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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냐 사단이냐(마태복음 16장 21절~28절)

by 【고동엽】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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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냐 사단이냐(마태복음 16장 21절~28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경험을 많이 쌓는다 해도 역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합니다마는 정작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평생을 두고 느낍니다. 정치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혹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좀 아는 것 같아 보입니다마는 자기 자신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소홀히 하고, 너무나 자기성찰(自己省察)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진실이라고 봅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실존적인 물음에 답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자기를 믿는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이든지 간에 오늘까지 살아오는 중에 뼈아프게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전혀 믿을 것이 못 되는데도 이것을 믿으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라스베가스라는 데가 도박장이 아닙니까? 그 안에 들어서자 같이 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주머니를 털더니 지니고 있는 돈을 모조리 부인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들은 그 돈을 다 모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맡깁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돈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으면 필경은 다 날려 버리고 만다는 대답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100불만 가지고 하루저녁을 즐기겠다고 철석같이 마음먹지만 그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은 가진 돈을 다 써 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나는 못 믿어도 아내는 믿습니다" 부인들에게 맡기고 부인들은 또 "우리는 못 믿어도 목사님은 믿습니다" 하고 저에게 맡긴 것입니다. 별수없이 맡아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시간이 흐르자 "목사님, 조금만 꿔 주시죠" 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집디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믿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의 지식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못 믿을 자기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웃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때에는 교만하고 어떤 때에는 절망하고 비굴해집니다. 이것이 말이나 됩니까?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토록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애초부터 믿지 못할 존재인데, 어떻게 거기에 기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대표적인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큰 사람입니다 마는 주책이 없다 할 정도로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닮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베드로에게 투사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首弟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라고 하는 귀중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헬라말로 '페트로스'인데, 반석․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 베드로 석상이 있습니다. 동상도 많고 그림도 많지요. 저는 베드로를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그런 석상이나 동상이나 그림만 보고도 베드로를 잘 알아봅니다. 손에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요. 어디에를 가보나 손에 열쇠 쥐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큰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말씀의 검을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나타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그와 같이 엄청난 칭찬을 듣고보니 베드로는 자못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무참하게 허물어지는 것을 그는 느껴야 했습니다.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주님한테서 큰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베드로'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단'이라 하십니다.

왜 사단이 있느냐?----많은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단을 만드셨는지, 어째서 사단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여기서는 구구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단이 왜 있어야 하는 지를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사단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사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시험에 들기 때문에 문제이지,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이 제아무리 많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유혹이 아무리 많고 드센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야 유혹은 있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누구에게라도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사단의 유혹이 있었다면 두말할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광야 40일 동안에 그토록 엄청난 시험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들 사람에게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마귀는 네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네 가지 방법인즉 첫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니까 너도 죄지어라. 너만 죄인이냐, 다 죄인인데" 하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정도의 짓이야 뭐 어떠냐, 별 것 아니다" 하고 약간의 죄는 괜찮다고 유혹을 합니다. 셋째는, "한번만 죄를 지어라" 즉 속된 말로 '한탕'만 하라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이 '한탕' 때문에 교도소에 갑니다. 넷째는, "아직도 날은 많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다음에 기회를 보아서 회개를 하면 그만 아니냐!" 하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무섭고 간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깨닫고 제자들을 깨우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에덴 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까지, 골고다까지, 그리고 저 성자(聖者)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속세에 사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유혹은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성전 안에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시간에도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건 속에도 사단은 역사합니다. 사단이 유혹을 하는 데는 성역(聖域)이 없습니다. 사단은 어디에나 뛰어들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 합니다. 많은 제자 가운데 하필이면 왜 베드로에게 역사 합니까? 가룟 유다가 아니고 이 순간에는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관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라면 시험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극히 좋아하는 것,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바로 그것에 시험의 여지가 있고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 하는 경고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네 어른들도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마(魔)가 끼어들기 쉽다는 말이 아닙니까? 교회도 부흥될 때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바로 살아보고자 뜨겁게 믿으려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여 큰 일을 해 보고자 마음먹고 출발을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칭찬을 받을 때, 내가 성공을 했 을 때, 내가 영광을 누릴 때, 바로 그런 순간에 사단의 무서운 시험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대로, 사단은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걸림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또 하나는, 사단은 나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숙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알고보면 결국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어려운 일 있으면 노기(怒氣)가 나서 말썽이 많습니다. 사실은 칭찬들으려고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했다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한들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 일이라면 아무런 잡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자기를 위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만 생각하고 장차에 올 영광은 생각지 못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은 이런 경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할 때에 사단의 유혹에 빠진다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 라의 복부제라고 하는 사람이 신부라고 하는 마을에 원님으로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제(齊)나라 군사가 이 마을에 쳐들어왔습니다.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저 아까운 곡식을 전부 원수한테 뺏기게 되었구나" 하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아무나 빨리 거둬 오는 게 좋겠다." 그러나 원님은 말렸습니다. "안 된다. 불을 질러라" 하고 원님은 말했습니다. "전쟁 때이건 평화 시절이건 간에 백성에게 남의 것 공짜로 가지는 버릇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이것을 고치는 데는 10년으로도 어렵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경우에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느니, 저런 경우에는 남을 속여도 괜찮다느니 하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환경에 따라서는 남의 것을 가져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 따로 있습니까? 불한당이란 문자 그대로 땀「汗」흘리지 않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요즈음 보면 이른바 '복부인'이니 뭐니 하는 투기꾼들이 늘 말썽이 되고 있어요. 자나깨나 생각한다는 것이 "어디에다 땅을 사면 돈을 벌꼬?" "어디에다 터를 사면 한밑천 잡을꼬?" 하고 눈이 벌개 가지고 설칩니다. 전부 강도의 마음입니다. 강도가 따로 있습니까? 공짜로 바라니까 강도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피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내게도 이롭지 않고 가정이나 자손에게도 해롭습니다.

