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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따라 사는 자(로마서 14장 16절~23절)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국이 동경 땅에 발을 디디었습니다. 들은 바로는 동경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이 적국(敵國)의 장국을 뜨겁게 환영했다고 합니다. 매스컴들은 그 모습을 가리켜 이례적인 광경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 환영 군중을 향하여 유명한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 문제입니다. 도덕 문제는 종교 문제입니다. 종교 문제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하고 연설을 맺은 것입니다. 오늘에 다시 음미해 보아도 위대한 연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맥아더 장군의 면모가 절로 우러러 뵈는 연설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지적한 문제는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으며 또 거치고 있습니까? 보릿고개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잘살아 보자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경제적으로 나아지려면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술만 있으면 문제가 다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안보를 외쳤습니다. 삼팔선만 흔들리지 않으면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만 없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전쟁 같은 것도 염려할 여유가 없을 만큼 심각하고 엄청난 위기입니다. 경제도 좋고 정치도 좋지만, 양심의 문제, 도덕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오늘처럼 뼈아프게 느껴 본 때가 없는 듯합니다. 여러분,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경제 문제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요, 정치적인 수완의 문제도 아니요, 오로지 진실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엄청난 문제는 죄의식의 문제입니다. 죄의식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죄는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죄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두드러진 현상은 숫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이 증발되거나 마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태연하게 마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잘못에 대해서도 시치미를 떼고 얼굴 빛 하나 달라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써!" "양심이 있어야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면서 추상같은 마음의 법을 지니고 살았던 옛 어른들이 지켜본다면 아예 말문이 막히고 말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형무소가 무서워서 죄 못 지은 것이 아닙니다. 육법전서를 다 알아서 죄 안 짓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양심의 법은 살아 있었습니다. 죄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나마도 겨우 질서가 유지되어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류 도덕의 맥이 명맥(命脈)이라도 이어져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양심의 법이 있어서 오늘까지 이 나마의 평화라도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법도 오늘날에는 희미한 그림자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의 기준부터 모호해졌습니다. 어제의 죄수가 오늘은 영웅으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은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역적이던 것이 저쪽에서는 애국자입니다. 절대적 기준에 의한 의(義)가 어디 있고 죄는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전에 없던 말을 많이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양심수(良心囚)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분명히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양심수라고 합니다. 본인은 물론이요 아무도 그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양심수라고 하는가 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하는데도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양심수라고 하는가 봅니다.
한편으로는 온 세상 사람이 다 애국자로 우러르고 있는데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는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의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기도 하고 죄인을 하루아침에 의인 만들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염치없이 죄를 짓고도, 나는 이렇게 저렇게 의롭다 하고 억지를 부리는 얼굴 두꺼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찌 일일이 매거(枚擧)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세대는 실로 위기입니다. 기초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정신차려 읽어보면 세 가지 규범에 의한 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자기의 옳다 하는 바'---옛 어른들에게는 이것 이 있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고집 하나가 있었습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판단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집은 고집이지만 위대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이것이 없습니다. 뭐 좀 있는 듯 하다 싶으면 어느 새 정치적으로 어물쩡 타협을 해버립니다. "국민이 원하면 어쩌고……" 이렇게 되고 맙니다. 아무 것도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 그것이 없는 이토록 맥빠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이렇게도 어지럽고 불안합니다.
그리고, "서로 덕을 키우는 데 힘쓰나니(롬 14:19)"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회적인 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보아하면 옳은 것 같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옳다 하면 옳은 것입니까? 많은 사람의 뜻하는 바대로 한답시고 한번 큰 양보를 하고 나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거기에 의가 있고 거기에 선이 있는 것도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보다는 신주주의(神主主義)를 찾습니다.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니라 데오크라시(theocracy)를 추구합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장미나 가꾸면서 세월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아침에 장미밭에 나가 보니 탐스러운 장미를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꺾어 가면서 꽃밭을 어지러뜨려 놓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팻말을 하나 세웠습니다--- '꽃을 훔쳐갈 사람은 아무쪼록 가위를 가지고 와서 잘라 가시오.' 꽃을 훔칠 정도라면 적어도 꽃을 사랑한다는 마음일 텐데, 그렇다면 가위라도 가지고 와서 곱게 잘라 가는 정도의 양심(良心)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고 '꽃밭이야 어떻게 되건 내가 가지고 가는 꽃송이만 성하면 그만이야'하고 생각한다며 참으로 한심한 이기심입니다. 이런 이기심이 세상을 탁하게 만듭니다.
