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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장 24절~31절)
한 칠팔십 년 전의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 때만 해도 이렇다 할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길손들은 먼길을 가는데도 걸어야 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노회(老會)에 참석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는 바람에 부득이 길가의 주막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주막에는 객방(客房)이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선객(先客)이 들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숙(同宿) 하기로 했습니다. 바깥은 비가 오니 더욱이나 칠흑같이 어둡고, 방안에는 등잔불 하나 가물거리고 있지마는 워낙 불빛이 희미하므로 낯선 두 객이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선객에게 인기척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보따리를 내려놓은 다음 옷을 벗어 횃대에다 걸었습니다. 옷을 걸어놓고 보니 윗도리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의 줄이 등잔불빛을 받아 유난스레 번쩍거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회중시계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저 사람이 혹 도둑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 시계는 오늘밤에 없어지겠구나.' 드러누워 잠을 청하지만 못내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잠자리에서 도로 일어난 목사님은 회중시계를 거두어서는 머리맡에 있는 보따리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웠으나 그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보따리 속에 넣는 것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엿보았을 게야. 이거 야단났구나. 보따리째 다 들고 가면 더욱 큰일이다.' 잠은 아예 천리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사람이 부스럭하고 돌아눕습니다. 그 역시 잠을 자지 않는 모양입니다. 목사님이 헛기침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도 헛기침 소리를 냅니다. 서로가 "나는 잠들지 않았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습니다. 밤새껏 그러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상이 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려니 상대방도 고개를 숙이면서 먼저 기도를 시작합니다. 서로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마주 쳐다보았고, 그제야 통성명 수인사(通性名修人事)를 했습니다. 그래 알고 보니, 그 사람 역시 노회에 참석하러 길 떠난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더랍니다. 똑같이 노회에 가는 사람들끼리 그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 채 밤새 의심하고 고생을 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못 믿을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요, 그러다가 뒤에 후회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허상을 실상으로 보며,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소중한 것인 양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믿을 것을 못 믿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 진실을 회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괴로울 뿐더러 남까지 괴롭힙니다. 충분히 믿을 만한 남편을 두고도 믿지 못하여 속을 끓이는 아내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조강지처(槽糠之妻)를 두고도 그 아내를 불신하는 남편은 불행한 남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심각한 불신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들끓고 있습니다. 사방에 혁명이 있고 시위가 있고 폭동과 난동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에도 어려운 문제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노사문제(勞使問題)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요, 임금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인권문제라고요? 그것도 아닙니다. 표면에 떠오르는 모든 문제가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불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올려 달라는 대로 임금을 올려 주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할 판이니 제발 좀 참고 일을 해 달라지만 그것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망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정말로 망한다면야 정신들을 차리지요.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믿지 못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하는 말도 못 믿고 있다고 하는 말도 못 믿습니다. 된다는 말도 못 믿고 안 된다는 말도 못 믿습니다. 준다고 해도 믿지를 않고 또 믿을 수가 없습니다.더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견딜 수 있고 더 가난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어서 참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불신이 쌓이고 쌓여서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불신으로 말미암는 문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입니다.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입니다.
불신은 체질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생후 서너 달 된 아기가 있다고 합시다. 세 시간마다 젖을 먹인다고 했으면 꼭 세 시간마다 먹여야 합니다. 세 시간 안에는 아무리 보채도 젖을 주지 말아야 하고, 세 시간이 되었다면 어김없이 젖을 먹여야 합니다. 아기는 이렇게 버릇을 들여놓아야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터득합니다. 안 준다고 했다가도 보채면 주고, 시간이 되었는데도 보채지 않는다고 안 주기로 버릇하면 아기에게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은 버릇이 들게 됩니다. 제대로 찾아 먹으려면 울고 보채야 하거든요. 약을 먹이는 일도 그렇습니다. 쓴 약을 달다고 속여서 먹입니다. 아기가 먹어 보니 씁니다. 그 순간부터 아기는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후로는 단 약을 주면서도 달다고 해 봐야 믿지 않습니다. 이런 불신이 체질화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술 먹으면 해롭다'고 해도 마시게 되고, '공부를 많이 해야 성공한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불신이란 상당한 기간을 두고 누적되어 체질이 됩니다. 하루아침에 불신 체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체질은 치료하기도 어려운 병입니다.
