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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편◑/이정익 목사 명설교(385편)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by 【고동엽】 2021. 11. 27.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14:8-11

 

 

 

 

                 빌립이 이르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

 

                 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배후에 그리고 삶의 중심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면에 어떤 모습으로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연구한 결과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내린 이론을 유신론이라고 말합니다. 연구 결과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이론을 무신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연구결과 존재여부를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린 이론을 불가지론이라고 말합니다. 이 연구는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지만 인간이 신의 존재여부를 입증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 입증한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총으로 알고 계시로 알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을 증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각종 병자들을 열심히 고치셨습니다. 그 치유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과 메시야 됨을 증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 살리심으로 자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리야가 옥합을 깨트려 발에 붓는 일을 통해서 마리아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여 곧 십자가에서 죽임 당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유다 배반을 예고하고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본문에서는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며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보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보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말을 제자들에게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빌립이 용기 있게 질문을 합니다. “그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왜 자꾸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나와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하였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니라,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

 

 

  신앙생활에서 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경험과 계기가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도의 영적 교통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왜 보여 달라고 했는가 하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도 그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믿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도 신앙생활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 그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갈증이 일어나고 회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지 못한 목회자들이나 교회의 중직 자들이 때로 헛소리도 하고 인간적인 갈등도 유발하고 문제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 전도를 하다 보면 간혹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곤란한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보여주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주신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보여줄 수도 볼 수도 없는 창조주이시고 절대 신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것은 순전히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몇 가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계시는 성경과 세상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이미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를 받아 쓰인 책입니다.  성경 속에 이미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없었던 시대는 대부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부분 유치한 아이들을 상대하듯이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보여주시고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성경이 주어진 이후에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이미 다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요, 나를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믿는 것입니다.

 

 

 

 

2. 사물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사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물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보는 감각과 신비한 눈이 은총의 눈이고 영적인 눈입니다. 여러분, 자연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강과 그 터를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의 오묘함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창조의 신비를 보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경과 신비한 산맥과 넓은 바다를 보십시오. 그 모습을 보면 저절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하고 찬양이 흘러나오고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하고 찬송이 솟아나옵니다.  또 오묘한 것은 그 자연과 인간이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을 사랑하며 기르는 사람들에 의하면 자기가 기르는 식물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식물과의 대화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자연이 하는 대화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하고 사랑하며 기른 화초는 더 윤기 나게 잘 자란다고 합니다.

 

 또 물도 사랑하는 대화를 하면 물이 막 움직이고 육각수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거나 나쁜 말을 하면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새도 개도 짐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집에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세 거미줄이 쳐지고 온 집안에 먼지가 쌓입니다. 그런데 집에 사람이 살면 거미줄도 먼지도 곰팡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그리고 자연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곧 이 세상에는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틈만 나면 산으로 가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영적으로 충전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영혼이 피곤한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갑니다. 갔다 오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하고 맑아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화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창조입니다. 그 그림 속에는 화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서 화가를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그림이 화가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그림 속에서 화가를 체험하고 화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 우주가 암시하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매 사물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고 흔적이 나타나고 발자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를 보면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3.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꾸준히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동참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인생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것으로 그냥 끝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보완하시고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고 간섭하시고 때로는 채찍도 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나타나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향에서 떠나라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장소와 방향까지 안내하셨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서운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제 나는 혼자다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저 넓은 땅을 바라보라, 그리고 저 높은 하늘을 보라,  내가 네 자손에게 저 하늘의 별처럼, 저 땅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단 한번 나타나신 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길로 개입하시고 안내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오래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안내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속에 그리고 삶속에 나타나는 숱한 사건들 속에 나타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생에 사사건건 일마다 때마다 고비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의 일생 동안 마찬가지로 때마다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일생동안에도 다윗의 일생동안에도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은 사건들 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심판도 역사상 단 한번 있었고 그 후에는 전무했느냐 하면 아닙니다. 그런 심판은 매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사례로 아주 족합니다. 그것을 보고 믿고 깨달으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하늘 문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시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사건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지금도 여기서 우리에게서 그대로 재연됩니다. 그래서 세례는 형식이 아니고 성령의 임재하시는 성례인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의 예배에는 구름이 나타나고 음성이 들려지고 천상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졌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그 노랫소리가 성전가득 채워지는 구름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기적, 심판, 은혜, 영적 경이로움 등은 단 1회성이 아니고 지금도 똑같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고 함께 하심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인도하심도, 개입하심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개입하시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 속에서도 나타나십니다. 인간은 꾸준히 하나님께 영적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입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심도 영적으로 임하십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육신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준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때 국가 조찬기도회가 백악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가 “영원을 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케네디 대통령이 영원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는데 며칠 후 암살당해서 죽었습니다. 영원은 우리들이 준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때 인간은 인간의 값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신론자들은 별 소리를 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래 살기를 추구합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가 어디 있습니까. 무신론자들이 심각한 실존적인 상황에 빠져 보십시오. 어디라고 신을 안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100%라는 확신이나 자신 있는 말을 싫어하십니다. 사람에게는 100%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100%라는 자신 있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100라는 말은 교만의 말이고 자만의 표현입니다. 100%라는 말은 절대 무오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자만이나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어느 의학공부를 하는 레지던트 둘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치료를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이 두 수련생이 환자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무슨 병인지를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교만해지고 자만해지고 나는 이제 다 알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그 둘이 회진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느 환자가 배를 움켜쥐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저 환자는 무슨 병 같으냐”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사람은 척추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 했고 또 한사람은 장염 환자 같다고 말 했습니다. 서로 자신 있다는 마음으로 환자에 다가가서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아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환자가 소리치며 저리 비키라고 하더니 “화장실이 어디야“하고 소리쳤습니다. 인간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다 이런 식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채울 수 없는 영적 공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영을 갈구하고 하나님을 갈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그 안에서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직접적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여러 간접적인 방법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 직접적인 방법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길을 가다가 도중에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서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환상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에서 과감히 떠나라는 계시를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그 엄청난 홍수와 싸워 이겼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3년 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다고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교회의 중직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단 방법을 너무 앞세워 목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남들로부터 듣고 하나님을 믿는 삶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글을 통해서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시각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맛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깊이가 다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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