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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목사(牧師)의 이성문제로 휘말릴 때 사모의 고통

by 【고동엽】 2022. 2. 17.

목사(牧師)의 이성문제로 휘말릴 때 사모의 고통


목사(牧師)와 산부인과의사 (産婦人科醫師)는 직책상 여자들을 많이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정말 조심하지 아니하면 엉뚱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직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조심하지 아니하면 고귀한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왕의 고귀한 인격과 명예를 잊어먹고 본능적으로 동물과 같이 욕정(欲情)이 발동하는 대로 군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그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는데 늦게나마 깨닫고 하는 말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하였다(시119:67.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한 본문은 시편 기자의 현재 상황을 분명히 밝혀준다.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 등의 본문 번역은 현재 시편 기자가 처한 상태를 '비천해지기 전에는'이라고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시편 기자의 이 고난이 단순히 대적들의 적대감 때문에 임했는지 아니면 그 고난이 이웃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낳는 어떤 특정한 불행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릇 행하였더니(쇼게그) 한 이는 '방황하다', '실수하다', '범죄 하다'등을 뜻하는데, '범죄 하다'를 뜻할 경우 의도성(意圖性)이 없는 죄를 대체로 가리킨다. 여기서는 그 의무를 잊음으로써 비롯된 죄 정도를 가리킬 수 있다. 그는 말씀 파수의 의무를 잊음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의 경우 의도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씀 파수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극적인 범죄 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한 말 중에 '유익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문자적인 뜻은 '선하니라'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통을 신적(神的) 은총의 표식 혹은 부성애적(父性愛的) 교정(交情)의 한 방편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보기 드문 신앙의 확신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유사한 표현이 시94:12에서 등장한다:"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 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기자는 고통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좀더 배우도록 박차를 가하는 신적 교육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윗은 간음한 자로서 받은 고난이 이만 저만이 아니고 자신이 남의 아내를 범하고 자신은 자식놈에게 자기의 아내가 당하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 최전방에 내세워 의도적으로 그를 죽이게 한 그의 죄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되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
이 정도면 다윗의 부인은 어떠했겠는가 남편의 무분별한 이성문제로 가정은 파괴될 직전에 있고 왕위는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그것도 아들에게 당하고 있으니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사람이 아니지 그래서 그는 많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리고 죄진 것이 잘못인 줄을 깨달아 신앙적으로 고백하여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간음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음행 한 사실이 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였는지 후대를 위하여 교훈으로 기록한 말씀이 있는데 이 시점에서 한번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하였다(고전10:8.11.).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한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또 하나의 범죄는 '간음'이었는데 '간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뉴오멘'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부정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서 5장에서 사용된 용어들과 어원이 같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 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배하였는데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민25: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겼으며 비너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재현(再現)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바울은 본 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는 하나님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한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25:1-9).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민25: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 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기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 절에서는 당일 하루만 계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말세를 만난 이라고 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유대인 시대의 끝을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13:39 히1:2).
또한 '메시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한 세월의 '끝'을 뜻하는 '타 텔레'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창조이래 지나간 모든 시대의'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옴으로써 유대 민족이 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의 경계로 한 말의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시안'은 '권고하다' 혹은 '교정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로(살전5:12,14)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성문제로 휘말리게 되면 목회를 망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중에는 자의(自意)에 의하여 휘말릴 수 있고 타의(他意)에 의하여 휘말릴 수 있는데 어찌되었든 간에 사모님은 그 사이에서 죽어나는 것이고 그 고통은 누구도 짐작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하였다(딤전6:11-12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안드로페 데우)이라는 호칭은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데 이 말은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나 특별한 인물들에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모세(신33:1 시90:1), 다윗(대하8:14), 선지자들(삼상2:27;9:6), 엘리야(왕하1:9), 하나님의 사자들(왕상12:22 ) 등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호칭이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일반 신자들(딤후3:17)이나 디모데와 같은 복음 사역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이것들을 피하고...좇으며 한 '이것들'이란 4-10절에서 언급된 멸망의 요인들을 가리킨다. '좇으며'의 헬라어 '디오케'는 '추구하다'의 뜻으로 '피하고'(퓨게)의 반의어이다. 여기서 바울은 딤후2:22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특유의 대조법을 사용하여 권면 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라 하였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을 열거한다. '의'(디카이오쉬넨)는 법률 용어로 '공의'(公義)를 뜻한다(Lenski). '경건'(유세베이안)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경외심을 간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벧후1:3). '믿음'(피스틴)에 대하여 혹자는 '이것은 주관적인 믿음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Hendriksen).
그런데 렌스키(Lenski)는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즉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인데 처음에 열거되지 아니하고 세 번째 나온 것으로 보아 이것은 신앙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의 미덕(美德)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가 타당하다. 본 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미덕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덕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아가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핵심 요소이다(요일4:10). '인내'(휘포모넨)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살전1:3;5:14 ). '온유'(프라위파디안)는 신약성경 중 본 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온순'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가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위를 제공하고 대인 관계에 있어서 늘 여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마11:29 고후10:1).


