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뜻만 제대로 안다면, 그 과정을 안다면 우리가 완전히 알았다 할 수 있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 했던 암호이기도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일련의 이단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 때 흑암의 물질들과 세력들이 우리 앞길을 막을 때, 예수는 주, 라는 말만 하면 흑암이 자동적으로 물러간다는 일종의 반자동 기계적 신앙고백으로 이 고백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때때로 역사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왜 구원받는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논리 안에서 해명돼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믿어버리려 하지 말고 말뜻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진 언어가 철두철미하게 구약적인 울림을 가진 언어라는 것, 구약의 언어를 전제하고 있는 언어라는 것, 구약적인 울림이 있는 언어를 구약성경의 내적논리에 비춰 해석하지 않고 빨리 믿어버리려고 한다면 큰 어려움이 생기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의 관련성은 금방 이해가 되죠? 태초에, 창세기 1장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압니다. 어둠과 빛, 생명과 만물창조, 맞습니다. 창세기 1장을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이 충분히 밝히지 않는 중간 한 요소를 도입하는데,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이르시되’ 이 부분은 하나님의 발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처럼 입이 있다면 ‘이르시되’는 물리적인 기관인 입에서 나가는 하나의 발성이죠. 영어로 말하면 utterance 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발성을 독립적인 행위자로 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이 독립적인 행위자는 왜 갑자기 생겼는가? 독립적인 행위자로서의 말과 하나님 입에서 나간 발성의 의문과 음량과 에너지를 가지는 발음자체는 차이가 큽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입에서 나가자마자 실현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제왕들의 말을 볼까요? 고대 메소포타미아 제왕들은 선포하자마자 그 선포가 곧 말이 됐죠. 시내산 뒤에 100미터짜리 높은 탑이 있을 지어다, 느브갓네살 왕이 만일 그렇게 말하면 곧 탑이 생기죠. 시차가 있긴 하지만 제왕만이 가진 특권이죠. 왕은 말하자마자 그 말이 reality가 되죠? 127개 도지사들은 다 모일지어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렇게 말했죠. 에스더 1장에서 5장에서 127개 도지사가 다 모였죠. 제왕은 말과 현실이 차이가 없습니다. 시차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고대적 제왕 개념을 가지고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고대적 제왕개념의 연상 작용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127개 도지사들은 다 모일지어다, 했을 때 127개 도지사는 텔렉스 받고 온 거 아니죠? 문자 받고 온 거 아니죠? 파발마가 달렸죠. 많은 귀납적이고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순종이 있었죠. 순종이 쭉 누적돼서 마침내 실현됐죠. 말씀을 발설한 자의 말씀을 그대로 이어 받은 실행한 실행자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은 실현이 되었죠. 그것과 같은 원리로 이사야 55장 10-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발설자체가 행위자체로 행동하고, 독립적인 인격자 행위자로 활약합니다. 요한복음 연구에서 너무 중요한 말씀이니 이 말씀은 일단 다 필기부터 먼저 해 놓으십시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거기서 제일 중요한 말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독립적인 행위자가 되어서 내가 보낸 목적을 성취하지 않고는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왕이 사절단을 보냈는데, 왕의 사절단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 이씨 조선 역사에서 태조이성계의 역할을 뭐라고 합니까? 네 글자로, 함흥차사, 맞습니다. 대부분 함흥차사가 아니라 돌아옵니다.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옵니다.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온 하나님의 말씀은 대언자가 됐죠. 그 대언자가 어디에 숨어 있느냐? 창세기 1장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은 발성기관인 입이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처럼 입을 가지고 말했을 리가 없죠. 하나님이 우리처럼 입을 가진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 입을 만드시고 입이 무엇인가를 아시는 분이긴 하지만, 즉 입을 만드셔서 말하는 게 뭔지 아시죠? 입을 설계하신 것은 말한다는 개념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시편 94편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귀를 설계했다는 말은 듣는다는 동작을 아는 분만이 할 수 있죠. 우리와 같은 눈이 아니지만 하나님 눈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보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에요. 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눈을 설계할 것 아닙니까? 