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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강의 8-(제자들의 슬픈 낙향과정에 동행하신 부활예수)

by 【고동엽】 2021. 11. 27.

누가복음 24:13-34
(제자들의 슬픈 낙향과정에 동행하신 부활예수)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


오늘 날 우리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 부활을 확신하며 부활신앙을 확실한 자산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일단 부활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믿어지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거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동행한다고 부활신앙이 생기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오순절 성령의 내림으로만 확신이 가능하다, 1979년 제가 부활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됐을 때, 그때 저는 슬픈 여로를 걷고 있었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뜨겁게 풀어주는 인간교사들 속에 임재하신 예수님을 느꼈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형체를 가지고 제 옆을 두리번거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의 논리를 가지고 부활하실 수밖에 없음을 설득하는 논리 안에 설복당하면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적논리,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자의 글이 얼마나 강력한지, 하나님의 끊임없는 죽음 초극의 역사, 죄 이김의 역사, 반역 이김의 역사가 성경의 주제거든요. 성경의 주제는 모세의 글로부터 시편과 예언자의 글,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반역을 이겨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다함없는 사랑의 역사,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인간 죄 초극의 역사, 인간반역 초극의 역사입니다. 모세오경과 시편과 예언서는 구약성경의 3대별이잖아요. 이게 나에 관해 말한다, 자기에 관해 말한다는 말을 하셨어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자세히 설명하는 이 자리가 부활하신 예수님 설명하는 자리거든요. 참 제가 좋은 곳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ESF라는 단체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단체가 너무 말씀을 사랑하는 곳입니다. 자세히 성경을 가르쳐주는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오늘 이것을 깨달으면 핵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27절과 44절을 이해하세요. 요즘 한국에 돌아다니는 스터디바이블이라고 주석이 붙어 있는 바이블이 있죠. 문화성경이라든지, 구약성경에서 성취된 예수님에 관한 구절을 뽑아놨어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미가서 5장 2절,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마태복음 2장 14절, 이건 너무 성경이해를 약하게 하는 거예요. 그것도 물론 예언이지만 구약성경의 내적 논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한 것 중에 부활하신 것은 어디에 있어요?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어떤 구약성경에 호소했어요? 인자가 삼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부활한다, 요나서 말씀으로 했죠.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요나서 말씀으로 몇 번 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 삼일 만에 부활하는 거잖아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흑암에 집어던져요. 심판 받게 했다가 또 금방 풀어주시고 살려주시죠. 이게 구약성경에 너무 많이 반복돼 있습니다. 죄 범한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심판하여 어둠속에 집어던졌다가 또 부활시키는 이 과정이 구약성경에 너무 많이 반복되니까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되는 거예요. 죄 범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짐 지고 심판받아 다시 부활하는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무진장 많이 나오는 거예요. 모세의 글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죄 범했다가 구원받는 길은 어디에 나와요? 모세의 글에서 죄 범한 이스라엘 민족이 물고기 뱃속에 빠진 것처럼 흑암 속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부활하는 이야기가 어디 나와요? 출애굽기 32-34장에 나오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만들었다가 심판받아 전멸의 위기에서 구원 받았죠. 광야에서 내내 그랬고, 민수기 21장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놋뱀을 번쩍 들어서 살렸죠? 이런 일련의 과정, 그 모든 걸 통틀어서 3일 만에 부활하는 거예요. 곧 부활한다, 이런 뜻이에요. 3일은 구약에 굉장히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divine decide action, 결정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게 3일이거든요. 예수님은 자기가 3일 만에 부활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보고 말한 게 아니라 구약성경의 내적논리를 보고 말한 거예요. 구약성경 어디에도 3일 만에 메시아가 살아난다는 말이 없어요. 또 무덤 속에서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부활한다는 말이 어디 나와요? 