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스페인 영에 속해 있던 리 스본 도시, 지금은 포르투갈의 수도 가 되어 있죠? 이 항구 도시에 해안 마지막 끝나는 곳에 큰 암석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nothing behind.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 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제 일당의 무리들과 배를 타면서 이렇 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는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 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 이 름이 크리스토퍼스 콜롬버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5세기 말에 유럽 남부는 두 차례 걸친 커다란 지진을 겪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다니면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 시킨 사람이 바로 이 콜럼버스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미 대륙을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 었습니다. 그보다 휠씬 오래 전에 A.D 64년 7월 여름 어느날 저 로마 의 중심가에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 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저 유명 한 네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 다. 그는 불타는 로마의 도시를 바 라보면서 그는 광적으로 춤을 추면 서 시를 지어 노래 했습니다. 그러 나 이어서 성난 로마 군중들의 항의 가 시작되자 그에게는 희생양이 필 요했고 크리스챤들이 방화의 주인공 이라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줄줄이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십자형에 서 참수를 당하기도 했고 더러는 야 생 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길길이 찢기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로마를 떠났 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찾아갔 습니다. 소아시아의 그 암열, 그 바 위 굴속에 들어가 피신해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굴속으로 피신했던 그 들은 다시는 아마도 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 다. 바로 이때 흩어진 이 크리스챤 가운데 가장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 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들 에게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 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흩어진 나그네 이 도시들 가운데 보면 갑바 도기아 라는 지명이 있죠? 우리는 로마에 방문 하면서 로마의 카타콤 의 그 동굴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 다. 그러나 여러분이 터키를 방문하 고 갑바도기아의 이 암굴 도시를 보신 분들은 로마의 카타콤은 문자 그대로 새발의 피라는 것을 발견하 게 될 것입니다. 이 도시 전체가 거 대한 바위의 굴로 만들어져 있습니 다. 거기서 바로 이 시대의 크리스 챤들이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서 공동생활을 시작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 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 네, 거기에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의 편지는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3절을 다같 이 한번 읽겠어요. 3절 다같이 시 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 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3절에서 우리가 주 목할만한 한 단어는 산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이라는 단어입 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 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 합니다. 참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맞이 합니다. 아마도 한해의 마지막 주일 치고 금년처럼 우울한 주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요즘은 대화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IMF소식입니 다. 춥고 우울한 민족 겨울의 이야 기 속에서 우리는 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 드로는 당시의 크리스챤들에게 편지 를 썼던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희 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문에서 선포합니다. 우리 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그 이유 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로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부 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 리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주일 의 의미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주일, 이 날에 모여서 하나님을 경 배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예배일은 안식 일 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금요일 날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날 해가 질 때까지 전통적인 유대인 들의 안식일이 였습니다. 그것은 지 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은 아직도 토요일 날에 그들은 회당 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 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 적이고 전통을 지키는 일에 철저한 민족이 있다면 유대 민족일 것입니 다. 그들은 이것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하 면 절대로 변경하지 않습니다. 아직 도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고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아집을 깨뜨리고 토요일이 아닌 안 식일 다음날 안식 후 첫 날, 주일날 일단의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날. 그들의 전통을 깨뜨리고 주일에 모이기 시작한 그 이유가 어디에 있 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이날에 만났기 때 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사건 전후로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비박산이 되서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 였습니다. 그들은 다 흩어졌어요. 드 디어 그들의 메시아 라고 믿었던 예 수가 십자가에 죽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체념했 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보따리 를 싸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리고 다시는 악몽 같았던 예수와의 함께 했던 시간들은 잊어버리자고 그들은 약속한 듯 흩어져 갔어요. 흩어져간 제자들. 사라진 제자들. 체 념해 버린 제자들. 그런데 한순간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 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 동체로 그들은 태어났습니다. 무엇 이 이 변화를 가져 다 주었습니까?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 변화에 대 한 가능한 역사적 설명은 꼭 하나밖 에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을 만났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흩 어질 때 이름 모를 예수의 두 제자 그들도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 라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죠? 누가 복음 마지막 장의 스토리입니다. 슬 픈 기색을 띠고 그들은 낙심하면서 고향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두 제자도 발걸음을 돌이킵 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 리고 복음을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바치는 제자로 새롭게 일어섭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부활하 신 주님이 엠마오 길을 향하던 두 제자 곁에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러 나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몰 랐던 두 제자는 여전히 낯선 나그네 와 힘없는 무력한 그들의 절망을 고 백하는 대화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두 제자와 성경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풀어 주신 말씀 예수님의 성경이야기를 들으면 어떨까요? 이 두 제자는 갑 자기 가슴이 뜨거워 졌죠. 