절대로 공짜 바라지 마십시오. 나라 망치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눈이 벌개서 제 욕심만 채우려 덤비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은 급한 마음에 집을 팔고 땅을 팔았다가 금새 값이 오르는 걸보고 가슴아파하는데, 누구는 그걸 사들여 떼돈 벌었다고 희희낙락하니, 세상에 이런 마음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남긴 돈을 절반이라도 나누어 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런 불한당의 마음이 생겨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땀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먹지 않고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 돈은 절대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라스베가스에서 본 일을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1달러 짜리 동전 하나를 도박 기계에 집어 놓고는 "주여!" 하고 소리지르면서 돌렸습니다. 돈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예배당 지을 밑천을 따려고 그랬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그따위 돈으로 지을 것입니까? 여러분,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면 영락없이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베드로의 그 고백 속에 사단의 시험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짓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단의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자각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내 명예만 위하는 그런 마음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돼서 그렇게 만류를 하고 나섰는지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적(異 蹟)능력을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빌라도나 헤롯 왕이나 가야바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십자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내 충성이 있지 않습니까? 만에 일이라도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면 제가 지지, 주님께서 지시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하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나라를 회복하는 때가 아닙니까?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질 판국인데, 오직 보좌에 앉으실 생각이나 하셔야지요."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성경,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메시야의 나라는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업의 성공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가진 메시야관(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뜻을 찾아내게 됩니다.

