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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장 20절~25절)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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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장 20절~25절)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난생처음 타 볼 때처럼 새삼새삼 신기해하곤 합니다. 사람이 5백 명이나 타고 있는 그 육중한 몸체가 허허로운 공중에 치솟아오르는 것도 희한하고, 장장 열 몇 시간이나 논스톱으로 날으는 것도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겠어요. 더욱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면, 그 빗속을 뚫고 올라가 금새 구름 위에 있는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붓는데, 거기는 고요합니다. 내려다보면 솜을 깔아놓은 듯 부드럽고 하얀 구름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 이대로 하늘나라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컴퓨터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그것을 이용할 때마다 마치 속임수를 당하는 것만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공부했던 미국의 학교에 가서 성적표를 뗀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로 성적표를 떼는데, 이름자를 대고 스위치 하나를 누르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종이 한 장이 달랑 빠져 나옵니다. 이런 신기할 데가 있습니까?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졸업생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내 성적표가 금방 가려져서 이렇게 순식간에 나올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비행기나 컴퓨터까지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만 해도 보통 신기한 것입니까?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어떻고요. 저는 가끔 음악을 듣는다고 전축을 틉니다. 보일듯 말듯 작은 바늘이 판 위를 긁고 나가는데 그토록 훌륭한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늘 지니고 늘 들으면서도 새삼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한백 년 전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에게 비행기니 컴퓨터니 라디오, 텔레비전, 전축, 전화 같은 것에 대하여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고 입이 닳도록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실성한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지요.

여러분은 기적이 있다고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기적은 정말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습니다. 옛날에는 조금 회의가 가더라도 성경이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전적으로 믿습니다. 사람들도 재주가 좋아서 희한한 물건들을 다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오늘까지 왔고, 또 얼마나 더 발전할는지 모르는데, 하물며 천지를 지어내신 하나님의 역사에 무슨 기적인들 대수입니까? 그래서 저는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믿습니다.

점 하나도 가감함이 없이 그대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마지못해 믿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다고 믿어집니다. 응당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기적의 뜻을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거나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 또는 '신의 능력에 의하여 일어나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 국어사전의 풀이를 좀 고쳤으면 합니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현재 못 하는 일은 다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10년 뒤에 생각해 보면 기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몰라서 기적이지 사실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로서는 깨닫지 못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 내 능력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한계 밖의 일을 생각할 때에 흔히 기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기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는 "기적은 사도들의 시대에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멍청한 소리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만이 아니라 그 전에도 기적이 있었고 오늘도 기적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믿겨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도 언젠가는 응당 그러한 것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그렇게 고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좀 간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좀 고약해서, 이 기적에 대한 신앙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깎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곡해 보려는 심술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양이면 전적으로 믿든지 아예 그만두든지 할 일이지, 어떻게든 조금씩 조금씩 용훼를 하려 하고 건드려 보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수천 명을 먹인 기적을 두고 액면대로, 하나님이 역사 하셨으니까 그럴 것이라고 믿어 두면 되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어린아이도 점심을 싸 왔는데 어른들은 왜 맨손으로 왔겠나? 어린아이가 예수님 잡수시라고 내놓으니까 너도나도 내놓아서 넘은 거겠지 뭐" 하고 삐딱하게 나온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도 그대로 믿어 두지를 못하고 이걸 또 건드립니다. "지금은 홍해바다이지만 그 옛날 삼천 년 전에는 거기가 갈대밭이었다고 하는구먼. 그래서 그냥 저벅저벅 걸어 건널 수 있었다고 하더군." 이렇게 생각을 하느라고 자신도 고생이고 남도 고생입니다.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해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여러분,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보면 나중에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될 때에는 회개하느라고 진땀을 빼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공연히 부정하고, 기다 아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필경은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공연히 비뚜루 나가는 것은 사단의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성경의 말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믿음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혹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마는 무엇이건 꼭 손으로 만져 봐야 믿는 야만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서양 선교사가 이런 야만인들에게 선교하려 갔는데, 눈이 파랗고 낯빛이 희니까 다가와 눈을 자꾸 쑤시더랍니다. "이게 정말 눈인가? 무엇이 보일까?" 하고 갸우뚱거리면서요. 그러나 소위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 믿습니다. 손으로 만져 볼 것까지는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인이라면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듣기만 하고 믿은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니까 듣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돈을 많이 들여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가서 이것저것 눈으로 본 다음에 믿겠다고 합디다마는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이천 년 전 이야기를 두고 지금에 가서 본들 뭐가 보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듣고 믿습니다. 신앙으로 보고 신앙으로 알고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기적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가령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든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든가 하는 말씀 같은 것은 좋은데, 병자를 고친다느니 죽은 자가 산다느니,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못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끝까지가 전부 기적입니다. 