그리고 자기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던 그 상대방 또 앉아서 식탁을, 자리에 앉아서 교제를 하던 바로 그분이 부 활하신 주님인 것을 바라보던 한 순 간 이 제자들의 모든 것이 변합니 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생명 을 던집니다.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 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 이 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는 이 주일에 모입니다. 왜 그렇습니 까?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 성령으로 임 재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신 주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 시는 주님, 그리고 엠마오 길에 두 제자와 동행하시던 동일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좀 달라지겠죠? 그런데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 주님을 만난 분들 같지가 않아요. 다. 무력한 모습이 예요. 너 무나.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개혁의 말기에 지쳤습니 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 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자리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넋두리 처 럼 이제 모든 것은 끝났소. 끝났소. 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마 틴 루터의 아내가 어느날 상복을 입 고 방에 들어왔어요. 상복을 입고. 그러니까 루터가 깜짝 놀래 갖고 아 니 누가 죽었소? 하니까, 예.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 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 슨 소리요. 루터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릃 아니 하나님이 안 돌 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있을 탓이 있겠소. 아 이 아내의 한 마디 가 루터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 지. 살아계시지.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는 다시 그의 미션을 수행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오늘 이 3절 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왜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3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 까? 시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부활 하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 니까?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거듭납니다. 이 거 듭남은 일종의 우리의 부활 사건이 라고 할 수가 있어요. 다시 사신 주 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일종의 영적 부활이 예요. 다시 소 생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신 앙의 근겁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 들 안에 주께서는 오시사 부활하신 주님 성령으로 임재 하시사 우리 안 에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 습니다. 이 희망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주님. 새 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 리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 다면 참 우리가 이렇게 무력한 자리에 앉아 있을 이 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그 미국교회에 어느 날 청 년들의 연극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극이 나사로의 ,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이 였어요. 인상적인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동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이런 질 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 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 에게 달라진 것이 뭡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뭐가 달 라질까요? 그런데 나사로가 이런 대 답을 해요.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 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 이 왜 생기 냐면 알지 못하는 대서 오지 않습니까? 미지의. 미지의 사 실. 모른다는 공폽니다. 죽어보지 못 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 어요. 다시 산 나사로에게 두려움이 없었어요. 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 신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우리 안 에 오셨어요. 무엇보다도 달라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소망입니다. 소망.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면 살아계신 주 뭐예요? 나의 참된 소 망. 저는 근데 이 복음성가의 그 가 사가 영어의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살렸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데 후렴 에 보시면 아주 좋습니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 문에 all fear is gone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living 삶은 살만한 가 치가 있는 것 그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 날 수가 있다. I can face tomorrow.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다. 여러분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나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소유하고 그분과 더 불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정황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절망 은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 습니다.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십니다. 왜 무력한 자리에 계 십니까? 성경은 말하시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 사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 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희 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또 한 가지 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영 원한 기업을 우리가 약속 받았기 때 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 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 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어 오는 소리가 기업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 됬다. 어저께는 또 보니까 뭐 불루힐도 무너졌다. 화의 신청이 들어왔다. 계속 기업 소릴 듣습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업니다. 이 것은 심지어 1세기 크리스챤들에게 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 른 그들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 에서 그 기업 앞에서 무너져가는 기 업 앞에서 초대 크리스챤들이 드렸 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여러분 읽어 보세요.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다 찾아보세 요. 저 유명한 히브리서 11장. 믿음 의 장 직전 장인 히브리서 10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 장 3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 까요? 히브리서 10장 34절 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 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그들의 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 다.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하고 다른 것은 뭐예요?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했습니까? 기쁘 게 당한 것은, 그랬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뭐라 그랬습 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이 지상의 기업을 잃어버리면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 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낫고 영구한 산 업,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업 흔들릴 수 없는 기업 영원한 기업을 소유했 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의 권한과 시련을 이기는 초대 크리스챤의 저 력이요 dynamic한 생동하는 믿음의 근거였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합 니다. 