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리모델링
행 18:24-26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불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
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
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
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도 이제는 오래되어서 금년으로 48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신앙이 참 참신했었습니다. 신앙이 뜨겁고 신선하고 참신하고 눈물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영적 생활이고 생명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눈물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가 천년을 넘기고 안정이 되다보니까 중세교회시대에 와서는 그 참신하고 신선하던 신앙이 점점 침체되고 습관화되고 안주하면서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마침내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종교가 이렇게 되면 그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생명력과 영적 요소들이 사라지고 윤리신앙으로 도덕신앙으로 전락되게 됩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참신한 신앙인들이 “이것이 아니다” 하고 기독교를 정화하고 회복하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종교를 개혁하려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정화하고 회복하고 잃은 생명력을 되찾으려 했지만 너무 신앙이 타락하고 곪았습니다. 그래서 개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개혁의 역사가 벌써 금년으로 48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말하자면 신앙을 리모델링 하자는 운동입니다. 낡고 구태의연하고 생명력을 잃은 기독교를 새롭게 하고 감각을 되살리고 원래의 기독교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묵은 신앙을 갈아엎고 구태의연한 신앙을 새롭게 회복하자는 신앙의 리모델링운동 입니다.
오늘은 리모델링 시대입니다. 요 근래에 와서 리모델링이라는 말이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일입니다. 헌집을 새롭게 고치면 새집 같이 됩니다. 집을 헐고 다시 짓는 것 보다 리모델링하면 얼마든지 환경을 새롭게 만들어 살수 있습니다. 요즘엔 중년의 나이 사람들이 인생도 리모델링합니다. 요즘 중년의 남성들이 외모에 참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피부도 관리하고 머리도 염색하고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여성분들은 이제는 화장하고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아예 얼굴을 뜯어고치는 리모델링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앉아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감을 되찾고 무엇인가 개선하려는 의지가 좋지 않습니까.
생명체는 무엇이든 그냥 앉아있으면 쇠퇴합니다. 물과 자연도 그냥 놔두면 구태의연해지고 더러워집니다. 물도 항상 잔잔하게 놔두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생명력을 위해서 때로 태풍을 보내시고 강한 바람을 불게 하시고 홍수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깎이고 부서지고 깨질 것은 깨져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가만히 있으면 구태의연해지고 생명력이 떨어집니다. 신앙이야말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무력해지고 나약해지고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신앙도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중세교회시대 때는 교회도 신앙도 참 구태의연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너무 안주하고 편안함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세속에 관심을 가졌고 즐기는데 집착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중세교회는 그 신앙이 완전히 세속화되어 갔습니다.
여러분, 종교가 세속화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중세교회가 무력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무시되고 인위적인 신학이 판을 쳤습니다. 교황은 신격화되었고 교직은 사고 팔고 신앙은 완전히 형식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중세 기독교가 무슨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할 일을 했겠습니까. 그때 루터를 비롯한 뜻있는 신앙인들이 안되겠다 싶어 죽음을 무릅쓰고 개혁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자 숨죽이고 있던 다수 신앙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불같이 일어나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리모델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신앙을 리모델링하지 않았더라면 중세교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50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신앙은 또 한번 리모델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가라앉아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에 감격이 없어졌습니다. 기쁨도 없어졌습니다. 눈물도 없어졌습니다. 떨림도 없어졌습니다. 모두 생명력을 잃고 주일날 한시간 예배드리는 일로 일주일 내내 신앙에서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극히 형식적 신앙으로 흘러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신앙도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리모델링 할 부분 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나 신앙인들이나 설교에서 말씀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윤리강의를 하고 철학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은 일주일 내내 방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그대로 놓여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이 성경책을 신앙의 중심처럼 중히 여겼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성경책이 빨간색을 칠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은 빨간 책이었습니다. 그 모습만으로도 성경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자랄 때 사람들은 밀주를 담아 먹었습니다. 그러면 읍에서 조사를 나왔습니다. 조사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비상입니다. 우리 집은 동네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집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훤히 열린 방안 책상 위에 그 빨간 성경책이 놓여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조사원이 “예수 믿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두말 없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온 동네 사람들은 성경책을 사다 방에 놓는 열풍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책이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성경이 무시되고 말씀이 사장되고 읽지도 않고 묵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이 말씀이 엉뚱하게 해석되어 사람들을 혼돈 시키게 만들기도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는 일반 신앙인들은 성경책을 읽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 기독교가 암흑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배를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21세기를 가리켜서 예배의 위기시대라고 합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신앙문화가 많이 변했습니다. 한마디로 놀이문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매우 형식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두 예배를 간단히 드려버리려는 것이 이 시대의 풍조입니다. 그 예배에 무슨 감격과 은혜와 사모함과 진지함과 깊이가 있고 진한 느낌이 있겠습니까. 요즘은 조금 빠르고 복음적인 찬송을 부르면 찬송이 잘못되고 큰 오류나 범하는 것 처럼 난리입니다. 그리고 찬송을 꼭 애국가 부르듯 부동자세로 굳은 얼굴로 부릅니다. 그렇게 120년 동안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해야 예배인 것 처럼 알고 있습니다. 감격이 없고 은혜가 없고 진한 느낌이 없는 예배, 모두 권위주의에 매여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루빨리 예배를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예배에 생명력이 없으니까 사람들도 안나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받으려고 하나님이 오시겠습니까.
