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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구원론 강의 5- 요 1:1-12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는 이유) 구원론 5

by 【고동엽】 2021. 11. 27.
1:1-12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는 이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직역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태초라는 말이 나온 걸 보니까 요한복음은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요? 창세기입니다. 1장 1-12절까지 계속되는 구절에서 창세기를 내가 allude to, 암시한다, 또는 참조한다, 라는 느낌을 주는 강력한 단어가 무엇이죠? 빛과 어둠, 세상,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남, 하나님 자녀가 됨,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요한복음의 창세기를 겨냥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죠. 왜 헬라어로 읽어야 하느냐? 헬라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국어 영어 성경을 서너 개 같이 읽으면 헬라어로 읽은 것과 효과는 같습니다만, 신학생들, 규준형제나 명일형제는 이걸 반드시 헬라어로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학교 등록금 3년 낸 본전을 찾는 것이고, 헬라어를 배우고 나서 이걸 여전히 한글성경을 읽으면 그건 등록금이 매우 헛되게 들어간 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호 로고스,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때 이 말씀은 창세기에 없습니다. 창세기에는 말씀하는 동작만 있지 말씀은 없습니다. 말씀하는 동작자체가 요한복음에는 하나의 agent, 행위자가 된 겁니다. 이 차이입니다. 호 로고스 텐 프로스, 프로스라는 말은 전치사인데, in close union is, 매우 밀접하게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할 때 이 프로스라는 전치사는 밀접한, 중립적인 함께 있음이 아닙니다. 내가 서랍 속에 돈과 동전과 지폐와 케이크를 넣는 것은 함께 있는 거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프로스라는 말은 밀접한 친교 속에서, 라는 말입니다. 1장 18절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 프로스톤데온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왜? 태초부터 co-eternal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같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성이 없는 상태로 한때 존재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없는 상태로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태초에 말씀보다 하나님이 먼저 있는 것인데,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고 지성적인 하나님이고 지혜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한 순간부터 말씀과 함께 있었습니다. 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성과 목적과 하나님의 의지, 모든 걸 총괄하는 행위자입니다. 이 말씀은 곧 태초부터, 영원 전부터 함께 있었던 그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기독교와 유대교가 갈리는 결정적인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심을 믿으라고 그렇게 강조했는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자라는 것을 믿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예전에는 구약성경에서 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사무엘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예레미야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보낸 분이 이분이라고 믿어야만 구약성경에 나온 모든 하나님의 계시를 이분이 완성한다는 걸 믿는 거거든요. 구약성경에 나온 개별적인 증언을 믿는 것, 개별적인 모세의 말 이사야의 말 예레미야의 말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걸 믿는 겁니다. 이사야를 읽고 예레미야를 읽고 다 읽는 것, 다 맞았어요. 그 모든 걸 동시에 이분만 믿으면 다 믿는 것이 돼버려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하나님이 보내신 분, 저주받아 죽은 분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테제는 예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죽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요한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옆에 있던 독생자였고, 그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아버지, 창세기를 시작하신 그 하나님에 의하여 파송된 아들이기 때문에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자들의 말을 믿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온다,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연결 짓는 것이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어요.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잘못 읽으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씨가 엄청 좋은, 인간의 죄를 무한 책임적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죄와 참혹한 상황을 자기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사랑 자비를 감당을 못해요. 특히 부서지고 깨어지고 망가진 자들에 대한 자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한 그 하나님은 이렇게 부서지고 망가지고 깨어진 자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분이란 걸 몰라요. 구약성경을 잘못 읽으면요. 왜 잘못 읽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장로유전이라는 게 있어요. 