자, 다시 베드로 전서 1장 4절 의 말씀입니다. 자, 베드로 전서 1장 4절 본문을 한번 더 같이 읽겠습니 다. 시작!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 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네, 하늘나라의 기업을 얘기하고 있어요. 자, 이 기업을 가 리켜서 어떤 기업이라고 설명했습니 까? 세 가지 특성을 말했는데 썩지 아니하는 기업, 영원한 기업입니다. 더럽힐 수 없는 기업, 이것은 거룩 한 기업입니다, 그다음에 쇠하지 아 니하는 기업 불멸의 기업. 그 영원 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예비 하셨 다. 어디에? 하늘에 간직한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기업이 있어요. 다 빼앗겨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 한 기업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 비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자, 이 소망의 기업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 장 하시는가. 자, 그 다음 절을 읽어 보세요. 5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 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 기업만은 아무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부도 낼 수 없는 기 업. 빼앗길 수 없는 기업, 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무엇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요? 하나님 자신의 능력 으로 지키심을 받습니다. 이 기업이 영구히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 다. 저는 오늘 우리 이 시대야 말로 천국 소망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해 요. 천국소망. 천국소망과 천국 신앙 의 회복. 이것은 우리 시대 크리스 챤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 앙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동 안 소위 지식인들이 한국교회의 신 앙을 비판할 때 두 가지 비판을 많 이 했어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 이 타계 신앙적이고 둘째는 기복 신 앙에 빠져있다. 이런 비판을 참 많 이 했습니다. 이 비판의 상당한 내 용은 정직한 비판이에요. 그것은 부 인할 수 없는 비판 받아 마땅한 요 소들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 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비판이 전체적으 로 정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하면 교인들이 지나치게 세상적인 축복에만 매달린다. 믿지 않는 사람 들과 꼭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사 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똑같다. 믿 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기복신 앙에 매달려 있다. 이 비판은 상당 한 부분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을 할 때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 꼭 같이 나오는 것이 타계 신앙 이 예요. 지나치게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타계신앙을 갖고 있다. 이 역사를 몰라라 하고 천당만 바라보 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묶어서 비판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비판은 정확한 비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들이 기복 신앙에 빠진 이 유가 어디 있냐면 타계신앙이 없어 서 그래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 요. 여러분 천국 믿으세요? 가끔가 다가 의심이 생겨 갖고. 정말 믿어 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 하셨다. 정말 믿으십니 까? 정말 믿는 다면 이 땅에서 조금 못 살아도 괜찮아요. 그 발버둥 치 면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 요. 왜 기복신앙에 빠지냐 이 말이 예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진 정한 의미에서 천국신앙. 하늘의 하 나님이 의롭게 산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보상의 세계. 그리 고 천국에 의한 믿음 이 하나님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셨다. 이 사실 을 참으로 믿는다면 세속적인 어떤 작은 이윤이나 이익에 매달려서 몸 부림을 치는 그런 life style을 가져 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 천국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계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 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 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 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 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챤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 예요.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 다면 오 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땅 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 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 학 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추석 때 혹은 이 구정 설 날 때 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 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 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네,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 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 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 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 은 어려움 견딜만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 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 다.
세 번째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 지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련이 가 져올 믿음의 유익 때문입니다. 오늘 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구체적인 유익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의 소망만이 우리가 가진 본질 적 소망이 아니라 또 그 소망과 더 불어 이 땅에서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유익 가운데 하나는 지 금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요. 시련이 없 이 믿음은 강화되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통해 서 반드시 체험할 수 있는 유익 중 에 하나는 내 신앙이 강화 된다는 사실이 에. 다 그런 건 아니 예요.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성도라 면 그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 질 것 입니다.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더 깨끗 해 질 것입니다. 자,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그러 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 여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 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 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 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형형색색 의 시험을 만나요. 자, 이 시험 앞에 서 우리도 근심합니다. 성도들 근심 해요. 자,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어요? 어떤 사람이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절대로 근심하지 않고 산다. 그러면 저는 그가 사람인 것을 의심 하겠습니다. 네, 근심하는 것은 당연 해요. 당연해요. 여기도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했 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잠간 그랬어요. 잠간 근 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 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근심은.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그 다음 절이 대답을 들려주죠?