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사 40:27-31 하나님의 능력 : 희망 고통 / 배정훈 교수(대전신대)

by 【고동엽】 2021. 12. 9.

사 40:27-31 하나님의 능력 : 희망 고통 / 배정훈 교수(대전신대)

얼마전에 한국의 신문 지상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전해졌습니다. 서른살인 청년이 육십이 다 된 할머니를 무차별하게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청년이 할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가 젊어서 결혼을 하여 이 청년을 낳았는데 남편이 일찍 죽어서 할수없이 이 아이를 버려두고 재가를 하고 말았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아무도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지 않는 그런 어린 시절, 사랑이 몹시도 고픈 시절을 살았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할까?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나를 버렸을까 눈물겨운 날들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재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아이는 분노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자기 인생의 불행의 근본 원인을 어머니에게 돌렸습니다. 그의 인생이 잘 풀렸다면 모르겠는데 무직인 것을 보면 서른이 되기까지 밑바닥 인생을 산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청년은 자기 인생의 한을 풀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풀이를 시작했고 마침내는 잔인하게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과연 재가한 어머니의 책임입니까? 아니면 버림받은 아이의 책임입니까?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래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버림받았다는 슬픔 때문에 이를 갈았을 이 청년의 마음입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힘과 용기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은 우리가 우리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버림받았으며,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회복되고 치유되기까지는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심정은 바로 이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신다더니 나를 영원히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을 보호하시리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이 실제로는 멸망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살륙을 당하고 대부분의 지도자급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뒤늦게서야 자신들의 멸망의 원인이 불순종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70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한 기한은 다되었는데 이제 여호와는 죽었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을 버렸구나 하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음성을 들려주고 계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절망에 갇혀있는 이스라엘의 탄식소리를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7: 야곱아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 탄식소리는 신앙을 포기한 자들의 절망이나, 배교가 아닙니다. 이 탄식소리는 안타깝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통곡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약속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백성인데 어찌하여 나라는 멸망해 버리고, 이 처참한 굴욕을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왜 우리들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얼굴을 우리로부터 숨기십니까? 이방 민족인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이제는 복역의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이제는 회복의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당신께서 정말 능력이 있다면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

이 탄식소리는 인간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 갔을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이러한 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이러한 축복만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이러한 비극이 주어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이러한 탄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을 통해 배운 신앙을 가졌던지, 나이가 들어 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지, 대부분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납득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절망에 빠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절망이라는 말은 단지 어려움이 있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보다 믿음이 커서 능히 이 곤경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어려움이 있다해도 믿음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절망입니다. 절망이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느낄 때를 뜻합니다. 절망이란 더 이상 지불능력이 없는 사람이 은행에 파산선고를 내듯 내 삶의 마지막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두 남녀가 사랑을 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항상 일등만 하면서 최고 학부를 다니며 교수를 하기까지 인생에 있어서 자신만만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이런 장담을 했습니다. 너도 천재이고 나도 천재이니 우리가 애를 낳으면 아마 천재의 제곱은 되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자가 낳은 아이는 정신 박약아였습니다. 설마 이럴수가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은 아이가 보통아도 아니고 정신 박약아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잖아!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 자식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숨겨 기르면서 늘 수심에 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자신들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들이 마침내 겸손해져서 하나님앞 에 신앙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절망은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인간의 한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자기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기고만장하고 교만하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 앞에 섰을 때에 그래서 그 한계 때문에 절망하고 눈물 흘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꿈을 가지고 이 미국에 찾아온 한국인들은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경험합니까? 문화적인 충격, 언어적인 충격, 인종차별, 등의 충격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미국에 가면 무궁무진한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미국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번 두번 좌절을 경험하고 무력감에 빠집니다. 맨주먹으로 고생하며 돈을 벌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실의에 빠져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뛰어 다니던 어느날 나의 사랑하는 가정이 무너져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집니다. 망가진 나의 건강, 지옥같은 나의 가정, 불편한 인간관계, 무엇보다도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기쁨을 회복하지 못하고 매일 무감각하고 습관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우리에게 신앙적인 좌절이 찾아 옵니다. 이러한 좌절과 절망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거기에 나의 원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추구해 왔는지 돌이켜 보게 만듭니다. 나를 사로 잡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절망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우리의 자아를 용광로에 집어 넣은 것같이 우리를 새로 지으십니다. 이 절망의 순간은 견딜 수 없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앞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혼자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앞에 항복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절망을 희망과 축복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둘째, 피곤에 지친 현실만 바라보지 않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탄식의 그 자리에서,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역설적인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기 원하십니다.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여기에 하나님이 영원하신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의 힘의 거대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열방을 정복한 바벨론은 정치적이나 경제적이나 종교적으로 위대한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미국의 거대한 땅을 구경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우습게 여기고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듯이 거대한 바벨론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가르쳐 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벨론도 역시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바벨론도 역시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힘보다 더 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너무 위대해 보여서 우리의 힘으로는 꿈쩍할 것 같지 않는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도 하나님은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차고 번성하고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느꼈던 무력감은 우리도 역시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모여 신앙을 이야기할 때에는 당장 순교라도 불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흩어져 세상의 한복판에 서면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 예수를 믿었었나 하는 것처럼 무력하게 세상에 타협하고 맙니다.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는 그 모든 세력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신앙고백 위에서만이 우리는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 자신은 초라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거대한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던 열두명의 정탐자들가운데,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 자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거대하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낙심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은 나를 포함한 모든 세력이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하나님과의 연관성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삶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우리의 결론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서있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한계 끝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모조품으로 신앙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까?

