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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구원론 강의 3-예수의 죽음은 어떤 점에서 대속적 죽음인가)

by 【고동엽】 2021. 11. 27.
-(예수의 죽음은 어떤 점에서 대속적 죽음인가)


예수의 죽음이 대속할 의사가 전혀 없다, 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불트만이라는 서구신학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대속하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일 뿐이고, 그것도 특별히 사도바울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뿐이고, 예수의 죽음자체는 모방의 효과만 있고, 교육효과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 마술적인 대속효과는 없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서구신학자들입니다. 적도의 성자,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라는 책을 썼던 앨버트 슈바이처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으로 세상의 심판을 유도하려고 하셨다, 그는 의롭고 거룩한 자기가 죽었을 때 묵시문학적인, 엄청난 개벽을 동반하는 큰 재난이 세상에 올 줄 알고 죽었는데, 자기가 억울하게 죽으면 무서운 재난이 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역사의 어처구니없는 수레바퀴에 희생을 당한 사람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적도에 가서 성자생활을 했지만 신학적으로는 너무나 해를 끼치는 주장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지금 정통보수신학자들에게는 굉장히 비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아임을 계속 은닉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꾸 알리지 마라, 예수님은 메시아임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계속 신신당부를 하는데 사람들이 계속 소문을 내는 바람에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이건 신학적 관심이고, 여러분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을 수 있는데, 그러나 엄격하게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죄사함의 구원이 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잘 정리되었는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냥 마술적인 공식을 믿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믿어버리려고 하지, 그 믿음이 나의 마음과 행동과 의지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저는 불트만과 같은 서양신학자들의 주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한 말과 행동, 그가 일으키셨던 많은 치유사역들, 병자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행위, 이 모든 것 자체가 죄를 대속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마침내 못이 박혀서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 됐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사건은 그 앞에 많은 삭개오 사건, 간음하다 붙잡힌 간음한 여인 사건, 베드로 장모사건,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사건, 이 모든 사건이 전부다 죄를 지는 건데, 죄의 개념자체가 죄라는 포괄적인 정의 자체가 죄를 짐 진다할 때 병을 짐 진다, 저주를 짐 진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죄를 짐 졌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들의 불명예, 그들의 수치, 그들이 받는 대중적 증오심을 자기 몸에 이전시키는 행위 아닙니까? 짐을 졌죠?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행위는 삭개오 집에 전가되었던 모든 저주와 모든 비난을 대신 떠맡는 거니까 짐을 지는 거 맞죠? 공생애 자체가 죄를 대신 져준 어린 양의 삶인데, 그 죽음자체에 대속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게 무엇이 이상합니까? 아무 이상이 없죠? 이 사건과 이 사건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불트만, 여러분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인데, 불트만이란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 유럽신학자 80%가 그걸 믿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양진일 김회권 이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김세윤 박사님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저는 학부 때 김세윤 박사님의 글을 읽었고, 김세윤 박사님은 요아킴 에례미아스의 책을 수없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김세윤 김회권 이 라인은 요아킴 예레미아스 그 위에 아돌프 슐라트가 있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튀빙겐에 가 있었죠? 아돌프 슐라트가 있어서 제가 그리 간 거 아닙니까? 슐라트의 무덤 앞에서 제가 사진을 찍었는데, 슐라트 예레미아스 김회권 양진일, 이 라인이 있는 거죠. 불트만 요세 로만 페린이 있고 안병무도 있고 도미니크 크로산도 있고 예수세미나 도올 김용옥도 있습니다. 