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믿음의 시 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 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 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 게 하려 함이라.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7절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시험이 결국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화 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하신 시련이 예 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내가 이 시험을 제대로 크리스챤답 게 통과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믿음 의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입니 까? 이것은 주님 앞에 서는 날, 내 가 칭찬 받을 자, 그리고 영광스러 운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마침내 내 인격이 빚어져, 새 로워져, 영광스러워져, 성숙한 자로 세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유익이 예요. 우리의 믿음이 마침내 궁극적으로 가져올 빛나는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잠시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가 왜 이렇게 움 츠려 들고 위축 되야 할 이유가 어 디 있어요. 저는 요즘 사람들 만나 는 게 꺼려져요. 우리 성도들도 그 렇고.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지 누구 를 만나든지 얘기가 딱 하나밖에 없 어요. 가보면 꼭 다 그냥 IMF얘기 에요. 다 늘어져 갖고. 축 늘어져 갖 고. 한참 얘기 하다가 보면 스트레 스 받아 가지고 다 넘어져 있어요. 저는 그런 자릴 나올 때마다 종종 제 안에 늘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자 세로 살까? 라는 질문이 예요. 제가 어제 어 우리 전도폭발 만찬 자리에 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계속하다 가 드디어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 도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 니다. 한번 3장 읽어보세요. 베드로 전서 3장이 예요. 14절입니다. 3장 14절. 15절. 베드로 전서 3장 14절과 15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 작!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 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여기 14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오죠?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믿지 않는 사람 들이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럼 크리 스챤들이 좀 달라야 되잖아요. 달라 져야.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다가 오는 고난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은 아니 예요. 우리가 그 다음 장에 보면 얼마나 베드로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경계했는지 모릅니 다. 한번 4장까지 읽어 보시면요. 4 장이요.12절에 보세요. 4장 12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 련 하려고 오는 무슨 시험이라고 했 어요? 불 시험을. 베드로는 눈을 뜨 라고 말합니다. 불 시험이 온다. 그 러나 이 불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동하지도 말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 다. 여기 3장 15절에 보시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 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 을 예비하라. 여러분 다 두려워 하 구요, 요즘. 다 걱정하고, 다 염려하 고, 그리고 다 주저 앉아있는데 여 러분만은 당당하게 한번 산다고 한 번 가정해 보세요. 당당하게.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 이젠 좀 IMF에 자꾸 F자로만 하다보니깐 우 리가 F국가가 되고 F신앙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I am F라고 하지 말고 Im fine입니다. 한번 연습해보 세요. Im fine. 나는 괜찮다 말이 예 요. 나는 괜찮다. Im fine. 우리가 만 약 이런 자세로 산다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야, 넌 괜 찮니? 넌? 넌 괜찮으니? 나, 사업이 야 어렵지. 근데 너는 어려운 것 같 지 않냐? 벽장에 달라 라도 숨겨 뒀 니? 뭐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야, 벽장에 쌓아둔 것은 없 지만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다. 소망이 있단 말이 예요. 움직일 수 없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고,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가 내 마음 속에 노래를 만들고 시를 만들고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야. 만 약 이런 간증을 한다고 해보세요. 야, 너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가 있느냐? 이 시대야 말로 복음을 전하기 얼마나 좋은 시댑니까?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게 그 얘길 하고 있 는 것입니다.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너희 마 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 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 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 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흔들 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 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 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 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 합니다,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 지 고 있습니다. 나는 주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내 어느날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 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 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당 당한 자세로 살아보세요. 세상이 얼 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여기 우리 가 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희망의 소망과 함께 그리고 이 희망의 믿음, 그리 고 희망의 주님을 붙들고 새해를 믿 음으로 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 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사실이고 또 우리의 삶이 전보다도 더 훨씬 피곤하고 힘든 것도 사실입 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게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좌 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등뒤에 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내 고난의 장 에 달려오시는 그 분. 나의 인생 길 에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 고 싶을 때 나를 향해 손을 펴시는 주님, 그리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 성을 들어보세요. 일어나 걸어라. 내 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 라 내 너를 도우리. 하나님 포기하 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좌절 하지 않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나 를 살려주시고 내 안에 쇠할 수 없 는 이 소망을 주 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붙들 고 일어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를 도와 주시옵소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 처럼 두려워 하거나 소동하 거나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찬양하며 걷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가진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 내 주님 되 셨기 때문입니다. 증거하게 도와 주시 옵소서. 이 믿음으로 세 상을 이기고 그리고 이땅의 영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 소망 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도와 주시옵 소서 이 소망으로 절망의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는 당신의 성도들이 되 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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