장로유전은 구약성경 히브리백성들이 가졌던 구전율법의 통칭입니다. 그 구전율법은 언제부터 왔느냐? 여호수아와 함께 모세의 율법을 따랐던 70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70장로 있죠? 출애굽기 24장에 나오죠? 모세가 준 문서율법은 여호수아한테 갔습니다. 그런데 문서율법보다 양이 10배 이상 많은 구전율법은 70장로한테 갔다고 본 겁니다. 70장로가 남겨준 구전율법, 말로 전해준 율법을 다 써놓으면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의 10배가 넘는 겁니다. 그 구전율법을 장로유전 또는 사람의 계명이라고 하거든요. 그 계명에 보면 이 세상에 왜 우리는 선민이 되었을까요? 하는 문답식 질문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이렇게 봅니다. 하나님은 세계만민의 조상이 될 만한 사람들을 다 부르셨습니다. 다신교를 버리고 하나님 백성이 될 기회를 다 주셨습니다. 그 기회를 포착하고 응답하여 본토 친척 아비집, 다신교의 본거지를 떠난 사람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밖에 없습니다. 이게 탈무드의 해석입니다. 이게 구전율법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을 왜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까? 여러분들 꿈도 못 꾸는 본문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26장 볼까요? 이런 본문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줄을 쫙쫙 긋는 본문입니다. 개신교인들은 이런 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명기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기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됐다고 믿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너무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창세기 26장 4-5절 ‘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마지막 이 말은 신명기의 주제구입니다. 신명기의 refrain, 후렴구입니다. 토라의 핵심입니다. 순종하여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순종하여 복의 근원이 된 사람 누구죠? 아브라함, 두 번째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본문의 내 종 다윗의 성실히 행함과 정직히 행함 때문에 모든 조상을 구원해버리십니다. 여러분께서 다윗 생각할 때 밧세바 간음사건만 생각하죠? 간음한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에요. 다윗은 밧세바 간음사건에서 전멸의 위기로 가지만 신속하게 회개하고 새사람 됐죠? 그건 다윗의 실수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그 얼룩 빼고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입니다. 완전한 순종의 모범이 성경에 많이 있는데, 우리 개신교 사람들은 그걸 안 읽고 밧세바 간음사건만 계속 읽고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밧세바 간음사건은 성경은 지속적인 죄의 성향이 열매를 맺었다고 보지 않고, 지극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치명적인 경력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왕조의 영원한 영속적 존재를 가능케 했던 엄청난 양의 순종을 바친 사람이 됩니다. 조상이 엄청난 순종의 credit을 바쳐놓으면, 의로움의 credit을 바쳐놓으면 그걸 평생 후손이 써 먹어도 닳아지지 않는 그런 개념, 상당히 금융거래적인 개념이에요. 이 유대인의 의 사상에는 지금 말하면 정확하게 공로주의 라고 말하는 게 포인트 적립제와 똑같습니다. 현대, 삼성과 똑같아요. 엄청난 포인트를 쌓아놓으면 어떻게 돼요? 제가 지난번에 장신대 강의 하러 간다고 수업을 하나 빠져서 토요일에 보충수업을 했는데, 한 50명이 듣는 클래스입니다. 제가 반장에게 피자를 사주겠다고 약속해서 피자를 시켰는데, 이 친구가 미스터피자를 시켰는데 금액이 42만원이 나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이렇게 비싸냐? 난 20만원이면 될 줄 알았는데, 하니까, 교수님 미스터피자는 한판에 만 오천 원이래요. 콜라도 시켜라,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제가 현대차를 사고 반드시 강제로 써야 하는 현대카드가 있었는데, 현대차를 제가 샀을 때 포인트가 엄청 많이 쌓인 겁니다. 오늘 쓸 수 있는 포인트는 13만원입니다, 해서 27만원인가 주고 제가 그걸 사줬습니다. 물론 그 포인트는 제가 현대 아반떼 1300만 원짜리 차를 사면서 엄청 많이 적립됐기 때문에, 이런 개념하고 똑같습니다. 제가 포인트의 위력을 그 자리에서 엄청 깨달았습니다. 제가 만일 그때 42만원, 복상 다 헌금해버렸는데, 나는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2백만 원 받아서 복상 다 줘버렸는데 42만원 내면 얼마 남은 거예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잖아요. 쇼크를 받았는데 포인트가 살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구매한 거니까, 유대인들과 성경의 의 사상에는 조상이 쌓은 의로움의 포인트를 후손이 무진장 써도 닳아지지 않을 만큼 원천적으로 너무나 하나님 나라 보좌, 신용은행에 의의 은행에 너무 많은 돈을 쌓으면 후손이 아무리 써도, 후손이 아무리 죽을죄를 져도 그 의로 pay off, 변제하고 남는다, 이런 개념이 있어요. 다윗에 관한 유대인의 해석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공로주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다니엘이 바로 바리새인의 조상입니다. 다니엘 보세요. 얼마나 FM대로 살지 않습니까? 개신교인들이 제일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이 사무엘 다니엘 요셉입니다. 죄를 안 짓기 때문에, 특히 야곱이 엄청 만만한 죄인이라고 야곱을 갖다 붙이는데 야곱 이 사람 보통 아니에요. 창세기 31장 보십시오. 초성실의 화신입니다. 야곱은 야외에서 양을 치면서 주인 양 한 마리도 몰래 바비큐 안 해 먹었습니다. 이거 진짜 힘든 일입니다. 주인 양 한 마리 바비큐 해먹어도 표가 나지 않는데, 실오라기 하나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시간 보충수업 종강 철두철미하게 해줘서 흠 잡을 수 없어요. 한번 마음의 연인을 잡자마자 7년 동안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았어요. 야동도 안 보고 포르노도 안보고, 라헬만 보고 7년 동안 살아요. 이런 초신실 초정직 초의로움의 화신이 야곱이에요. 그렇게 해석해요. 