어찌 되었든 간에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항상 조심하여 보통 사람들보다는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성적인 문제에 휘말려 교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이곳 저곳에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는 사모의 심정은 편할 리가 없고 남편의 인격을 의심해서가 아니고 왜 그와 같은 일에 말려들어 이 같은 창피를 당해야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 가운데 목회자를 목표로 하는 이유는 그 한 사람만 넘어뜨리면 일반 성도 1천명을 넘어뜨리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된 다는 것이다.
입에 오르기조차 민망한 더러운 성적인 문제로 목회자가 곤욕을 당하는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마귀의 시험으로 자의(自意)가 아니고 타의(他意)에 의하여 넘어지는 불행을 당하게 되는데 곧 요셉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기습적으로 요셉을 유혹하는 경우이다.


참고로 요셉에 대한 성경전문을 옮겨보겠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하였다(창39:6-12).
이는 요셉이 범죄하고 싶은 마음에서 계획적으로 주인의 아내에게 가까이 함이 아니고 요셉이 자기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직무상 그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려고 적극적으로 동침을 요구해오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간 죄로 주인으로부터 괘씸하게 여김을 받아 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항상 형통하였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그 누명을 벗겨주시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그의 심적.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그의 인격에 치명타를 입었는데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늘의 목회자들이 요셉과 같은 경우가 되어도 요셉 이상으로 피해를 입어 목사는 물론이고 그 가족과 사모는 더욱 마음의 고통이 무엇에 비할 바 못되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더욱 기막힌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교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모로서는 도무지 그곳에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어 목사에게 우리 다른 데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새로 시작합시다 하였지만 목사는 막무가내로 이곳에서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버티는 바람에 더욱 일이 악화되는 것을 보는 사모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사모로서는 남편의 신앙과 그의 인격을 보아서는 아내인 사모가 백 번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결백을 믿어주지 아니하니 기가 막히고 그렇다고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남편을 변호하기는 역부족이라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들으며 견디기도 어려워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새로 출발하자고 해도 도무지 듣지 아니하니 시험들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시험을 처리하는 남편의 어리석은 행동에 더욱 실망하여 삶의 의욕을 상실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이 크다.


