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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강의 6-(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by 【고동엽】 2021. 11. 27.
16:25-32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 예수 믿는 것이 쉽다고 느껴지는 분위기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도폭발운동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1980년대 중반에 한국에 도입돼서 저도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터미널 같은 데 가서 바로 전도를 시킵니다. 그 전도훈련 소책자에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냉장고에서 달걀을 가지고 오므라이스를 만든다고 할까요? 그런데 10개 중에서 1개는 썩은 달걀입니다, 9개는 성한 달걀입니다, 1개의 썩은 달걀과 9개의 싱싱한 달걀이 합해져서 오므라이스를 덮었습니다. 이 오므라이스는 어떨까요? 1개의 달걀이 썩어서 모든 오므라이스를 망쳤다고 볼 수 있죠? 그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썩은 오므라이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제일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외줄을 타는 곡예사가 있습니다, 이 곡예사가 늘어선 청중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외줄을 타고 나이가라 폭포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는 걸 믿습니까? 예, 믿는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럼 의자를 이고 외줄을 건너는 걸 믿습니까? 박수를 다 쳤습니다, 제가 이 의자 위에 한 사람을 앉혀서 외줄을 타고 가는 것을 믿습니까? 세 번째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면 이 의자 위에 올라올 사람을 뽑겠습니다, 아무도 박수를 안칩니다, 아무도 세 번째부터 믿은 게 아니죠. 믿는 일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거죠. 제일 마지막 예화는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예수 믿는 게 쉽다는 인상을 주는 구절은 딱 한군데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여기가 참 쉬운 겁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마음으로 믿는 건 안 보이죠? 이때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양진일 목사님이 즐겨 쓰는 표현, 존재 전체를 바쳐서, 가향기도의 특징은 존재가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That's OK! 가향에서 많이 쓰는 말은 존재 자체, 이런 것들인데 아주 감미롭게 들려져요. 그 말이 저는 정말 공감이 돼요. 왜 저렇게 기도하는지 아무도 그 말뜻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보통 공기도 시간에 존재가 나오면 그날 바로 퇴장당합니다. 그 말은 어렵기 때문에, 그러나 가향에서 그 말은 그 말로 쓰일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기 때문에 맞는 거거든요. 존재 전체를 받쳐서, 걸고, 나의 운명을 걸고, 이런 뜻이에요. 나의 운명을 걸고, 내 마음으로 믿어,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음으로 믿는 것만큼 쉬운 게 없는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마음으로 믿는 게 가장 어려운 것이고, 진실에서 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는 건 쉬운 거예요. 일본의 엔도 슈사쿠 라는 가톨릭 소설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소설 중 <위대한 몰락> <침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침묵>에 보면 일본 가톨릭교도 중에서 배교와 신앙고백을 쉴 새 없이 바꾸는 사람이 나와요. 부주인공정도 됩니다. 주인공 페레라신부에요. 포르투칼 믿음 가장 좋은 신부들이 일본에 와서 일본 선불교에 철두철미하게 역개종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포르투갈 신부들이 너무 처절하게 일본정신에 함몰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포르투갈 신부들이 일본 선불교에 의해서 철두철미하게 오염당해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일본 여자와 결혼까지 해버리는 참담한 배교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서 가장 엘리트 신부인 페레라 신부가 가서 평정을 합니다. 모든 배교한 가톨릭 형제들을 상담해서 다시 개종하고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해서 본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함흥차사입니다. 안 옵니다. 제일 마지막에 다시 사절단이 가서 보니까 이 사람이 일본승복을 입고 불경을 읽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일본 정신이 정체성을 완전히 recreation 해버리는 거예요. 그 소설에서 배교의 물결 속에서 배교와 신앙고백을 일삼는 등장인물이 나와요. 이름이 기억은 안 납니다. 그 인물에게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게 너무 쉬운 일입니다. 이 사람은 배교의 물결에 편승해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하면 즉시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 배교의 물결이 지나가면 다시 신앙고백하고 또 교회에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 한국 기독교인들이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게 이것입니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즉 예수가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으면, 그게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뭐가 어려워? 믿어버리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인데, 바로 <침묵>에 나오는 일본 배교자입니다. 첫째, 이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이 본문은 박해본문입니다. 취조관 앞에서 박해 받는 현장에서 있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겁니다. 유대교 박해자들 앞에서, 또는 로마제국 박해자들 앞에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해야만 면죄가 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의해서, 예수는 공식적으로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죽은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공식해석이고, 예수가 저주받아 죽었다고 해야만 출교되지 않습니다. 출교될 각오하고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일은 회당의 출교를 의미하고 직업박탈을 의미하고 아내를 빼앗깁니다. 산헤드린을 보면 배교자를 다루는 방법이 직업박탈, 호적박탈, 부인박탈입니다. 바울이 결혼했을 거라 보는 학자들은 바울이 부인을 빼앗겼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부인을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바울이 나처럼 그냥 홀알비로 지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한때 결혼했다는 거거든요. 