조금 성서학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붙들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붙든다는 말은 헬라말로 '프로스라보메노스'인데, 라보메노스만으로도 붙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가로막아 서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만류하는 것이 됩니다. 또, "간하여 가로되"라고 하는 데 이때 쓰인 헬라어 '에피티만'의 뜻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영어로는 'rebuke'라고 하지요. 이 '에피티만'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었다는 구절에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강한 표현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로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고 거의 강압적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는데, 오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고 있습니다. 큰일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정치적인 욕구 따위에만 얽매여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얼마나 소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덮어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언제나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서도 딴생각만 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엉뚱하게도 예수님을 꾸짖다가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이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고 있는 말을 단순히 베드로의 이야기로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개인의 실수라고 보시지도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이 거룩한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시는 십자가인데, 베드로는 하는 수없이 지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실수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나를 유혹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시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남을 유혹하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합니다. 내가 사단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도 그래서 실수를 합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 되어 지금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남을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타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 열쇠를 가진 자가 천국 열쇠는 고사하고 남이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마저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방해하고 비판하고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는데, 원문의 뜻을 보면 '내 인도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는 수종자(隨從者)가 되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앞질러 가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하나님의 뜻마저 제멋대로 해석하여 원망할 생각 말고 뒤로 물러가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울 반석이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책망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자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 3천 군중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똑바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요,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해서 지시는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벗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냐 사단이냐(마태복음 16장 21절~28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경험을 많이 쌓는다 해도 역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합니다마는 정작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평생을 두고 느낍니다. 정치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혹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좀 아는 것 같아 보입니다마는 자기 자신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소홀히 하고, 너무나 자기성찰(自己省察)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진실이라고 봅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실존적인 물음에 답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자기를 믿는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이든지 간에 오늘까지 살아오는 중에 뼈아프게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전혀 믿을 것이 못 되는데도 이것을 믿으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라스베가스라는 데가 도박장이 아닙니까? 그 안에 들어서자 같이 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주머니를 털더니 지니고 있는 돈을 모조리 부인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들은 그 돈을 다 모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맡깁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돈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으면 필경은 다 날려 버리고 만다는 대답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100불만 가지고 하루저녁을 즐기겠다고 철석같이 마음먹지만 그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은 가진 돈을 다 써 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나는 못 믿어도 아내는 믿습니다" 부인들에게 맡기고 부인들은 또 "우리는 못 믿어도 목사님은 믿습니다" 하고 저에게 맡긴 것입니다. 별수없이 맡아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시간이 흐르자 "목사님, 조금만 꿔 주시죠" 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집디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믿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의 지식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못 믿을 자기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웃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때에는 교만하고 어떤 때에는 절망하고 비굴해집니다. 이것이 말이나 됩니까?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토록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애초부터 믿지 못할 존재인데, 어떻게 거기에 기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대표적인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큰 사람입니다 마는 주책이 없다 할 정도로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닮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베드로에게 투사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首弟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라고 하는 귀중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헬라말로 '페트로스'인데, 반석․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 베드로 석상이 있습니다. 동상도 많고 그림도 많지요. 저는 베드로를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그런 석상이나 동상이나 그림만 보고도 베드로를 잘 알아봅니다. 손에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요. 어디에를 가보나 손에 열쇠 쥐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큰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말씀의 검을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나타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그와 같이 엄청난 칭찬을 듣고보니 베드로는 자못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무참하게 허물어지는 것을 그는 느껴야 했습니다.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주님한테서 큰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베드로'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단'이라 하십니다.

왜 사단이 있느냐?----많은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단을 만드셨는지, 어째서 사단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여기서는 구구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단이 왜 있어야 하는 지를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사단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사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시험에 들기 때문에 문제이지,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이 제아무리 많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유혹이 아무리 많고 드센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야 유혹은 있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누구에게라도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사단의 유혹이 있었다면 두말할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광야 40일 동안에 그토록 엄청난 시험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들 사람에게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마귀는 네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네 가지 방법인즉 첫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니까 너도 죄지어라. 너만 죄인이냐, 다 죄인인데" 하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정도의 짓이야 뭐 어떠냐, 별 것 아니다" 하고 약간의 죄는 괜찮다고 유혹을 합니다. 셋째는, "한번만 죄를 지어라" 즉 속된 말로 '한탕'만 하라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이 '한탕' 때문에 교도소에 갑니다. 넷째는, "아직도 날은 많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다음에 기회를 보아서 회개를 하면 그만 아니냐!" 하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무섭고 간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깨닫고 제자들을 깨우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에덴 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까지, 골고다까지, 그리고 저 성자(聖者)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속세에 사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유혹은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성전 안에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시간에도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건 속에도 사단은 역사합니다. 사단이 유혹을 하는 데는 성역(聖域)이 없습니다. 사단은 어디에나 뛰어들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 합니다. 많은 제자 가운데 하필이면 왜 베드로에게 역사 합니까? 가룟 유다가 아니고 이 순간에는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관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라면 시험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극히 좋아하는 것,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바로 그것에 시험의 여지가 있고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 하는 경고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네 어른들도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마(魔)가 끼어들기 쉽다는 말이 아닙니까? 교회도 부흥될 때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바로 살아보고자 뜨겁게 믿으려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여 큰 일을 해 보고자 마음먹고 출발을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칭찬을 받을 때, 내가 성공을 했 을 때, 내가 영광을 누릴 때, 바로 그런 순간에 사단의 무서운 시험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대로, 사단은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걸림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또 하나는, 사단은 나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숙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알고보면 결국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어려운 일 있으면 노기(怒氣)가 나서 말썽이 많습니다. 사실은 칭찬들으려고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했다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한들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 일이라면 아무런 잡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자기를 위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만 생각하고 장차에 올 영광은 생각지 못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은 이런 경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할 때에 사단의 유혹에 빠진다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 라의 복부제라고 하는 사람이 신부라고 하는 마을에 원님으로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제(齊)나라 군사가 이 마을에 쳐들어왔습니다.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저 아까운 곡식을 전부 원수한테 뺏기게 되었구나" 하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아무나 빨리 거둬 오는 게 좋겠다." 그러나 원님은 말렸습니다. "안 된다. 불을 질러라" 하고 원님은 말했습니다. "전쟁 때이건 평화 시절이건 간에 백성에게 남의 것 공짜로 가지는 버릇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이것을 고치는 데는 10년으로도 어렵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경우에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느니, 저런 경우에는 남을 속여도 괜찮다느니 하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환경에 따라서는 남의 것을 가져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 따로 있습니까? 불한당이란 문자 그대로 땀「汗」흘리지 않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요즈음 보면 이른바 '복부인'이니 뭐니 하는 투기꾼들이 늘 말썽이 되고 있어요. 자나깨나 생각한다는 것이 "어디에다 땅을 사면 돈을 벌꼬?" "어디에다 터를 사면 한밑천 잡을꼬?" 하고 눈이 벌개 가지고 설칩니다. 전부 강도의 마음입니다. 강도가 따로 있습니까? 공짜로 바라니까 강도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피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내게도 이롭지 않고 가정이나 자손에게도 해롭습니다.

