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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牧師)가 생활비를 주지 아니할 때 사모의 고통

by 【고동엽】 2022. 2. 17.

목사(牧師)가 생활비를 주지 아니할 때 사모의 고통


목사의 가정도 일반인들의 가정이나 다를 바가 없고 먹고 입고 살아야 하며 자녀들 교육도 시켜야하는데 목사인 남편이 생활비를 받으면 그 즉시로 외롭고 병들고 어려운 성도들이나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 주어버리고 처자인 가족들에게는 하나도 주지 아니하는 그와 같은 행동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속상해서 도저히 참기가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한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한 말은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 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남편은 이와 같은 성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남편이 남들에게는 천사같이 보이겠지만 가정에서는 악마같이 보이니 어떻게 남편의 행위를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자동차를 사시라고 돈을 주면 자동차는 사지 아니하고 개척교회 하는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주어 버리고 교회에서 아파트를 사라고 돈을 주면 이 또한 개척교회 하는 자들에게 주어버리니 남편의 그와 같은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마음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일로 인하여 자식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나가버릴 때 더욱 가슴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가정이요 목회자의 가정에서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아니하여 자식까지 교회 밖으로 내쫓아버리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색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라 남편이 그 돈을 도박을 했다든지 아니면 여자 때문에 써버렸다든지 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의 동정도 받을 수 있어 말하기도 한결 쉽겠는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가지고 남편의 흠을 잡으면 듣는 사람들은 전후사정도 모르고 훌륭한 남편을 흠잡는다고 욕할 것 같은 처지라 이래도 저래도 할 수 없어 정말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결혼할 연령이 되어 결혼시키려고 하면 혼수 준비할 돈이 없다고 해도 걱정도 하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결혼식을 돈 없이 한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 사정 일일이 어떻게 다 말로 하겠는가 오죽하면 교인들이 한가지씩 혼수를 해주고 음식도 장만해주어 간신히 마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어 줄 수 있겠는가 아무도 긍정적으로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일에 동참하지도 아니하고 협조도 하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사모가 협조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만약에 협조하지 아니하고 사사건건 남편 이 하는 일에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 이판사판 이다 하고 너 죽고 나죽자 하면서 교회에서 대판으로 싸움이라도 했다면 남편의 선행도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 뻔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불평하고 자신만 고통스러웠지 남편에게는 노골적으로 불평하면서 쌈해본 일이 없기에 목회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아니한 점을 보아서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희생하였지만 남편을 도와 협조하였다는 증거가 된 셈이다.
목회자가 웃고 칭찬 받는 뒤에는 아내의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랴 자신이나 알고 하나님께서나 알지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남편 뒷바라지 한 결과로 목회는 어렵게 하지 아니하고 순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손해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는데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나갔던 자식이 다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그가 조그만 한 사업을 하는데 남들은 I ·M·F로 인하여 사업도 안되어 야단들인데 그 자식놈이 하는 사업은 잘되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하지 아니할 수 없고 더욱 감사한 것은 자식놈의 입에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인 목사가 심은 것을 내가 거두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지니라"하였다(갈6:9-10) .
이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한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 본 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3:13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본 절과 살후3: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 절'(토 칼론 포이운테스 메 엥카코멘), '살후3:13'(메 엥카케세테 칼로포이운테스). 살후3:13에서는 '메'와 연결된 부정 과거 가정법 '엥카케세테'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하게 설명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멘'과 '메'의 구문이 앞에 있는 '포이운테스'( '행함')와 함께 사용되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 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 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기회 있는 대로 한 말을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 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 때 언제나 '안'(if)을 썼다. 본 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착한 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선') 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 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좋은 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 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가돈'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스'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 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한 말은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급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엡 2:19 딤전5:8).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 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 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 '형제'(아델포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석가들도 이와 같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데 남들을 돋는 것은 자기가족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가족개념과 일치하는 점이 있어 깊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저자는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하였다(마12:46-50).
선을 행한 목사님은 가까이는 직계가족(直系家族)으로 보고 넓게는 믿는 성도들을 모두 가족으로 보고 있었기에 직계가족이 고생을 해도 예수 안에서 형제가 고생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것 때문에 사모님과 자녀들이 고통을 했는데 그와 같은 생활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복음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서 볼 때는 자기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언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 볼 수 있느냐는 식이라 불평이 나왔고 그 일로 고통도 당했지만 실제로는 잃은 것도 없고 다만 불편하게 살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기록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하였다(시37:25-28).


