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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기(마가복음 1 : 35~39)

by 【고동엽】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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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기(마가복음 1 : 35~39)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어린이들이 방학이 끝날 때가 되어서 숙제를 정리할 때 보면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았다가 한 달 동안의 일기를 하루에 다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하고 놀고 무엇을 먹고 그리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들고… 하는 식의 한 달 동안의 일기를 하루에 다 써 버립니다. 나날이 똑같은 날의 연속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일기를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기계문명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따분할 정도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므로 매일 같은 일기를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똑같은 물리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면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은 곧 습관화됩니다. 습관화라고 하는 말은 기계화된다는 말이고, 기계화란 무의식화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생각을 적게 하고 이제 아주 익숙해지면 생각은 전혀 필요 없이 그저 손발만 돌아가면서 움직이게 됩니다. 마치 어느 숙련공과도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기계화되고 또 무의식화되면 결과적으로 비인간화가 되고 맙니다. 인간의 인간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또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으며, 목표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런 육체의 길을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네 현대인들의 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은 생각하고 나서 뛰는 사람, 또 한 사람은 뛰면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뛰고 나서 생각하는 사람, 즉 뜻도 의미고 없이 우선 뛰어 놓고 잘 됐으면 재수가 좋았다고 하고, 실패하면 누구 때문이라고 말해 버리는 이러한 막연한 생을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현대인에게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상이 없는 것입니다. 깊은 사색 다시 말하면 고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피해적 고민은 있어도 스스로 고민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물리적 현상에 따라서 혹은 환경의 변화에 의하여 쫓기면서 고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피해적으로 사는 그러한 아픔은 있어도 고민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자기의 생을 위해서 깊이 생각하는 그런 본질적인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민을 피하려고 하는 그런 가소로운 노력과 이에 따른 또 하나의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우리 한국 교회의 규례 중의 하나인 새벽 기도에 대해서 불평을 많이 합니다. 누가 그런 것을 만들어서 잠을 못 자게 하며, 또 현대같은 바쁘고 피곤한 세대에 어떻게 새벽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새벽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 마음대로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의 생활을 대표적으로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어느 날 하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생을 축소한 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제자들을 깨우지 아니하고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루의 모든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우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피곤하든 바쁘든 이 일은 우선해야 되었기에 제자들과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관계없이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새벽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내 영이 하나님과 만나는 행위입니다. 몸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만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을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 잘하는 것이나 진실하게 사는 것, 사회 생활을 잘 하는 것, 혹은 사회 사업 단체에 구제를 많이 하는 것 등 이렇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이란 기도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일대 일로 직접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사회 정의니 윤리니 도덕이니 아무리 논해 보아도 결국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바른 만남의 관계입니다.

세례 문답을 하면서 간혹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기도는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합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합니까?" "세번 합니다." "언제 합니까?" "식사 때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더 질문하여 "식사를 두번 하면 어떻게 합니까?"하면 "두번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국에서도 가끔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만나 보면 꼭 기도회라고 하는 그런 모임은 없어도 그들은 그들대로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신앙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족도 중요하고 사회도 중요하고 직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시간에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면 대면하여 일대 일로 만나는 만남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 만남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시간에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을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마르틴․루소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아침에 두 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이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쁜 때는 기도를 더 많이 한다고 했는데, 왜냐 하면 바쁜 중에 하는 일은 실수하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식사 시간에 보면 아이들이 배고픈 게 급해서 식사부터 하다가 중간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감할 시간이 따로 있지 기도 시간을 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잠을 덜 자고 음식을 금할지언정 기도 시간이 감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절대로 지켜져야 할 시간입니다.