에스겔 37장 12절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그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 백성이 예수님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부활할 것으로 믿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활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인 당신의 부활을 확신한 거예요. 하나님은 죄 범한 당신의 백성을 죽여서 관계를 멸절시키는 분이 아니라 복원하여 영속적으로 이 관계를 이어가시는 은총이 더 많은 하나님인 걸 알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 범한 인류를 심판해서 공중 우주에 가루로 날려버리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죄 범한 인류를 고쳐서 소생시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여 영구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을 만큼 압도적으로 큰 자비를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가 끝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무덤 속에서 나온다는 확신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믿었어요. 예수님이 왜 부활할 것으로 믿었냐면 구약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너무 많은 죄 심판과 구원과 회복의 역사 때문에 당신은 반드시 부활할 것으로 믿은 거예요. 이 내적논리를 가지고 설명했단 말이죠. 여기서 저는 부활을 확신했어요. 간단한 수학공식 때문에 부활했어요. 하나님 은총이 죄보다 크다면 부활은 필연적이라고 봤어요. 죄범한 제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죠. 창세기 2장 17절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제가 언제 부활을 확신했느냐? 정확하게 이 일이 제게 일어났어요. 죄가 하나님의 마음에 끼친 데미지보다 나의 반역이 하나님 가슴에 끼친 상처와 데미지보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기를 새롭게 하는 무궁한 은총, 나의 죄를 잊어버리기 까지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내 죄가 용서받았다면 부활은 필연적이라고 봤어요. 왜?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한다면 죽음은 부활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 논리를 구약성경은 말했다는 겁니다. 이 논리가 구약성경의 모세의 글로부터 관통한다는 거죠. 시편의 그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왜 특별히 시편을 인용했느냐, 예수님이 시편을 얼마나 사랑했느냐면 시편은 부활신앙의 진수입니다. 죄 범한 인간이 심판과 환난과 징계를 받고 마침내 새 사람 되는 이야기가 온통 시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바로 부활이야기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스터디 바이블 더 이상 보지 마세요. 도표 그려진 것, 아침에도 두 분 제가 봤어요. 교목실장실에서, 너무 난센스에요. 그렇게 보면 안 돼요. 제가 이걸 깨달은 거예요. 성령이 순식간에 깨닫게 했어요. 이걸 천천히 깨달은 게 아니라 79년 11월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어요. 오후에, 저녁 집회할 때, 이 논리가 깨달아지면서, 그걸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식으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서대문구 대현동 37번지 건물에서 우주저편에서 빛이 저에게 몰려오는 꿈을 꿨어요. 그만큼 깨달아져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마음이 뜨거워져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뜨거운 마음으로 말씀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이기는 장면을 볼 때마다 여기서 저는 부활을 보는 거예요. 최초의 부활을 맛본 사람이 누구죠? 아담, 이런 해석을 한 사람이 누구죠? 밀턴, 밀턴의 <실낙원>에 보면 아담이 부활의 첫 증인이 돼요. 왜? 가죽옷을 지어 입혔기 때문에, 아담은 새 사람이 된 거예요.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신 사건이 아담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다 죄를 용서하는 암시를 준 거예요. 아담은 죄 용서의 암시만 받았어요. 아담은 우리처럼 어린 양 예수의 무차별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은혜의 암시만 받고 구원을 받은 거예요. 또 누가 구원 받아요?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 죽는 사람도 구원받은 거지만, 상대방의 죄 때문에 이웃의 죄 때문에 동네이웃의 죄 때문에 죽은 자가 부활해요. 이사야 26장 19절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이 말씀 읽을 때 가슴이 뜨거워요. 아벨이 또 그다음 부활을 경험했어요. 아벨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 않고, 상대방의 죄 때문에 상대방의 죄 때문에, 이웃의 죄 때문에 죽었지만 하나님 보좌에 아벨이 들어갔죠? 아벨의 호소는 accepted 됐습니다. 부활했고, 또 요셉이 부활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 때문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죠? 요셉은 부활했습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른 사람도 부활시키지만 이웃의 죄로 무참하게 죽은 사람도 부활시키는 주님이십니다. 또 개인적으로 참혹한 죄를 범했지만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 죄를 이기고 마침내 큰 구원을 경험하고 위대한 시편의 대장르를 개척한 사람이 누구죠? 다윗, 다윗은 어디서 부활을 경험하죠? 시편 51편에서, 부활은 수학부등식입니다. 나의 참혹한 죄가 하나님에게 끼치는 파괴적 영향보다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무진장한 죄사함의 은총 은혜주심이, 나를 창조하신 무한책임적인 사랑과 투신이 더 크기 때문에 나의 죄를 없는 것처럼 여겨주셔서 죽음의 취소를 결정하여 주신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죽음의 취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죄용서와 상대방의 죄와 동료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른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키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모든 구절들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모세의 이야기부터 전부 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돼 버린 거죠.