장자권을 탈취한 것은 신학적으로 충분히 정당화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야곱을 매우 애매모호한 나쁜 놈으로 생각하는데 야곱한테 혼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얼마나 많이 돌봄 받았는가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의미가 없어요. 요셉과 야곱과 아브라함 같은 돌봄을 받는, 하나님의 신적 돌봄을 완벽하게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그 동안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율법을 믿어야 하거든요. 모세의 율법을 믿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차적인 자녀가 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만 이스라엘 백성으로 개종할 수 있는데,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향유하는 길이 열렸는데,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십시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떨거지들, 이방인들,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자녀를 삼을 길이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유대인 해석과 정반대입니다. 이런 본문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은 이스라엘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시의 조명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먼저 베풀어준 은혜를 훨씬 강조하는 마음으로 구약을 쫙 풀어버립니다. 유대인 탈무드 식으로 구약을 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조상이 됩니까? 아브라함은 갈 길을 찾지 못하여,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불러서 보금자리를 주신 하나님,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녀, 구약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의 정신적 친족들, 정신적 후손들은 세리와 죄인과 창녀라고 요한복음은 보는 거예요.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예언자들의 적분체, 예언자들의 모든 적분의 화신, 예언자적 순종의 완성자, 이걸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는 거예요. 모세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먼저 모세율법을 지켜야만 된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녀임을 믿는 순간 율법을 지킬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원하는 걸 결국은 성취할 수 있어요. 왜? 로마서 8장 3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의 육신, 저주받은 자와의 접촉, 죄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예수 육체가 죄밖에 남지 않았죠?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빠져나갔죠?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의 육체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저주받은 자의 운명과 동일시됨으로 말미암아 저주덩어리가 돼버린 몸이죠.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심판받아 저주받아서 생명의 능력이 다 소진돼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 ‘육신에 죄를 정하사’ 즉 저주받은 자의 죄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육체에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어 저주받은 자의 인생을 살던 노예가, 무거운 운명의 힘이 예수께 전가되게 만들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 육신에 모든 죄를 집결시켜서 예수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예수 육신에서 저주받은 자의 운명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저주받은 인간성으로 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믿으면 율법의 요구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길과 다른 것은 유대인들은 성령 하나님의 먼저 베푸신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시퍼런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향해서, 자연적인 양심과 인간성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려고 하니까 그 시험을 통과해서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막혀 있었다는 말이죠. 이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예수 이름을 믿으면 왜 구원받는가? 예수 이름을 믿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열조들의 순종, 즉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킨 것처럼 여겨주기 때문에 구약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구약적 개념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건 율법을 다 지키면 되죠?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이 할례죠.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 할례를 받는 순간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지만 앞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율법을 다 지킨 거나 마찬가지에요. 할례를 받는 순간 이방인들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렸어요. 그런데 할례를 받는 순간 이방인들도 율법을 다 지킨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니지만 이론적으로 내가 그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약속의 말은 결백한 거니까 다 지킨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할례를 행하면서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켜요. 