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성
사 49:14-15
여인이 어찌 그 져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일본에 내촌감삼이라는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사랑을 가리켜서 “그림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내가 환경이 좋고 수입이 좋고 형편이 좋아야 친구가 있고 애인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없으면 친구도 떠나고 애인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그림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렇게 하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에는 이렇게 허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태에서 난 아이를 버리기도 합니다. 짐승도 이 기본적인 본능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건을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그 조건이 상실되면 그 사랑도 버립니다.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들입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이렇게 허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촌감삼은 이 같은 인간의 사랑은 그림자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형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여기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당시 고난받던 백성들이 고난이 너무 길고 어려우니까 하나님께 호소하고 눈물로 탄원했는데도 무반응입니다. 기다려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아니면 우리를 잊으셨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응답이 너무 늦으면 사람들은 별 생각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형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만을 말해왔습니다. 공의, 섭리, 심판, 역사, 능력, 충만 같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의 표현이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땅에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도 관심 가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공중의 새한 마리는 참 하찮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죽는지 우리는 관심도 없고 보살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들은 이 땅에서 별로 존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와서 사람들이 자연과 동물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을 갖다 보니까 좀 어설픈 모습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엊그제 보니까 어떤 할머니가 등에 아이를 엎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어린아이가 아니고 개를 아기처럼 등에 엎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여인은 죽은 강아지를 들고 교회로 목사님을 찾아와 장례식을 치러달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죽은 강아지 장례 치르는 곳이 아니라고 하니까 아쉬운 듯 돌아가다가 되돌아서서 “이 강아지에게 상속된 재산이 2억 원인데 장례식을 치러주면 다 주려고 했는데”하고 돌아갑니다. 그때 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그러면 진작 말씀하지 않았느냐고 좇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웃지 못할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공중의 참새 한 마리, 들에 핀 백합 한 송이 뭐가 대단합니까. 말이 백합이지 우리나라는 백합이 들에 피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백합은 들에 핀 야생화를 말합니다. 들에 핀 야생화 하나, 그것이 뭐 대단합니까. 그런데도 예수께서 참새 한 마리를 강조하셨고 들에 핀 야생화 한 송이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참새나 야생화가 대단해서가 아니고 인간의 소중함의 의미와 값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참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고 들에 핀 야생화 하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찮은 것이지만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면서 “하물며”라는 부사를 사용했습니다. 그 말은 “더군다나” 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너희야 말하면 뭐하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성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상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내 사정을 모르십니다. 앞길이 콱 막혀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제사 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참 답답하고 암담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는가, 나를 잊으셨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정신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버리고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공중의 새한 마리도 먹이시고 들의 야생화 한 포기도 기르시는 하나님이신 데 그 하나님을 의심할 여지가 무엇입니까. 이 백성들이 그런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너를 낳은 어미는 너를 잊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결코 잊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관심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걱정을 많이 합니다. 마치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하나님의 자상하신 모성의 사랑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의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관심가지십니다.
여러분은 머리에 난 머리카락이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머리감다 머리가 빠져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머리카락 중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그렇게 자상하고 세밀하시다 는 말씀입니다. 또 그 말은 이 세상에 사람이 머리카락처럼 많아도 하나님은 나 한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 한사람, 얼마나 중요한 대상입니까.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내가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나 한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치 사람들이 무심코 던져버리는 머리카락 하나에도 관심 갖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나”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나는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를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몸이 쇠약했을 때 움직이고 새벽기도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요”하고 기도했더니 그 다음날 새벽부터 새벽마다 날 깨우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인구가 얼마입니까. 그 많은 인구가운데 하나님은 새벽마다 정확하게 나를 찾으셔서 깨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관심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카락 하나에도 관심을 가진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해서 섭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대충 넘어갑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대충이 없고 아주 세밀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고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성입니다.