바울이 자기 가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지만 유대교에서 출교하는 것은 지금 아랍 에미리트나 레바논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사회전체로부터 통째로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종교를 바꾸는 것은 사회전체로부터 완전한 고립무원의 존재가 되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고, 예수가 저주 받아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겁니다. 그때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을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심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도저히 긍정적인 맥락에서 쓰인 말이 아닙니다. 주라는 말은 옥타비아누스라고 하는 로마 제1대 황제에게, Jupiter에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라는 말이 얼마나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이냐면 주라는 말은 생사여탈권을 지닌 통치자를 가리켜요. 절대로 좋은 말이 아니에요. 큐리오스라는 말에서 키르케라는 독일 말이 나왔어요. 키르케가 앵글로색슨 말로 바뀌면서 church, 이게 키르케라는 말에서 나왔어요. 키르게가 큐리오스에서 나왔어요. 전부 다 똑같은 말이에요. 주라는 말은 생사여탈권을 지닌 배타적, 바꿀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자에요. 이건 사람이 쓰면 안 되는 말이에요. 주라는 말은 Jupiter, 제우스신에게 쓰였고, 로마황제에게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쁜 말을 예수님께 쓸 수밖에 없었어요. 주라는 말을 70인 역의 번역자들이 야훼를 번역할 때 전부 다 큐리오스로 번역했어요. BC 3세기에 주라는 말이 이교도의 최고신, 로마제국 판테온 신전에 최고 높은 신을 가리키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최고신을 큐리오스라고 하는데, 그 큐리오스를 야훼하나님께 갖다 붙였어요. 그 종교적 용어와 별도로 세속사회에서 주는 Jupiter 또는 로마황제를 가리켰어요. 주라는 말은 인간이 개인에 대해서 가장 극한의 통치권을 행사할 때 써요. 이건 좋은 말이 아니에요. 사람이 극한의 통치권을 개인에게 가지면 안 돼요. 특별히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라는 말을 하나님께만 붙였어요. 하나님은 우리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피터에게 주라는 말을 쓰는데, 우주의 최고 대권을 가진 그분, 그게 주기 때문에 그 주라는 무서운 말을 예수께 갖다 붙였다는 건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 단어의 무게 상, 예수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았다는 확신이 없는 한, 높이 들린 하나님 보좌 위에 예수가 앉았다는 확신을 할 때만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빼버리고 로마서 10장 9절을 보니까, 얼마나 말이 쉬운지, 한국 교인들이 예수 믿는 일을 쉽다고 소개하고 전도폭발훈련에 김회권 같은 사람을 80년대 동원해서 훈련시키고, 제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80년대에, 다 훈련받았습니다. 터미널에 많이 나갔습니다. 조선대 약대 충남대, 경북대, 부산대, 모든 간사들은 전 캠퍼스를 다 돌면서 훈련하는데, 아침에 기도하고 무작위로 만나는 사람들 다 전도하는 겁니다. 계란부터 해서 나이아가라 하고, 잘됐는지 안 됐는지 보고하고, 다 해야 합니다. 11년 6개월 합니다. 군대 여섯 번 갔다 온 것만큼 했습니다. 얼마나 제가 전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저한테 안 걸리면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인문대에서 저랑 전도의 미팅으로 안 만난 사람은 간첩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과 교수님들은, 김군 제발 우리학과를 종교학과로 만들지 말게, 우리학과는 영문과니 제발 종교학과로는, 그렇게 제가 수련회에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 종교학과 분위기를 만들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경희대 가 있는 양모 여교수는, 김회권 너의 종교적 열정 때문에 우리 과의 분위기가 흐려져, 여학생인데 막 저를 비난했습니다. 소주 한잔 먹고요. 그 사람까지도 제가 수련회에 데려 왔어요. 하도 기가 차서 따라오더라고요. 여학생 두 명을 늘 수련회에 데리고 다녔어요. 한 명은 시카고대학 극동아시아 교수고, 여기 한 명은 경희대 영문과인데, 이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 방법은 탁구를 가르쳐준다고 하는 겁니다. 탁구 한 시간씩 가르치고 성경공부 한 시간씩 했는데, 이 두 사람을 좋아하는 복학생이 여섯 명씩 있습니다. 항상 두 명이 세 명씩을 데리고 다니니까 기본적으로 수련회는 여덟 명이 따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또 저와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누는 사람, 기본적으로 열네 명이 수련회에 따라갑니다. 아주 기가 막힌 일인데,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이, 계란 오므라이스, 그때만 해도 얼마나 순진했느냐면, 참 친구가 좋아요. 그때는 그 말을 듣고도 따라와요. 회권아 네가 간절하게 요청해서 이번에 한 번 따라갈게, 하고 와요. 와서 수련회 끝까지 견뎌요. 그런데 제 후배들이 있어요. 진주고등학교 후배들은 보통 2박 3일 만에 탈출해요. 내 지성에 대한 폭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이렇게 지루한 말을 듣고 네가 참는다는 것, 나 너를 다시 봤다, 네가 지성인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논리도 엉성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계속 눈을 감고 기도한다는 것, 실망한다면서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전도를 해보면 아무라도 전도를 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것은 이 구절입니다. 그 중에 가장 우리를 대중적으로 통속적으로 영감을 주면서 동시에 혼란을 주는 말은 이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한국 사람들의 천박한 사고방식과 완벽하게 제휴하는 말씀입니다. 불러? 부르지! 하면서 주여 세 번 부릅니다. 주여 삼창 기도라고 하죠. 여러분은 양목사님께 훈련 받아서 주여 삼창 모르죠?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하면서 기도하는 게 주여 삼창 기도인데, 우리 하은이가 어렸을 때 대학선교회에서 주여 라는 기도를 듣고, 그게 얼마나 아이의 영혼에 충격을 주는지, 이 아이가 갑자기 집에서 혼자 놀면서 주여! 부르는 겁니다. 이런 말들이 대중적으로 예수 믿는 일은 쉬운 일이고 전도는 쉽다는 생각을 줍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이런 말씀들이 전도를 아무나 할 수 있게 만들고 전도는 쉽다고 만들고 예수 믿는 일은 간단하다고 말했어요. 이걸 믿는 사람들에게 저처럼 설명하면 이건 너무 어려운 겁니다. 