기도 시간을 줄여 가면서까지 바쁜척 하지 맙시다. 건강이라구요? 몸만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까지 얻어진 건강을 무엇에다 쓰시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좀 더 생각을 달리 하여야 될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없이 일을 시작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외과 의사의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수술에 성공하여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기도를 하지만, 그의 기도하는 중심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몇 십 년 동안 사람을 뉘어 놓고 칼로 째고 꿰매고 하다 보니 사람이 고기 덩어리인지 동물인지 알 수가 없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먼저 인간이 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속물이 되어 버립니다. 물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서 사람을 만나야만 참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의 음성을 들어야 그 음성이 사람의 음성으로 들려집니다. 하나님을 만남이 없이 사람을 대할 때 곧 생활 수단으로 대하게 되고 물건으로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 이전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연장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2: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의 한 생활 철학이라고 여겨집니다. 기도하고 나서 문을 열고 나아가 사람을 대하든지 물건을 대하든지 바로 그대로가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이고, 욕을 들어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며, 칭찬을 듣든지 꾸중을 듣든지 혹은 소득이 있든지 없든지 이 모두가 기도의 응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의 구체적인 생활이며 또한 그 만남을 생활 속에서 현실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철학을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생활의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 속에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의 초점과 그 중심은 오직 전도였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도 전도를 하기 위함이며, 봉사를 하셔도 전도를 위한 것이며, 누구를 만나도 전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전도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만이 영원히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쳐도 먼저 전도를 생각하고, 장사를 해도 이익 이전에 상대방의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며, 무엇을 하든지 오직 전도를 목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은행에 다니는 신앙이 좋은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은행에서 맨 앞의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하기에 어째서 그 자리가 제일 좋으냐고 질문했더니 거기 앉아 있어야 전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전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자기 출세나 몇 푼 어치 되지 않는 명예를 위해서 사는 것처럼 고달픈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명예나 지위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만이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고 했고, 예레미야서에는 듣든지 안 듣든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목표는 전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혼과 몸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며, 몸이 없는 혼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혼과 몸을 하나로 생각하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병든 자를 고칠 때에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하여 죄의 문제와 연결하셨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할 때에도 영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생각하셨으며, 문둥병을 깨끗하게 할 때에도 반드시 영을 깨끗하게 하는 그 의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의 가난을 먼저 생각하셨고, 목마른 자를 볼 때에도 영원한 생수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이 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보면서 사셨습니다. 보이는 모든 사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의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 상징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선물을 주었는데 그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하여 경제적으로 판단한다면 이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은 아이들도 교회학교에서 선물을 받으면 들고 나가면서 오늘 얼마 벌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답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여 사랑과 정성을 먹고사는 것이 인간인데, 상징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신령한 것에 있었으며 혼과 몸을 함께 생각하시고 함께 치료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늘과 땅을 함께 생각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확장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봉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며, 귀신 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깨끗하게 고쳐 놓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고, 한 사람의 병자가 낫는 순간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셨으며, 한 사람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네 가정에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안타깝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다급히 생각하시며 오직 그 일에만 최대의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에다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버느냐 못 버느냐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까? 그러나 조금 잘 살고 못 살고 병들고 건강하고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기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가셨습니다. 그 걸음을 낯선 사람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회에 참석해 보면 외국 사람들은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여 하룻밤씩 사람을 바꾸어 가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 사귀며 교재하여 생활을 넓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달리 한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같이 간 사람들 중에서도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지내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저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낯선 사람,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아는 사람하고만 악수하지 맙시다. 자리에 앉을 때도 가능한 한 낯선 사람 옆에 가서 앉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낯선 곳으로 또한 생소한 곳으로 옮겨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 대접을 하려거든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나에게 갚아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를 청하여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깨끗한 철학입니다.