생명은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지식도 지혜도 능력도 다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무능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에 떨게 됩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사실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있는 일입니다. 생명이 생명 되고 진리가 진리 되는 것도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불을 보듯 엄연한 사실도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도 내가 믿지 않으면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증거 한다고 말입니다. 증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실을 놓고 믿어 달라고 사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증거 하는 것이지요. 무슨 새로운 지리를 발견하라는 것도 아니요, 어떤 새로운 길을 가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증거해서 믿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을 두고도 그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발전해야만 합니다. 부활 신앙에서 부활이 사건화됩니다. 부활 사건이 성립할 때에 비로소 '나'라고 하는 존재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누누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생각을 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앞에 놓고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엄연하게 보이시면서 굳이 '믿어 달라'고 사정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은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엄연히 보는 부활의 사건 하나를 놓고 간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 체질이 되지 말고 믿는 체질이 되라---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부딪혀서 마침내 믿는 자가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도 믿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사람을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가 될 때에 지혜자(知慧者)가 되고 지혜자가 될 때에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내가 그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부활 사건에서 믿음을 얻게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느 소문나 깡패가 중생(重生)하여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그 중생의 기적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나타난다'고요. 그러자 누군가가 비아냥거립니다. "쳇, 기적이 어디 있어?" 깡패였던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누군가가 반박을 합니다. "아, 그거야 당신이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새 사람된 거 아니요?" 중생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역설을 합니다.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누구는 자기 의지로 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요? 결코 자기 의지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되는 기점(起點)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 출발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부활케 하신 능력을 믿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의심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생성하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짓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짓는 의심은 생산적인 의심입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 의심하는 자의 의심(체질적인 의심)은 파국을 자초하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의심, 믿음을 위한 의심, 믿음으로 향하는 의심은 생명적인 것입니다.
도마라는 사람은 마치 현대 지성인을 대표하는 듯한 인물입니다. 그는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무엇이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오늘의 교회 중에서 기적 같은 교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똑똑한 압구정동 사람들-----그 현대 사람들이 열심히 모여드는 교회이니 기적이요, 그런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을 보면 더더욱 기적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어디, 보통 사람들입니까?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무엇이건 확실하게 알고야 수긍하는 탐구적인 체질들입니다. 남들이 믿는다고 해서 쉽게 같이 믿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따지고 비판하고, 질문도 많고 문젯거리도 많습니다. 여간해서 예수 믿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즉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공동번역성서)'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거니하고 있는데, 유독 도마는 캐묻고 나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독단적(獨斷的)이고 개성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데 혼자 빠져서 어디에 가 있었던지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추리를 해 봅니다. "이 사람이 도망을 갔나? 아주 절망을 해 버렸나?" 혼자서만 별나게 구는 것은 도마의 큰 약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볼 때에도 가만히 보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두들 찬송 부르고 신앙고백하고 기도할 때에 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이를테면 찬송 부를 때에 입다물고 가만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도마는 함께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어서 남들의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열 사람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고 말하는데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을 보면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오늘의 본문 25절을 보십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놓으며 '내' 손을 그 옆 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나' '내 손가락' '내 손'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간접적인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의심과 망언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습니까? 그지없는 사랑입니다. 이미 도마의 의심을 다 알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보시자마자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도마의 어리석은 욕구를 이렇게 다 충족시켜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이며 기적 같은 긍휼입니까? 고집 많고 못된 인간을 몸소 찾아오셔서 "보고 싶으냐? 보아라. 만지고 싶으냐? 만져라."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보인다고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만져지는 것은 다 확실하고 옳은 것입니까?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물론 요한일서 1장 1절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손으로 만진 바이니 더는 이론(異論)을 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 아시는 대로, 보고 믿는 일이 있습니다마는 어떤 경우에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 그 보상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믿는 바를 주께서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에 다 알고 사랑합니까? 사랑함으로 그를 압니다. 다 알고 사랑하겠다며 기다리다가 올드 미스 되는 사람 많습니다. 다 캐고 알아보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못 믿게 되고 맙니다. 반대로 아직은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요. 그러나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고 보니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아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황혼녘이 되었습니다. 바닷가에 앉아 바라보자니 해가 뉘엿뉘엿 수평선 아래로 잠겨 들어갑니다. 한 어린이가 말합니다. "저것 좀 봐.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어린이가 말을 받습니다.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야. 지구가 돌아가는 거래." 앞의 어린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를 우깁니다. "아이 참, 눈이 있으면 보란 말이야. 저봐, 바닷속에 잠기고 있잖니, 해가!" 그러나 다른 어린이는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그렇지 않대두.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지구가 돌아간다고 말이야. 나는 그걸 믿어!"----여러분, 내가 꼭 눈으로 보아야 하고 내가 굳이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저 사도들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경험으로 삼을 때에야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도마는 끝까지 상식적인 것을 고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나도 확연하고, 하도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신 분이 어떻게 살아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견문이나 경험으로 판단한다면 부활은 불가능합니다. 