성경에 기적이 아닌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기적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시고, 기적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기적을 믿으라고 성경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을 받아들이라고 줄기차게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기적이란 하나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가름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이 세 낱말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적(異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말로 '테라스' 곧 '놀랍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wonder' 즉 놀랄만한 일을 가리킵니다. 또 '두나미스' 곧 능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곧 권능이 이 사건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가장 격이 높은 해석이 '표적(表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서 귀중한 것을 말씀하신다고 해석해서 표적 곧 '세메이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대할 때에 그 기적 자체보다는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님을 눈뜨게 하셨다고 할 때에 눈뜬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습니다.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냐-----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능력의 뿌리(근원)로 돌아가서 바로 그 능력을 행하시는 자의 존재를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역사,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사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지, 그 미래지향적인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멈추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경륜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시며,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수관하고 계시는가?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워낙 미련하고 보니, 대체로 과거의 기적은 믿는 편인데 현재의 기적은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은 믿으면서 오늘의 내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기적은 믿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미래에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기적 같은 역사가 이 민족 위에 나타나 주시고 기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아들을 놓고도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야말로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시험 날에는 모르는 것도 알게 해 주셔서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기적적인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고 소원했으면서 막상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기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대표 격입니다. 하나님께서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25년이 가도록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만 지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이듬해 이맘때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천막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사라는 픽 웃었습니다. 묘한 웃음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도 참, 사람 웃기시네' 하고 웃는 것 같은 웃음입니다. '내가 단산(斷産)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지금 이 나이에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하고 어이없어하는 웃음입니다. 이 때에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네 아내가 왜 웃느냐?" 아브라함은 더럭 겁이 나서 "아, 안 웃었습니다." 하고 당황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참 자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웃었느니라." 만일에 천사가 그 웃음을 괘씸하다 여기고 "너 왜 믿지 않고 비웃느냐? 아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취소다!" 하고 나왔다면 다 틀려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사람이란 워낙 부족한 존재이니 웃을 수도 있는 일이지'이렇게 잘 봐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좌우간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제야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고 크게 복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란 마치 무지개 따라가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무한히 미래지향적으로 환상으로만 그릴 뿐, 믿음의 현실성, 기적의 현재성에 대해서는 불신을 하기 쉽습니다. 이런 신앙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란 흔히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기적은 곧잘 믿습니다. 누가 병 고침 받았다느니, 누구에게 성령이 어떻게 임하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잘도 믿으면서 자신에게 나타나는 일은 믿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가지 기적을 통해서 일만 가지 기적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크게 지적하신 때가 있습니다.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있은 후 디베랴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데, 배 안에 빵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다고 시비가 붙습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그 사람들을 훈계하십니다.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 먹이고 얼마나 남았더냐?" "열두 바구니입니다." 대답은 곧잘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예수님께서 질책을 하십니다. "그래, 5천 명 먹이는 기적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거늘 어찌해서 빵이 없다고 걱정들이야, 이 답답한 사람들아! 어제 기 적이 있었으면 오늘도 있을 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리도 믿음이 없단 말이냐!" 그러나 풍랑이라도 조금 일어나면 또다시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았으면 이제는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이야기로 돌려버리고,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이야기로 뚝 떼어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성경에 허다히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고는 "주께서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답답한 소리입니다. 살리실 것이면 거기 계시지 않아도 살리실 것이요, 죽었다 해도 살리실 것인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았으면 다른 기적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어딘가에서 기적을 보았으면 이 자리에도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도 남에게도 기적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지금 배에 타고 계십니다. 고물에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풍랑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불평합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보십니까?" 하고 법석을 떱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배 위에 계시는 이상 풍랑이 일어났다면 일어나야 되겠기에 일어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함께 한다면, 나사로가 죽 은 것은 죽어야 좋기 때문에 죽은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고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에게서 능력이 떠나버려서가 아니요, 그 자체가 곧 능력임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라고 하는 엄청난 기적이 십자가 죽음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불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문제가 많은 것이며, 그래서 이 아우성들입니다.

