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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강의 7- 로마서 12:1-2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통전적 구원론)

by 【고동엽】 2021. 11. 27.

로마서 12:1-2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통전적 구원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구원론 보낸 자료 6강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서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영적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세속적 혹은 육적이라는 말과 대비되어 보다 높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만큼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양식을 말해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당신 주변에 계신 신앙의 선배나 어른을 보면서, 그분 참 영적이다, 신앙이 참 좋은 분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런 분은 어떤 분입니까?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분,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열심히 이웃에게 전도하는 분, 교회 일에 동분서주하며 열심인 분, 주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자녀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분, 찬양집회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는 모습을 눈 지그시 감으면서 나타내는 분, 말씀을 들을 때는 자주 아멘 또는 속으로 아멘을 크게 하는 분, 말을 할 때마다 성경말씀을 들먹이거나 할렐루야를 자주하는 분, 조그만 일에도 아이고 하나님 이라는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하는 분,’ 이러면 영적인 분이죠? 영적예배가 무엇인가를 오늘 살펴보고,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계속 살아야 하는지, 왜 구원받자마자 우리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시지 않고 이 세상에 남겨두시는지, 1994년 미국 샌디에이고와 LA 근교에 서 39명의 종파 신도가 비디오로 녹화촬영하면서 집단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Heavens gate, 천국문이라는 종파단체입니다. 천국문이라는 종파단체가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로 이해하고, 다 작별하면서 곧 천국에서 봅시다, 라고 하면서 39명이 약을 먹고 죽은 겁니다. 그런데 전부 다 시애틀 컴퓨터 밸리에서 일하는 고급 지성인들입니다. 39명이 동시에 아주 평화롭게 비디오 촬영을 하면서 죽어갔는데, 그들 마음속에는 천국은 육체를 벗는 길이라고 보는 겁니다. 육체를 벗는 길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플라톤의 대화록 <파이돈>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친구와 제자들에게 육신을 벗고 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긴 철학적 연설문입니다. 그 철학적 연설의 핵심에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말이 나오고, 육체성을 벗는 것이 구원을 경험하는 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주 반복적으로, 이것이 그리스 사상이죠. 육체성은 곧 악성, 죄악성, 피조물의 한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죠. 오늘 우리 본문은 몸을 산제사로 드릴 때 영적 예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육체가 영보다 더 궁극적인 질료라는 겁니다. 육체가 영보다 더 궁극적인 표현이란 말입니다. 영이 육체를 벗길 원치 않고, 영은 육체를 덧입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가 인간의 육체 덧입는 걸 사모한다는 표현이 나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육체를 잠시 입은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와 영원히 살기 위하여 육체를 입은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육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우리랑 살기 위하여, 사람과 같은 장막에 살기 위하여 육신의 장막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도 육신을 입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고기를 드실 만큼 생생한 육체성이 있고, 살과 뼈가 있었습니다. 살과 뼈를 가지고 고기를 드시고 밥을 드신 것을 보면 그분은 완전히 우리와 똑같은 육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육체성은 영이 벗어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이 궁극적으로 육체성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하나님의 섭리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육체성을 벗어버리는 것이 영적이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분은 교회성이 충만한 분이지, 영성이 충만한 분이 아닙니다. 이분의 영성은 을지로와 충무로 세종로와 테헤란로에서 6일 동안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영적인 사람인가 아닌가 판가름 나는 거죠. 그분이 직장에서 정의로운 분인가, 직장상사로서 직장부하로서 공평한 분이가, 가정에서, 이런 종합적인 판단에서 그분이 영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구원론을 정리하면서 제가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를 설명합니다. 구원은 죄와 악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과 악과 고난과 질병과 귀신들림으로부터 구원인데, 이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너무 많기 때문에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총체적인 것, 이 모든 것은 죄 안에 들어 있는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죽음을 가져오고, 죄 안에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악과 고난과 질병과 귀신들림이 있습니다. 