절대로 공짜 바라지 마십시오. 나라 망치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눈이 벌개서 제 욕심만 채우려 덤비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은 급한 마음에 집을 팔고 땅을 팔았다가 금새 값이 오르는 걸보고 가슴아파하는데, 누구는 그걸 사들여 떼돈 벌었다고 희희낙락하니, 세상에 이런 마음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남긴 돈을 절반이라도 나누어 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런 불한당의 마음이 생겨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땀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먹지 않고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 돈은 절대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라스베가스에서 본 일을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1달러 짜리 동전 하나를 도박 기계에 집어 놓고는 "주여!" 하고 소리지르면서 돌렸습니다. 돈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예배당 지을 밑천을 따려고 그랬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그따위 돈으로 지을 것입니까? 여러분,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면 영락없이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베드로의 그 고백 속에 사단의 시험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짓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단의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자각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내 명예만 위하는 그런 마음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돼서 그렇게 만류를 하고 나섰는지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적(異 蹟)능력을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빌라도나 헤롯 왕이나 가야바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십자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내 충성이 있지 않습니까? 만에 일이라도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면 제가 지지, 주님께서 지시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하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나라를 회복하는 때가 아닙니까?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질 판국인데, 오직 보좌에 앉으실 생각이나 하셔야지요."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성경,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메시야의 나라는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업의 성공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가진 메시야관(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뜻을 찾아내게 됩니다.

조금 성서학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붙들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붙든다는 말은 헬라말로 '프로스라보메노스'인데, 라보메노스만으로도 붙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가로막아 서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만류하는 것이 됩니다. 또, "간하여 가로되"라고 하는 데 이때 쓰인 헬라어 '에피티만'의 뜻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영어로는 'rebuke'라고 하지요. 이 '에피티만'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었다는 구절에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강한 표현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로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고 거의 강압적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는데, 오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고 있습니다. 큰일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정치적인 욕구 따위에만 얽매여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얼마나 소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덮어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언제나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서도 딴생각만 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엉뚱하게도 예수님을 꾸짖다가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이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고 있는 말을 단순히 베드로의 이야기로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개인의 실수라고 보시지도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이 거룩한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시는 십자가인데, 베드로는 하는 수없이 지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실수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나를 유혹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시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남을 유혹하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합니다. 내가 사단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도 그래서 실수를 합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 되어 지금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남을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타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 열쇠를 가진 자가 천국 열쇠는 고사하고 남이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마저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방해하고 비판하고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는데, 원문의 뜻을 보면 '내 인도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는 수종자(隨從者)가 되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앞질러 가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하나님의 뜻마저 제멋대로 해석하여 원망할 생각 말고 뒤로 물러가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울 반석이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책망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자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 3천 군중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똑바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요,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해서 지시는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벗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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