그런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간단한 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비춰볼 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았다는 확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안 생깁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이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성령의 눈 열어주심으로만 가능한 것이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주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기 때문에 인간성이 바뀌고, 구원에 실제로 참여하게 됩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주류문화, 악하고 패역한 주류문화로부터 탈출한 것이고 이탈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에 속박된 공동체로 와버리는 거예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이중계명, 내 모든 직업 재능 내가 가진 모든 재산, 내가 벌어들인 모든 소득 전부 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의명분에 바쳐져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는 가족 사랑이 당연히 들어갑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건 당연히 들어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에 속박된 것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 구원받는 것이고,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돈을 비신앙화 시키는 것입니다. 돈을 신주단지처럼 모시지 않고 낭비하는 대상으로 돈을 씁니다. 돈을 거룩한 목적으로 낭비하는 것, 이게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에 속하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 그런 공동체에 참여하면 내가 광릉수목원에 온 것과 같습니다. 서울시에서 가장 매연이 심한 중랑구 면목동 망원동 도시 한복판에서 엄청나게 나쁜 공기를 쐬다가 광릉수목원이나 과천수목원을 걷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를 옮기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공동체를 옮기는 것, 사망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 이것이 주를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된 주를 믿다가 참 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은 이사를 가는 겁니다. 직업을 바꾸는 거예요. 이게 주를 믿는 것 안에 다 들어가요. 이사를 가고 직장을 옮길 것, 악한 생활습관을 버릴 것, 악한 인간관계를 청산할 것, 이 모든 것이 주를 믿는 가운데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런 의미의 주를 믿는 일은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과 격려 없이는 안 되기 때문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괄호하고, 하나님께 극한의 순종을 드리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신 주라고 믿는 거예요. 예수를 주라고 믿는다는 말은 예수적 삶을 최고 원리로 믿는 것,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는 삶, 그렇게 복종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전 과정을 믿는 거예요.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말을 쉽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죽기까지 복종했더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아지는 예수의 전 행적을 믿는 거예요. 어떤 원리를 믿는 것?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자기를 겸손케 낮춘 사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거룩한 낭비를 일삼는 사람을 하나님은 엄청난 부요함으로 이르게 하시고 높은 이름을 주신다, 이걸 믿는 거예요. 결국 우리한테 엄청난 이익이 되는 결단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자마자 내 짧은 생애에 순종을 바쳐서 영원히 하나님께 높아진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결국 높아지려고 예수 믿는 거네, 형식은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감화를 받아 낮아지면 높여주십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높여 주시지만 높여주심을 목적삼아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예수적 삶의 행적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적 삶의 행적 속에 있는 원리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원리를 믿는 일은 당장에 손해를 주고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일은 나의 인간성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결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일은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으로 조명되고 이 세상의 덧없음을 순식간에 깨달아야 하고, 이 세상의 욕망대로 사는 삶이 덧없음과 부질없음과 자기 허무성을 순식간에 깨닫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사랑의 이중계명에 속박되어서 약간 불편함을 감수하고 약간 부자가 늦게 되는 이런 정도를 감수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하신다는 걸 믿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고백은 이 세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믿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남들은 모르는 비표를 받아서 남들이 모르는 천국으로 가는 밀교적인 일이 아니라 이성과 양심의 승인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열매를 거두면서 믿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지리산에 가면 고로쇠물이 나오는 물이 나오는 나무가 있는데, A라는 동네 사람은 알고 있어요. B라는 동네는 몰라요. 다만, A라는 사람이 고로쇠 물을 먹으니까 어디서 따오는지 궁금하긴 하는데, A라는 사람은 안 알려줘요. A라는 동네사람끼리만 밤에 몰래 가서 B동네 사람들 자는 사이에 물을 받아서 먹는 거예요. B동네 사람들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고, 고로쇠물 좀 줘, 하는데 A라는 사람들은, 너희는 알 것 없어, 이런 게 천국이 아니에요. 이런 게 기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보편타당한 이성과 양심이 승인한 하나님의 축복법칙을 믿고 축복 받는 삶을 공공연히 사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믿고 살면 이 세상에서 대부분은 큰 성공을 거둡니다. 조심하십시오. 큰 성공을 거두는 게 목적이 아닌데 큰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큰 성공을 자기가 독점하지 않고, 사랑의 이중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바쳐버리는 데 있습니다. 여기가 가장 중요한 겁니다. 기독교인이 경쟁에서 뒤질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지는 것 패배하는 것 가난케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 또 신비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예수를 믿고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경험하지 않고, 부유함을 경험합니다. 이 부유함은 로마서 10장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얼마나 여러분이 좋아하는 말입니까? 이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계를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돈이 얼마나 성령과 똑같은 위를 주는지 모릅니다. 돈이 두둑이 있으면 성령 충만한 것과 효과가 거의 같습니다. 