듣는다는 동작을 이해해야만 귀를 만들죠.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말씀도 하시는 분이고 듣기도 하는 분이고 보시는 분인데, 하나님이 우리처럼 발성기관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입에서 나간 말을 음량과 음성으로 된 에너지 덩어리라고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대언자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 대언자가 오늘 본문에 나온 호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를 정확하게 우리말로 하면, 태초에 하나님의 뜻 대언자가 있었습니다, agent,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대언자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뜻을 수행하는 대언자도 사실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나오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사실 이 대언자가 순종을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태초부터 하나님 옆에는 하나님 말씀이 살았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 뜻을 완벽하게 대언하는 분입니다, 그 대언하는 분을 그리스철학 말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 대언하는 그 분이 완벽하게 뜻을 대언하기 위해서, 인간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 뜻을 완벽하게 대언하시고 성취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왔습니다, 육신을 입은 그 분을 우리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세상 말로는 나사렛 예수지만 그분의 원적지나 호적지는 베들레헴 아닙니다, 말구유 아닙니다, 그분의 원적지 호적지는 태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옆입니다, 이게 요한복음 주장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기억나세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돌아간다는 말은 이사야 55장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perfect fulfiller, 하나님 말씀은 완전한 성취를 함으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는 이 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과정의 일부인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과정, 이 사건이야말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의 일부인 거예요. 이 예수님의 순종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붙잡혀서 거룩하게 도살당하여 일곱 번 이스라엘 백성의 양심에 피를 뿌리고, 성소휘장을 찢고 하는 일에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만이,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길만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거예요. 일곱 번 피 뿌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일곱 번 피 뿌림은 완전한 순종, 완전한 순종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위야 말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정통 유일한 길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요한복음 19장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4장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기억나세요? 여러분 책에도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 뜻을 한번 성취할 때마다 한 번 비타민을 먹은 것과 같다, 한번 성취할 때마다 힘이 난다, 예수님의 힘, 지치지 않는 능력의 원천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많이 하면 힘이 많이 납니다. 물론 힘도 빠지기도 하고, 힘이 늘 나기만 한 게 아니라 순종할 때 힘이 썰물처럼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대체함을 받습니다. 1부 때는 부탁 안 했습니다. 2부 때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5장 18-37절까지 읽어야 하는데, 1부 때는 이사야 55장 10-11절만 노트에 쓰라고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새로운 섭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유리할 줄 모르겠습니다. 제가 요즘 요한복음을 너무 많이 묵상하는데, 가향에서 구원론 마치고 나면 요한복음을 강의할 겁니다. 요한복음 원고가 90%가 완성돼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보면 요한복음 예정이라고 돼 있죠? 그런데 제가 왜 책을 낼 수 없느냐면 지금 저는 너무 깊어져버렸습니다. 그 원고는 쓸 데 없게 됐습니다. 완전히 새로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이 2-3년 내에 저를 많이 감동시켰는데, 벌써 2년 전인가요? 안식년 갔을 때 튀빙겐 도서관 너도밤나무 밑에서 계속 요한복음을 묵상했거든요. 요한복음 원전연구가 결정적으로 저를 새롭게 했습니다. 전도사님들은 원전을 읽으십시오. 반드시 원전을 읽고 소리 내 읽으면 계시의 빛이 떠오릅니다. 분명히 확신합니다. 양 목사님, 우리가 이 세상 목숨 잃고 나면 우리 후배들이 강단을 기름지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리 내어 강독합시다. 집사님들은 어차피 헬라어 모르니까 한글성경 3개 이상 읽고, 영어성경 4개 이상 읽으며 됩니다. 그러면 헬라어 읽은 것과 효과가 비슷합니다. 