예수가 구약성경이 파송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순간, 그게 믿어지는 순간, 성령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지킬 능력을 줌으로 말미암아 참된 의미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거예요. 가장 첫째 율법의 요구를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의 부여받음, 하나님 자녀가 되는 제1조 구약의 율법을 지킬 능력의 부여입니다. 둘째 오는 새로운 세계에서 열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봤어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이 새롭게 된다고 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는 바인데, 죽어서 혼백이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지구가 갱신된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저는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정통기독교라고 저는 믿습니다. 셋째, 새 세계가 도래하기 전까지 잠정적이고 유예시간에 하나님의 임재경험 하나님의 동행경험 하나님의 보호경험, 넷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 다섯째, 하나님의 나라 그림자인 교회 공동체 지체가 됨, 이것이 저는 하나님 나라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보거든요.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요? 제가 요한복음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써 놓은 원고를 책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지금 제 요한복음은 옛날하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세오경과 요한복음을 요즘 제가 많이 묵상하기 때문에, 이번에 가향교회 버전으로 요한복음을 새로써야 할 것 같습니다. 2부에서는 이렇게 못합니다. 1부는 재미나게 합시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첫째 율법의 요구를 행할 능력의 부여, 둘째 다가오는 갱신된 지구에서 펼쳐질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참여자, 셋째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경험함, 넷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 다섯째 하나님 나라 그림자인 공동체 일부가 됨, 이것은 정확하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개종할 때 약속하는 거예요. 정확하게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이방인에게 약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할 때, 율법을 지키는 능력의 부여는 정말로 마음씨가 엄청 일관성 있고, 멘탈이 strong한 사람은 근사치로 접근할 수 있어요. 고넬료 같은 사람, 장교 같은 사람이 있어요. 시키는 대로 FM대로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유대교를 믿어도 잘 되고, 불교를 믿어도 잘 되고, 남묘호렌케교를 믿어도 잘 돼요. 어떤 종교로도 잘 되는 사람은 멘탈이 strong 한 사람이에요. 약속 잘 지키고, 이 사람들 외에는 구원을 못해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잘못 살아버린 어둠의 자식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이 있어요. 요한복음 1장 1-11절이 너무 중요해요. 창세기의 재판입니다. 창세기에서 어둠이 더 시원적입니까? 빛이 더 시원적입니까? 존재의 궁극에 어둠이 먼저 있었어요? 빛이 먼저 있었어요? 창세기로 말하면 존재의 궁극, 형이상학적인 궁극의 실재가 어둠입니까, 빛입니까? 먼저 있었던 게 어둠입니다. 빛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어요? 이게 히브리적 세계관의 진수입니다. 여기서 왜 이런 세계관이 나오는가 알아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어둠을 더 궁극적인 시원으로 설정해놨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세계에 창조됐어요. 본문을 잘 보세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땅이 혼돈하다는 말은 땅이 물에 가득 잠겨 있고, 혼돈이라는 말은 큰 물, 홍수를 생각해야 해요. 육지가 원시바다 안에 잠겨 있고, 이런 뜻입니다. 땅이 원시바다 안에 잠겨 있기 때문에 땅에 아무도 살지 못했다, 공허하다, uninhabited, '흑암이 깊음', 깊음도 원시바다입니다. 깊음이란 말과 혼돈이라는 말은 물이 땅을 뒤덮고 있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첫째 빛이 전혀,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태초에는 마이너스 에너지밖에 없었습니다. 마이너스 에너지라는 말은 인간 피조물이 살아갈만한 에너지가 없고, 에너지를 흡수하는 어둠만 있었습니다. 어둠이 빛보다 먼저 있었을 거라는 물리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보다 몇 백배 큰 게 블랙홀이라고 하죠? 지금 물리학자들이 하는 말이 지금 눈으로 보는 우주보다 엄청난 우주, 천체를 지탱하는 것이 블랙홀과 같은 어둠이라는 거예요. 이 물리학적 토대가 흑암물질이에요. 저는 물리학자들이 어디까지 나갈지는 모르겠어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호섹 아르레 함마임, 이 깊음이란 말도 깊은 심연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루아흐 엘로힘, 베 헤터 더 알파힘, 하나님의 신은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큰 바람과 같은 말입니다. Great wind, 이런 말과 같아요. 하나님의 신을 자꾸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지금 이 맥락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해도 제가 말릴 마음은 없지만, 적어도 이 맥락에서는 루아흐 엘로힘이라는 말은 God like wind, 이런 뜻입니다. 큰 바람,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노아 홍수 때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서 뭍이 드러났죠? 바람이 불어 증발시켰죠. 또 하나는 홍해바다 밤새도록 뭍이 드러나도록 바람이 불었죠. 