여 비행기를 탔는데 큰 비행기에 혼자 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종사 옆 좌석으로 가서 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며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조종사가 목사님께 구명대를 입으시라고 하니까 목사님이 벌벌 떨며 어떻게 되는 거냐구 물으셨습니다. 마침 비행기가 필라델피아 상공을 날을 때 목사님이 필라델피아에도 친척이 있고 하니까 여기에 내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사는 목사님의 목적지가 뉴욕이니까 거기로 가자고 했을 때 목사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 비행기가 무사히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내리시면서 미안한 얼굴로 조종사에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조종사가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오랜 시일에 걸쳐 여러 번 경험을 했으니까 그렇게 운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요" 라고 했을 때 목사님이 "믿음?" 하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벌벌 떨었던 것이 믿음이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라고 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도중에 우리가 여기 내리자 저기 내리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서워 떨어도 비행기는 목적지까지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믿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핸들을 잡고 운전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사랑, 더 큰 능력, 더 큰 지혜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직접 행사되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여기에 우리의 담력과 인내와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기도 아버지 하나님, 믿음 없는 저희들을 이 시간에도 불러 주셔서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이 믿음 위에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닻을 주님께로만 던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 속에서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믿음으로 사는 사람(히브리서 10 : 32~39)

 

 

매해 시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이 날을 종교개혁 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이유는 우리의 순수한 처음 믿음이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점점 변질되어가므로 다시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서 그 신앙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서, 믿음이 관념화되어 가는 경향으로 인하여 생각은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에 능력이 없어서 실제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이제 그 믿음에 살아서 역사 하는 능력을 공급받아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며, 또한 믿음의 현실적 의미를 찾자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같은 내용의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이해하는 문화적 현상과 믿음을 따라 사는 방법은 각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방법에 있어서 현실적 입장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변하는 세대와 여러 차원의 문화적 현상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계속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마다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날을 당하여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근본 정신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며, 둘째로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며, 셋째로 만인 제사장설로서 모든 사람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위의 세 가지 내용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면, 먼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인간적인 의를 부정한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선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고 다만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개혁적 신앙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오늘 우리의 생활이나 의식 속에 혹시라도 자기의 의나 공로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을 개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둔다는 것은 교권이나 어느 인간에다 권위를 두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권위의 소재를 오직 성경에만 두고,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그 말씀에만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말로 설교를 했을지라도 성경 말씀에서 떠난 것이라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정론을 주장했던 칼빈 선생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시고 배워 왔지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이중 예정론만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선생님께 묻고 서로 토론도 하며 의심을 가졌다가 칼빈 선생님의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제라도 그 비합리적인 이중 예정론을 취소할 마음이 없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숨이 넘어 가시는 순간에 칼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Bible said so)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스스로 합리적인 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의 귀에 좋게 들리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대로는 성경이 그같이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믿고 따르거나 또는 병든 자를 고치고 이상한 능력을 나타내게 되면 그 사건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따라가는 그러한 신앙 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서 순수한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신앙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만 순종하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이 말은 인간이 중간적 입장에서 하나님께 중보의 역할 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2천 년 역사상 교황 베드로를 비롯하여 존경받을 만한 많은 성자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분들의 이름을 빌려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는 적이 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개혁 정신의 신앙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믿음만을 주장하고 행함을 부정하여 관념주의로 흐르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믿고 실제 행동은 믿음에 미치지 못하여 이원론적으로 의식을 전개하여 나아가게 되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신앙인이 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불 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적입니다.

둘째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여 무슨 다른 일로써 믿음에 보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여 자기의 선행을 믿음과 병행시키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도 믿음의 적입니다.