사모의 마음 같아서는 그와 같은 말을 지어낸 사람과 그 말을 믿고 문제를 확대시키는 자들과 담판을 짓는데 그와 같은 죄를 지었다면 목사가 하나님께 죄를 받아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그렇지 아니하고 모함이라면 이 일에 가담하여 교회를 소란케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죄로 그들이 죽거나 그 이상의 상응한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는 조건하에 깨끗이 교회를 사면하고 떠나주면 문제는 자신이 다 뒤집어쓰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큰 상처가 남지 않겠고 또한 목회자가 억울하다면 주께서 그 일을 꾸민 자들이 죽거나 집안이 망하게 되는 것으로 목회자의 누명을 벗겨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줄 때는 목회자의 명예는 회복되고 목회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리어 그 일로 인하여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요셉은 망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떳떳하게 일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해도 남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의 고집은 굽히지 않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명예회복을 해야 된다는 외 골수로 일방통행 하려는데 사모로서는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명예회복은 하나님께서 시켜주셔야지 사람의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라도 밝혀지고 거짓은 언제든지 들어 나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어떤 목회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독신으로 목회를 하는데 여기 저기서 유혹도 많고 여러 가지 시험도 많았지만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자신의 정조를 지키며 무난하게 목회를 하는데 난데없이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본 교회 안에서 어떤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교회 당회원들이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나갈 사항이 아니라서 처녀를 불러다가 전후사정을 물어보면서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처녀는 말하기를 "우리교회 목사님의 아이입니다"장로들은 정말이냐고 계속 다짐해서 묻는데 처녀는 계속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장로들도 그와 같은 중대한 일을 수월하게 취급할 수 없어서 또 묻고 또 물어 몇 번이고 확인해서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다.
그리하여 당회를 소집하여 목사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서 어렵게 물으며 목사님 우리교회 어느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저희들이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목사님께서 말씀 좀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대답하시기를 "장로님들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미 그 아이가 그렇게 말을 했다면 내가 어떻게 해명을 하며 해명한다고 해도 믿으시겠습니까?"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 이름이 그 처녀의 입을 통해서 나왔으니 교회에 덕이 아니 되고 문제는 이미 발생하였으니 제가 사면을 하겠습니다.
이 때 장로님들은 말하기를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이때 목사님은 대답하시기를 "예 그 갓난아이도 제가 책임지고 키우겠습니다"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아이를 정성껏 기르고 나날을 기도하며 지내는데 얼마 있다가 그 처녀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방언 기도를 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이 그 기도를 듣고 하는 말이 너는 그와 같은 큰 죄를 짓고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아니하느냐 하고 책망하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 어머니가 된 처녀는 다시 본교회로 찾아가서 장로님들을 모셔놓고 사실을 털어놓는데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혼자사시기에 제가 그 목사님에게 시집가서 사모노릇 하려고 했는데 목사님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계속 못 본척해서 제가 일부러 다른 남자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서 목사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한 짓입니다.


장로님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죽일 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고 엉엉 우는 그의 모습도 처량하기 짝이 없는 처지인데 장로님들은 더욱 난처한 일이 확실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목사님에게 상처를 주어 교회를 떠나가게 하였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한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는 것은 죄 없는 목사님께서 누명을 쓰셨고 그 일로 인하여 교회시무를 그만두는 일까지 생겼으니 장로인 우리들의 경솔함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긴급 당회를 소집하여 이를 수습하는데 목사님을 다시 모셔오기로 하고 아이는 처녀가 데려가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는데 그 목사님의 인격은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라도 믿어드리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목사님에게 사모님께서 계셨더라면 얼마나 마음의 고통이 컸겠는가 아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편이시라는 것인데 주 앞에서만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없다면 그와 같은 시험으로 인하여 더욱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문제는 어떻게 참고 견디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목회에 사활이 걸렸기에 가만히 있을 입장도 못되고 그렇다고 속을 보여서 결백함을 증명하기도 어려운 때라면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참고 교회가 유익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더욱 높여 주실 줄로 확신한다.


모르기는 해도 한국교회 안에 계획적인 모함으로 목회자가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이들이 많을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서운 음모는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와는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는 타의에 의하여 이성적인 문제로 휘말려드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 자신이 자의에 의하여 의도적(意圖的)으로 문제를 일으켜서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정욕에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안목(眼目)의 정욕으로 간음죄를 지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고 위신은 땅에 떨어져 뭍 사람들로부터 손가락 질을 당하고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목회자들이 같은 내용의 죄를 지었다면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고 교회는 사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 문은 모조리 막히며 교회는 시험 들어 교인들은 흩어지고 당회는 목회자의 거취를 결정하라는 압력은 들어오고 죽을 맛인데 그 중에 제일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모님인데 교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야 하고 동역 자들의 모임에 나가도 모두가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며 어디에 발붙일 곳이 없어 야간도주(夜間逃走)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동기(同期)가 개척하는 교회를 물려달라고 하여 또 물려받아 해나가는데 또 그와 같은 짓을 반복하여 거기서도 있지 못하고 또 피해야하는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사모님의 마음은 무엇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매우 힘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더러운 이성문제(異性問題)로 남들에게 욕을 먹고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더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배고파 고통 하는 것도 아니고 병들어 고통 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이성문제로 고통 하는 것은 가치도 없는 부끄러운 고통이기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기막힌 일로 사모님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지만 글로 옮기기는 필자의 마음이 허락지 아니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기에 우선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되고 특히 사모가 목회자 뒷바라지하기도 고통스러운데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는 파렴치한 행동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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