30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나 장정들이 갖는 인간적인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집니다. 거대해보이는 바벨론이나 미국의 힘을 의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하여 당장에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힘은 내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그 결과로 겉으로 나타나는 힘입니다. 여러분을 하루하루 지탱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대하기 익숙한 사람들입니까? 그동안 모아놓은 돈입니까? 나의 직업의 전문적인 지식입니까? 이런 것들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내안에 참된 기쁨을 만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넘어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에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주시는 근본적인 힘이 내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일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내 중심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그분의 숨결을 느껴야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서울에 봉천동에 가면 윤주홍 외과가 있습니다. 이분이 시민 대상을 타고나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이분의 꿈은 의사가 되어서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의사가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이 생각은 다 버리게 되고 교회도 잘 안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가 잘 나는 자리에서 병원을 하여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어느날 병원 근처에서 사고소리가 나서 또 한 건 걸렸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막상 병원에 데리고 온 사람은 바로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서둘러 수술을 했지만 이 딸 아이는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교통사고 환자가 전문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사라져간 딸아이의 죽음으로 이 아버지는 시름에 차고, 삶의 의욕을 잃어 병원을 정리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낙은 딸 아이 산소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병원앞에서 어느 소녀가 병원비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친구 병원에 데려다 주고 자신이 병원비를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소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의사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소녀의 가슴에 대었습니다.

그 순간 힘찬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는 그동안 돈때문에 한눈 먼 아버지의 양심을 두드리는 딸 아이의 생명의 고동소리였습니다. 딸의 생명은 아버지의 심장에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이분은 다시 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살려던 이 능력있는 의사는 마침내 넘어지고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절망속에서 하나님은 그가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겸손하게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에 그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위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그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혹시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의 한계와 절망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지는 않았습니까? 자신의 한계가 보이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아무런 방향이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며 나는 피조물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지나간 나의 눈물의 기간들은 나의 죄의 댓가를 위해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고통스러운 나날들은 나의 연단을 위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한 연단일지도 모릅니다. 절망하여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것을 남김없이 내려놓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세상이 주는 그 평안이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세상의 지혜와 안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안에 좌정하셔서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이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몸으로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로다.”

1993. 8. 18. 엘림교회 (배정훈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