1941년 어느 날, 발명왕 에디슨이 66세 되던 해의 일입니다. 그가 오랜 세월 몸담고 연구해 오던 연구실이 화재를 만나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연구 업적들도 고스란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두들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가슴이 아파 말문이 막힌 아내에게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이 잿더미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숴 있어요. 나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깨끗이 불태워 버리고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이 잘 되는 것만 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이 안 되는 것도 기적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고목에서 꽃이 피는 것도 기적이지만 멀쩡한 나무가 말라죽는 것도 기적입니다.

완벽하고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실패가 옵니다. 틀림없는 일인데 어긋납니다. 여기에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해서 심판을 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 하실 때에 당장에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적은 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에도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에 기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내일도 기적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기적으로 나를 구속하셨고,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과 내일, 이 귀한 사람과 이 능력이 또 다른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대로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기적이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어떤 유명한 사업가가, 자기는 기도하고 사업을 하기 때문에 사업에 관한 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망한다면 망하는 대로, 그것이 주의 뜻이요 축복인 줄 알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것만 기적인 줄로 알기 쉽습니다마는, 영(靈)이 구원받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은 신천 장터의 이름난 깡패였습니다. 그런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목사 되고 부흥사 되고, 그리고 신천서북교회에 시무 하시면서 많은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굉장하다고 찬탄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은 "뭐니뭐니해도 진짜 기적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가는 것만큼 큰 기적이 어디 있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 이것이 최고의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기적을 믿는 사람은 기적을 깨달을 때마다 감사합니다. 기적을 믿지 않던 사람은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장 20절~25절)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난생처음 타 볼 때처럼 새삼새삼 신기해하곤 합니다. 사람이 5백 명이나 타고 있는 그 육중한 몸체가 허허로운 공중에 치솟아오르는 것도 희한하고, 장장 열 몇 시간이나 논스톱으로 날으는 것도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겠어요. 더욱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면, 그 빗속을 뚫고 올라가 금새 구름 위에 있는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붓는데, 거기는 고요합니다. 내려다보면 솜을 깔아놓은 듯 부드럽고 하얀 구름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 이대로 하늘나라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컴퓨터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그것을 이용할 때마다 마치 속임수를 당하는 것만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공부했던 미국의 학교에 가서 성적표를 뗀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로 성적표를 떼는데, 이름자를 대고 스위치 하나를 누르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종이 한 장이 달랑 빠져 나옵니다. 이런 신기할 데가 있습니까?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졸업생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내 성적표가 금방 가려져서 이렇게 순식간에 나올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비행기나 컴퓨터까지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만 해도 보통 신기한 것입니까?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어떻고요. 저는 가끔 음악을 듣는다고 전축을 틉니다. 보일듯 말듯 작은 바늘이 판 위를 긁고 나가는데 그토록 훌륭한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늘 지니고 늘 들으면서도 새삼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한백 년 전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에게 비행기니 컴퓨터니 라디오, 텔레비전, 전축, 전화 같은 것에 대하여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고 입이 닳도록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실성한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지요.

여러분은 기적이 있다고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기적은 정말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습니다. 옛날에는 조금 회의가 가더라도 성경이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전적으로 믿습니다. 사람들도 재주가 좋아서 희한한 물건들을 다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오늘까지 왔고, 또 얼마나 더 발전할는지 모르는데, 하물며 천지를 지어내신 하나님의 역사에 무슨 기적인들 대수입니까? 그래서 저는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믿습니다.