이성과 지성과 논리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예수님 스스로 예언하신 말씀을 도마는 생각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깨달아 마음속에 새겨 두었더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군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변증법적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언해 놓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은 거짓말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즉 예언한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예언은 거짓인 셈이 되는데, 그 예언이 거짓이 아니니까 반드시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말인 줄 압니다. 성경의 맥락을 모르면 도마와 같은 태도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야는 당연히 이런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전 맥락을 깊이 이해한다면 부활은 당연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도마는 성경을 먼저 알았어야 합니다. 높은 차원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 안에서 비로소 이 진리를 믿고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옛지식의 최선(最善)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능력으로 알게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내가 가졌던 상식의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요,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어야만 이 부활의 귀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도마의 모든 욕구를 다 채워 주셨습니다. '보라' '만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잘 보면, 도마는 보라고 하시니 보기는 했는데, 만지라고 하셨을 때 만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어는 짓궂은 신학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혼령이기 때문에 만져질 리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만졌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만지나마나니까 만지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주시며 만지라고 하시는데 굳이 만져야만 확인이 되는 것입니까? 도마는 마침내 믿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요. 내 마음을 아시고 내 의심을 꿰뚫어보시고 내 고집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만지라 하시는데, 굳이 손을 내밀어 만져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도마는 그제야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며,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가까운 데서 복음을 전한 데 반하여,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도마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또 성령의 역사 없이 부활 신앙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이웃을 믿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믿음으로써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변화하고,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유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그 본보기입니다. 그렇게도 비겁하던 사람이 용기의 사람, 담력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제일 용기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사람, 다시 말하면 부활 신앙에 사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부활 신앙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생명이 될 때에 초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말씀대로 이제는 보느니 만지느니 하는 이야기는 접어 두고, 보지 못하고 믿는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장 24절~31절)
한 칠팔십 년 전의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 때만 해도 이렇다 할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길손들은 먼길을 가는데도 걸어야 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노회(老會)에 참석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는 바람에 부득이 길가의 주막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주막에는 객방(客房)이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선객(先客)이 들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숙(同宿) 하기로 했습니다. 바깥은 비가 오니 더욱이나 칠흑같이 어둡고, 방안에는 등잔불 하나 가물거리고 있지마는 워낙 불빛이 희미하므로 낯선 두 객이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선객에게 인기척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보따리를 내려놓은 다음 옷을 벗어 횃대에다 걸었습니다. 옷을 걸어놓고 보니 윗도리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의 줄이 등잔불빛을 받아 유난스레 번쩍거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회중시계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저 사람이 혹 도둑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 시계는 오늘밤에 없어지겠구나.' 드러누워 잠을 청하지만 못내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잠자리에서 도로 일어난 목사님은 회중시계를 거두어서는 머리맡에 있는 보따리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웠으나 그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보따리 속에 넣는 것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엿보았을 게야. 이거 야단났구나. 보따리째 다 들고 가면 더욱 큰일이다.' 잠은 아예 천리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사람이 부스럭하고 돌아눕습니다. 그 역시 잠을 자지 않는 모양입니다. 목사님이 헛기침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도 헛기침 소리를 냅니다. 서로가 "나는 잠들지 않았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습니다. 밤새껏 그러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상이 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려니 상대방도 고개를 숙이면서 먼저 기도를 시작합니다. 서로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마주 쳐다보았고, 그제야 통성명 수인사(通性名修人事)를 했습니다. 그래 알고 보니, 그 사람 역시 노회에 참석하러 길 떠난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더랍니다. 똑같이 노회에 가는 사람들끼리 그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 채 밤새 의심하고 고생을 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못 믿을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요, 그러다가 뒤에 후회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허상을 실상으로 보며,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소중한 것인 양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믿을 것을 못 믿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 진실을 회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괴로울 뿐더러 남까지 괴롭힙니다. 충분히 믿을 만한 남편을 두고도 믿지 못하여 속을 끓이는 아내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조강지처(槽糠之妻)를 두고도 그 아내를 불신하는 남편은 불행한 남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심각한 불신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들끓고 있습니다. 사방에 혁명이 있고 시위가 있고 폭동과 난동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에도 어려운 문제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노사문제(勞使問題)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요, 임금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인권문제라고요? 그것도 아닙니다. 표면에 떠오르는 모든 문제가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불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올려 달라는 대로 임금을 올려 주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할 판이니 제발 좀 참고 일을 해 달라지만 그것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망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정말로 망한다면야 정신들을 차리지요.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믿지 못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하는 말도 못 믿고 있다고 하는 말도 못 믿습니다. 된다는 말도 못 믿고 안 된다는 말도 못 믿습니다. 준다고 해도 믿지를 않고 또 믿을 수가 없습니다.더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견딜 수 있고 더 가난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어서 참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불신이 쌓이고 쌓여서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불신으로 말미암는 문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입니다.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입니다.