죄가 가장 큰 집합입니다. 가장 큰 모집단은 죄, 그다음 죽음, 그다음 악과 질병과 고난과 귀신들림, 이런 것들은 죽음의 부분집합이 되는 거죠. 죄가 가장 큰 범주고, 죄 다음에 오는 죽음의 징후들이 악과 고난과 질병입니다. 험악한 생계노동, 먹고 살기 위해서 가혹하게 육체를 학대하는 것, 죽음입니다. 파라오 채찍 아래서 짚 없이 벽돌 만드는 것이 죽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하는 노동, 창녀의 노동은 죽음이에요. 창녀의 노동은 계량화된 화폐를 받으면서 할지라도 노동이 아닌 것은 생명의 가치를 멸각시켜가면서 감가시켜가면서 하는 것, 그건 노예노동, 죽음으로서의 노동입니다. 노예노동은 내가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 내 생명의 가치를 훼손해가면서 하는 노동이에요.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노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노동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노동,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노동, 이것이 참 노동, 죄는 죽음을 가지고 오고,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가 가져온 대가, 죄를 면하려면 죽음으로, 죽어야만 죄가 끝난단 말이에요. 죄가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죄를 짓자마자 죄 안에 있는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니까 시간문제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 주 안에서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망을 사망시키는 그분은 영생, 다시 말해서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죄입니다. 마이너스를 한 번 더 죽이면 뭐가 돼요? 영생이 되죠.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되니까,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창세기 2장 16-17절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반드시 죽는다, 바로 그겁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으로부터 구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악과 질병과 고난과 귀신들림과 험악한 생계노동과 노예노동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이런 죄가 총체적으로 죄 짖지 않을 수밖에 없도록 된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해요. 마가복음 8장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 그 세대와 이 세대는 같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할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 표적을 구하는 세대, 이 세대는 오는 세대의 반대말로 오는 세대는 하나님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데서 새로 출발하는 게 새 세대입니다. 오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새로운 세대에 적응할 준비를 하여라, 그게 로마서 12장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죄 짓지 않을 수 없는 세대, 죄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사회구조, 이걸 가리켜요. 여러분 다시 한 번, 구원은 이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임과 동시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이에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추상적인 말로 흐를 수가 있어요.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수밖에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8장 23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몸에 속량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몸으로부터의 속량이 아닙니다. 달라요. 플라톤의 <파이돈>편에서는 몸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몸으로부터의 구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몸 전체의 속량입니다. 몸도 새로워지는 겁니다. 왜 몸이 아직까지 속량되지 않았느냐?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가향공동체 안에 있으면 우리가 서로 허세부릴 필요 없죠. 교만할 필요 없죠. 서로 우리가 투명하게 커밍아웃했고, 대부분이 우리 연약함을 짐 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해도 괜찮죠.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나갈 때 내가 겸손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나를 짓뭉개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가 겸손하게 한만큼 손해를 봅니다. 직장 생활할 때 과장님이, 미스 김 차 한 잔 타와, 한 잔 타주면 그다음 계장까지 나를 시킬 것 같으니까 반발이 온다 말이에요. 김대리 신도리코 복사 좀 해와, 그건 나한테 시킬 수도 있고 안 시킬 수도 있어요.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건 아닌데 이걸 해주면 내가 너무 겸손한데, 그다음부터 계속 이 사람이 나를 시킬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빳빳하게 하는 거죠. 못 들은 척 하는 거예요. 해 와, 해 와 이놈의 자식아, 우리가 속량 받지 못한 세상 사람과 살면 우리 인간성이 같이 돼버려요. 나는 처음에 프린스턴에서 왔을 때는 밤 12시에도 가만히 신호등을 지키고 있었어요. 한 2년간은 그렇게 살았어요. 김진홍 목사님과 신호등을 건너는데 두레교회 목사 할 때, 임창동 아파트에 얼마나 신호등이 많아요. 김진홍 목사님은 빨간 불에도 가버려요. 이 사람 이러면 못 살아, 그런데 나는 한참 서 있었어요.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우리 가운데 신호등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칼칼 웃으면서 김진홍 목사라고 소문이 난 거예요. 목사님이 나중에 농담으로, 김회권 목사는 율법주의자라는 말이 있대, 그런데 제가 그렇게 살다 괜찮았어요. 점점 타락한 세상에, 심지어 내가 어떤 상태까지 갔느냐면 안 볼 때 그냥 가버립니다. 이제는 나는 12시에 신호등 안 지켜요. 나도 다 가버리고, 몸의 속량 받지 못한 세상에서 타락이 된 거예요. 2200번 버스가 엄청 빨리 달립니다. 