무서운 것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이른바 바리새적인 의가 그것입니다. 믿음을 빙자한 범죄는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독일의 나치스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6백만 유대 사람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선행(善行)의 이름으로 거짓과 권모와 술수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선을 빙자한 악, 의를 목적으로 한다면서 구사하는 기만술(欺瞞術)---언필칭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의를 운위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누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처럼 소극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저 유명한 비유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빈사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갑니다. 그들은 강도도 아니요 남의 것을 빼앗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을 하고 지나간 그 마음이 죄가 됩니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나 나의 일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이웃을 위한 것인지, 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우리는 이것을 가늠하여 죄를 가름해야 할 것입니다.
신념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믿음을 전제하고 거기서 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이제 신학적 의미에서의 윤리를 설파합니다. 본문에 유명한 명제(命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고 합니다. 모든 행위, 모든 의, 모든 선(善) 안에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고,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만 의가 의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판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라든가, 아프리카의 케냐 같은 곳에 가서 수고하는 외교관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는 북한 영사도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 외교관과 한국 외교관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는 무척 거북스러운 자리가 된다고 합니다. 서로가 동족간인데, 남의 나라 사람을 앞에 두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게 되기 일쑤이니 참 괴롭다고들 합디다. 귀동냥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우리 외교관이 아랍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 나쁘다고 했더니 아랍 사람의 말이 "그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거기는 교회도 없고 알라신도 안 믿는다.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는 곳이다." 그랬더니 아랍 사람은 "거,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면 나쁜 사람들이구먼.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 하고 말하더랍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의를 운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세계를 보고, 그리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신앙적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의심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게 되고 맙니다. 신앙이 없는 자의 선행은 빛나는 악덕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세계를 위하느니 평화를 위하느니 하는 것은 다 악덕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복,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롬 14:20)"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 믿음이 토대가 되어야만 일이 일다워집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롬 14: 1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 나름대로 한번 쉽게 풀이해 보십시다. 이것은 평화요 안정이요 번영이요 자유요 행복이요…… 그리고 무슨 말로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즉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지 먹는 것 과 마시는 것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을 초청했는데, 앞에 모셔다 놓고 온 집안과 더불어 그 앞에 절을 합니다. 경건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했더니 우쭐해하기 잘하는 베드로가 얼른 다가가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이러지들 마시오" 하고 면구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고넬료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입은 옷도 변변치 않고 출신 성분도 별 것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자기 앞에 있지만 고넬료는 경건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십시오" 하고요.
바로 이 순간이 곧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믿음을 굳게 지켜라."
여러분, 노동자도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믿음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귀한 것으로, 소중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공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의 질서나 사원들의 위계 질서도 믿음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의를 다루기 위한 아름다운 기구(機構)로 보이는 것입니다. 경영주도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노동자가 생산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입니다. 형제를 볼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보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서로를 믿음으로 소중히 존중하고, 어느 경우에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할 수 있을 때에야 새로운 질서, 참 질서가 창조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거룩한 사업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볼 것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스가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장사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끌려가면서 한다는 소리가 "나는 나치스에 항거한 일도 없어요. 나는 이쪽이고 저쪽이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왔다갔다하면서 장사나 했을 뿐이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단 말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치스에 저항하다 붙들려와서 나란히 끌려가던 사람이 한마디로 핀잔을 줍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까 죽어 마땅해! 이 같은 험난한 세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 그게 보통 죄인가, 죽어 마땅한 죄이지!"
여러분, 이 세대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역사 의식을 바로잡읍시다. 종말론적인 바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오늘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마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이 늠름한 청년을 보고 음욕(淫慾)을 품었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때를 틈타서 그 여자가 요셉을 유혹했나 봅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좀 즐기면 어떠냐고 꾀니까 요셉이 말합니다.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는 치마를 벗더니 그것을 우상(偶像)에다 덮어씌우고는, 이렇게 하면 못 보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요셉은 "저따위 우상이야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다 보십니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요셉을 지켜 준 것이 이러한 신앙입니다. 그의 양심이 지켜진 것은 이 신앙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대를 지켜 줄 하나님의 역사도 신앙 가운데에 나타납니다.