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예수님 부활하심을 논리적으로 깨닫는 것이고, 성경을 풀어헤쳐서 자세히 설명하여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아마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쳤을 겁니다. 요나도 부활의 증인이죠? 죽음 저편에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구원받은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부활의 증인이고, 온통 부활의 증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죠. 죄로 말미암아 20년 동안 망명생활 갔다가 갱생하여 새 사람 되어 하나님 은총의 위대한 승리를 증언한 야곱도 죄의 심판을 받았다가 부활한 것이고요. 이삭도 마찬가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은총의 위대함 앞에 죄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여 마음을 뜨겁게 해주셔서 부활을 확신시켜주시는 겁니다. 이런 방식의 부활의 확신, 하나님 은총이 인간의 어떤 생태학적 죄보다 문명사적 죄보다 더 클 것을 믿기 때문에 인류의 종말은 핵 재앙도 아니고, 생태재앙도 아니고, 운성대충돌도 아니고, 핼리혜성 대충돌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미래가 되는 거예요. 이걸 깨달아야 해요. 이 뜨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자세히 풀어주는 성경 선생님이 옆에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성경공부를 자세히 풀어주시도록 성령을 영접하여 성령께서 우리 바이블 스터디를 주장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해요. 그때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임재하신 것이고, 이 내적 논리를 자세하게 알려줘서 여러분이 엠마오 도상으로 고난을 피하여 도망치고, 현실의 무게와 맞부딪히기 싫어서 소시민적인 동굴로 도망치는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의 길은 죽음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거룩한 십자가 고난을 향해서 이 세상의 죄와 맞불 작전을 하겠다, 이런 마음을 심어주는 게 부활신앙이에요. 부활신앙은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전투에 참전하는 겁니다. 부활신앙은 영속적이지 않은 가치를 내가 추방하는 데 앞장서는 겁니다. 영속적이지 않은 가치가 무엇이에요? 많이 먹으려는 마음, 애인을 두 명이상 많이 거느리려는 마음, 필요 이상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 재산을 많이 가지려는 마음, 쓸데없이 높아지려는 마음, 이런 건 영속성이 없기 때문에 악한 게 아니라 영속성이 없는 것이고 그걸 사망의 권세라고 해요. 단순히 도덕적으로 표현하면 안 됩니다. 몽땅 필멸의 가치, 멸망될 수밖에 없는 가치들,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는 것, 그런 것이 전부 다 멸망의 대상들을 멸망하겠다고 선포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엠마오 도상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어요. 내가 엠마오 도상으로 가면 소시민적 안정감, 일찍 아파트 사서 편안함, 출세해서 자기 가족만 돌봄, 물론 자기 가족만 돌보는 인간도 없기 때문에 지금은 자기 가족만 돌보는 것도 성자입니다. 자기가족 돌보는 일도 쉽지가 않아요. 지금은 자기 가족 돌보는 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이건 굉장히 성자급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위험을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진리 안에 사는 부담을 피하면 엠마오 도상의 길은 끝이 없이 넓고 광활하여 찾는 이가 많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가치에 결박된 삶에서 영생의 삶으로 질주하는 친구들과 한 동아리가 되는 삶에 참여하면서 나도 그 동아리와 함께 격려 받으면서 영생의 좁은 길로 함께 걸어가는 동무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엠마오로 가는 길, 길이 넓고 광활하여 많은 사람이 감, 절대로 쉬운 문제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주는 안심, 위로, 큽니다. 좁은 길로 소수의 무리에 속하는 건 항상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경험이고,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 길이 옳은 길인지 항상 의심에 시달립니다. 저도 가향에서만 큰소리치지 어디서 큰소리치겠습니까? 저도 항상 약간의 의심과 분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하다 보면 가정을 못 돌봅니다. 탄탄한 가정생활에 가장 큰 방해를 받습니다. 너무나 예언자적으로 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 고난이 보통이 아니구나, 물론 경제적으로 약간 궁핍하게 사는 건 되는데, 가족관계가 어려워집니다. 자녀를 잘 못 돌보고 부모형제 친지를 돌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 안에 살아버리면, 그걸 다 돌보면 공적으로 전혀 역할을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죽은 자가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친척을 다 돌봐야 합니다. 친척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복음의 광채 안에 살다 보니까 식구들과 멀어집니다. 제 친구들과 많이 멀어집니다. 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면 50이 돼서는 옛날 친구들과 하나가 되기 힘듭니다. 옛날 그 친구 아닙니다. 우리 동문회가 최근에 무슨 일을 했느냐면, 저랑 친한 아이들입니다. 동문회가 안동에 있는 어떤 방위산업체에 가서 발칸포 자주포 시험참관을 했어요. 그런데 그 동문회 회장이 그룹의 회장이에요. 동문회 회장이 계속 불러다 포사격 하는데 데려가요. 