나를 환영하는 자를 내가 환영하고 내가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하기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항상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반항하고 핍박하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계속 우리의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크게 확장되기 위하여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수기 가운데 보면 그는 하루에 성경 한 장이라도 읽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일선에서라도 성경을 읽고야 잠을 잤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며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평가하시겠습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새로운 목표 우리는 이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삽니다. 소란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고요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생이 그리스도께서 분주하게 전도하시던 것처럼 또한 그가 관심을 가졌던 그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그가 사랑하던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복잡한 세대에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하고 괴로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하오니 하나님 없이 사람을 만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사람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이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이지만 주의 음성을 확실히 들으며 그 응답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귀중한 생활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그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의 일기(마가복음 1 : 35~39)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어린이들이 방학이 끝날 때가 되어서 숙제를 정리할 때 보면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았다가 한 달 동안의 일기를 하루에 다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하고 놀고 무엇을 먹고 그리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들고… 하는 식의 한 달 동안의 일기를 하루에 다 써 버립니다. 나날이 똑같은 날의 연속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일기를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기계문명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따분할 정도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므로 매일 같은 일기를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똑같은 물리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면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은 곧 습관화됩니다. 습관화라고 하는 말은 기계화된다는 말이고, 기계화란 무의식화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생각을 적게 하고 이제 아주 익숙해지면 생각은 전혀 필요 없이 그저 손발만 돌아가면서 움직이게 됩니다. 마치 어느 숙련공과도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기계화되고 또 무의식화되면 결과적으로 비인간화가 되고 맙니다. 인간의 인간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또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으며, 목표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런 육체의 길을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네 현대인들의 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은 생각하고 나서 뛰는 사람, 또 한 사람은 뛰면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뛰고 나서 생각하는 사람, 즉 뜻도 의미고 없이 우선 뛰어 놓고 잘 됐으면 재수가 좋았다고 하고, 실패하면 누구 때문이라고 말해 버리는 이러한 막연한 생을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현대인에게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상이 없는 것입니다. 깊은 사색 다시 말하면 고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피해적 고민은 있어도 스스로 고민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물리적 현상에 따라서 혹은 환경의 변화에 의하여 쫓기면서 고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피해적으로 사는 그러한 아픔은 있어도 고민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자기의 생을 위해서 깊이 생각하는 그런 본질적인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민을 피하려고 하는 그런 가소로운 노력과 이에 따른 또 하나의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우리 한국 교회의 규례 중의 하나인 새벽 기도에 대해서 불평을 많이 합니다. 누가 그런 것을 만들어서 잠을 못 자게 하며, 또 현대같은 바쁘고 피곤한 세대에 어떻게 새벽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새벽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 마음대로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의 생활을 대표적으로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어느 날 하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생을 축소한 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제자들을 깨우지 아니하고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루의 모든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우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피곤하든 바쁘든 이 일은 우선해야 되었기에 제자들과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관계없이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새벽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내 영이 하나님과 만나는 행위입니다. 몸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만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을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 잘하는 것이나 진실하게 사는 것, 사회 생활을 잘 하는 것, 혹은 사회 사업 단체에 구제를 많이 하는 것 등 이렇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이란 기도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일대 일로 직접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사회 정의니 윤리니 도덕이니 아무리 논해 보아도 결국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바른 만남의 관계입니다.

세례 문답을 하면서 간혹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기도는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합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합니까?" "세번 합니다." "언제 합니까?" "식사 때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더 질문하여 "식사를 두번 하면 어떻게 합니까?"하면 "두번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국에서도 가끔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만나 보면 꼭 기도회라고 하는 그런 모임은 없어도 그들은 그들대로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신앙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족도 중요하고 사회도 중요하고 직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시간에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면 대면하여 일대 일로 만나는 만남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 만남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시간에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을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마르틴․루소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아침에 두 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이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쁜 때는 기도를 더 많이 한다고 했는데, 왜냐 하면 바쁜 중에 하는 일은 실수하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식사 시간에 보면 아이들이 배고픈 게 급해서 식사부터 하다가 중간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감할 시간이 따로 있지 기도 시간을 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잠을 덜 자고 음식을 금할지언정 기도 시간이 감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절대로 지켜져야 할 시간입니다.