일단 돈이 많은 친척만 있어도, 돈이 많은 사람 옆에만 있어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서, 그게 돈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돈이 별로 없기 때문에 부유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지 모르는 꿈꾸는 순진무구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돈은 굉장한 신적 위력이 있고, 잠언서를 보십시오. 잠언서에 뇌물이 일을 해결한다는 본문이 두 개 나옵니다. 이 말은 뇌물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태를 꼬집는 말입니다. 안 돼 안 돼 하다가 돼, 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요절로 삼지 마십시오. 이건 세태를 풍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물질적 부유하심을 초월합니다. 뇌물은 정직한 사람에게 안 먹힙니다. 어둠의 자식들한테는 돈이 신적위력이 있지만 빛의 자녀에게는 돈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본문이 우리에게 예수 믿는 일의 통속적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 믿는 일은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은 예수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을 만큼 운명이 역전됐다는 믿을 수 없는 그 이야기는 보고도 못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 몸을 보고도 못 믿는 거예요. 못이 박힌 걸 보고 충격 받았습니다. 못 박힌 예수가 부활해서 갈릴리에 돌아다닙니다. 그걸 보고도 이런 가치의 전환, 인식의 전환이 안 일어나요. 성령 받아야만 이런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과 생선 바비큐 안 드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부활한 것, 도마처럼 옆구리에 손 안 넣어 봐도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우편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걸 믿기만 하면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게 가능해요. 네 입으로, 이 말은 예수를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하면 살려주고 예수를 주라고 하면 죽이는 그 박해자 앞에서 네 입으로 주라 고백하고, 네 마음으로 전존재를 다 바쳐서 남은 인생을 명운을 다 걸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다는 것, 결코 쉬운 게 아니죠. 얼마나 어려워요. 이 어려운 걸 단숨에 하게 만든 것이 성령조명, 성령의 감화감동만으로만 가능해요.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고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전도폭발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보지 않습니다. 전도폭발훈련으로 구원의 때가 무르익은 사람에게 전도했을 때 저는 그 전도폭발훈련이 크게 역사한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전도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훈련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평신도들이 신학교 안 다닌다고 해서 전도 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고, 구원의 과정 자체가 예수를 주로 믿는 과정 자체가 내용도 없는 맹목적인 투기 심리로 가능한 게 아니다, 그걸 설명하려고 한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 16장 본문은 주를 바꾸라는 요청을 받고 있어요. 로마제국의 옥사장, 빌립보 감옥에 있는 그 사람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넣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묶어서 족쇄에 채웠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족쇄에 채웠지만 미셀 푸코가 말한 것처럼 이 세계의 국가론, 미셀 푸코는 국가론이 아주 포스트모던 적입니다. 근대적 국가는 이런 뜻입니다. 모든 개인이 사회적 계약을 맺어서 국가에게 자기 개인의 일반의지를 양도했다, 국가는 개인들이 맡겨놓은 일반의지를 묶어서 집단으로 행사한다, 이게 루소와 로크의 국가론입니다. 이게 보통 근대국민국가의 국가론입니다. 근대국민국가의 국가론은 우리 개개인이 양도해놓은 하나의 권리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우리 군대에 가라고 하는 것은 헌법이 명하는 거죠. 헌법은 왜 우리 개인을 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 모든 4800만 국민의 일반의지가 합해져서 헌법이 됐으니까 명령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지금은 안 맞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국가는 그렇지 않다, 지배적 세력의 강압적이고 폭력적 통치기구인데 국가를 지탱시키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감옥이다, 감시와 처벌이다, 이게 요즘 국가관입니다. 감옥이 없어지면 국가가 없어집니다. 로마 제국은 국가소추권, 형벌권이 없어지면 없어지는 겁니다. 만일에 로마제국이 재판을 해서 감옥에 가뒀는데 로마제국의 감옥을 쉴 새 없이 열어버리는 국가가 있다면 로마제국보다 더 센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벌써 감옥 문을 세 번째 엽니다. 로마제국의 감옥문을 마음대로 열어버리는 이 제국은 누구냐? 이런 질문을 하면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로마제국의 국가소추권 형벌소추권 형벌집행권 감시권 처벌권, 이런 모든 걸 무효화시키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겁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의 주보다 더 센 나라의 주가 있다면 주를 바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맥락에서 16장이 나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유는 빌립보의 점을 쳐서 돈을 버는 일종의 강신술, 타로점 오피스가 있었습니다. 컴퓨터 타로보다는 훨씬 더 용한 사람인데,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의 이름으로 영험 있게 알아맞힙니다. A 당신 뭐였지? 바람피운다, 알아맞힙니다. 엄청난 복채를 주고 이익이 많았는데 귀신 들린 사람이 귀신의 영험으로 제한적으로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히니까 바울이 그 장면을 봤습니다. 계속 이 귀신들린 자매를 괴롭히니까 바울이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썩 나올지어다, 귀신에게 명령하니까 귀신이 즉시 그 소녀에게서 나갔습니다. 이 소녀가 귀신의 영험, 피조세계를 뛰어 넘는 영적인 통찰력이 없어지고 맨 정신으로 돌아오니 멀쩡한 처녀가 됐습니다. 귀신 들린 그 소녀를 빈대 삼아서 이익을 누리던 그 사람이 고발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막 매로 치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23-24절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깊숙한 감옥은 국가보안법입니다. 경범죄가 아닙니다. 이건 원래 경범죄거든요. 그런데 로마제국의 풍속을 해친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깊은 감옥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몇 겹의 간수들이 지킨다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거 보세요. 지진이 나서 문이 열리기까지 됐죠. 이건 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때 우연히 지진이 난 겁니다. 