약간 떨어지지만, 그러나 헬라어 줄줄 읽고 운율을 맞춰서 암송하는 건 엄청난 겁니다. 요한복음 옛날 원고 가지고는 책을 못 냅니다. 이걸 제가 깨닫기 전까지는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너무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너무 깊습니다. 도올 김용옥이 요한복음 하려다가 1-144페이지까지 서론을 쓰는데, 요한복음 너무 좋다, 너무 대단하다 하다가 5장에 가면 더 이상 주석을 못 합니다. 성령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5장부터는 영어성경 보세요, 다 넘어갑니다. 우스꽝스럽습니다. EBS에서 요한복음 강해 끝을 못 냈습니다. 도올 김용옥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만 할 수 있거든요.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너무나 도도한 임재확신이에요. 예수에게 있어서 너무 독특한 것은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른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자기가 너무 가깝다고 느끼는 확신, 잘 보세요.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를 하나라고 하는 모든 순간은 순종 모티브가 드러납니다. 특권모티브가 아니라 순종 모티브입니다. 검사 아들이 강남경찰서에서 붙들려 수사를 받았습니다. 검사아들 왈, 너 내가 누구 아들인 줄 알아, 이때 아들은 특권의 이미지입니다.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이라고 할 때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특권과 배타와 오만과 자기존대와 자기영화를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목숨을 바치는 자기부인의 모티브입니다. 모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순종모티브입니다. 이것이 독특합니다. 이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요한복음 5장과 10장이 이걸 결정적으로 드러내거든요.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빌립보서 2장 6-11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하려고 하지 않고, 아담처럼 열매를 탈취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도 엄청나고 큰 순종인데, 두 번째로 육신의 죄를 정하는 사람의 몸으로 종의 형체를 가진 게 또 한 번 큰 순종, 그다음 죽기까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저주 받은 자와 하나가 되는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는 또 한 번의 순종, 삼중적인 자기 낮추심, 이것이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맥락이에요.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맥락은 철두철미한 자기죽음, 순종, 자기 비움, 부인, 이런 게 모티브에요. 그래서 거역감이 전혀 안 들어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매료가 될까? 내가 왜 빨려 들어갈까? 예수님에게 내가 빨려 들어가는 가장 큰 확신은 이 거대하고 거침없는 도발언어와 극한의 자기부인이 너무나 절묘하게 결합이 돼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런 거 다 암송하세요. 늘 암송하면 좋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더 중요한 것은 5장 36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이때는 세례요한 때 세례 받는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항상 순종 모티브, 자기부인 모티브, 희생 모티브라 그랬죠? 강남경찰서에 붙들렸던 검사 아들의 아버지 맥락과는 다르죠? 내가 누구 아들인 줄 알아? 그때는 특권과 율법파괴의 배타를 의미합니다. 모든 이단교주는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 말할 때 탐욕과 음란과 폭력의 정당화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순종과 희생할 때 씁니다. 5장 37-38절 중요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순종 때문에 죽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고 믿지 않은 것, 이게 바로 예수님 죽음의 원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 사무엘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예레미야의 하나님이 예수의 하나님이라고 믿을 때는 예수를 믿으면 구약의 높은 계시의 봉우리를 경험했던 모든 예언자들의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계시를 한꺼번에 믿는 겁니다. 구약의 모세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모든 예언자들을 통해서 준 계시의 핵심은 율법의 순종과 요구죠. 율법순종,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거거든요. 모든 계시의 핵심, 모든 구약성경의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일관된 모든 주제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주신 모든 요구를 예수님이 직접 집행하고 있고 실현하고 있는 현장을 안 믿으니까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안 믿는 게 되죠. 그러면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안 믿는 셈이 되죠. 