시속 110km로 달립니다. 엔진도 안 좋은 차가요. 수지와 용인에 사는 사람들은 새 차를 타요. 똑같은 모양인데, 파주 사는 사람들은 완전히 수지에서 10년 묵었던 것 페인트칠만해서 타거든요. 우리는 언제 멈춰서 급정거 할지 모르는 차에요. 수지 용인 사람들은 영생을 누리고 우리는 곧 죽는 거지, 엄청 빨리 달려요. 신호등 하나도 안 지켜요. 점점 내가 그 아저씨 옆에서 가만히 살다 보니까 나도 지킬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드디어 내가 1년에 4번 정도의 티켓을 받았어요. 일산두레교회 목회할 때 항상 대곡역 위에 올라갈 때 12km 오버해서 6만 원짜리 5만 원짜리 물었어요. 제 아내한테 신고한 것도 있고 신고 안 한 것도 있어요. 제 아내한테 두 개만 신고하고 두 개는 신고 안 했는데, 그 신고 안한 것 두 개를 가지고 늘 새벽기도 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왜 이랬을까? 문제는 내 아내가 나를 본받고 있어요. 절대로 내 아내는 법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내가 타면 내가 급히 가야 하니까 bold move, 아내도 가끔 법을 어겨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면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착한 천사 같은 아내도 준법정신의 마지막 보류였던 정선희 여사도 신호등을 어기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요. 이런 것이 몸의 속량을 받기 전에 피조물의 한계 안에 살 때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량 받지 못한 세상에 구원받은 성도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책임감, 이 세계의 마지막 한 사람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지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앞으로 살 천국은 지금 지상에서 속량 받지 못한 세상에서 영생을 연습하는 게 너무 좋아요. 우리가 앞으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성숙도는 지금 이 한계 있는 세상에서 연습하는 게 적법한 거예요. 여러분 전쟁을 연습할 때 총알이 빗발치는 실전 상황에서 연습하는 게 더 좋아요? 아니면 인형이 서 있는 데서 연습하는 게 좋아요? 전투력이 좋은 병사를 기를 때 총알이 빗발치는 데서 훈련해야 해요? 아니면 그냥 허수아비가 서 있을 때 훈련해야 해요? 허수아비가 서 있을 때 훈련하면 전투력이 안 생기겠지? 총알이 빗발치는 데서 하면 굉장히 날 센 병사가 되겠죠? 논산훈련소에서는 제가 23연대 4중대 1소대 사람이었는데, 군대 이야기 하는 것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참 싫어합니다. 이게 적절한 예이기 때문에 제 이야길 잘 들어보고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우리가 사병으로 처음 생활하기 때문에, 조교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친절합니다. 그런데 6주 훈련받고 자대 배치를 받으면 우리가 군대 6주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우리를 거칠 게 대합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에 있었을 때는 정지된 사격만 연습을 했었습니다. 정지된 걸 25미터에서 쏘는 사격만 연습을 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치를 받으니까, 은평구 진관동에 인수봉 폐군대 옆에서 훈련하는데, 산에서 이동타깃을 막 하면서, 사람 모양의 이동타깃을 맞히는 겁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총을 잘 쏘았던 한 총했던 저도 거기서는 도저히 총이 안 맞는 겁니다. 그래서 사격 못하는 그룹에 속해서 얼마나 많은 김밥말이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걸 김밥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섞어놓고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것, 그리고 매를 때립니다. 너무 매를 맞다 보면 긴장이 돼서 이동타깃이 맞기 시작합니다. 사격연습만 10주 동안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온 생발톱이 다 빠져버립니다. 산악에서 훈련받기 때문에, 생발톱이 다 빠져버립니다. 그때 제가 전투할 마음이 생기고 내가 병사가 됐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웬만한 총하나 피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사람이 완전히 호전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이게 무장공비가 되는 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무장공비가 돼서 내가 8월 20일에 군대 갔다가 12월 말에 내가 남산 필동에 배치를 받습니다. 대한극장 뒤에 배치를 받았는데. 그때 내가 완전한 병사가 돼서 완전히 날 센, 얼마나 군가를 많이 불렀는지, 그때는 찬송가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군가밖에 없습니다. 각하의 가슴 앞에 방패가 되자, 이런 것, 그때 각하가 참고로 전두환 각하였습니다. 그 체제 안에 있으니까 군대노래가 너무 즐겁고, 높은 산 깊은 골, 군가를 부를 때 그렇게 identify가 잘 되는 겁니다. 10주 동안 격리된 채 교회는 못 가고 군가를 부르고 총을 쏘고 사격을 해서 수류탄을 던지니까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럴 때 파병되면 군대 가는 겁니다. 총 쏘러 가는 겁니다. 이래서 전쟁이 가능하구나, 이런 몸서리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룩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천사 같은 착한 형제자매들의 돌봄과 배려와 나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들과 있으면 죄를 지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거의 죄를 안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정말로 내 인간성에 해결되었던 쓰레기 같은 감정을 자극하면서, 나의 파괴된 존엄성을 막 해코지하면서 격렬하게 정죄하고 타격하기 때문에 우리가 극단적인 over defence, 방어심리가 생기고, 공격심리가 생기고, 나를 보호하기 위한 위악적일 정도의 거친 태도가 우리한테 생깁니다. 그게 세상살이 하는 방법이죠. 그래서 우리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소속됨입니다. 로마서 12장 3-6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는 은사와 재능의 경합이 일어납니다. 