혁신도 개혁도 좋습니다. 외치는 것도 좋고 자유나 인권의 수호도 좋습니다. 민주주의도 좋고 무엇도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 해도 믿음이 없는 선행이면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을 떠나 행하는 것은 아무리 빛이 좋아도 죄악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내 생각, 내 행위를 믿음의 빛 안에서 재조명해야 됩니다. 믿음을 따라 생각하고 믿음을 따라 행할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반문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을 따라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의가 있을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앞에, 이 민족 위에 새로운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자(로마서 14장 16절~23절)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국이 동경 땅에 발을 디디었습니다. 들은 바로는 동경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이 적국(敵國)의 장국을 뜨겁게 환영했다고 합니다. 매스컴들은 그 모습을 가리켜 이례적인 광경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 환영 군중을 향하여 유명한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 문제입니다. 도덕 문제는 종교 문제입니다. 종교 문제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하고 연설을 맺은 것입니다. 오늘에 다시 음미해 보아도 위대한 연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맥아더 장군의 면모가 절로 우러러 뵈는 연설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지적한 문제는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으며 또 거치고 있습니까? 보릿고개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잘살아 보자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경제적으로 나아지려면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술만 있으면 문제가 다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안보를 외쳤습니다. 삼팔선만 흔들리지 않으면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만 없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전쟁 같은 것도 염려할 여유가 없을 만큼 심각하고 엄청난 위기입니다. 경제도 좋고 정치도 좋지만, 양심의 문제, 도덕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오늘처럼 뼈아프게 느껴 본 때가 없는 듯합니다. 여러분,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경제 문제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요, 정치적인 수완의 문제도 아니요, 오로지 진실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엄청난 문제는 죄의식의 문제입니다. 죄의식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죄는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죄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두드러진 현상은 숫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이 증발되거나 마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태연하게 마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잘못에 대해서도 시치미를 떼고 얼굴 빛 하나 달라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써!" "양심이 있어야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면서 추상같은 마음의 법을 지니고 살았던 옛 어른들이 지켜본다면 아예 말문이 막히고 말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형무소가 무서워서 죄 못 지은 것이 아닙니다. 육법전서를 다 알아서 죄 안 짓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양심의 법은 살아 있었습니다. 죄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나마도 겨우 질서가 유지되어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류 도덕의 맥이 명맥(命脈)이라도 이어져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양심의 법이 있어서 오늘까지 이 나마의 평화라도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법도 오늘날에는 희미한 그림자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의 기준부터 모호해졌습니다. 어제의 죄수가 오늘은 영웅으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은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역적이던 것이 저쪽에서는 애국자입니다. 절대적 기준에 의한 의(義)가 어디 있고 죄는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전에 없던 말을 많이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양심수(良心囚)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분명히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양심수라고 합니다. 본인은 물론이요 아무도 그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양심수라고 하는가 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하는데도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양심수라고 하는가 봅니다.
한편으로는 온 세상 사람이 다 애국자로 우러르고 있는데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는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의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기도 하고 죄인을 하루아침에 의인 만들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염치없이 죄를 짓고도, 나는 이렇게 저렇게 의롭다 하고 억지를 부리는 얼굴 두꺼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찌 일일이 매거(枚擧)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세대는 실로 위기입니다. 기초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정신차려 읽어보면 세 가지 규범에 의한 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자기의 옳다 하는 바'---옛 어른들에게는 이것 이 있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고집 하나가 있었습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판단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집은 고집이지만 위대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이것이 없습니다. 뭐 좀 있는 듯 하다 싶으면 어느 새 정치적으로 어물쩡 타협을 해버립니다. "국민이 원하면 어쩌고……" 이렇게 되고 맙니다. 아무 것도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 그것이 없는 이토록 맥빠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이렇게도 어지럽고 불안합니다.
그리고, "서로 덕을 키우는 데 힘쓰나니(롬 14:19)"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회적인 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보아하면 옳은 것 같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옳다 하면 옳은 것입니까? 많은 사람의 뜻하는 바대로 한답시고 한번 큰 양보를 하고 나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거기에 의가 있고 거기에 선이 있는 것도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보다는 신주주의(神主主義)를 찾습니다.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니라 데오크라시(theocracy)를 추구합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장미나 가꾸면서 세월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아침에 장미밭에 나가 보니 탐스러운 장미를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꺾어 가면서 꽃밭을 어지러뜨려 놓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팻말을 하나 세웠습니다--- '꽃을 훔쳐갈 사람은 아무쪼록 가위를 가지고 와서 잘라 가시오.' 꽃을 훔칠 정도라면 적어도 꽃을 사랑한다는 마음일 텐데, 그렇다면 가위라도 가지고 와서 곱게 잘라 가는 정도의 양심(良心)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고 '꽃밭이야 어떻게 되건 내가 가지고 가는 꽃송이만 성하면 그만이야'하고 생각한다며 참으로 한심한 이기심입니다. 이런 이기심이 세상을 탁하게 만듭니다.