요한복음의 맥락은 지금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독생자라는 걸 믿도록 설득하는 거예요. 5장 38-39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때 성경이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한다는 말은 성경은 곧 완전한 순종자의 도래를 증거한다, 완전한 순종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런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비전을 말하니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 구약에 별로 안 나타나지만 구약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순종하는 자녀들에 대해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비전, 그게 구약성경의 핵심이니까 결국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셈이 되죠. 방금 아까 읽었죠? 오늘 약간 복잡합니다. 이것이 계속 되풀이 될 거라 생각하고요. 오늘 은혜 못 받아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저한테는 너무 깊고 클리어한데 여러분에게 전달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엄청 은혜 받은 상태입니다. 이래봬도, 저는 늘 이렇게 강의합니다. 설교 아닙니다. 구원론 강의입니다. 설교는 5월 1일부터 아닙니다. 이건 only 구원론 강의로써 예비자 학습교리반이라고 보면 돼요. 요한복음 1장 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땅이죠.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일정한 동행과 증거와 숱한 이적과 표적의 나타나신 사건이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자니까 보내신 자를 영접하면 보낸 자를 영접한 거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보내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셈이 되는 겁니다. 영접하지 않은 이유를 좀 있다 말씀드릴게요. 영접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지 못하는가? 요한복음 3장 19절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왜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는지 보겠습니다. 지금 신경 쓸 것은 15-20분 동안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잘 생각하면서 들어보십시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이때 함께 있었다는 말,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아까 말한 것처럼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이르시되’ 라고 표현된 이 부분이 사실 알고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 뜻을 완벽하게 대언하는 하나님 아들이 있었음을, 즉 하나님 뜻의 완벽한 대언자가 옆에 계셨음을, 이때 옆에 있었다, 함께 있었다, 이 말은 영어로 하면 in close union with, 밀접하게 교제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서랍 속에 돈도 집어넣고 초콜릿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서랍 속에 뭐가 있는 거예요? 초콜릿과 돈도 함께 있었더라, 이런 뜻은 아닙니다. 함께 있었다는 말은 완벽한 공감 속에 있었다, 완벽한 순환 속에 있었다, 완전한 감정의 순환, 완전한 지성의 순환 의지와 계획의 완전한 공유 속에 있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걸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아버지 품 속에 있는’이라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밀접한 친교 속에 있던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만물 중에서 하나님 아들 독생성자인 품속에 있던 그분, 로고스, 말씀 대언자인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그것이 자세히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괄호하고, 하나님의 아들 말씀이신 뜻의 대언자가 하나님 뜻을 완전히 성취하여 처음으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제 알겠다, 태초에 처음으로 창조한 게 무엇이죠? 빛, 중요합니다. 이 빛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즉 말씀을 만드신 말씀의 대언자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은 에너지 덩어리죠? 에너지가 가장 압축된 상태가 에너지입니다. 자기를 축소해서 존재하는 게 에너지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제 창조된 겁니다. 태초에 창조된 빛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즐겨하고, 순종하는 기쁨을 안 그 생명력이 발산됐다 말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는 예수 생명이 전 세계에 퍼질 지어다,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과 교제에 참여하는 말씀이신 그분의 가슴 속에 있던 생명력이 온 세상에 퍼질지어다, 이런 뜻이에요. 애매모호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빛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의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빛을 발해요?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하는 사람이 빛을 내잖아요. 이 빛은 물리적인 빛이면서도 영적인 빛이고 윤리적인 빛이에요. 똑같은 거예요. 빛은 창조주 하나님과 태초부터 오랫동안 교제하던 말씀이신 그분이 발산한 것, 생명력이에요. 우주는, 이 세상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했던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을 모방하는 것만 앞으로 우주에 존속한단 말이에요. 빛만이, 그런데 빛보다 먼저 있는 게 무엇이에요? 빛이 더 시원적인 질서에요, 어둠이 더 시원적인 질서에요? 