불신은 체질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생후 서너 달 된 아기가 있다고 합시다. 세 시간마다 젖을 먹인다고 했으면 꼭 세 시간마다 먹여야 합니다. 세 시간 안에는 아무리 보채도 젖을 주지 말아야 하고, 세 시간이 되었다면 어김없이 젖을 먹여야 합니다. 아기는 이렇게 버릇을 들여놓아야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터득합니다. 안 준다고 했다가도 보채면 주고, 시간이 되었는데도 보채지 않는다고 안 주기로 버릇하면 아기에게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은 버릇이 들게 됩니다. 제대로 찾아 먹으려면 울고 보채야 하거든요. 약을 먹이는 일도 그렇습니다. 쓴 약을 달다고 속여서 먹입니다. 아기가 먹어 보니 씁니다. 그 순간부터 아기는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후로는 단 약을 주면서도 달다고 해 봐야 믿지 않습니다. 이런 불신이 체질화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술 먹으면 해롭다'고 해도 마시게 되고, '공부를 많이 해야 성공한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불신이란 상당한 기간을 두고 누적되어 체질이 됩니다. 하루아침에 불신 체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체질은 치료하기도 어려운 병입니다.
생명은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지식도 지혜도 능력도 다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무능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에 떨게 됩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사실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있는 일입니다. 생명이 생명 되고 진리가 진리 되는 것도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불을 보듯 엄연한 사실도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도 내가 믿지 않으면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증거 한다고 말입니다. 증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실을 놓고 믿어 달라고 사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증거 하는 것이지요. 무슨 새로운 지리를 발견하라는 것도 아니요, 어떤 새로운 길을 가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증거해서 믿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을 두고도 그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발전해야만 합니다. 부활 신앙에서 부활이 사건화됩니다. 부활 사건이 성립할 때에 비로소 '나'라고 하는 존재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누누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생각을 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앞에 놓고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엄연하게 보이시면서 굳이 '믿어 달라'고 사정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은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엄연히 보는 부활의 사건 하나를 놓고 간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 체질이 되지 말고 믿는 체질이 되라---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부딪혀서 마침내 믿는 자가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도 믿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사람을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가 될 때에 지혜자(知慧者)가 되고 지혜자가 될 때에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내가 그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부활 사건에서 믿음을 얻게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느 소문나 깡패가 중생(重生)하여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그 중생의 기적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나타난다'고요. 그러자 누군가가 비아냥거립니다. "쳇, 기적이 어디 있어?" 깡패였던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누군가가 반박을 합니다. "아, 그거야 당신이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새 사람된 거 아니요?" 중생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역설을 합니다.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누구는 자기 의지로 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요? 결코 자기 의지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되는 기점(起點)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 출발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부활케 하신 능력을 믿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의심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생성하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짓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짓는 의심은 생산적인 의심입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 의심하는 자의 의심(체질적인 의심)은 파국을 자초하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의심, 믿음을 위한 의심, 믿음으로 향하는 의심은 생명적인 것입니다.