은사와 재능의 경합이 일어나기 때문에 욕구의 충족이 많이 일어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는 내가 변호사하고 싶으면 상대방도 변호사 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의사하고 싶으면 의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들어오면 전부 다 은사와 재능이 충돌되지 않고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몸의 지체가 되는 길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아주 실제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몸의 지체가 되어 강력한 성령 임재 공동체에 참여함, 이것이 구원입니다. 요약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이 박혔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믿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실제로 죄의 형벌, 죄의식, 죄책감, 죄의 권세, 이 세 가지로부터 해방되는 것,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는데, 죄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은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나라 앞에 가면 더 이상 형벌 받지 않습니다. 죄책감,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죄를 반복적으로 지을 마음에서 제외됩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죄를 반복적으로 지을 권세, 죄의 권세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않을 수밖에 없어서 짓는 권세에서 서서히 풀려납니다. 내가 옛날에 마약중독자였다면, 성령께서 나에게 해방을 주고 구원을 주면 마약빈도가 점점 줄어듭니다. 점점 마약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마약 밭에 지나가도 마음이 설레지 않습니다. 옛날에 양귀비 밭이나 마리화나 밭을 지나가면 마음이 들떠서 성령 충만 하듯이 마리화나 샐러드 해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지금은 마리화나를 보더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점점 죄의 권세, 죄를 반복하여 지을 수밖에 없는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도박을 하면 손발을 잘라도 입으로 도박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도박은 중독성이 강한데, 내가 도박장을 보고 경륜장을 보고 카지노를 보더라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을 때 우리는 권세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합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오로지 성령의 법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때 정죄함이란 다시 죄짓게 하는 힘이 없나니, 다시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없나니,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완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음, 영단번에 해방이 끝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영단번에 죄 용서를 받았지만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는 시차가 필요합니다. 이건 무슨 비유와 같으냐면 히브리 노예가 파라오 채찍을 피해서 요단강을 건넜죠? 파라오의 채찍은 더 이상 안 따라오죠? 실제로 물리적인 파라오의 채찍은 안 따라오지만 그 백성의 심령 자체가 즉시 자유인으로 바뀌었어요? 여전히 옛날 노예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는 노예근성과의 혈투를 벌여서 점점 거룩해지는 걸 우리는 성령 충만을 통하여 성화가 된다, 이렇게 말해요. 성화, sanctification,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어요. 한 번 끝났어요. 구원은 한 번 끝난 완료사건이에요. 동시에 구원은 점진적 반복적 누적적 사건이에요. 다시 말해서 법적 구원은 한 번 일어났지만 품성적 구원은 반복돼 일어나야 해요. 홍해는 한 번 건넜지만 파라오 채찍 아래서 살던 노예근성과의 결별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는 말은 영단번에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영단번에 일어난 한 번의 해방사건과 구원사건은 지속적 성령 충만으로 인하여 반복적 누적적인 출애굽이 있어야만 해요. 그걸 우리는 성화, 그리스도와 함께 닮아감, 거룩해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8-14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임, 이때 몸은 속량 받지 못한 세상에 남아 있는 몸, 2200번 버스 운전기사의 감정 운전을 보고 닮아가려는 김회권 목사의 몸, 김진홍 목사와 함께 죽음의 빨간 불을 돌파하려는 용감무쌍한 마음, 이런 것들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 할 때의 몸이 되는 거죠. 행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성화라고 해요. 성화, 거룩하게 됨, 성화가 마지막이 되면 완전한 구원이 영화입니다. 구원은 첫째 영단번에 한 번 일어난 탈출사건이면서 구원사건인데, 이 구원사건이 해방되지 못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있는 내 몸과 함께 매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분투와 점진적 과정을 포함하면서, 이렇게 구원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8장 28-30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의롭다 하신 사건은 한 번입니다. 한 번 해방된 사건입니다. 영화롭게 한 것도 한 번인데,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의 중간에 매일 매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분투하는 점진적 과정이 있음, 영화롭게 바뀌는 것도 마지막 하나님께서 화룡점정으로 바꿔주시는 겁니다. 누에가 고치가 돼서 나방이 될 때 일정기간 동안 있다가 되죠? 꽃도 일정기간 있다가 터져 나오죠? 병아리도 21일 동안 있다가 터져 나오죠. 임계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홀연히 변화가 안 되다가 정지돼 있다가 갑자기 탁 터져 나오는 것이 임계점의 원리 아닙니까? 병아리가 21일 만에 나오죠? 빌립보서 3장 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비천한 몸, 속량 받지 못한 세상이 무서워서 완전한 죄를 이기지 못했던 그 비천한 몸, 몸을 벗어버리는 게 문제입니까? 그 몸을 변화시키는 게 문제입니까? 