그런데 지진보다 더한 것, 차꼬와 족쇄는 지진가지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차꼬와 족쇄가 열린 것을 볼 때 이 지진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진이 나쁜 게 아닙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아마 이건 기본적으로 법령에 있을 겁니다. 죄수가 도망치면 자결하는 게 있을 거예요.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구원문제를 꺼내려면 자기가 살고 있는 터가 흔들려야 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문제를 꺼내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가 든든하고 견고하고 천년요새처럼 안정되면 절대로 구원무제를 꺼내지 않아요. 적어도 구원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의 터가 산산이 부서지는 사람만이에요. 이런 사람만이 구원의 때가 임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터가 견고하다고 믿고, 내가 누리는 이 안전보장을 영구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한 세계가 무너지고 산산 조각날 때, 그 무너지는 세계의 위기감 예후를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은 로마제국의 간수입니다. 로마제국의 국가소추권 형벌권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로마제국의 주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어집니다. 로마제국의 감옥이 무너졌으니까, 로마제국의 체계가 와르르 무너진다면 로마제국보다 더 센 나라에게 충성심을 바치는 게 낫습니다. 구약에서 누가 이런 사람이었죠? 자기가 살고 있던 터가 무너지고, 쇄도하는 해방의 가치를 가지고, 거대한 상천하지 하나님 앞에서, 거대한 하나님의 상천하지 자유의 군대, 해방의 군대, 거룩한 군대가 쇄도하자 자기가 있던 여리고 성의 터가 무너지고 흔들리니까 기생 라합은 즉시 전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이 터가 무너지고 존재의 기반이 완전히 부서지는 걸 경험할 때 진지하게 그때 구원의 문제가 나오고, 이때 바로 신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아직 없다면 그건 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저는 20대 나이였지만, 제가 그 당시 몸담고 있던 이 세계 구조가 매우 불안전한 구조라고 봤습니다. 그 터는 흔들리고 무너지고 그게 영속적이지 못하다는 걸 저는 봤습니다. 왜? 아무리 내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공부해서 출세한다 한들 경쟁에서 뒤쳐진 자가 저렇게 불행하다고 아우성을 내지르면 내가 이룬 모든 성공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경쟁을 가지고는 안 되고, 성실한 사람이 독점하는 행복의 세계, 이건 행복이 아니라고 본 겁니다. 저는 그때 제가 이탈해버린 세계에 대해서 애착을 끊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출세하여 모든 부와 행복을 독점하고, 나머지 절대 다수 인간들은 아우성치고 못 살겠다고 소리치고, 이런 부서진 세계에서 소속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그런 세계는 버려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돌봄을 골고루 누리는 사회, 그 사회에 내가 소속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 전향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제가 벌어들인 것, 제가 가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아까 처음 설명했던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주피터와 옥타비아누스와 같은 무시무시한 복종을 요청하는, 복종을 요청하고 순종을 요청하는 새 주를 영접하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제국의 옥터가 부서지고 산산조각 났는데 이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진 이 사람에게 새 주를 믿으라고 초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삶이 난장이 돼버리죠. 결론적으로 이 예수를 믿는 사람 마음에는 이 세계가 로마제국의 옥터처럼 흔들리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영속성이 없다는 사실을 직관해야 합니다. 예수 안 믿었을 때 속했던 세계가 경쟁과 각축과 탐욕과 배제와 소외를 시키면서 사는 이 세계, 이건 절대 존립이 안 되는 세계이고, 옥터가 부서지듯이 멸망될 수밖에 없는 세계인 것을 낙인을 찍어야만 예수님께 구원받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교회에 소속되는 기쁨을 그때 안다는 거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네가 속한 가문전체가, ‘구원을 받으리라’ 이때 구원이라는 말은 임박한, 옥터가 무너지는, 터가 부서지는 낡은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에요. 구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속박된 공동체, 형제사랑의 공동체, 자매사랑의 공동체, 다시 말해서 착취와 비착취의 관계로 만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과 그가 가진 것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더 큰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이중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의 소속감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으면 좋은 이유는 첫째 영구적이고 항구적이고 안정감 넘치는 공동체에 소속됨으로 말미암아 일단 당장 인생이 너무 행복해진다, 죽어서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둘째 직업적 성공가능성이 높아지고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직장을 포기해도 아깝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주를 바꾸면요.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제8권에 보면, 로마제국의 연극배우들은 전부 다 직장을 바꿔야 해요. 왜? 로마시내에서 벌어지는 연극은 지금 포르노수준이었습니다. 연극배우들은 다 바꿨습니다. 심지어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직장 군대를 다 포기했습니다. 군대에서 다 제대해버렸습니다. 로마제국의 쇠락 안에 예수 믿은 사람들의 병역거부가 너무 많았습니다. 로마제국이 병역으로 무장된 나라가 돼야 하는데, 로마제국 변방에 가는 기독교 병사들 때문에 전쟁이 안 되니까 로마제국은 전투력을 잃어갑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이 무시무시한 정복약탈국가에서 그 힘을 서서히 잃어간 것은 병역거부라고 하는 굉장히 대항문화적인 결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순절만이라도 40일 동안이라도 육식을 금하고, 오락을 금하고, 영화를 금하고, 대중문화의 많은 것들을 금식하다하더라도 상당히 한국교회에 주는 임팩트가 클 것입니다. 국정원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모든 부조리한 정보가 차단될 것이며, 부조리한 지휘명령체계가 스톱될 것이며, 부당한 명령에 과장이 불순종할 수 있죠. 과장이 하더라도 계장이 불순종할 수 있죠. 이런 모든 악의 위계질서, 악의 조직적인 음험한 지휘와 명령체계가 어디가 고장 나요? 기독교인들이 각 요소에 박혀 있으면 통하지 않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에 사학법이라는 법이 있죠? 사학법 안에 대다수는 여전히 오너십, 학교에 돈을 많이 낸 사람이 이사를 임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3명 정도는 바깥에서 와야죠. 그런데 악한 사학들은 3명 중에 1명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와도 부조리한 짓을 못하지 않습니까? 