기도 시간을 줄여 가면서까지 바쁜척 하지 맙시다. 건강이라구요? 몸만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까지 얻어진 건강을 무엇에다 쓰시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좀 더 생각을 달리 하여야 될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없이 일을 시작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외과 의사의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수술에 성공하여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기도를 하지만, 그의 기도하는 중심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몇 십 년 동안 사람을 뉘어 놓고 칼로 째고 꿰매고 하다 보니 사람이 고기 덩어리인지 동물인지 알 수가 없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먼저 인간이 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속물이 되어 버립니다. 물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서 사람을 만나야만 참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의 음성을 들어야 그 음성이 사람의 음성으로 들려집니다. 하나님을 만남이 없이 사람을 대할 때 곧 생활 수단으로 대하게 되고 물건으로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 이전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연장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2: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의 한 생활 철학이라고 여겨집니다. 기도하고 나서 문을 열고 나아가 사람을 대하든지 물건을 대하든지 바로 그대로가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이고, 욕을 들어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며, 칭찬을 듣든지 꾸중을 듣든지 혹은 소득이 있든지 없든지 이 모두가 기도의 응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의 구체적인 생활이며 또한 그 만남을 생활 속에서 현실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철학을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생활의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 속에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의 초점과 그 중심은 오직 전도였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도 전도를 하기 위함이며, 봉사를 하셔도 전도를 위한 것이며, 누구를 만나도 전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전도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만이 영원히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쳐도 먼저 전도를 생각하고, 장사를 해도 이익 이전에 상대방의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며, 무엇을 하든지 오직 전도를 목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은행에 다니는 신앙이 좋은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은행에서 맨 앞의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하기에 어째서 그 자리가 제일 좋으냐고 질문했더니 거기 앉아 있어야 전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전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자기 출세나 몇 푼 어치 되지 않는 명예를 위해서 사는 것처럼 고달픈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명예나 지위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만이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고 했고, 예레미야서에는 듣든지 안 듣든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목표는 전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혼과 몸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며, 몸이 없는 혼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혼과 몸을 하나로 생각하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병든 자를 고칠 때에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하여 죄의 문제와 연결하셨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할 때에도 영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생각하셨으며, 문둥병을 깨끗하게 할 때에도 반드시 영을 깨끗하게 하는 그 의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의 가난을 먼저 생각하셨고, 목마른 자를 볼 때에도 영원한 생수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이 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보면서 사셨습니다. 보이는 모든 사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의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 상징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선물을 주었는데 그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하여 경제적으로 판단한다면 이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은 아이들도 교회학교에서 선물을 받으면 들고 나가면서 오늘 얼마 벌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답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여 사랑과 정성을 먹고사는 것이 인간인데, 상징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신령한 것에 있었으며 혼과 몸을 함께 생각하시고 함께 치료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늘과 땅을 함께 생각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확장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봉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며, 귀신 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깨끗하게 고쳐 놓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고, 한 사람의 병자가 낫는 순간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셨으며, 한 사람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네 가정에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안타깝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다급히 생각하시며 오직 그 일에만 최대의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에다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버느냐 못 버느냐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까? 그러나 조금 잘 살고 못 살고 병들고 건강하고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기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가셨습니다. 그 걸음을 낯선 사람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회에 참석해 보면 외국 사람들은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여 하룻밤씩 사람을 바꾸어 가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 사귀며 교재하여 생활을 넓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달리 한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같이 간 사람들 중에서도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지내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저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낯선 사람,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아는 사람하고만 악수하지 맙시다. 자리에 앉을 때도 가능한 한 낯선 사람 옆에 가서 앉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낯선 곳으로 또한 생소한 곳으로 옮겨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 대접을 하려거든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나에게 갚아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를 청하여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깨끗한 철학입니다.

나를 환영하는 자를 내가 환영하고 내가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하기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항상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반항하고 핍박하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계속 우리의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크게 확장되기 위하여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수기 가운데 보면 그는 하루에 성경 한 장이라도 읽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일선에서라도 성경을 읽고야 잠을 잤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며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평가하시겠습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새로운 목표 우리는 이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삽니다. 소란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고요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생이 그리스도께서 분주하게 전도하시던 것처럼 또한 그가 관심을 가졌던 그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그가 사랑하던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복잡한 세대에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하고 괴로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하오니 하나님 없이 사람을 만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사람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이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이지만 주의 음성을 확실히 들으며 그 응답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귀중한 생활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그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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