우리 기독교 구원론, 플라톤의 대화록 <파이돈>편과 기독교 바울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몸 전체를 해방하고 속량하여 거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그리스 사상은 몸 자체를 벗어버리려고 하니까 너무 차이가 많이 나죠? 영화롭게 되는 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됩니다. 우리 비천한 몸을 갑자기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34절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42-43절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온 몸에 많은 욕이 있습니다. 상처도 있고 모든 게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미국 LA 장의사들이 화장을 하면 온 몸에 너무 많은 실리콘이 나와서 불에 타지 않는대요. 할머니들인데도 그렇게 많이 성형을 하신 거예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때문에 할머니들이 엉덩이 가슴 온 데서 실리콘이 다 나오는데, 몸에 박는 인위적인 가공물인데, 화장이 안 된대요. 얼마나 우리 여성들이 불쌍한 거예요. 턱에서도 그렇게 많이 나온대요. 멀쩡한 사람이 화장을 하면 그렇대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사는 거예요. 영화, 우리 구원은 처음에 한 번 일어난 법적구원인 의롭다 하심, 매매일의 분투, 성화, 그다음 마지막 임계점에서 턱 바뀌는 영화, 이게 구원이에요. 이 구원이 일어나는 과정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 안에서 일어나요. 왜 이 구원이 일어나느냐? 첫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여전히 구원해야 할 추수밭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구원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해요. 성령의 임자 몸인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임자 몸인 교회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많이 추수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거점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지렛대가 되기 위해서 남아야 해요. 또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물실재 전투에서 전투력을 길렀던 병사처럼 우리가 우리 희생정신을 연습하기 좋은 세상에서 연습하도록 적당하게 죄가 많은 세상에 내버려두고, 우리를 품성적 구원 즉 성화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남아 있는 거예요.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왜 아직까지 세상에 남아 있습니까? 왜 heaven's gate 천국의 문처럼 가면 안 되죠? 이 세상에는 육신을 갖고 사는 우리가 속량받지 못한 세상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을 연습하도록 하는 훈련장이 필요한데, 이 세상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연습하기 너무나 좋은 훈련장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많이 말했습니다. 첫 번째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통치거점이 됨으로 세상구원의 방주가 돼야 해요. 두 번째로 우리가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 성화구원,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훈련을 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적절한 모순과 제한성이 많은 세상이다, 세 번째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갱신시키는 하나님의 비전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째로 바꿀 비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는 마음으로 세상에 대해서 무한책임적인 마음으로, 즉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마음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할 비전을 고취 받고, 새 세상을 창조해내는 이유를 납득하고 설복당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천지개벽적인 사명에 동참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 것은 제가 많이 강조합니다. 우리가 만약 죄 많은 세상에서 떠나버리면 어떻게 돼요? 아브라함이 불타는 소돔성을 모른 척 하고 떠나야겠습니까? 불타는 소돔성에 고개를 숙이면서 살려달라고 해야겠습니까? 아모스가 House of Jacob, 야곱의 집안을 위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계속 오니까 아모스가, 예 심판 받아 마땅한 놈입니다, 빨리 다 불로 심판해주십시오, 했습니까? 하나님 잠시 만요,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진노를 만류했던 예언자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진과 기근과 재난이 온다,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온다, 그런 묵시록이 있으니까 지진이 왔구나, 이제 두 가지만 더 오면 된다, 기근과 전쟁, 이 묵시록적 예언이 성취되려면 전쟁을 벌여야 하나보다, 나라끼리 전쟁하자, 이렇게 해야겠습니까? 그런 묵시록적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단두리하면서 이런 세상과 반대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까? 후자입니다. 후자가 하나님 뜻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이제 50점 이하로 받으면 매 맞아, 예언한다, 아버지가 맏아들을 여섯째 아들들에게 예언합니다. 이번에 너희가 공부 못하면 다 매 맞는데, 데드라인이 50점이야, 이러면 그 아버지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50점 이하를 맞아 매를 맞아야 합니까? 그 예언을 필요 없게 만들고 진노가 폭발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역실천을 해야합니까? 성경에 있는 재난예고를 보고 재난이 성취되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까? 아니면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있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 안 있다면 전쟁을 일으켜야 합니까? 아니면 이런 묵시록적 재난이 오지 않도록 우리가 맏아들 같은 마음이 돼서 이런 세상이 안 오도록 애를 써야 합니까? 