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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령설교 182편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약속 갈3:1~14, 요7:39

by 【고동엽】 2022. 2. 19.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약속        갈3:1~14, 요7:39   출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는 것에 대하여 책망했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도, 복음을 알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하지 않게 행동하는 
위선에 대하여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재판관, 심판자가 되어 형제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통해 전해진 이 순전한 복음이 
초기교회 때부터 복음이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과 

그 복음의 능력을 훼손하는 이에 대한, 
그 이면에 있는 거짓된 영의 공격에 대한 단호한 책망이며, 
또한 복음을 지키는 순전한 노력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도록 
교훈을 줌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자신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순전한 복음을 다시 기억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함께 살펴본 갈2장을 통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자신의 체험과 함께 고백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가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자유케 된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복음은, 
그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 연합의 삶,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또한 내 안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동의할 뿐만 아니라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 이해 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루신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축복을 누리는데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죄인은 이 믿음이 없습니다. 
타락한 죄인은 

믿음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고 
우리 안에 믿음을 만들어 주셔야만..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이 은혜!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모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부족하다.. 
믿음 외에 인간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를 자꾸 더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 무료란 없다. 거저 주는 은혜란 없다'라는 
그런 확신 속에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야만, 믿을 수 있고 
그리고 그 보상으로 내가 얻는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물 들어 있기 때문에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 누린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그것을 잘 압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 
인간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이 교만을 부추겨서 
복음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책망하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이르러서도 바울의 책망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갈3: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8개의 질문을 연이어 퍼부으면서 
그 마음에 안타까움과 간절함과 그 절박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여러분의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다는 말입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까? 

여러분, 그렇게 많은 고난을 헛되이 경험했단 말입니까? 
정말 헛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 

이 연이은 질문에서 핵심되는, 전체를 포괄하는 말씀은 3절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까?' :3

여러분이 성령을 체험한 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써 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라는 이 말씀 속에서 
갈라디아 교회가 처음 생성될 때 
성령님의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와 대비해서 보면 
행14장에 남부 갈라디아 지역으로 볼 수 있는 루스드라에서
놀라운 치유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기적, 
그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또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통하여
갈라디아교회가 시작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체험했던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었던 성령의 역사가 
이제 왜 당신들은 육체로 끝내려고 하는가요?' 3:3

여기서 육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죠. 
단지 우리의 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혼에 붙어 있는 타락한 본성을 '육체(육신)'라고 바울은 규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행위를 더 해야 된다 라는 그 주장, 그 가르침은 
바로 육체에 속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육체는 성령을 대적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성령님을 대적합니다. 

1) 첫 번째 모습은 분명하게 죄를 짓게 하는 거죠. 
갈5:17절에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린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성령님을 대적하는 일, 그것이 바로 육체가 성령님을 대적하는 
뚜렷한 첫 번째 일입니다. 

2) 두 번째 모습은 교묘합니다. 
그것은 육체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으로.. 성령님을 대적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고 
또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데.. 그게 어떻게 성령을 대적하는 것입니까? 

육체(육신)의 타락한 본성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는 
안타깝게도 죄의 세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이 없이 
육체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는 
안타깝게도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닌 쪽으로 흐르게 된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또 가장 뛰어난 바리새인이 되길 원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일하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그 섬김의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존재, 그를 따르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뿐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죠. 
육체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의와, 위선과, 교만과, 자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의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아닌 
자기 스스로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는, 

우리 열정이 우리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소위 '독 있는 믿음'이라고 하죠.      *toxic faith

분명히 열심을 가지고 헌신하고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섬기는데 
열심을 낼 수록 성도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도리어 죄의 세력이 되어버리는 
이 모순이 왜 나타나는 겁니까? 

그것은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여기서 봉사는 예배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이들이 참으로 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겉으로 어떤 율법의 규칙을 지키고 
또 스스로 규정한 자기 의를 내세우며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생각을 잘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배하고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만'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육체 스스로 
타락한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속이는 것
그것이 사단의 전략이에요. 

바로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을 잘못 가르쳤던 이들이 
그런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고
바로 이런 모습들이,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로마 가톨릭이 그런 모습이었죠. 
당시 로마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에 더하여,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보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기에
중세교회의 비참한 어두운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 더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인간의 공로와 행위를 제하여 버리고 
'오직 믿음, 솔라 피데' 
'오직 은혜, 솔라 그라티아'

인간의 교회 회의에서 만든 심지어 교황의 결정이 아닌 
'오직 말씀, 솔라 스크립투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교황의 권위보다 더 위에 있으며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다시 확인하고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복음의 진리가 분명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흘러가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성령 체험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오직 은혜로, 내가 구원 받았으며 

믿음으로만 살 수 있음을 체험한 이후에   *롬1:17 
시간이 올라갈수록 점점 자기 의에 빠지고 
종교적인 생활에 빠져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오늘 강조하고 있는 초점에 그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즉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건 아니다) *갈3:3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성령으로 계속 돼야 된다는 말이죠. 
'너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냐?'  :2

그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로마 가톨릭도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교회가 이상해졌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서, 

그 믿음은 연결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높임을 받으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이심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두 가지 중요한 단어로 예수님을 소개했어요. 