그리고 필자가 아는 사모님은 목사님의 선행 때문에 고생하신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목사님은 어렵게 사시면서도 어렵게 사시는 분들을 돕는 은사가 있어서 교회서 주시는 생활비는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빚이라도 내서 약한 교회들을 도우시고 목회자들을 돕는 분이시라 사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지 불 땔나무가 없어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자 사모님은 방망이를 방안으로 들고 들어와 농을 부셔버리려고 하시는 것을 목사님께서 말리시며 왜 이래 하시니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땔감이 없는데 무엇으로 밥을 하라고 걱정도 하시지 아니하시니까 옷장이라도 부셔서 밥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목사님에 대한 불만 어린 항의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여보 미안하기 짝이 없다고 사과하고 달래면서 우리가 편하고 만족하게 살고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없어 당신이 고생하는 줄 알지만 이렇게 무례를 범하고 있소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하시구려 하며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니 눈물에 마음 약한 사모님은 여보 아무리 그렇지만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남들을 돕는다고 하면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소 정말 당신 때문에 내가 할 짓이 아니고 애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무엇이라고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하고 있다고 눈물어린 어조로 뼈를 깎아내는 듯한 호소를 하는데 남편도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계속해서 어려운 교회를 30 군데가 넘게 돕는데 못 말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지쳐서 원망할 기력조차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와 같이 사모님과 가족들이 고생하는 댓가로 약하고 어려운 교회들의 힘을 얻어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얼마가지 아니하여 교회들이 자립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는데 거기에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은 그와 같이 모진 고생만 하시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셨는데 목사님은 선한 사업을 하시다보니 돈도 없고 빛만 지게되었는데 그래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모님 살아 계실 때나 다름없이 미 자립교회를 도우시는데 계속해서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가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사모님 세상을 떠나고 나서 혼자 살면서 목회 할 수 없어 다시 결혼을 하셨는데 새로 들어오신 사모님께서 재력이 있는 분이라 그 일을 하시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목사님께서는 늘 미안한 감과 가슴 한 구석에 못이 되어 빠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돌아가신 사모님의 생각이 늘 없어지지 아니하고 되살아나는 것인데 그는 너무나도 고생만 많이 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모님께서 그렇게 고생하신 보람으로 미 자립교회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자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고 이는 사정이 다른 측면에서 생각을 하겠는데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으면 사모님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주는데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분통이 터질 때가 있는데 그 돈을 맡겨주면 누가 그 돈을 다 없이하는지 아내를 믿지 못해서인지 버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에 욕심이 많아서 아내의 마음 고생시키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 이로 인하여 가정불화가 한 두 번 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나는데 아내를 믿지 못하는 남편 만나서 사시는 분들은 사모가 아니라고 해도 그 마음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모님 편에서 생각할 때는 부인을 믿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돈 관리하는 것이 취미인지 무엇 때문인지 분간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이 남편과 앞으로 살을 맞대고 살아야할지 아니면 일찍이 헤어져야 할지 고민이 적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부부는 일신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렇다면 믿어야 하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죽을 때까지 동고동락(同苦同樂)을 같이해야하는 것이 부부인데 왜 서로 믿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고통스럽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빠듯한 생활비로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으니까 남편이 그와 같은 비상수단으로 계획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고 남편이 생활비 전체를 쥐고 필요할 때만 조금씩 주면서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하는데 아이들 옷과 아내의 속옷까지 자기가 사들고 들어오는 모양새는 썩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시시비비(是是非非)가리며 싸울 수도 없고 정말 교인들의 시집살이도 만만치 아니한데 산 넘어 산이라고 남편의 사나이답지 못한 행동에는 실망을 금치 못하고 정말 이런 남편과 평생을 같이 살아야할지 자신이 자문자답하면서 그 고통을 참으며 사는 사모들이 예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모님들의 고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이 충분히 덜어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몸이 되어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으로 목회자인 남편을 도와 목회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라고 본다.


아무리 목회자 아내라고 해도 그도 모든 여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남편의 사랑도 받고 싶고 자신이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사 가지고 와서 남편과 아이들이 잘먹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싶고 또한 여자이기에 시장 가는 재미도 있으며 속옷 하나라도 자기 손으로 고르고 싶고 가족들의 옷도 하나씩 사고도 싶은 구매욕구(購買慾求)도 충족시켜보고 싶은데 아내가 할 일을 남편이 볼썽 사납게 하고 있으니 보이지 아니하는 갈등이 생기고 남편을 돕고 싶은 마음보다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때때로 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고백하며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가정살림은 아내인 사모에게 맡기고 목사님들은 교회 일에 전념하시고 양떼들에게 마음을 두고 그들을 부지런히 살피는 일에나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란다 (잠27:23-27).
그리하여 사모들에게 아주 작은 기쁨이라도 주어 사모로서 남에게 말못하고 괴로워하며 고통 하는 것을 다소나마 덜어주어 여자로서의 작은 즐거움이라도 빼앗지 말아 주었으면 하고 구차하게 구걸해본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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