김용옥은 신학자도 아닌데 아무데나 자기 이름을 올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 남의 죄를 뒤집어쓰려는 대속성이 없었다, 그건 사도들이 갖다 붙인 것이다, 예수에게는 그런 사상이 없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데, 제가 볼 때 아돌프 슐라트, 요아킴 예레미아스, 김세윤 이런 분들은 예수의 언동 전체를 보아야 한다, 예수의 행위 행동 비유 말 도발적인 행동, 이 모든 걸 다 봐야만 죄를 대속했다는 말뜻을 알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아돌프 슐라트라는 사람은 불트만과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로버트 모간이라는 옥스퍼드의 학자가 라는 책을 썼는데요. <신약신학의 본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불트만과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돌프 슐라트, 아돌프 슐라트와 똑같은 때 베를린 대학교 교수가 아돌프 폰 하르낙입니다. 좀 딱딱하죠? 오후예배시간에는 공부한다, 필기합시다. 구원론이 끝나면 진짜 은혜로운 설교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강의를 하기 때문에 제 개인기가 충분히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원래 은혜로운 설교를 하는 사람인데,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숭실대나 장신대에서 하는 강의인데, 여러분은 크게 소화가 안 되도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제가 쉽게 해야 하는데, 아라 자매 이해가 됩니까? 학부 1,2학년은 이해가 안 될 수 있는데, 이런 관심자체가 한국에는 없기 때문에, 뭐가 그렇게 복잡하노, 믿으면 되지, 그 간단한 말이 정말로 간단하게 이해하면 되는데 맹목의 신뢰가 있기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 한국은 유럽과 다릅니다. 모르는 채로 믿어버리는데 그게 대부분 미신입니다. 설복된 지성의 확신이 아닙니다. 설복된 지성의 확신만이 구원에 이릅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설복되지도 않고 동의되지도 않고, 그 구원의 이치와 논리도 모른 채 무조건 믿어버리려고 하는 정신적 노예근성과 같은 의존성입니다. 이거 옳지 않습니다. 정신적 노예근성으로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뭔가를 잘 믿어버리려고 하는 태도보다는 설복된 지성으로 이치를 따져가면서 늘 마음이 뜨겁도록 만드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늘 마음이 뜨겁습니다. 이걸 제대로 깨달으면 늘 마음이 뜨거워져서 항상 원자로 상태가 유지됩니다. 폐연료봉도 없는 원자로입니다. 늘 에너지가 납니다. 절대로 폭발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런 내용은 이치를 따져가면서, 오늘 하려고 하는 건 굉장히 긴 이야기입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뜻이 뭔가를 가장 쉽게 이해해보자는 겁니다. 저는 바울서신과 복음서를 면밀하게 관련시킵니다. 저의 박사과정 부논문이 신약성경입니다. 부논문이 가 제 두 번째 부전공입니다. 제 전공은 이사야서를 가지고 논문을 써서 졸업을 했고, 졸업하기 전에 논문을 쓰는 모든 자격을 주는 논문이 신약논문입니다. 역사적 예수연구를 제가 했는데, 한국 신학자들은 자꾸 저보고, 왜 당신은 구약이 돼서 신약에 와서 우리 억장을 무너뜨리느냐? 저는 그런데 구약전공이 아니라 성서학전공이고 다 제 전공인데, 우리는 뭐 먹고 사느냐? 책을 좀 썼다고 신약연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양목사님 사람들이 이야기 하면 이것도 김회권 목사 업이다, 이야기해주십시오. 오늘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으면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뜻이 뭔가를 해명해보고요. 그 해명의 근거로는 로마서와 공관복음서를 면밀하게 연동시켜서 해석해보겠다는 겁니다. 아까 오전에 설명했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 세상 죄를 지고 어디다 하역을 할 것인가?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살인한 사건은 에너지 방출사건입니다. 칼을 찌르는 것, 피를 흘리는 것, 전부 다 이 사건은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가 짐 지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건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제가 실수로 절벽에서 등산하다가 친구를 쓰러뜨려 친구가 죽었습니다. 내가 친구를 밀고 친구가 쓰러져 죽는 이 사건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걸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불가역적인 시간을 가역적인 시간으로 만들어서 원래 그 상태로 거꾸로 돌려줄 수 있는 하나님, 시간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가진 하나님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만이 그 사건 이전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활시킬 때 우리 몸을 그대로 재생시키는지 알려 드릴까요? 우리가 부활할 때 육신을 입고, 천국 갔을 때 서로 동일성을 확인하면서 양 목사님과 알아보는 이유는 완벽하게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시간의 불가역적 성격을 가역적으로 reversing 할 수 있는 전능하신, 시간 바깥에 계신 그분만이 우리 몸을 그대로 재생하기 때문에 부활이 가능한 겁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말은 그 사건이 범해지기 이전 상태로 되돌려주는 능력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창조주 하나님만이 원래 시간의 불가역성,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성격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즉 시간을 지배한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되돌릴 수 없음을 철회 시킬 수 있는 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 제가 설명했나요? 