1) 첫 번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 구속하시는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했어요. 


2) 그러나 또 한 소개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 두 가지의 소개가 동시에 연결돼야 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곧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부활이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요7:3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성령을 주시지 않았던 것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단어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성령을 주시지 않은 이유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십자가의 사건을 통과해야만
죽음에서 부활 하셔야만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성령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증거한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영광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높임을 받으신 그 분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모든 것을 다 믿어야 하는 거예요. 

때로 그런데 우리 믿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끊어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성령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면서 
그 이후에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만 강조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열심을 내야 된다. 더 섬겨야 된다.. 라고 말한 게 
그것이 다 율법의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육체 스스로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기에 

우리는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빠졌던 문제에 빠지는 것이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가톨릭의 문제에 빠지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문제에 빠지는 것이고 
오늘 이 시대의 무기력한 현대교회의 모습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능력이 없는, 확신이 없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교회 공동체 안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사랑으로 하나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다툼과 분열로 인간 스스로가 만든 규칙에 얽매여서 
하나님의 말씀 보다 (전통과 의식을, 율법의 행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중세교회 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오순절에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시며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건이 나타났죠. 
오순절의 사건입니다.

그때 그 현상을 사도 베드로가 해설해주는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그분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높임 받으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 주셨는데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예수는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올리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시고 

그 높임 받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오른편에서 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그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을 때 
우리도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교회가 율법적이 되고, 
왜 우리의 신앙이 무기력해지고 
왜 우리의 신앙이 율법의 행위를 지키려는, 그런 신앙이 되어 버릴까요? 
왜 복음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끝나기 때문이에요. 
그 믿음은, 동일한 믿음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우리가 받는 체험과 능력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라는 단어에 대한 기억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을까요?

아마 압도적으로 전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교리적, 신학적인 편견입니다. 
어쩌면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높임 받으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의 연장선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임직자나 목회자만 알아야 되는 지식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동일한 믿음의 지식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비록 이방인 이었지만 
구약의 역사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설명해주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란 인물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택하시고 섭리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데라 때부터 
달 신을 섬기는 갈데아 우르의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제 하란을, 그리고 부친 데라를 먼저 데려가심으로써 
그에게 찾아오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창11:28, 32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의 땅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믿음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 했죠. 
그래서 약속의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물렀던 이유가 
바로 아직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거듭 찾아 오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일어났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과연 우리가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인간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형편과 상황과 심지어 감정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 약속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양자를 입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닙니까?' 라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 내셔서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을 것이다' 말씀하셨어요.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라는 말씀이 
창세기 15장 6절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말씀이 거기에 처음 나옵니다. 

그러면 그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성된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믿음에서 출발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어디까지 인도하셨습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 과정을 통해 주신 독자 이삭을 
죽음에 넘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많은 계시와 
또 함께 하시며,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그 역사 속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서 
이제 독자 이삭을 죽음에 넘기는 순종을 하지요.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의 순종을 할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11:2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와 같은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예표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옛 사람이 죽음에 넘겨질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생명으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비유로 미리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생애가, 비유와 같은 사건으로..
실제로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스토리로 주어졌다는 거예요.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그 믿음의 단계라면, 

창세기 22장의 믿음은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허락하는 믿음이에요. 
내어드리는 믿음이에요. 

우리의 옛사람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자신을 죽음에 넘기며, 살아가는 믿음이죠. 

이것은 성령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함께 우리 모두가 받는 복은 두 가지입니다. 

1) 첫 번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이며 

2) 두 번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복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우리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이 두 번째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3:14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도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약속'은 히브리어적 표현입니다.
'약속된 성령' 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 사람들에게 미칠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은 
바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믿음이어야 됩니다.

창세기 15장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내어드리는 믿음으로 연결 된 것처럼.. 
둘은 같은 믿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안에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으며
그리스도와 연합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게 하시는 이 성령님! 

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끊어버릴 때
우리 육체(육신)는 끊임없이 성령을 대적하는 겁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의 저주 아래 다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 하셨기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율법의 저주안으로 들어가는 이 어리석음!
그래서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렇게 책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왜 능력이 있지 못하고, 율법적이 되고
교회가 왜 능력을 잃어버리고, 율법적인 교회가 되어
중세 교회 같이 돼 버립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믿고 
바로 그 분이 부활하셔서 높임 받으시고 
성령으로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의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끝나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그리스도의 임재만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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