마른 땅, 즉 야바스라는 뭍을 드러내는 건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큰 바람이 에너지작용이 있어서 땅이 드러났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 물 위로 뭍이 드러나는 순간에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창조됐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이 어둠속에 창조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둠 속에, 빛이 뒤에 왔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신화론적인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먼저 있던 어둠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시는 우주의 전사시다, 우리 하나님은 거대한 어둠과 심연과 땅으로 뒤엉켜 있는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빛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런 우주의 고독한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우리가 동참해 드리기 위해서 자꾸 순종을 바쳐야 한다, 이게 유대인들의 마음이다, 이걸 개신교 신학에서는 신인협력설이라고 해서 매우 나쁘게 봅니다. 이게 잘못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동역과 협조가 신적인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리고 하나님께 순종해드리는 것이야말로 우주에 있는 더 시원적인 어둠을 빛으로 제압하는 엄청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간 빈 곳을 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그런 신관을 가졌기 때문에 순종을 강력하게 유발하는 신학이에요. 이게 구약신학입니다. 신약신학도 원래 구약신학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게 가장 좋은데, 원래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 우리가 순종을 안 가르치는 신학은 이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순종의 중요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는 신학은 이단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게 실제로 더 큰 이단이거든요. 우리 하나님은 시원적인 어둠에다 빛을 창조하셔서 빛을 가지고 어둠을 서서히 거둬내시고 흑암물질 위에 빛의 왕국을 창조하셔서 그걸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창조됐기 때문에, 창조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창조의 순간을 빛이 와서 어둠을 제압하는 일종의 갈등론적인 우주관을 가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매순간 순종해드려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바탕으로 어둠을 제압하신다고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신학을 가지면 내가 아침에 기도하는 과정이 너무 감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다는 말, 창세기 1장을 요한복음이 너무나 깊게 해석한다는 걸 알게 돼요.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을 같이 읽어보면 요한복음이 엄청 깊다는 걸 알게 되는데, 다음에 요한복음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가향에서 요한복음을 처음 설교할 겁니다. 오늘 다하기는 쉽지 않고, 시간도 없어요. 오늘은 구원론적 관점에서 봅니다. 요한복음 1장, 창세기 1장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 속에 계셨으니 아버지 독생자의 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곧 하나님의 지성과 지혜를 의미했기 때문에 지혜 없이 존재하는 하나님이 없을 수 없듯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존재했던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런 뜻이에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 말씀이 한 일이라고 본 거예요.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뜻을 알려면, 이사야 55장 10 -11절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이 말을 했습니다. 빛이 있으라, 내 입에서 나간 이 말이 성취하지 않고 내게 헛되이 돌아오는 일이 없죠. 그걸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 명령을 실제로 집행한 분은 로고스라고 본 거예요.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보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는 갈릴리에서 3년 반만 순종한 게 아니에요. 태초부터 순종의 화신이었어요. 왜?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신 방식대로 창조했어요. architecture, designer, 건축사와 건축시공자와의 차이입니다. 건축설계를 했어요. 건축설계도가 시공자가 직접 한 건축을 보니까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여러분, 작품을 글로 써 놓으면 보시기에 좋은 작품이 있고, 보시기에 안 좋은 작품이 있죠? 내고 싶지 않은 페이퍼가 있고 내고 싶은 페이퍼가 있죠? 그것과 똑같아요. 보시기에 좋은 페이퍼는 내가 원하던 모든 디테일한 게 다 들어갔죠. 이 세상은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작품이었어요. 이 세상의 하나님 아버지의 오리지널한 디자이너에 완벽하게 만족감을 드리도록 만든 architecture 시공자, 건축자가 로고스,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 말씀이신 하나님이에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일을 집행한다는 느낌, 요한복음 1장 4절과 창세기 1장 3절을 결정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구문이 이사야 55장 10-11절이니까, 그건 너무 중요한 구절이니 알아놓으세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것 기억나세요? 요한복음 13장 1절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양목사님과 저는 교감이 잘 됩니다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양목사님 같이 제 말귀를 알아듣는 인간이 많이 다수 나오기를 바랍니다. 규준이 영일이는 앞으로는 이렇게 설교자가 돼야 할 텐데, 철두철미하게 말씀 충만하세요. 