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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믿음(마가복음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누구보다도 믿음을 많이 강조한 개혁자입니다. 라틴말로 Sola Fide(오직 믿음)라고 하는 말을 그의 테마와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믿음을 강조했고, 이것이 바로 신교 교리의 지주가 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믿고, 어떤 이는 자기의 젊음과 건강을 믿고, 혹은 명예를, 권력을, 인적인 관계 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믿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일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에 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한 번 재점검했으면 합니다.
마틴 루터는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가정 생활, 사회 생활 등 복잡한 현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것을 상징적으로 구사를 써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릇이란 우선 비어 있어야지 가득 채워있는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 무엇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릇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깨끗하고 빈 그릇이어야 합니다. 독약이 묻었든지 오물이 묻었어도 다시 무엇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씻겨져야 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또한 큰그릇이어야 합니다. 너무 작은 종지 잔은 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큰 그릇,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스로본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크다는 말을 헬라 원문으로 '메가스피스치스'라고 합니다. 메가스는 아주 크다는 뜻으로 적어도 메가톤 급의 큰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릇이 커야만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큰 그릇, 위대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마틴 루터가 오늘 이 세대에 살아있다면 믿음을 무엇에 비유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에는 믿음이란 수신기 채널이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텔레비전, 라디오 등은 송신기가 아니고 수신기입니다. 받아들이는 기계이며 여기에는 채널이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여러 가지 전파가 오고가고 있지만 수신기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피곤하면 라디오를 켜는데 FM 방송에서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진작 라디오를 듣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어도 내 수신기의 스위치가 꺼져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신기가 있고 또 제 구실을 해야만 좋은 음악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물론 채널도 맞아야지 이것이 빗나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신기 채널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 비유해 봅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 왕이 21세에 약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일은 중첩되고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밤새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솔로몬은 준비된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내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래 살게 해달라고 장수를 구할 수도 있고, 부귀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성(成)을 구할 수도 있고, 안정을 구할 수도 있고, 이렇게 구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지혜를 구하느냐?"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알맞는 기도로서 이것은 믿음입니다.
요즘 이산가족을 찾느라고 TV에서 서로 만나고 전화를 하면서 "맞다, 맞다"라고 야단입니다. 맞아야지 안 맞으면 무효이지요. 묻는 말과 대답하는 말이 맞아야 일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데 채널이 맞지 않고 그릇이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부모와 자녀와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돈을 줄 때가 제일 기쁩니다. 자녀가 돈을 달라고 할 때 선뜻 내어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없어서 못 주고,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안 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바로 쓰기만 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못 받는 우리도 답답합니다만 못 주시는 하나님은 더 괴로울 것입니다. 주어선 안되겠기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이란 수신기의 채널로서 꼭 맞아야 합니다. 주시고자 하는 분과 받고자 하는 자의 사이에 매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소정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말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동 자체가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때에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말은 얼마나 좋은 얘기입니까? 아주 꼭 맞았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훌륭한 믿음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실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믿는 대로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어느 순간, 어느 믿음, 즉 어떤 채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믿음, 바른 믿음, 바른 관계 이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채널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디매오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그는 듣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리고 성을 나갈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밖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가시는데 그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소란한 소리 중에 예수님이 나가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때에 소리를 질렀는데 이 기회야말로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 때가 많으며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오늘 기도할 것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선한 일을 다음 번에 하자고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바디매오는 가능한 것을 총동원했습니다. 소경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이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없는 것만 생각하여 불평하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간단히 말합니다. "자네들이 내 나이 되어 보면 알 걸세."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젊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최고로 행복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면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안됩니다. 젊었다는 것 하나가 얼마나 큰 밑천인데 무엇을 불평하겠습니까? 굶고, 먹고, 출세 따위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젊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크게 행복한 것인데 과연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장남이므로 돈도 없고, 지식도 없고, 명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정도 없습니다. 이렇게 다 없으나 귀가 있고, 입이 있었습니다.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못 가진 것 원망하지 않고, 이미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하다고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은 못 해서 못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기다립니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극대화해서 최선을 다해 후회함이 없이 해 나갑니다. 굉장한 일을 하겠다고 떠벌릴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방해가 많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군중들이 꾸짖고 그가 주님 앞에 나아옴을 방해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장님도 고쳤고 문둥병도 깨끗이 낫게 하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장님 거지 한 사람이 주님께 간청할 때 왜 좀 도와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휴머니티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군중들은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유대의 왕이 되실 분이 행차하시는데 거지가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중과 제자들로부터 방해받은 바디매오는 자기를 소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행차하시는데 나 같은 것이 방해를 해서 되겠느냐고 자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실은 말릴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생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도 잠잠하라고 꾸중했을 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조그마한 핍박이 있다고 넘어지고 낙심하는 신앙은 안됩니다. 핍박이 있을수록 더 크게 소리지르고 열심히 나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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