어떤 것이 옳은 겁니까? 후자가 옳은 겁니다. 이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김회권 목사가 강조하는 세 번째 근거구절, 하박국 2장 14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온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할 때까지 우리는 남아야 해요. 포기하고 가는 게 아니라, 묵시록적 재난의 피해자가 되도록 가버리는 게 아니라, 휴거와 같은 게 아니에요. 휴거 영화는 정반대입니다. 보잉 747 비행기 조종사는 가버립니다. 올라가요.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납니다. 참 기독교 정신은 휴거한다고 747 비행기 기장한테 삐삐삐 올라와라, 너는 너무나 착한 기장이다, 그러면 파일럿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올라가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는 제 승객 260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포기하고 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 부기장 한 명 주시던지요, 제가 만약 가면 우리 260명 다 죽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이 세상에 남겠습니다, 하나님 천국에서 오래 사십시오, 안녕, 이렇게 하고 남아야 합니까? 아니면 놓고 올라갑니까? <휴거>에 보면 잠수함 기장이 놓고 올라가 버립니다. 다 죽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에요. 이사야 11장 9절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남는 이유는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세계구원의 지렛대가 돼준다, 그 정도보다 훨씬 더 큰 비전,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길 사모해야 해요. 이사야 6장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 차는 것,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남아야 해요. 다시 말해서 아까 말했던 처음 이유는 소극적 이유고, 그건 보통 기독교인 중에 각성한 신학자가 하는 말이에요. 세 번째는 저와 양진일 목사가 강조하는 바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믿음,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하는 하나님 비전 때문에 남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휴거에 나오는 기장이나 잠수함 함장처럼 하면 안 돼요. 오전에 말했죠? 죄와 죽음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불행한 에피소드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생명의 왕국을 창조했고, 영생이 원래 광막한 우주의 하나님과 인간 드라마의 핵심부분이에요. 죄와 죽음은 temporary 에피소드에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죄의 형벌과 죄책감 죄의식으로부터의 구원인데,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성령 받는다는 말도 맞고,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는 말도 맞아요.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느냐? 주 예수를 믿으라 할 때 전심으로 아멘 하면 성령을 받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그 말을 들을 때 구약을 다 알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죄와 죽음의 골짜기에 빠져서 혼신의 힘으로 죄와 죽음을 헤쳐 보려고 애를 썼던 모든 사람들은 구약성경이 없더라도 주 예수를 전하자마자 바로 그걸 감격합니다. 저는 구약을 잘 모를 때 예수를 믿었습니다. 내가 이미 구약적 경험인 죄와 죽음의 속박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 때 예수를 소개받아서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 구약을 공부했지, 구약 성경을 다 알아야만 고백하는 것은 아니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 할 때 주 예수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세주이며, 우리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죄를 짐지게 하는 그 간단한 명제를 설명만 해도 구원의 임계점에 도달하는 사람, 구원의 때가 임한 사람은 즉각 감지하고 인식하고 그 계시를 받아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노방전도가 가능한 것이고, 구원의 때가 임한 사람은 몇 마디 하지 않고도 낫으로 이삭을 자르듯이 싹둑 자를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선물로 오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죄책감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속량 받지 못한 몸을 가지고 사는 세상에서 매일 분투하면서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감으로써, 닮아가는 과정이 불완전한 채 우리는 죽어요. 비천한 몸으로 죽습니다. 이 비천한 몸을 D-Day 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게 해줘요. 고린도전서 15장 43절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이게 바로 구원인 거예요. 이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의 성화, 속량 받지 못한 세상에서 속량 받지 못한 몸을 가지고 살 때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구조적으로 받을 수 있는가? 첫째, 기도 가운데 찬양 가운데 성경공부 가운데 예배 가운데, 네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 네 가지를 동시에 해주는 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있으면 이 네 가지가 다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게 6일 동안 세상 한복판에 나가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고독한 결단을 할 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합니다. 성령이 언제 여러분에게 역사해요?