어둠이 먼저 있었어요. 이게 바로 히브리 창조론 우주론의 핵심이에요. 이건 이원론이 아니에요. 이원론은 빛과 어둠이 영원히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50대 50으로 피조물을 관할할 때 이원론입니다. 어둠이 없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낙관주의 일원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둠 위에 빛이 후발적으로 왔어요. 흑암물질, 블랙홀이 지금 우리가 보는 우주 배후에 엄청나게 넓게 퍼져있다는 최근 물리학자들의 물리적인 설명과 같아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보다 억 만 배 더 큰 블랙홀, 암흑물질이 있다, 빛으로 가득 찬 우주 배후에는 암흑물질이 있다, 그런 원리랑 비슷한 거예요. 더 시원적인 질서가 어둠으로 나와요. 어둠위에 빛이 후발적으로 와서 빛이 계속 어둠을 몰아내는 형국이에요.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했다고 할 때, 아담 안에 사람들 안에 순종이 강력한 충동,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왔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사람들 안에 빛이 됐어요. 동물과 피조물 모두 다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력의 수혜자가 된 거예요. 나무는 봄 되면 순종하여서 꽃을 내는 것, 그리스도의 순종의 복사품이에요. 배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 그리스도 순종의 피조물적 재현이에요. 사람들 안에 있는 생명력, 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씀이신 그 안에 있는 생명력이 사람들의 빛이 됐는데, 이 빛은 태초에 창조된 빛임과 동시에 이 세계를 붙들고 있는 빛이에요. 이 빛이 없으면 세계 만물이 설 수 없죠.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은 만물을 붙들고 있는 일,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이라고 했어요. 이게 너무 중요한 표현이에요. 만물을 질서 있게 붙드는 것은 빛이 어둠을 계속 비취게 만드는 일을 하거나 죄, 불결을 없애는 일을 해요. 똑같은 말입니다. 빛이 어둠을 비추는 일과 죄가 없어지는 건 똑같은 일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어둠의 심연 위에 빛이 비춰서 사람이 거주하는 생존공간을 창조하는 일을 합니다. 히브리 우주론의 신비가 무엇이냐면 어둠과 빛의 일대일 관할 영역지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창조론의 핵심은 어둠이 빛보다 더 궁극적인 질서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둠 위에다 빛의 왕국, 생명의 왕국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여러분 피조물들은 들을지어다, 어둠이 우리 빛의 왕국 바깥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된다, 우리는 아직까지 완전히 정신을 놓아도 될 만큼 태평스럽게 살면 안 된다, 하나님께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던 순종을 통하여 빛을 축적하여 빛을 방사하는 존재가 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매순간 순종하여 빛을 방사하여 소우주를 만들어야 한다, 빛의 왕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적 순종이 집적된 곳에 빛의 왕국이 창조되듯이 우리는 빛의 왕국 바깥을 에워싸고 있는 이 광막한 암흑물질과 같은 어둠의 심연을 정복해 가야 한다, 이런 메시지가 이 우주론에 있어요. 그럼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긴장 없이 처음부터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우주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어둠의 심연 위에 있는 우주를 빛의 왕국으로 만드는 과정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기 위하여, 우리 동역이 마치 필요로 한 것처럼 자기를 억제하시고 자기 능력을 비우시고, 자기의 신성을 억제하시고, 자기 전능성 일부를 감추신 그 끝에, 그 여백에 인간의 순종이 동반자적인 능력을 발휘하도록 우리 인간을 우주적인 존재의 존귀한 자리로 부르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부러 전능하심을 억제하신 거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이건 구약성경 안에 추론돼 있어요. 이건 명시적으로 나와 있는 게 아닙니다. 저의 책 <모세오경>에 나옵니다. 약간 어렵죠. 제가 이번에 깨달은 건 이겁니다. 이번 가향에서 설교하면서 깨달은 것은 2주 동안 요한복음에서 너무 희열을 받았어요. 빛이 어둠보다 너무 늦게 나왔다는 사실, 그래서 저는 로마서 1장 21절을 깨달은 거예요. 빛 가운데 창조된 아담이 고의적인 불순종을 할 때는, 하나님과 교제가 의도적으로 절단될 때는 즉시 아담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과정,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의 관계를 깨달았어요. 우리 생물 안에 보면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게 있죠? 진화론에 있습니다. 