도마라는 사람은 마치 현대 지성인을 대표하는 듯한 인물입니다. 그는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무엇이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오늘의 교회 중에서 기적 같은 교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똑똑한 압구정동 사람들-----그 현대 사람들이 열심히 모여드는 교회이니 기적이요, 그런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을 보면 더더욱 기적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어디, 보통 사람들입니까?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무엇이건 확실하게 알고야 수긍하는 탐구적인 체질들입니다. 남들이 믿는다고 해서 쉽게 같이 믿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따지고 비판하고, 질문도 많고 문젯거리도 많습니다. 여간해서 예수 믿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즉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공동번역성서)'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거니하고 있는데, 유독 도마는 캐묻고 나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독단적(獨斷的)이고 개성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데 혼자 빠져서 어디에 가 있었던지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추리를 해 봅니다. "이 사람이 도망을 갔나? 아주 절망을 해 버렸나?" 혼자서만 별나게 구는 것은 도마의 큰 약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볼 때에도 가만히 보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두들 찬송 부르고 신앙고백하고 기도할 때에 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이를테면 찬송 부를 때에 입다물고 가만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도마는 함께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어서 남들의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열 사람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고 말하는데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을 보면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오늘의 본문 25절을 보십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놓으며 '내' 손을 그 옆 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나' '내 손가락' '내 손'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간접적인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의심과 망언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습니까? 그지없는 사랑입니다. 이미 도마의 의심을 다 알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보시자마자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도마의 어리석은 욕구를 이렇게 다 충족시켜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이며 기적 같은 긍휼입니까? 고집 많고 못된 인간을 몸소 찾아오셔서 "보고 싶으냐? 보아라. 만지고 싶으냐? 만져라."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보인다고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만져지는 것은 다 확실하고 옳은 것입니까?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물론 요한일서 1장 1절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손으로 만진 바이니 더는 이론(異論)을 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 아시는 대로, 보고 믿는 일이 있습니다마는 어떤 경우에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 그 보상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믿는 바를 주께서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에 다 알고 사랑합니까? 사랑함으로 그를 압니다. 다 알고 사랑하겠다며 기다리다가 올드 미스 되는 사람 많습니다. 다 캐고 알아보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못 믿게 되고 맙니다. 반대로 아직은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요. 그러나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고 보니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아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황혼녘이 되었습니다. 바닷가에 앉아 바라보자니 해가 뉘엿뉘엿 수평선 아래로 잠겨 들어갑니다. 한 어린이가 말합니다. "저것 좀 봐.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어린이가 말을 받습니다.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야. 지구가 돌아가는 거래." 앞의 어린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를 우깁니다. "아이 참, 눈이 있으면 보란 말이야. 저봐, 바닷속에 잠기고 있잖니, 해가!" 그러나 다른 어린이는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그렇지 않대두.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지구가 돌아간다고 말이야. 나는 그걸 믿어!"----여러분, 내가 꼭 눈으로 보아야 하고 내가 굳이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저 사도들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경험으로 삼을 때에야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도마는 끝까지 상식적인 것을 고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나도 확연하고, 하도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신 분이 어떻게 살아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견문이나 경험으로 판단한다면 부활은 불가능합니다. 이성과 지성과 논리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예수님 스스로 예언하신 말씀을 도마는 생각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깨달아 마음속에 새겨 두었더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군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변증법적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언해 놓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은 거짓말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즉 예언한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예언은 거짓인 셈이 되는데, 그 예언이 거짓이 아니니까 반드시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말인 줄 압니다. 성경의 맥락을 모르면 도마와 같은 태도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야는 당연히 이런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전 맥락을 깊이 이해한다면 부활은 당연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도마는 성경을 먼저 알았어야 합니다. 높은 차원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 안에서 비로소 이 진리를 믿고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옛지식의 최선(最善)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능력으로 알게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내가 가졌던 상식의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요,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어야만 이 부활의 귀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도마의 모든 욕구를 다 채워 주셨습니다. '보라' '만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잘 보면, 도마는 보라고 하시니 보기는 했는데, 만지라고 하셨을 때 만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어는 짓궂은 신학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혼령이기 때문에 만져질 리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만졌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만지나마나니까 만지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주시며 만지라고 하시는데 굳이 만져야만 확인이 되는 것입니까? 도마는 마침내 믿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요. 내 마음을 아시고 내 의심을 꿰뚫어보시고 내 고집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만지라 하시는데, 굳이 손을 내밀어 만져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도마는 그제야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며,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가까운 데서 복음을 전한 데 반하여,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도마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또 성령의 역사 없이 부활 신앙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이웃을 믿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믿음으로써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변화하고,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유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그 본보기입니다. 그렇게도 비겁하던 사람이 용기의 사람, 담력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제일 용기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사람, 다시 말하면 부활 신앙에 사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부활 신앙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생명이 될 때에 초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말씀대로 이제는 보느니 만지느니 하는 이야기는 접어 두고, 보지 못하고 믿는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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