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예수를 주답게 모시고 살면 그 고독과 불확실의 여백 안에서 성령이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역사해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속하는 경험, 이것이야 말로 현재 내 구원을 향유하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내가 내 구원을 향유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지체가 되는 길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말은 거의 준 무한책임적인 결속감으로 모여든 공동체, 우리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공동체, 어떤 형제도 십일조 안 냅니다. 형제끼리 십일조 내는 집안 있어요? 교회만 예수님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겁니다. 이건 가족보다도 훨씬 강력한 존재입니다. 교회는 이미 혈연적 유대를 뛰어넘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 중에 10만원씩 계 들어서 남 좋은 일 하는 사람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교회는 우리 모두 십일조 내고 십일조보다 더 내기 위하는 착한 마음들의 집합이에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데, 먼저 교회 안에 못 사는 사람들을 도와줘야 해요. 교회 안에 못 사는 사람, 교회 안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데 교회 헌금을 쓰는 거예요. 교회 안에 있는 형제를 돌보는 사랑의 확장에서 교회 바깥까지 담을 넘어 가는 거예요. 교회 안에 기본적 인간의 생존권을 채우는데 써야 해요. 우리 교회 안에 못 사는 사람이 있고, 성실하게 일하지만 밥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밥을 먹여 주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준 무한책임적인 결속감이에요.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준 무한 결속감에 교회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상당한 제약을 의미합니다. 여기 만일 의사 선생님이 한 명 있다, 의사 선생님이 여기 속해서 살면 의사 선생님들의 상류사회에서 왕따를 당합니다. 여기 법관이 한 명 있다, 변호사가 한 명 있다, 그 법관 변호사들은 보통 변호사들처럼 못삽니다. 여기에 준무한 책임적인 지체 안에 들었다는 말은 실제로 가족이 됐다는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의 확실성을 묻는 거예요. 제가 옛날 교회에서 이걸 실험하다가 어려운 일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2500-3000만원의 펀딩을 조성해서 micro credit을 시작했습니다. micro credit은 300-500만원의 돈을 그냥 빌려주는 겁니다. 급전이나 일수의 돈을 빌리지 않고 재정적인 금융위기를 타파하도록 도와주는 제도인데, 그 심사위원 6명이 정해졌고 심사를 잘 해서 빌려주도록 돼 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그걸 빌려갔는데 한 사람은 갚았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신청했다가 빌려갔는데, 제가 신청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마침내 신청을 한 겁니다. 이 사람은 거의 갚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거짓말로 저에게 중국에 가서 사업하고 올 테니까 apply하려고 서류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건 거의 거짓말이 확실합니다. 당신 거짓말 하고 있습니다, 라고 내가 물으면 매우 민망해집니다. 저는 매우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6명과 의논을 했는데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걸 빌려서 중국 안 가고 딴 데 가서 그 돈을 써 버리는 걸 알았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교회란 조직은 없습니다. 교회는 영적혈연가족입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 직업군이 교회에 오면 그 직업군의 전문가적 대우를 안 받고 포기를 할뿐만 아니라 그런 삶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은혜 안에서 평균케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오면 사장 티를 내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사장인지 장관인지 표를 내면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평균케 된 지체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화를 일삼도록 도와주는 준 천국 격려기관입니다. 오늘 결론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모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모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덧입은 사람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몸, 육체의 이 몸을 영혼의 감금소로 보지 말고,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서 의로운 일을 하는 봉사도구로 몸을 드리면 이웃 사랑에 내어 던져진 몸을 산제사라고 합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 이웃 사랑을 위해서 몸이 직접 가는 것, 이게 바로 산제사입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이웃 사랑을 위해서 바쳐진 시간과 물질이 모두 산제사입니다. 몸이 동반된 참여, 그것이야말로 영적예배다, 성실한 직장생활이 영적예배입니다. 의사선생님, 사회복지사, 간호사가 성실하게 직장 생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산제사입니다. 그게 영적예배입니다. 내가 변호사다 내가 의사다 내가 약사다, 주사도 아무데나 팍팍 놓고 철야기도 간다고 의사선생님인데 정신이 없어서 동맥을 찔러야 하는데 정맥을 찌르고 돌팔이처럼 하고 할렐루야, 하면 영적예배가 아니고 직업적 불성실이고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참된 의사는 철야기도에 오지 말고, 잠을 푹 자고, 수술할 사람들을 위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참 의사입니다. 내일 수술할 의사가 목사님 도운다고 강남기도원에 가서 금식한다고 배를 훌쭉 굶어서 눈동자가 희미한 상태에서 수술하고, 가위도 뱃속에 놓고, 한양대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배가 아파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가위모양이 있습니다. 성실한 수술행위가 산제사이고 영적예배다, 이렇게 예배를 정의하면 얼마나 우리 기독교인들의 직장생활이 성스럽고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덕이 되겠어요? 