교회는 천막으로 지어도 괜찮습니다. 컨세트로 지어도 좋습니다. 벽돌로 그냥 지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 예배는 살아있어야 하고 그 예배에는 반드시 은혜와 감동과 눈물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이고 교회입니다. 중세 교회 때는 교회가 웅장했었습니다. 그런 교회를 짓다가 돈이 부족해서 면죄부까지 팔았습니다. 거기다 웅장한 오르간가지 갖다 놓았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웅장하게 지어 놓으면 무얼 합니까. 그 속에 예배가 없는데.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눈물과 감동과 섭리가 없는 예배인데. 생명력을 잃은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빨리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 번째는 “성례전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성례전은 세례와 성찬을 일컫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세례와 성찬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형식인줄 압니다. 세례가 형식이면 예수님이 왜 굳이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까지 요한을 찾아갔겠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이 증거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을 때 영적으로 이 증거가 이루어집니다.
또 성찬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이 성찬은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서 성찬을 나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성찬을 지극히 형식적으로 일년에 한두 번만 행합니다. 그리고 카톨릭은 반대로 이것을 너무 우상시해서 매주일 행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에 넘어가는 순간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너무 해석이 지나칩니다. 우리들이 성찬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 성례를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성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은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나의 나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그리고 내가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인정하십니까. 이 은혜가 얼마나 깊고 크고 소중합니까. 그래서 이 은혜에는 값이 없습니다. 그 값이 너무 커서 값을 매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공기를 마실 때 옆구리에 메타기를 달아 매놓고 돈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공기를 아껴 마시느라고 법석을 떨 것입니다. 공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빚을 내서라도 마셔야 하는 고마운 생명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하나님이 세상에 그냥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은총이라, 긍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 된 것은 면죄부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루터시대 카톨릭은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죄사함은 면죄부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흥분한 것입니다. 구원은 공로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더구나 면죄부도 아니고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신앙을 리모델링하고 바로 잡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새롭게 고쳐야 하고 바로잡아야 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오늘 신앙은 거의 전부가 은혜와 은총과 긍휼을 얻기 위한 신앙이 아니고 거의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고, 철야하고, 산기도를 갑니다.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내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내용이 모두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은총이 얼마나 크고 중대한데 그것에 대한 감격이나 감사는 없고 잘되게 해 달라는 믿음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이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예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시고 구세주이시고 순전히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받고 죽으시고 수모 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같은 역할을 예수말고 또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너무 커서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 후로 바울은 너무나 큰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입만 열면 오직 예수만 흘러나왔습니다. 바울의 몸속에는 온통 예수의 피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서 이 예수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생활에서 예수가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의식 속에서 예수가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알렉산드리아에 아불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전도자이고 웅변가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화려하게 웅변했던 사람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불로가 웅변을 하면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거기다 성경을 보면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언변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이 사람이 복음을 전했으니 얼마나 그 달변으로 잘 전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운집했을 것입니다.
그때 아굴라 부부가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아불로의 설교를 듣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아불로는 웅변에 능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설교를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령체험이 없고 예수를 몰랐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영감이 없습니다. 실제로 아불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성령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성령을 모르는데 예수를 어떻게 깊이 알겠습니까. 유창한 웅변으로 설교는 했지만 힘있게 예수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굴라 부부가 그를 조용히 방문해서 성경을 가르쳐주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불로를 조용히 앉혀놓고 복음과 성령과 예수에 대해서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이 체험이 없으면서 사람들이 성경을 풀고 예수를 전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해되고 굴절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패했다느니, 인간의 아들이라느니, 부활하지 않았다느니, 구원은 공로로 얻어진다느니, 예수는 3대 성인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알지 말고 말로만 예수를 찾지 말고 이제는 예수가 내 인생을 주관하고 이끌고 그 예수께 내 전부를 맡길 수 있는 그런 신앙으로 거듭나고 회복되고 내 신앙이 리모델링 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 신앙 안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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