점 하나도 가감함이 없이 그대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마지못해 믿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다고 믿어집니다. 응당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기적의 뜻을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거나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 또는 '신의 능력에 의하여 일어나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 국어사전의 풀이를 좀 고쳤으면 합니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현재 못 하는 일은 다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10년 뒤에 생각해 보면 기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몰라서 기적이지 사실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로서는 깨닫지 못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 내 능력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한계 밖의 일을 생각할 때에 흔히 기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기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는 "기적은 사도들의 시대에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멍청한 소리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만이 아니라 그 전에도 기적이 있었고 오늘도 기적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믿겨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도 언젠가는 응당 그러한 것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그렇게 고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좀 간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좀 고약해서, 이 기적에 대한 신앙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깎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곡해 보려는 심술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양이면 전적으로 믿든지 아예 그만두든지 할 일이지, 어떻게든 조금씩 조금씩 용훼를 하려 하고 건드려 보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수천 명을 먹인 기적을 두고 액면대로, 하나님이 역사 하셨으니까 그럴 것이라고 믿어 두면 되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어린아이도 점심을 싸 왔는데 어른들은 왜 맨손으로 왔겠나? 어린아이가 예수님 잡수시라고 내놓으니까 너도나도 내놓아서 넘은 거겠지 뭐" 하고 삐딱하게 나온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도 그대로 믿어 두지를 못하고 이걸 또 건드립니다. "지금은 홍해바다이지만 그 옛날 삼천 년 전에는 거기가 갈대밭이었다고 하는구먼. 그래서 그냥 저벅저벅 걸어 건널 수 있었다고 하더군." 이렇게 생각을 하느라고 자신도 고생이고 남도 고생입니다.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해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여러분,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보면 나중에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될 때에는 회개하느라고 진땀을 빼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공연히 부정하고, 기다 아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필경은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공연히 비뚜루 나가는 것은 사단의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성경의 말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믿음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혹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마는 무엇이건 꼭 손으로 만져 봐야 믿는 야만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서양 선교사가 이런 야만인들에게 선교하려 갔는데, 눈이 파랗고 낯빛이 희니까 다가와 눈을 자꾸 쑤시더랍니다. "이게 정말 눈인가? 무엇이 보일까?" 하고 갸우뚱거리면서요. 그러나 소위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 믿습니다. 손으로 만져 볼 것까지는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인이라면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듣기만 하고 믿은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니까 듣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돈을 많이 들여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가서 이것저것 눈으로 본 다음에 믿겠다고 합디다마는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이천 년 전 이야기를 두고 지금에 가서 본들 뭐가 보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듣고 믿습니다. 신앙으로 보고 신앙으로 알고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기적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가령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든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든가 하는 말씀 같은 것은 좋은데, 병자를 고친다느니 죽은 자가 산다느니,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못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끝까지가 전부 기적입니다. 성경에 기적이 아닌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기적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시고, 기적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기적을 믿으라고 성경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을 받아들이라고 줄기차게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기적이란 하나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가름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이 세 낱말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적(異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말로 '테라스' 곧 '놀랍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wonder' 즉 놀랄만한 일을 가리킵니다. 또 '두나미스' 곧 능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곧 권능이 이 사건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가장 격이 높은 해석이 '표적(表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서 귀중한 것을 말씀하신다고 해석해서 표적 곧 '세메이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대할 때에 그 기적 자체보다는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님을 눈뜨게 하셨다고 할 때에 눈뜬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습니다.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냐-----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능력의 뿌리(근원)로 돌아가서 바로 그 능력을 행하시는 자의 존재를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역사,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사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지, 그 미래지향적인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멈추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경륜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시며,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수관하고 계시는가?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워낙 미련하고 보니, 대체로 과거의 기적은 믿는 편인데 현재의 기적은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은 믿으면서 오늘의 내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기적은 믿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미래에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기적 같은 역사가 이 민족 위에 나타나 주시고 기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아들을 놓고도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야말로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시험 날에는 모르는 것도 알게 해 주셔서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기적적인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고 소원했으면서 막상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기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대표 격입니다. 