무서운 것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이른바 바리새적인 의가 그것입니다. 믿음을 빙자한 범죄는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독일의 나치스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6백만 유대 사람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선행(善行)의 이름으로 거짓과 권모와 술수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선을 빙자한 악, 의를 목적으로 한다면서 구사하는 기만술(欺瞞術)---언필칭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의를 운위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누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처럼 소극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저 유명한 비유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빈사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갑니다. 그들은 강도도 아니요 남의 것을 빼앗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을 하고 지나간 그 마음이 죄가 됩니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나 나의 일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이웃을 위한 것인지, 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우리는 이것을 가늠하여 죄를 가름해야 할 것입니다.
신념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믿음을 전제하고 거기서 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이제 신학적 의미에서의 윤리를 설파합니다. 본문에 유명한 명제(命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고 합니다. 모든 행위, 모든 의, 모든 선(善) 안에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고,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만 의가 의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판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라든가, 아프리카의 케냐 같은 곳에 가서 수고하는 외교관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는 북한 영사도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 외교관과 한국 외교관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는 무척 거북스러운 자리가 된다고 합니다. 서로가 동족간인데, 남의 나라 사람을 앞에 두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게 되기 일쑤이니 참 괴롭다고들 합디다. 귀동냥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우리 외교관이 아랍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 나쁘다고 했더니 아랍 사람의 말이 "그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거기는 교회도 없고 알라신도 안 믿는다.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는 곳이다." 그랬더니 아랍 사람은 "거,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면 나쁜 사람들이구먼.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 하고 말하더랍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의를 운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세계를 보고, 그리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신앙적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의심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게 되고 맙니다. 신앙이 없는 자의 선행은 빛나는 악덕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세계를 위하느니 평화를 위하느니 하는 것은 다 악덕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복,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롬 14:20)"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 믿음이 토대가 되어야만 일이 일다워집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롬 14: 1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 나름대로 한번 쉽게 풀이해 보십시다. 이것은 평화요 안정이요 번영이요 자유요 행복이요…… 그리고 무슨 말로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즉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지 먹는 것 과 마시는 것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을 초청했는데, 앞에 모셔다 놓고 온 집안과 더불어 그 앞에 절을 합니다. 경건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했더니 우쭐해하기 잘하는 베드로가 얼른 다가가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이러지들 마시오" 하고 면구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고넬료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입은 옷도 변변치 않고 출신 성분도 별 것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자기 앞에 있지만 고넬료는 경건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십시오" 하고요.
바로 이 순간이 곧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믿음을 굳게 지켜라."
여러분, 노동자도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믿음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귀한 것으로, 소중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공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의 질서나 사원들의 위계 질서도 믿음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의를 다루기 위한 아름다운 기구(機構)로 보이는 것입니다. 경영주도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노동자가 생산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입니다. 형제를 볼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보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서로를 믿음으로 소중히 존중하고, 어느 경우에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할 수 있을 때에야 새로운 질서, 참 질서가 창조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거룩한 사업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볼 것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스가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장사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끌려가면서 한다는 소리가 "나는 나치스에 항거한 일도 없어요. 나는 이쪽이고 저쪽이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왔다갔다하면서 장사나 했을 뿐이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단 말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치스에 저항하다 붙들려와서 나란히 끌려가던 사람이 한마디로 핀잔을 줍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까 죽어 마땅해! 이 같은 험난한 세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 그게 보통 죄인가, 죽어 마땅한 죄이지!"
여러분, 이 세대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역사 의식을 바로잡읍시다. 종말론적인 바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오늘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마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이 늠름한 청년을 보고 음욕(淫慾)을 품었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때를 틈타서 그 여자가 요셉을 유혹했나 봅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좀 즐기면 어떠냐고 꾀니까 요셉이 말합니다.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는 치마를 벗더니 그것을 우상(偶像)에다 덮어씌우고는, 이렇게 하면 못 보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요셉은 "저따위 우상이야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다 보십니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요셉을 지켜 준 것이 이러한 신앙입니다. 그의 양심이 지켜진 것은 이 신앙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대를 지켜 줄 하나님의 역사도 신앙 가운데에 나타납니다.
혁신도 개혁도 좋습니다. 외치는 것도 좋고 자유나 인권의 수호도 좋습니다. 민주주의도 좋고 무엇도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 해도 믿음이 없는 선행이면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을 떠나 행하는 것은 아무리 빛이 좋아도 죄악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내 생각, 내 행위를 믿음의 빛 안에서 재조명해야 됩니다. 믿음을 따라 생각하고 믿음을 따라 행할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반문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을 따라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의가 있을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앞에, 이 민족 위에 새로운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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