믿음만을 주장하는 관념주의와 자기의 선행을 믿음에다 보충하려고 하는 율법주의, 이 둘은 모두 우리 신앙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음에서 떠나면 교만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교만과 절망은 모두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에서 조금이라도 치우치면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곧 교만하여지고, 무슨 일이 조금 잘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유명한 신앙에 대한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실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휴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하는데, 이 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헬라의 한 여인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았는데 토지 문제가 잘못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번 재판에서 실패를 한 이 여인이 알렉산드리아의 고등법원에다 상소를 하기 위하여 모든 법적 증거 서류를 모아서 돌 항아리에다 넣고 뚜껑을 닫아서 자기 집의 노예를 시켜서 고등법원으로 보내었는데, 이 노예가 가다가 숙박하던 어느 여인숙에 불이 나게 되어 모두 불에 타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사건 이후 2천 년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 돌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때의 모든 문서와 함께 재판장 앞으로 보내는 한 장의 긴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 마지막 부분에 "재판장님으로 하여금 내 고소가 참된 것임을 알게 하고자 여기에 내 Hypostasis를 보내 드립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Hypostasis란 바로 증거물에 대한 확실한 신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세계관을 유출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가지고 그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계성입니다. 지나치게 미래를 지향하는 환상적 신앙에 치우쳐서 현실성을 부인하여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전연 생각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지 성서적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약속이 있으면 반드시 실현이 있고, 영원한 미래가 있는가 하면 현재적 성취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입니다.

이와 반대로 또 하나의 잘못된 신앙은 현재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오늘의 생활 속에서 실현된 소망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전부라고 믿고 그것에만 만족하는 지나친 현실주의적 신앙으로서 이것 또한 성경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성서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사십 년 동안 광야의 고생을 겪고 나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 왔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며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 땅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소망을 끈질기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 소망의 결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소망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아브라함이 얻은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했으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며 풍랑도 잔잔하게 하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을 감사하다는 것으로 그치면 예수님은 좋은 의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는 것은 신령한 눈을 뜨게 하는 상징이며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것은 죄를 씻는 표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셨지만 그 사람은 결국 또 죽었습니다. 살리셨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우리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지고 복을 받고 하는 경험은 모두 상징적 사건의 역사입니다.

실제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영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영원한 축복의 조그마한 그림자로서 문자 그대로 Hypostasis입니다. 결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생으로 세계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양적인 면과 하나는 질적인 면입니다. 생을 물량적인 면으로만 보면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에 성공했다거나 혹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질적인 면을 생각하는 사람은 돈은 많이 벌었는데 인간의 진실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여 손해보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질적인 면으로 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이 말하는 세계관으로써 세계를 보게 되므로 언제나 깊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바를 믿고 그 결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의 열매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항상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의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산업을 빼앗겼어도 더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고, 재물을 잃었어도 가장 귀한 믿음을 얻은 것을 기쁘게 여기며, 건강을 잃었어도 진실을 얻었다면 이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 곧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둘 중에 우리는 항상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보이는 물량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자와 순교자를 존경하며 의의 고난을 부러워합니다. 헛된 영광을 바라지 않고 진실한 가난을 택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보는 세계관이며 여기에는 결코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잊히지 않는 책 한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City of God)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쳐들어오는 만족에 의해 대 신성로마제국이 그대로 무너져 버릴 때 모든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어거스틴도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세워 놓은 세상 나라 인간의 의와 인간의 영광을 자랑하던 이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며 그는 이것을 신의 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교만이 무너지고 자신이 세웠던 바벨탑이 무너지는 순간에 새롭게 세워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눈입니다. 믿음은 다시 믿음으로 연결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담력과 인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피어리라고 하는 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플로리다에서 뉴욕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기 위하여 비행기를 탔는데 큰 비행기에 혼자 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종사 옆 좌석으로 가서 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며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조종사가 목사님께 구명대를 입으시라고 하니까 목사님이 벌벌 떨며 어떻게 되는 거냐구 물으셨습니다. 마침 비행기가 필라델피아 상공을 날을 때 목사님이 필라델피아에도 친척이 있고 하니까 여기에 내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사는 목사님의 목적지가 뉴욕이니까 거기로 가자고 했을 때 목사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 비행기가 무사히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내리시면서 미안한 얼굴로 조종사에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조종사가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오랜 시일에 걸쳐 여러 번 경험을 했으니까 그렇게 운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요" 라고 했을 때 목사님이 "믿음?" 하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벌벌 떨었던 것이 믿음이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라고 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도중에 우리가 여기 내리자 저기 내리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서워 떨어도 비행기는 목적지까지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믿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핸들을 잡고 운전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사랑, 더 큰 능력, 더 큰 지혜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직접 행사되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여기에 우리의 담력과 인내와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기도 아버지 하나님, 믿음 없는 저희들을 이 시간에도 불러 주셔서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이 믿음 위에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닻을 주님께로만 던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 속에서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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