아담 안에 하나님의 창조의 첫 순간에는 그리스도적 순종의 빛이 방사하여 아담도 순종의 충동에 훨씬 더 많이 지배받았지만 아담이 어느 순간에 순종의 충동보다, 예수 그리스도적 순종의 모방자가 되기보다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불순종하기로 결단했을 때 아담은 다시 빛의 왕국 저편을 뒤덮고 있던 광막한 어둠에 사로잡혀서, 창세기 4장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다시 말해서 창조가 안 됨, 죄를 짓는다는 말은 더 시원적인 어둠의 자식이 돼버리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우주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아담자손이 죄를 지어서 창조의 빛 가운데 다시 어둠의 질서로 편입되었던, 창조가 되지 않은 어둠속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재창조의 빛을 비춰주셔서 순종하는 자의 기쁨을 주시고,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빛을 방사하는 영생의 지름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고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지금 정확하게 아담 안에서 인간이 어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이걸 이렇게 말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다시 말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안에 있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겁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괄호하고, 그리스도적 순종의 집적물로 방사된 그 빛이, 그리스도의 순종이 광막한 어둠 불순종 세력에게 비췄을 때 어둠이, 괄호하고, 하나님 창조주 뜻에 반역하는 어둠세력이 ‘깨닫지 못하더라’가 아니라 포획하지 못했다, 탈취하지 못했다, 제압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 동사는 카타 람바노라는 동사입니다. 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서구신학의 한계입니다. 인식론, 즉 신앙의 문제를 인식론적 생각 속에 집어넣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잔재물입니다. ‘깨닫지 못하더라’가 아닙니다. 어둠이 빛을 제압하지 못했다, 빛이 더 늦게 나왔습니다. 어둠이 더 시원적인 존재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항상 위로받을 것은 아무리 어둠이 활개 쳐도 어둠은 빛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빛이 이깁니다. 이런 건 아닙니다. 이원론 사상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입니다. 니체가 말한 조로아스터교 종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빛과 어둠의 이원적인 끊임없는 빛과 어둠의 갈등, 일대일 각축, 이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빛이 어둠을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겨가면서 마침내 빛의 왕국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서 이제 긴장하지 않고도 사는 때가 온다, 이게 기독교의 종말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혹받지 않을 때가 온다, 죄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때가 온다, 어둠의 세력들이 항상, 창세기를 보면 우리 빛의 왕국 외곽에 뭐가 있어요? 거대한 심연 안에 빛이 창조됐지만 아직까지 암흑물질, 블랙홀, 우리의 순종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은 광막한 세상 우주에 있는 겁니다. 광막한 우주에 있는, 질량이나 부피 면에서 훨씬 빛보다 더 많은 원시물질 암흑물질이 있는 가운데 빛이 창조된 것처럼, 불순종하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에 빛의 공동체가 창조됐는데 이 빛의 공동체가 마침내 어둠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 이 말은 실천적 일원론입니다. 실천적 일원론은 그냥 가만히 둬도 빛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인간의 순종과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서 어둠을 이겨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건 마니교와도 다르고 차라투스트라 종교와도 다르고, 이원론과도 다릅니다. 일원론과도 다릅니다.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빛의 왕국 사상이거든요. 지금 가향공동체가 한국교회에 가장 상식적이고 예수님의 밝은 계시가 막힘없이 조명되는 공동체가 되기만 하면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이 빛을 포획하지 못하고, 어둠이 삼투압작용을 통하여 빛을 오염시키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빛은 절대로 어둠에 의해서 영향 받거나 뇌물 받았거나 빛이 회색으로 바뀌지 않아요. 빛은 항상 이기게 돼 있어요. 무엇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력이 빛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부인하여 살고 십자가를 지고 살고 독생성자급 순종을 집적시키면 그 빛이 어둠의 질서 위에 생명의 공동체,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얼마나 감미롭게 사는가를 시범보일 수 있는 빛의 공동체가 나온다는 거죠. 형제사랑에 목숨을 바친 형제자매들의 공동체가 형제를 미워하고 탐욕과 배제의 논리로 가득 찬 세상에 강력한 우주창조 새 창조의 이야기를 이어간단 말이죠. 요한복음 1장은 제2창조입니다. 핵심은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세례요한은 지난번에 이야기했죠.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각사람’ 괄호하고, 아담의 원죄 이래로 시원적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비췄다, 9절이 제 인생을 해명합니다. 9절과 12절이 79년 10월 11월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게 처음 빛이 처음 비췬 것은 이때가 아닙니다. 제게 빛이라고 할 만한 강력한 충격적인 경험은 79년 5월 22일입니다. 제가 그날을 잊지 않는 까닭은 획기적으로 빛에 노출된 경험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우스운지 아세요? 그 빛의 노출을 경험하고 빛을 피해서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해서 얼마나 제가 피했는지 압니까? 