그래서 우리 죽고 나면 한국교회를 잘 이끌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집사님은 못해도 전도사님들은 해야 합니다. 집사님도 하면 좋지만, ‘요한복음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아시죠?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5장 19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도제입니다. 아버지께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도제십니다. 직접 견습을 배운 겁니다. 이 철두철미한 일치와 연합이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드러낸 자기 모습이거든요. 자,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괄호하고 이사야 55장 10-11절 처럼,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요한복음은 드디어 창세기가 빛이라고 말했던 그 빛을 생명이라고 치환을 했네요. 이것이 절정입니다. 창세기 1장의 절정해석, ‘빛이 있으라’ 그 말을 생명이 있으라, 라는 말로 이해한 거예요. 너무 깊지 않습니까? 도올 김용옥이 <요한복음의 이해>라는 책을 앞부분을 썼는데, 굉장히 의욕적으로 출발합니다. 4장까지 강의하다가 나머지는 영어성경 보세요, 하고 지나갑니다. 드디어 제가 도올 김용옥에 대해서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는 EBS에서 하는 강의가 끝났습니다.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서 보십시오. 뒤에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1장 1-4절까지 엄청 길게 써 놓고 다음부터 할 말이없습니다. 다 책에 나옵니다, 하고 지나갑니다. 도올 김용옥은 성령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해석을 못합니다. 요한복음은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의 암호들로 가득 차 있는 기호학적인 철저한 비밀의 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따라서 요한복음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 3절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이 말은 생명이 있으라, 라고 말하심이 됩니다. 이 생명이 죽음에 지배당한다는 것이 바로 시원적 어둠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빛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만드신 빛의 동산은 시원적인 어둠 위에 건설된 빛이기 때문에 취약합니까, 취약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더 궁극적으로 존재하고 더 시원적 존재인 어둠 위에 건설된 생명의 공동체니까 이 생명의 공동체는 생명 아닌 것에 위협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빛 아닌 것에 위협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걸 바로 성경, 히브리문학, 요한복음은 이걸 이해하는 거예요. 이게 너무 깊고, 이 구조가 끝까지 가요. 제가 요한복음을 연구하다가 옛날보다 훨씬 더 깊이 원전을 독해하면서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이번에 정말로, 한번도 이렇게까지 강해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강의는 완전히 저의 새로운 버전입니다. 일산두레교회나 사랑의 교회에서 했던 그런 강의가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깨달은 것은 시원적인 어둠 위에 빛이 건설되었고 원시 바다 물 위에 뭍이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우주, 이 세상은 언제든지 어둠에 삼켜질 수 있고, 언제든지 뭍이 물에 삼켜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분이 왜 이런 가설적이고 experimental한 세상을 만드셨을까? 추론컨대,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우리 피조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의무와 존재의 기쁨을 박탈하기까지 기뻐하지 않고, 당신의 전능의 일부를 유보하시고 억제하셔서 그 비좁은 틈에다 우리 인간의 능동적 창조의 기회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이 세계를 시원적 어둠위에 건설하셨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건 한 구절로 나오지 않고 내적 논리로 나옵니다. 이 말은 한두 구절로 입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 논리 안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시원적인 어둠이 우리 바깥의 환경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흑암이 시원적인 질료였습니다. 그 어둠 위에 빛이 창조되고 나서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5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번역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깨닫지 못하더라’ 보세요. 뭐라고 돼 있는지, 그 번역이 맞습니다. 카타 람바노, 체포하다, 탈취하다, 억제하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snatched up 위로 끌려올라가는 것, 강력하게 붙들린 포획상태, 그게 바로 카타 람바노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한 가지 위로입니다. 이게 너무 감사합니다. 어둠이 아무리 활개 쳐도 빛은 이기지 못한다는 것, 어둠이 아무리 활개 쳐도 늦게 온 빛은 어둠이 삼키지 못한다는 것, ‘깨닫지 못하더라’는 매우 약한 번역이고 그런 뜻이 없습니다. 사본 상에 몇 가지 있는데, 서구의 인식론적 기독교 위에 반영이 돼서 잘못 번역한 겁니다. 저는 헤브라이즘 사고에 접근한 동양인으로써, 우리가 유리합니다.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신학적 조예가 깊거든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같은 데 유학가세요. 시리아나 이스라엘 이집트 레바논, 앞으로 나는 이런 데 유학보내기를 원합니다. 가서 아랍 정통 셈족어를 다하면, 아시아가 앞으로 유럽 사람들이 쓸 책을 쓰게 됩니다. 시간문제입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죽을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문명사적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우리 동양이 훨씬 유리합니다. 서구인들의 ‘깨닫지 못하더라’ 이건 굉장히 약한 번역입니다. 