그리고 모인 놈들이 전부 다 그런 놈들이에요. 제가 거기 가면 그놈들과 저 사이에는 벌써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 무기산업 철폐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망할지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대량 살상용 무기, 그리고 저와 아주 친했던 미국 교회에서 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집사가 SK, 기름 값 올리는 회사의 회장이 됐습니다. 내가 전화해서 기름 값 내리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제 말을 못 듣겠죠. SK Oil 회사 회장이 된 사람이 옛날 저한테 십 몇 년 전에 굽실굽실하듯이 말 듣겠어요? 이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목사님 아직도 그런 말씀 하고 다니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립입니다. 고립이고, 보통 사람이 갖는 행복을 많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낙향하는 삶은 보통 사람들이 죽음이 의보다 강하다고 믿는 겁니다. 죽음이 최종판결자라고 믿으면 엠마오로 낙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게 슬픈 길입니다. 엠마오로 낙향하는 길의 특징은 돈과 죽음과 무력과 창과 칼, 우리 목숨을 담보 삼아서 위협하는 세력이 마지막 판결자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엠마오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모세의 글부터 자세히 성경을 공부한 이 사람들, 마음이 뜨거워진 이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반전의 길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선포를 하는 그 동아리에 합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선포는 죄와 죽음보다 하나님 은총이 더 큽니다, 이겁니다. 하나님 은총이 죄와 불순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우리는 흩어지면 안 되고 한 동아리로 모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를 속량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속량하는 길은 총칼로 빌라도의 군대를 몰아내는 데 있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필멸의 가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치의 삶을 다 걷어치우고 영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면서 남은 생애를 전폭적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을 진짜 해방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로마제국의 총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완악한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 속에 사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예수님의 속량입니다. 이 속량이 있을 때 로마제국 군대도 필요 없어져서 가게 됩니다. 로마제국 군대를 먼저 쫓아내기 위해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큰 죄는 우리 안에 있는 로마제국은 못 쫓아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는 로마제국 군대는 쫓아낼지 몰라도 내 안에 진 치고 있는 탐욕과 배제와 착취와 죄를 범하는 근원적인 본성은 성령이 충만하여 이기지 않고는 도저히 추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추방을 싫어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와 있는 로마제국의 추방을 제1과제로 삼기 위하여, 옛 자아를 십자가에 땅땅땅 못 박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옛 자아를 십자가에 땅땅땅 못 박는 길만이 참 해방이라는 길이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심으로 참 해방의 길을 시범보이신 겁니다. 여러분 이 논리가 이해가 됩니까? 납득돼요? 안 되면 2부 순서에 한 번 더 오세요.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단숨에 깨닫는 거거든요. 그러면 로마제국은 있어도 된다?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죽음이 있는 곳에 모여든 독수리 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썩은 시체냄새를 풍기면 독수리 떼가 몰려오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시체에서 벌떡 일어나서 갱생을 일삼고, 이웃사랑을 일삼고 거룩한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면 로마제국은, 아 이 민족은 우리가 지배할 수 없다, 라고 간단 말이에요. 이것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하고 비슷하게 들립니다. 사실상 이광수와 최남선이 민족개조론을 설파하고 일제로부터 어떤 편익도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안창호와 똑같은 반열입니다. 안창호는 미국 LA 호놀룰루에 가서 사탕수수 먹으며 가난하게 살면서 핍박받았습니다. 그런데 최남선과 이광수는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런 민족개조론을 말하면서 일제의 통치의 수혜자가 됐기 때문에 친일파입니다. 이 말 자체는 굉장히 도전적입니다. 우리 민족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일본의 압제를 이길 수 없다, 이건 절대로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이건 조만식도 말한 것이고 안창호도 말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은 성경을 자세히 공부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창세기부터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읽어야 가장 이해가 잘 됩니다. 창세기의 내적논리가 이해 안 된다면 지적문제가 아닙니다. 절대로 지식문제가 아니라 우리 세계관이 너무 억만년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부활신앙이 없는 거예요. 