이사장의 아들딸이 학교에 못 오지 않습니까? 그 일을 못하게 한다고 삭발을 한 겁니다. 이 악한 목사들이요. 그걸 하지 않겠다고 머리를 깎은 겁니다. 신사 참배하던 변절자의 후손들이 더러운 이익을 지키려고 머리를 깎고 온 난리를 피웁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한 사람의 외부인에게 우리 얼마나 투명하게 하는가를 과시하고, 기독교사학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있는 찬스를 막지 않습니까? 구원 받는다는 말은 영단번에 일어난 국적이동 사건입니다. 결론입니다. 구원을 받는다, 첫째 완료된 사건입니다. 국적이동은 한 번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둘째로 완료된 사건이면서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은 계속되는 진행형 사건입니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이민 왔으면 미국 땅에 계속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으로 국적 바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는 습성을 계속 일삼으니까 믿는 일을 계속 하는 자에게, 아까 요한복음 1장 12절 읽었죠?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피스튜트씬, 현재진행부사입니다. 계속 그 이름을 믿기를 일삼는 자, 계속 믿는 상태를 유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한 번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믿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을 주셨다,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내가 국적을 바꾸고 주인을 바꾼 사건이지만 주인을 바꾼 상태, 국적을 바꾼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일상적인 분투와 순종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순종을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받았다는 기억도 망각되고, 구원의 감격도 없어져버립니다. 결론 맺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말은 믿는 일을 한 번 결정적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믿는 일을 계속 유지하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한 번 국적이동 사건이 있는 것처럼 국적이 바뀌는 영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사건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계속 구원을 향유하는 구원의 현재진행형을 누리게 되리라, 이런 뜻입니다. 강의 마치겠습니다. 질문해주십시오.
OOO 오전에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서 질문 드리고 싶은데,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셨고, 그 중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셔서 빛이 있었는데, 하나님도 빛이시고 그와 동등된 예수님도 빛이시니까 빛이 있으라고 할 때 빛은 무엇인가요?
김회권 빛이 있으라 하심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게 빛이죠. 그런데 빛이 있으라 하심의 빛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랬죠.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 할 때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넘치는,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교제와 순종을 일삼다 보면 엄청난 빛이 축적이 되는데, 창조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이 드러난 거죠.
OOO 빛이 드러난?
김회권 온 세상에 빛이 최초로 비취기 시작한 거죠. 빛이 어느 순간, 창조의 순간에 어둠 위에 내리쬈다는 게 중요합니다. 더 시원적인 질서는 상대적으로 말하면 빛과 어둠 중에서 어둠이었다는 것, 어둠이 더 근원적인 질서였다는 것, 더 근원적인 질서 위에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하여 빛이 비치기 시작했는데 그 빛이 어디서 왔느냐?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 순종을 통해서 창조된 에너지에서 나왔다는 말이에요. 여기서 어떤 원리가 나오느냐? 누군가 빛이 있으라는 창조의 명령을 지금 자기 인생에 주신 명령으로 삼는다면, 내가 순종을 누적시켜서 빛이 되는 존재로 살아야겠다는 명령으로 그 말이 들리는 겁니다. 너는 빛이 되어라, 빛의 자녀처럼 살라는 말로 창세기를 재해석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 충만하게 하면 우리가 갑자기 어느 새 빛을 발사하고 방사하는 존재가 돼버린다는 것이죠. 창세기는 한 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동시에 전 세계에서 무수하게 반복되는 사건인 거예요. 창세기 사건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심연 위에 빛이 비치는 사건이다, 이런 예화를 이해하기 좋은 책은 미국의 여성 가톨릭 사회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가 쓴 <고백>이라는 책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서 나왔는데 제가 긴 해설을 붙여놨습니다. 도로시 데이가 1932년 미국 대공황 때, 절망에 빠져 있는 노숙자와 극빈자가 가득 넘쳐서 온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 덮인 그때, 어둠이 심연이었던 그때 피터 모린이라는 너무나 순결한 삶을 살던,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이 피터 모린입니다. 피터 모린이 자기가 갖는 이 사상을 글로 써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에 데모하러 갔다가 10일 동안 감옥에 갇혀서 구류를 살고 있어요. 구류를 사는데 너무나 자기 인생이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걸 보면서, 의로운 대의명분에 투신하기 위해 데모하다가 열흘 동안 감옥 안에서 인간성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걸 보면서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악과 맞싸우지 말고 빛의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스승을 주시고, 제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게 길을 보여 달라고 성모마리아 무념시태교회에 가서 기도하자마자 피터 모린이라는 농부 철학자가 턱 기다리고 있어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가톨릭 노동자>라는 신문이에요. <가톨릭 노동자>라는 신문이 얼마나 엄청난 빛이 됐는지, 그 누적된 순종을 한 두 사람이 봉홧불을 비췄어요. 역사는 무엇이냐? 짙은 어둠의 역사에 분투했던 누적된 순종을 바쳐서 빛을 방사했던 빛들의 분투기다, 이렇게 보면 돼요. 요한복음 식으로 역사를 정리하자면, 지금 가향공동체에 있는 여러분도 어둠이 짙게 내린 원시 우주 같은 심연 위에 빛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오늘 이 설교도 해설에 그치지 않고,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처럼, 빛의 자녀들처럼 살라, 오늘 설교의 실천적인 말을 읽어드릴게요. 빌립보서 2장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남, 마태복음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런 말과 같은 말이에요. 너희가 세상에서 창세기 주인공들이다, 너희는 세상에 어둠이 겹겹이 내린 심연 위에 내리쬐는 하나님 말씀의 순종자들이다, 이런 뜻이 되는 거죠. 오늘 오전 설교를 적용을 하자면요. 한 분만 질문을.