그 눈부신 빛의 천사들의 전도를 안 받으려고 작당나무 밑에 향나무 밑에 포플러나무 밑에, 제가 죄도 안 지었는데 그렇게 전도자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숨어서 내가 너무 비참해서,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되는데 안 가겠다는 그 말을 못하고 계속 피해서, 도서관 밑에 숨고 오동나무 밑에 숨고, 한 열 번 이상 숨다가 완전히 숨지를 못했습니다. 그 선배가 아예 제 기숙사 옆방으로 이사를 와서 제 멱살을 잡고 교회를 데려갔습니다. 저는 그때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아이고 내 인생 끝났구나, 그러면서 6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5월부터 6개월 동안, 비친다 할 때 미완료, 계속 비치는 겁니다. 일정시간 계속 비춰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자기가 돌이킬 수 있는, 빛으로 떠났을 때 잃을 수 있는 이익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악행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빛의 전향자가 될 수 없지만, 김회권처럼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한테는 빛이 조명하면 빛으로 전향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빛의 조명을 받고,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결무구한 창조적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삶, 지고지순한 이웃사랑의 삶, 자기부인의 삶, 그런 삶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내가 얼마나 많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돼 있는가를 순식간에 깨닫게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을 하고, 예수가 바로 내 인생을 창조하신 그분의 보내신 자임을 영접하면, 내가 김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던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인 것, 피조물인 것을 영접하면 아무 것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경주 김가로 태어난 생물학적 우연의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개성적으로 만드시고 나를 대한민국 할 일 많은 곳에 보내시고, 이 보내신 하나님이 내 어둠 양심에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냈다는 걸 믿게 된 거죠. 그때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79년 11월 17일 경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그게 일어났습니다. 일기장을 봐야합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납니다. 다만 5월 22일에 라일락꽃이 많이 피고, 향기가 진동하는 봄에 선배들에게 포획돼서 바이블 스터디를 하기 시작한 것, 그날 이승장 목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40대인 이승장 목사를 만난 것, 지금 저보다 10살 어린, 너무 젊은 이승장 목사를 만난 겁니다. 42년생이니까 79년에 서른아홉 살밖에 안 됐죠. 완전히 총각 같은 이승장 목사를 만난 겁니다. 어디서? 신림 미림여고 들어가는 주택 2층에서, 7평짜리 건물에서, 열 세 사람과 함께 맞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비치는가? 첫째, 하나님 말씀을 보면 빛이 비췹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의 삶을 볼 때 빛이 비춰옵니다. 예배도중에 빛이 비춰옵니다. 기도도중에 빛이 비춰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개인적인 방법으로 내 양심을 전광석화처럼 밝히는 빛이 비치면 내 안에 있는 어둠을 순식간에 몰아내는 빛입니다. 한 가지 위로는 역사를 볼 때 어둠이 빛을 삼키는 것과 같은 금안식과 같은 밤에도 빛은 절대로 어둠에 삼켜지지 않고, 어둠은 이기지 못합니다. 근본적인 낙관론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 가져야 하고, 우리 인생에 대해서, 우리 가정에 대해서, 음울한 우리 역사에 대해서, 빛이 어둠을 이기는 형국으로 진행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 근데 우리 하나님은 태초의 창조순간처럼 어둠을 너무나 짙게 배경으로 깔아놨습니다. 우리 역사를 볼 때 어둠의 경험이 더 많게 해서 빛의 조명을 받는 사람들의 강력한 사명감을 일깨울 만큼 충분한 어둠이 우리를 에워싸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적 순종의 모티브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어둠의 역사에 집어던졌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에서 어둠과 대면할 때마다 예수가 만났던 갈릴리 어둠의 역사의 지평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말 할 일 많은 땅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감격합니다. 어둠, 우리 신앙을 조롱하고 우리 신앙을 무의미하게 만든 활개 치는 폭력, 억제되지 않는 야만, 야만적 욕심들, 무너져버린 사법질서, 한상률 전금표 다 풀어주는 악한 사법부, 악한 정부, 저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회의원들, 썩어버린 기독교 종교,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암흑물질과 같고, 암흑물질, 혼돈의 물결이 땅을 삼켰는데 그 혼돈을 겹겹이 쌓고 있는 어둠의 심연을 향하여 ‘빛이 있으라’ 라고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럴 때 그리스도의 순종을 집적시킨 빛과 같은 인간들이 탄생하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 누추한 교회사, 우리 누추한 역사, 엘리트들이 민중을 오천년간 수탈해온 부끄러운 역사 위에 처음으로 수탈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희생하는 엘리트, 기독교인 엘리트, 나라의 왕조의 멸망을 단축했던 불교나 유교와 달리 한 나라의 문명을 새롭게 하는 기독교, 수도사 같은 기독교, 그런 기독교인들의 출현, 이게 바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입니다. 