부활신앙이 얼마나 간단 하냐면 인간의 죄보다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죽음보다 하나님의 죄 용서 의자가 더 크고, 죄 사함의 열정이 더 크기 때문에 죽음을 취소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은 생명만큼이나 필연적인 겁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만큼이나 필연적인 게 부활이래도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활시키는 것이 너무 필연적인 거예요. 우리를 창조한 것 자체가 부활을 내포하고 있는 선물이기 때문에 죽는 것은 오히려 에피소드에 불과해요. 죽음은 무엇이냐? 아주 우발적인 에피소드에요. 우발적인 에피소드가 정돈되고 원래 설계도대로 영성공동체로 초청받은 우리를 영성으로 그대로 데려가는 것이 부활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왜 못 믿느냐는 말이에요. 이런 걸 증명하기 위해서 무덤이 비었다,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이런 건 웃긴 거예요. 웃기진 않지만 약간 약해요. 성경 안에 있는 말을 가지고 성경을 증거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런데 이 큰 내적논리는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부활신앙을 안 믿으면 죽음의 최종권세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믿으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오느냐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모든 협박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 죽어, 잘라버려, 교목실장 잘라버릴 거야, 양진일이랑 같이 다니면, 어떻게 할까? 급진파 양진일과 같이 다니면 잘라버린대, 그러면 잘릴 각오하고 동아리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것이 부활신앙이에요. 양진일 목사가 나의 운명에 매우 고난을 가져올 인물처럼 보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내가 부활하는데 한 번 만져봐 임마, 이렇게 하지 않고 성경을 가르쳤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이성과 양심 속에 인식론적 기제가 준비돼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호소한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춤을 추고 만져보니까 허리 싸져있고 살이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선을 먹을 때 봤는데 뼈도 있더라, 이런 간증들이 없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내적논리에 호소하지 않습니까? 이 말귀를 알아들어야 해요. 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예수님이 극히 쓰지 않는 말 매우 안 좋은 말을 듣습니다. 에이 미련한 인간들아,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어쨌든 간에 얼마나 답답하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제가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만, 여러분이 제 입에서 이런 말을 유발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5절, 저는 이 성경구절을 예수님의 명예를 위해서 가려놓고 싶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런 말을 제가 여러분에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 이런 말이거든요. 여러분, 미련하다는 말 안 듣고 싶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좋을 텐데, 어쨌든 하셨어요.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인식론적 태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인식론적 태도가 아니라 윤리적 정치적 태도입니다. 부활을 안 믿으면 죽음을 믿는 거죠? 죽음을 믿는다는 말은 죽여 버릴 테다, 라는 이 말의 최종권위를 믿는 거죠? 죽여 버릴 테다, 라는 최종권위가 우리의 양심을 곡해하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동정심과 우리 모든 좋은 것들을 파괴하는 말이잖아요. 이 모든 말을 안 믿으려면 부활을 믿어야 해요. 제자들은 죽여 버릴 테다, 라는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너무 용감무쌍한 사람이 된 거거든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오늘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진짜 부활을 믿고 싶어요? 아니면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서 그냥 이 세상에 파묻혀 살고 싶어요, 진짜 예수 믿고 싶어요? 그걸 결정하세요. 여러분이 진짜 예수 믿고 싶으면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엠마오도상에서 반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고, 죄 짓고 살려면 아예 죄 지으러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로 돌아옵니다. 죄 많이 짓는 사람이 유리합니다. 죄 한 번도 못 짓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탕자가 차라리 낫습니다. 여러분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결단해야 할 문제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안 돼요. 부활과 죽음의 권세는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나는 부활을 믿겠습니다, 죽음을 믿지 않겠습니다, 죽음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부활의 가치를 믿으면 돌아서는 거예요. 너무 확실한 실천적이래도요. 저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푸대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 옆에 가서 알짱거리거나 그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사람 사인 받아 오는 것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 옅어지는 겁니다. 죄와 죽음보다 더 크신 은총의 찬란한 승리를 믿지 못하는 걸 두려워합니다. 