OOO 구원이 무엇인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불교에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하는데,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에서 말한 구원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계약,
김회권 구원은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충분한 자유를 얻은 삶입니다. 구원이전은 아담의 불순종 상태에 속박 당함, 그 죄와 죽음 가운데 속박 당함, 구원 반대는 죄와 죽음 아래 속박 당함, 김세윤 박사 식으로 말하면 악과 고난에 지배당함, 마가복음 8장으로 말하면 패역하고 악한 세대에 놓여 있음,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자유롭게 되고 이웃을 사랑할 만큼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OOO 흔들림 없는 내적확신,
김회권 아닙니다. 가끔 흔들립니다만, 대체로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구원을 짧은 기간 분석하면 흔들리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쭉 통계를 내보면 이분이 구원에 있는 삶인가 아닌가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5-6개월 동안 사는 모습을 쭉 이야기해주면 저는 그걸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루만에는 분별을 못합니다. 그러나 짐작은 합니다. 일주일만 지내봐도 이 사람이 성령 안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제가 분별을 마음대로 합니다만, 6개월 동안만 여러분이 삶의 포트폴리오를 준다면 제가 그걸 자세히 분석해서, 당신이 어떤 점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영분별이거든요. 목사는 이 영분별자입니다. 저는 목회를 오래 하다 보니까 영분별을 예민하게 빨리 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분별해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기도 안 된다고 불만을 하면 안 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기도가 안 된다고 정죄하면 안 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이 얼마나 좋은가를 열망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진보가 없고 성장이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져야겠죠. 대부분 제가 보건데 성령 안에서 정통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부단히 성장하는 게 가장 큰 특징이고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내린 감정에 노예가 되고, 엎치락뒤치락은 계속 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 자리에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열망하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한테 기독교 실천적인 명제를 줘서 못 지킨다고 자학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나는 아닌가봐, 이렇게 쓰지 말고, 너무 자기 노출도 하지 말고,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를 심하게 노출하는 정신병적인 상태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노출하면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노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를 즐기는 사람이고, 심하게 노출하는 사람들은 노출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원에도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방에 관한 인적정보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지나치게 많이 알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면 많이 아는 어설픈 정보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가로막아 버려요. 그래서 공동체는 비밀을 70% 이상 가지는 게 좋아요. 오자마자 다 털어놓는 것, 이건 제가 볼 때 약간 위험합니다. 그런 정보의 범람은 하나님께 가는 내 영성을 방해해요. 수도원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 저는 요즘 젊은이들이 카페 차려놓고 블로그 차려놓고 미주알고주알 다 하는 것, 가향이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향은 말씀 소감만 올리죠? 어떤 데 가면 너무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버립니다. It's very dangerous
그분들은 은밀성, 하나님께 가는 열망이 손상돼요. 많이 노출해버리면요. 어떤 사람은 자기 홈페이지를 만들어놓고 자기 새끼 사진까지 붙여놓고,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이 있어요. 방문해서 글 올렸다 하고, 몇 사람 왔다 하고, 제가 볼 때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정신병입니다. 자아탐닉, 나르시시즘입니다. 자기한테 그렇게 몰두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한테도 몰두할 필요 없고, 우리는 약간씩 낯섦 삼감 조심함이 좋습니다. 그런 능력이 오래갑니다. 너무 빨리 친해지면 오래 못 갑니다. 사람이 빨리 친해지면 권태롭고 싫증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장 은밀하고도 배타적인 정도의 소중한 관계로 먼저 설정해놓고 나서 지체들과 친하십시오. 그게 안 되고 지체들과 잔뜩 친해놓으면 하나님을 향해서 솟구쳐 오르는 영적열망이 많이 훼손됩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서로 많이 알지 않게 한 게 옳은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친해져도 모를 때 존경심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칩니다. 서로 다쳐요. 인위적으로 자기를 감추면서, 손봉호 교수가 한 말입니다. 약간씩은 위선자가 될 마음으로 자기를 감춰야 한다고, 공동체 할 때, 일종의 어른들의 영성관리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런 점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고 나는 여러분들의 말씀묵상 괜찮다고 봅니다. 그러나 말씀묵상도 저는 함부로 안 보여줍니다. 제가 한 말씀묵상은 고유한 제 것이기 때문에 널리 알리는 것을 별로 즐겨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로 나누고 싶은 사람한테 알려야지, 모르는 사람들에 글을 올려서 홈페이지 만들어서 사진 붙이고, 여행 갔습니다, 하고 도대체 mental state가 어떤지 궁금해요. 자기 지리산 갔다 온 사진을, 바위 위에서 다리 벌리고 사진 찍은 걸 왜 올려요? 