하나님께서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25년이 가도록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만 지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이듬해 이맘때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천막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사라는 픽 웃었습니다. 묘한 웃음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도 참, 사람 웃기시네' 하고 웃는 것 같은 웃음입니다. '내가 단산(斷産)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지금 이 나이에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하고 어이없어하는 웃음입니다. 이 때에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네 아내가 왜 웃느냐?" 아브라함은 더럭 겁이 나서 "아, 안 웃었습니다." 하고 당황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참 자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웃었느니라." 만일에 천사가 그 웃음을 괘씸하다 여기고 "너 왜 믿지 않고 비웃느냐? 아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취소다!" 하고 나왔다면 다 틀려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사람이란 워낙 부족한 존재이니 웃을 수도 있는 일이지'이렇게 잘 봐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좌우간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제야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고 크게 복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란 마치 무지개 따라가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무한히 미래지향적으로 환상으로만 그릴 뿐, 믿음의 현실성, 기적의 현재성에 대해서는 불신을 하기 쉽습니다. 이런 신앙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란 흔히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기적은 곧잘 믿습니다. 누가 병 고침 받았다느니, 누구에게 성령이 어떻게 임하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잘도 믿으면서 자신에게 나타나는 일은 믿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가지 기적을 통해서 일만 가지 기적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크게 지적하신 때가 있습니다.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있은 후 디베랴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데, 배 안에 빵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다고 시비가 붙습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그 사람들을 훈계하십니다.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 먹이고 얼마나 남았더냐?" "열두 바구니입니다." 대답은 곧잘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예수님께서 질책을 하십니다. "그래, 5천 명 먹이는 기적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거늘 어찌해서 빵이 없다고 걱정들이야, 이 답답한 사람들아! 어제 기 적이 있었으면 오늘도 있을 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리도 믿음이 없단 말이냐!" 그러나 풍랑이라도 조금 일어나면 또다시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았으면 이제는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이야기로 돌려버리고,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이야기로 뚝 떼어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성경에 허다히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고는 "주께서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답답한 소리입니다. 살리실 것이면 거기 계시지 않아도 살리실 것이요, 죽었다 해도 살리실 것인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았으면 다른 기적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어딘가에서 기적을 보았으면 이 자리에도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도 남에게도 기적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지금 배에 타고 계십니다. 고물에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풍랑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불평합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보십니까?" 하고 법석을 떱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배 위에 계시는 이상 풍랑이 일어났다면 일어나야 되겠기에 일어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함께 한다면, 나사로가 죽 은 것은 죽어야 좋기 때문에 죽은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고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에게서 능력이 떠나버려서가 아니요, 그 자체가 곧 능력임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라고 하는 엄청난 기적이 십자가 죽음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불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문제가 많은 것이며, 그래서 이 아우성들입니다.

1941년 어느 날, 발명왕 에디슨이 66세 되던 해의 일입니다. 그가 오랜 세월 몸담고 연구해 오던 연구실이 화재를 만나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연구 업적들도 고스란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두들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가슴이 아파 말문이 막힌 아내에게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이 잿더미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숴 있어요. 나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깨끗이 불태워 버리고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이 잘 되는 것만 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이 안 되는 것도 기적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고목에서 꽃이 피는 것도 기적이지만 멀쩡한 나무가 말라죽는 것도 기적입니다.

완벽하고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실패가 옵니다. 틀림없는 일인데 어긋납니다. 여기에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해서 심판을 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 하실 때에 당장에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적은 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에도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에 기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내일도 기적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기적으로 나를 구속하셨고,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과 내일, 이 귀한 사람과 이 능력이 또 다른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대로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기적이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어떤 유명한 사업가가, 자기는 기도하고 사업을 하기 때문에 사업에 관한 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망한다면 망하는 대로, 그것이 주의 뜻이요 축복인 줄 알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것만 기적인 줄로 알기 쉽습니다마는, 영(靈)이 구원받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은 신천 장터의 이름난 깡패였습니다. 그런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목사 되고 부흥사 되고, 그리고 신천서북교회에 시무 하시면서 많은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굉장하다고 찬탄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은 "뭐니뭐니해도 진짜 기적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가는 것만큼 큰 기적이 어디 있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 이것이 최고의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기적을 믿는 사람은 기적을 깨달을 때마다 감사합니다. 기적을 믿지 않던 사람은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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