세 번째는 “과부의 손에서 떨어지는 동전의 의미를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헤아리십니다. 사람들은 나의 깊은 마음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헤아리시고 이해하십니다. 우리들이 조용히 무명으로 이웃을 도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들이 무명으로 헌금을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향기입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어느 가난한 과부의 부잘 것 없는 두개의 동전을 헌금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많은 돈을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헌금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 모습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는 전 재산을 넣었느니라”. 주님은 그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향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헤아리시는 그 위로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은밀한 삶, 은밀한 헌신, 은밀한 봉사, 은밀한 선행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향기롭게 하십니다.
미국에 이사벨이라는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치료를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때 한국전이 터졌습니다. 거리로 내몰린 전쟁고아들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유산을 아무도 모르게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 기금으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여인은 죽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 때 아내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유산을 헌금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2주년 기념식 날 이 남편이 초청을 받고 학교에 와 보니까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도 자기의 재산을 모두 헌금했습니다. 그 기금으로 지어진 학교가 부산의 이사벨 학교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향기가 있습니다. 은밀하게 보내어진 기금이 싹이 나고 성장해서 오늘 이렇게 소중한 열매를 맺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해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을 마침내 이렇게 향기 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동전을 넣는 그 과부의 손길과 마음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는 “굶주리고 실패하고 병들고 배고픈 아이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어떤 고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배고픔의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분은 그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모릅니다. 내 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고통이 어떤 고통이겠습니까. 그래도 어른들은 배고픔의 이유를 아니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배고픔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더 울부짖습니다. 내 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고 앙상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 할 수 있는 일입니까.
TV에 비친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배만 불쑥하고 뼈가 앙상한 아이들의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해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이것이 아닌데 하는 아픔이 주어지고 또 이 아이들이 커서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앞섭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이 지구촌의 사람들의 가슴이 저려오고 아파 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굶주린 자, 병자, 불행인 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고 양심이 떨려오도록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사명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자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마음에는 양심의 등불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 빛나는 양심의 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행복한 사람, 건강한 사람, 기쁜 일, 웃을 일을 만드셨고 또 세상에 가난과 불행과 아픔을 만드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의 양심이 발동해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어떤 아이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헌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 아이를 놓고 아이들이 놀렸습니다. “너는 예수 믿는 아이인데 하나님이 정말 너를 사랑하신다면 왜 네 모습이 이 모양이냐”. 그때 이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이 듣지 못하고 있는 거야”. 왜 듣지 못하고 있느냐 하면 양심이 녹슬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일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함께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떤 아이가 뇌종양으로 머리를 깎고 수술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퇴원을 해서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내 머리 때문에 놀려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사정을 전해들은 반 아이들이 친구를 위로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의논하던 중에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깎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오랜만에 학교에 와 보니까 반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빡빡 깎고 있습니다. 그 순간 이 아이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것이 이웃과 함께 하는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고 마음입니다. 이런 정신이 세상을 건강하게 인류사회를 아름답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병들고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위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을 보내서 격려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에 보면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와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찾아오셔서 격려를 하십니다. 엘리야가 이세벨과 싸우다 지쳐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간할 때 하나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엘리야를 위로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위로를 받고 힘을 내서 호렙산에 무사히 도착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흡사 우리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마음은 우리 부모님들 마음과 그렇게 흡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건강한 자식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가난한 자식에게 더 애착을 쏟으십니다. 어떤 어머니는 여러 형제 중에 한 아이가 전신 마비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전신이 뒤틀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여러 형제들 놔두고 그 아이에게 정을 쏟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자식들 중에 이 아이가 제일 예쁘다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정말 예뻐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세상에서 지치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병든 사람에게 온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마치 상하고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존재들까지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값이 없는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성의 사랑이 본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주님께 드린 사람! (시 19:1-14) (0) | 2021.12.09 |
---|---|
하나님, 이 사람은 다시 살려주십시오! (행 9:32-43) (0) | 2021.12.09 |
신앙의 리모델링! (행 18:24-26) (0) | 2021.12.09 |
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0) | 2021.12.09 |
사 40:27-31 하나님의 능력 : 희망 고통 / 배정훈 교수(대전신대) (0) | 2021.12.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