나는 이해가 안 돼요. 그건 자기 혼자 해야지, 그리고 지리산 잘 갔다 왔어, 댓글 받고 댓글 안 단 놈한테 이 갈고, 제가 볼 땐 이건 신종 네티즌 나르시시즘이라고 봐요. 그럴 열정이 있다면 고요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과 나만이 나누는 고요한 대화에 사로잡히는 것, 이게 너무 좋은 것이다, 요즘 세대는 지나치게 노출증적인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아는 기독교학과 애는 너무 심하게 해요.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이 사진을 올려서 난리치고 하는데, 그러지 맙시다. 저는 기도에 방해되기 때문에 안 합니다. 형제자매들에 대한 내 사랑에 방해가 됩니다. 교인들을 많이 알면 설교에 방해됩니다. 교인들을 몰라야만 좋은 설교가 나오는데, 내가 교인들 300명 죄 고백을 다 듣고 나면 못 삽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됐습니까? 한 분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OOO 사도행전에서 말씀 주제였던 주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했는데 그 집안이라는 게 내가 태어난 혈연공동체의 집안을 말하는 것이고, 내가 주를 믿는 분투의 과정이 결국 우리 가정도 죄에서 해방된 이중계명에 속박된 공동체가 된다는,
김회권 맞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OOO 그게 가능한가요? 내가 그렇게 주를 믿는 그것이 정말 가정이 그렇게 된다는 것인지? 위로를 받자는 것인지,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지? 그분들의 개인적인 어떤 하나님과의 관계나 공동체 교제 없이,
김회권 내 아들 딸이 저만큼 못 믿기 때문에 저도 확신은 못합니다만, 제 아들딸은 정확하게 엄마 아빠를 통해서 사랑을 믿고, 기독교적 가치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못 믿습니다. 정확하게 교회의 값어치를 몰라요. 제 아들딸은 우리를 정말 사랑합니다. 정말로 웬만한 건 다 순종하지만, 교회에 대해서 저와 같은 태도를 갖지 않고, 아빠가 너무 낭비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한국교회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걸 믿는데, 그 실현과정을 저는 아직까지 몸서리치게 경험을 못했습니다. 이 아이가 내가 살 때까지 양진일 목사처럼 바뀌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만 지금 이 아이들은 자유의 황야를 달리는 한 마리 준마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얼 믿느냐면 이 아이들이 받은 사랑과 영향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너무나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컸습니다. 그렇지만 제도권 종교에 대한 반감이 워낙 많아서, 제가 4년 동안 교회를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엇 발랐습니다. 일산두레교회까지 잘 다니다가 저와 교회 따라 다니다가 완전히 반발했어요. 이 아이들은 anti church 가 돼버렸습니다. 이런 의심을 거치고도 잘 믿는 사람을 보면 너무 부럽긴 합니다만, 저는 이걸 굳게 믿는 바이고, 이것이 잘 안 될지라도 저는 가장이 예수를 믿었을 때 나머지 모든 가솔들이 다 주를 믿는다는 걸 확신합니다. 가장이 예수를 믿을 때 가솔 전체가 그 영적 영향권 안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노아 홍수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노아홍수 때 노아가 믿고 8명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 본문을 해석하거든요. 믿으십시오. 이렇게 될 걸 믿으십시오. 저는 이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실현될 줄 믿습니다. 저는 그리 믿습니다. 아주 인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저한테 너무 신실하십니다. 저는 목사직을 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게 아니라 예수 믿다가 지나치게 믿어서 목사가 됐지, 이 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제게 하나님은 amazing한 분입니다. 10시간 동안 말해도 그칠 수 없는 분입니다. 한 가지만 부탁할 게요. 하나님 말씀을 진중하고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엄청난 영적대보상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20대 때는 이걸 진중하게 안 읽고 펄펄펄 미친놈처럼 읽기 때문에, 20대가 만일에 마음을 갖고 본문을 하나하나 읽으면 엄청난 대 영적보상이 임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20대 초반부터 이걸 경험해봐서 압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이 엄청난 희망 비전, 이것이 제 마음을 들뜨게 만듭니다. 아까 번에 말했죠? 어둠이 빛을 강탈하지 못하고, 포획하지 못한다, 빛은 어둠보다 늦게 왔지만 하나님과 함께 이 빛은 어둠의 심연을 거룩하게 육박하고 공격한다, 저는 이걸 굳게 믿고 있는 바입니다. 여러분 가정도 이런 본문에 줄을 치고 기도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가향에서 제가 경험해보고 싶은 것은 공동체적인 성령 충만입니다. 오순절적 성령 충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락방에서 압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성령을 경험하고, 온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120문도가 공유하는, 제가 여기서 많이 성장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더 세밀한 순종, 더 은밀한 순종을 많이 해보고 싶고, 저는 열망이 그겁니다. 은밀하고 세밀하고 더 철저한 순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더운데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향의 젊은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또렷또렷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성과 지성의 소유자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바깥 흑암과 어둠물질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력의 순종의 집적물인 빛이 이들을 감화시켜 복제예수가 되게 하시고, 예수 모방하는 빛의 자녀들로 생명의 말씀을 밝혀내는 가향공동체가 되게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5월 1일 작은 창립예배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공동체로 출범하고자 할 때 하나님 저희에게 은혜 주시기 원하옵고, 교회에 소속된 복된 소속감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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