이게 바로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예배드리는 방법, 기독교인 교사는 클래스 룸에서 만난 아이들을 예수님 만난 듯이 지성적으로 겸손하게 존댓말을 쓰면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그것이 바로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 영적예배, 주부는? 엄마는 자녀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잘 권면하면서, 에라 모르겠다, 전자오락 하든지 맘대로 해라, 돈 여기 있다, 자기는 사우나 가면서 목욕하면서 열심히 먹고 동창회 다니면서 반지 사러 다니는 엄마들은 안 되죠. 성실한 엄마, 성실한 아버지, 이 모든 것이 몸으로 드리는 산 예배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몸으로 드리는 산 예배야 말로 세계종교철학 사상 몸에 관한 최고의 찬미임과 동시에 몸으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가장 우주적 차원까지 격상시키는 기가 막힌 신학적 진술임과 함께 이 세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종교가 될 것인가를 암시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만 알아도 이 세상은 우리가 석권합니다. 왜? 이렇게 감동이 충만하고 이렇게 정직과 진리가 가득 찬 신자를 누가 감당해요? 그 신자가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으며, 그런 신자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살겠습니까? 이렇게 성실한 사람은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권력은 못 잡을지 몰라도 영향력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세상일에 무한 책임적 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기독교구원론이고, 이원론을 극복하는 구원론이고, 그리스도인의 왕 같은 책임감을 행사하는 것이죠. 구원 받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함, 구원받은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 구원의 결과는 보편적인 혜택이 돌아감, 구원받은 성도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간접 경험함,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삭 옆에 있는 비골 군대장관, 블레셋 군대장관은 이삭을 보고, 네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다, 너는 하나님의 방백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주변 사람 모두에게,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우리 서로 평화협정 맺읍시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이니까, 평화협정 맺읍시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고 이방인들이, 우리 평화협정 맺읍시다, 우리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악된 삶을 살지 맙시다, 먼저 다가오잖아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한 하나님 백성의 참 예배입니다. 주일 날 우리가 모이는 것은 6일 동안 몸으로 예배드린 자가 드리는 감사의 축제입니다. 예수 부활했습니다, 예수부활, 지난 6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6일 동안 동행한 부활예수를 찬미하는 시간이 주일예배에요. 주일예배 때 처음 은혜 받는 게 아니라 주일예배는 6일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여 예수 부활하셨네를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 만세 예수 우리 주 보좌에 앉으신 주, 그걸 공동으로 confession 고백하는 게 주일예배에요. 주일예배는 6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 축제적으로 모여서 예수 부활하심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집중적으로 경험하는 것,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상적으로 기독교의 구원이 작동하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손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왕 같은 제사장, 섬김의 책임감, 왜 왕 같은 제사장이죠? 통치함으로 하나님께 사람들을 끌고 감, 제사장은 평신도를 하나님께 끌고 가는 거죠. 왕으로써 감화 감동시켜서 통치해서 섬겨서 서서히 하나님께 끌고 감,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죠. 구원론은 이제 끝났습니다. 저에게 많은 질문해주시고요. 오늘은 하지 마시고요. 서신으로도 괜찮고, 또는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탁구할 때, 항상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깊이 이해하기 바라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바라고 말씀 충만하여 6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와 동행하여 7일째는 예수찬미, 왕이신 예수찬미, 축제와 감사를 표하기 위해 주일예배를 드리러 오는 거예요. 주일예배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드리기 위해서, 6일 동안 동행하신 예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주일 날 오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구원론을 끝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가슴 속에 6일 동안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삶속에 동행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셔서 제7일 날 안식일에 와서 예수 우리 왕 찬미를 힘껏 외쳐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깃발을 흔들게 하여 주소서. 주님 목사인 저는 제 수준에서 회의하고 방황합니다. 우리 20대 청년은 청년수준에서 회의하고 방황합니다. 주님 우리를 오랫동안 냉담에 내버려두지 마시고,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고 6일 동안 우리와 동행하셔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예수 왕 만세, 부를 수 있는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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