너무 주지주의적, 헬라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이에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탈취하지 못하더라, 압도하지 못하더라, 억제하지 못하더라, 빛의 활동은 어둠이 항상 억제해왔어요. 억제하는데 애를 쓰지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더라, 누가복음 6장 11절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에서 이삭 잡수시다가 안식일 계명 어겼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그 밤입니다. 음모의 밤이 깊어가는 그 때, 12-13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 말은 어둠이 빛이신 예수를 포착했습니다. 체포했어요. 3일 간에, 빌라도의 법정에 완전히 체포하셨어요.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로마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유대인의 산헤드린, 그 모든 족쇄를 털털 풀고 보좌우편에 승천하셔서 광채를 날렸죠?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어둠이 빛을 탈취하지 못한다, 이 빛을 증거한 자가 세례요한인데, 세례요한도 빛이 강한데 2등성이었습니다. 그동안에 말라기 학개는 4등성 빛이 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모세와 엘리아급 2등성으로 강력하게 광채를 발휘하면서 2등성 밝기로 비취니까, 그가 혹시 빛이 아니신가, 나는 빛이 아닙니다, 나는 내 뒤에 오는 1등성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2등성에 불과합니다, 1장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괄호하고 각 사람의 어둠에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각 사람 어둠은 무엇이냐면 아담이 죄를 범했죠?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나서 시원적인 어둠, 빛이 창조된 그 동산에 태어난 아담의 마음에 빛이 있다가 그 빛,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꺼버린 사건이 불순종입니다. 불순종하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그 마음이 어두워져, 로마서 1장 21-22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보고 나서 자기가 총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아담의 죄를 생각하는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초의 생명의 빛을 스스로 꺼버렸습니다. 꺼버린 후에 창조 이전 시원적인 어둠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됐습니다. 창세기 4장 7절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것이 바로 아담이 우리에게 죄를 남겨줬다, 아담은 더 시원적 어둠의 세력이 다시 우세해진 상태로 갔습니다. 시원적인 어둠이 죄의 소원이 더 강력한 상태로 갔어요. 이게 바로 로마서 7장 21-24절, 선의 소원은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보다 어둠에 사로잡히는 능력이 훨씬 많아지는 상태, 이게 죄인입니다. 죄인은 도무지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선을 행하다가 그 모든 행한 선을 순식간에 배반하게 만들어버리는 악을 행해버립니다. 죄인은 단편적으로 선을 행하다가 그 모든 선을 배반하면 더 큰 악으로 가니까 한 번도 선을 행하지 못하다가 악으로 간 사람보다 더 기만적인 선을 행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이 말은 시원적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즉 죄의 원초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각 사람에게 비췄습니다. 그 지속적인 비췸을 받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종말에 파송하신 독생하신 그 자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순식간에 줘버립니다. 제게 일어난 일입니다. 1979년 11월에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겁니다. 비췬다는 말은 지속적인 비췸, 하나님 계시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비췸 받음, 계시의 조명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첫째, 먼저 계시를 받은 하나님 자녀로부터 옵니다. 둘째, 성경읽기를 통해서 옵니다. 셋째, 예배를 통해서 옵니다. 넷째, 하나님의 특별하신 조명으로 옵니다. 이걸 받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이구나, 그게 믿어지는 순간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다섯 가지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으면 구원 받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아들임을 믿는 것, 예수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신 종말의 구약약속의 모든 완성자임을 믿는 것, 예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졌던 하나님 자녀 권세를 모든 이방사람까지 다 포함하여 확대 가족을 만드시겠다는 그 약속의 성취자가 되심을 믿는 것, 넷째 예수의 십자가에 저주받은 죽음이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단죄 받은 그 저주받은 죽음임을 믿고 영접하는 자, 이 자가 바로 그 이름을 믿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괄호하고,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의 부여, 다가오는 새 세상의 하나님 나라 실제로 살고자 임재와 보호와 친밀한 동행의 경험, 하나님 성품을 닮아감, 이 세상 하나님 나라 가족의 그림자인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됨, 이 권세를 우리가 누립니다. 이 권세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얼마나 큰가를 교회론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는 이유를 개괄적으로 살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각인에게 적절한 깨달음 주시고 하나님 자녀 되는 권세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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