결론 맺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몸을 만져보라고 하지 않고 포즈를 취하면서, 찍어볼래? 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여기서 너무나 많이 깨달아요. 그래서 제가 <모세오경>을 가장 먼저 썼잖아요. 모세의 글로부터, 책은 이사야부터 먼저 쓸 수 있었거든요. 모세부터 먼저 쓴 이유는 너무나 깜짝 놀랐어요. 이 말 때문에, 제가 <모세오경>이라는 책에다 이걸 자세히 써놨습니다. 이 말에 창호지가 물에 젖듯이 제 마음이 젖었습니다. 무엇을 깨달아요? 죄를 용서하시는 그 현장이 바로 부활이 있는 자리구나, 그걸 깨닫고, 가죽옷을 지었던 그 자리가 바로 우리 주님이 짐승처럼 죽은 자리구나, 우리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보혈로 아담이 용서받았구나, 그걸 제가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자지러지게 놀랐고 그 뒤부터 <모세오경>이 풀린 겁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게 다 풀리는 거예요. 성경이 풀리는 경험은 몇날 며칠 동안 생화학적으로 제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아마 그때 제가 하나님 임재 안에 있을 때는 혈압이 많이 올라가거나 맥박이 많이 뛸 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세의 글부터 하나님 은총이 인간의 죄를 이기는 현장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약속됐다고 믿어야 하고 예고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가리켰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걸 선포하는 날이며 내 모든 허물과 실수, 내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일보다 우리 하나님의 재생능력이 크다는 것이며, 나의 치명적 실수, 다시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치명적 죄악, 또 내가 입었던 치명적 상처, 나의 열 형제가 구덩이에 집어 던졌던 그 무서운 패배, 그 무서운 전락마저도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이길 수 없고, 우리 하나님의 반전의 능력 재창조의 능력, 우리 하나님의 재구성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부조리보다 모든 뒤쳐진 내 삶의 역경보다 크셔서 새 출발하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약속되었던 하나님 은총의 위대한 승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어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롭다 하신 행위는 구약에 너무 많은데, 그 의롭다 하시는 모든 행위가 누구의 부활로 효력이 있었죠? 하나님 아버지의 구약에 나온 모든 의롭다 하심의 선언은 누구의 원초적 행동 때문에 효력이 있었던 거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앞당겨 가불해 쓴 거죠. 부활하신 예수님이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의로움을 다 주신 거죠.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시간의 중심, 예수님은 알파이면서도 오메가,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인류의 의롭다하심은 누가 관여했어요? 그리스도의 부활, 괄호하고, 은총이 인간의 죄를 이기는 곳에 항상 그리스도의 부활은 있었다, 그런데 그 있었다는 믿음을 실체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 몸, 부활하신 예수님 몸은 구약성경에 나왔던 모든 의롭게 하신 선언의 성육신,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의 선언이 몸으로 걸어 다니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 인류는 얼마나 복됐는데요. 내가 만일에 구원받지 못해도 인류의 대부분이 구원받으면 나는 좋겠다는 그런 기분이 들만큼 기분이 좋아요. 그렇게 행복해요. 이런 예수님이 인류의 창조주이고, 이 우주의 궁극적인 관할자이면서 통치자라는 사실은 내가 지옥에 가서 자리를 펼지라도 나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지옥에 가서 유배를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 천국을 통치하시고 이 우주를 빛나는 은총으로 통치하심을 믿는 순간 나는 지옥에 자리를 펼지라도 기쁘단 말이에요. 이게 부활절이에요. 부활절은 역사 속에 영원히 반복되었던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을 극적으로 선포하는 날이다, 죄와 죽음을 은총이 이기는 날이다, 그런 부활절 감격이 여러분 삶을 꼭 관통하여 승리로 이끌어가길 바라고, 인류 마지막이 핵겨울도 아니고 생태적인 대 운성충돌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 마지막에 서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 만세, 오메가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고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본떠 창조하신 인류가 잘못됐을 때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셔서 다시 복원할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거예요. 저는 너무나 기뻐요. 내 죄를 꼭 해결하고 남이 나에게 끼친 죄도 해결하여 죽음을 취소시키십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엠마오 도상에 소시민적인 이탈에서 거룩한 성도 동아리, 예루살렘 동아리로 대전향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 고맙습니다. 저는 제가 천국 못가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우주에 왕이시고 주가 되신 사실, 우리의 참혹한 죄를 압도하는 무진장한 은총과 은혜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 때문에 복됩니다. 이 부활절, 우리만 알고 있기에 너무나 아까운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게 해주시고,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던 형제자매들을 초청하는 가향공동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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