결론 맺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밀접한 공감과 친교와 순종 속에서 생명력이 나옵니다. 완전한 순종의 화신인 예수 안에는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력, 순종의 힘으로 집적된 생명 에너지야 말로 사람들이 살아갈 힘을 줍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는 것처럼 못 느낍니다. 우리가 사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사랑할 때만 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할 때만 산다는 느낌을 갖도록 설계가 돼 있습니다. 내가 남을 착취할 때는 산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생기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의 생기입니다. 언제 우리가 산다고 느끼느냐면, 내가 생명이 있다고 느끼는 딱 한 순간 밖에 없도록 창조해놨습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만,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내 안에 생명이 있구나, 라고 느끼도록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리스도적 순종을 집적시키는 삶을 나날이 축적해갈 때 이 사람들 안에 예수의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고, 이 생명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곳마다 어둠의 암흑물질들은 물러가고 사람이 살만한 생명왕국이 창조된다, 가향공동체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적 순종의 집적자들로써 빛을 모아서 에너지를 만드는 태양열처럼, 그리스도를 많이 모방하는 사람들 옆에서 모방을 배우고, 말씀 많이 읽고 기도하여 일상의 자리에서, 충무로와 을지로와 세종로에서 순종을 집적시켜가는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는 빛의 조명을 받아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영접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이 나오는 거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다섯 가지입니다. 강남경찰서에서 붙들린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검사야, 이때 아들권세와 다릅니다. 아들의 권세는 순종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권세입니다. 즉 율법의 요구를 행할 능력을 부여 받음, 둘째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에 참여할 자격을 얻음, 셋째 하나님과 밀접하고 은밀한 교제와 친밀한 동행과 끊임없는 보호를 경험함,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이것이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 자녀로 살면서 너무나 은밀하게 하나님 돌보심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확신이 굳어집니다. 넷째 하나님 성품을 닮아감, 이게 권세입니다. 성품이 좋은 사람은 출세를 오래 유지합니다. 성품이 좋은 사람만이 성공을 오래 유지합니다. 성품이 좋은 것은 토플점수 미적분 실력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좋은 성품이야말로 출세의 완전한 담지자입니다. 성질 더럽고 성품이 더러우면 빨리 출세해도 출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천문학적 자산가치가 있습니다. 온유함 정직함 겸손함 성내지 않음, 너무 천문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뇌물 안 받음, 뇌물 받자마자 경련이 일어남, 이런 건 온전히 출세를 보장해줍니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의 전위부대이자 그림자인 교회공동체에 소속되어 정서적 심리적 정신적 고독을 완전히 몰아냄, 우정의 재발견, 공동체의 재발견, 이것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의 가장 실질적인 수혜물입니다. 여러분 모두 빛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가향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어둠의 시원적 질서 위에 빛이 창조된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께 매순간 순종을 바치지 않으면 어둠의 영역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안에 있는 넘치는 생명력이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로 빛을 발하는 작은 우주 창조자 되게 도와주시고, 가향이 어둠의 흑암 물질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 빛의 공동체로 살도록 용기주시고 성령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0) | 2021.12.09 |
---|---|
사 40:27-31 하나님의 능력 : 희망 고통 / 배정훈 교수(대전신대) (0) | 2021.12.09 |
요한복음 4:35-42(예배설교)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의 세대간 동역) (0) | 2021.12.09 |
8강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에 참여함 (마지막 강의) (0) | 2021.12.09 |
7강 예수 부활 이전과 이후 (김재진 교수) (0) | 2021.12.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