호주의 한 자동차광인 아버지가 람보르기니에 못으로 장난 친 아들의 손을 쳐서 아이 손을 잘라내야 할 만큼 치명적이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버지가 칠만큼 악의가 없고, 그냥 못으로 람보르기니에다 I Love Dad를 쓰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람보르기니의 값어치를 몰라서 못으로 아버지 좋다고 쓰는데, I LOVE D 쓰는 동안에 아버지가 미친 듯이 가서 손을 쳤는데, 너무나 람보르기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이 손이 절단 나는 걸 모르고 때린 겁니다. 병원에 갔더니 아들이, 아버지 미안합니다, 하면서 일곱 살짜리 아들이 다시는 아버지 차에 하지 않겠다고 참회를 하는데, 이 아버지가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런 걸 죄 용서해주는 거예요. 어떻게요? 다시 역순으로 돌려주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돌려주셔서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는 감격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한다는 건 그겁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는 우리를 영구적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죄 짓기 이전 상태로 되돌려주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죄사함의 전권을 자기가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요합니다. 주장은 아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주장의 배타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장을 입증할 능력이 중요한 겁니다. 이 세상에 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여러 종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여기가 신이 있고 저기가 신이 있다고 주장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유일신이라고 참 하나님밖에 없다고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만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문서, 자기의 신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문서는 세상에 복수로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주장의 독특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장을 실현시키는 신은 이스라엘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이스라엘 하나님만이 그 문서의 주장대로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당신이 하나님 됨을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신들은 전부 다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갔습니다. 주피터 신, 헤라 신, 포세이돈 신, 아스르 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만이, 야훼 하나님과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과 알라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입니다. 알라 하나님과 엘로힘 하나님은 똑같아요. 엘로힘과 알라는 같은 말에서 나온 겁니다. 이슬람은 우리랑 다른 종교 아닙니다.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잘못 전파되어서 생긴 파생종교입니다. 파생유대교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으로 수습해야 할 우리의 에돔족속과 같아요. 정통구원사의 방계족보입니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는 싸워서는 절대 안 되고, 아브라함의 가문 안에서 화해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화해할 길은 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면 이 두 종교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기독교를 대표하면 둘 다 충분히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바니아의 수녀였던 테레사 수녀 앞에 힌두교도들이 그렇게 절을 하는 걸 볼 때, 테레사 수녀처럼 성육하신 기독교가 나타나면 힌두교까지도 우리가 절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세상 만민이 절을 하는 경지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겸허하고 세상 만민의 불행과 죄와 참상을 내 몸에 전가하겠다고, 내 몸에 지고 가겠다고 나서는 이 앞에는 모든 종교가 침묵할 수밖에 없고, 모든 종교가 절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는 세리가 받았던 비난을 자기가 짐 졌습니다. 삭개오가 받았던 죄를 자기가 지셨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를 자기가 지셨습니다. 이 행위를 바로 살아있을 때부터 예수는 대속했습니다. 한 번 비난을 받을 때마다 예수에게는 생명의 감가상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에 대한 비난이 꽂혔죠? 내가 한 번 죄인을 용서하고 더럽고 추악한 인간을 내가 한 번 껴안을 때마다 내 안에 어떤 감가상각이 일어났습니까? 내 정결함의 훼손이 일어났죠? 나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죠? 내가 죄인을 품을수록 율법의 의를 가진 사람이 나를 비난했죠? 내가 이런 사람을 끌어안고 친구가 되어 죽었다면 내가 저들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 말할 수 있죠? 논리적으로 안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죄와 연약함과 수치심과 모든 파산한 삶의 파편들을 끌어안다가 점점 미움을 많이 당하고, 내 생명에 일어난 생명가치가 훼손되다가, 그 훼손이 훼손1, 2, 3 쭉 나에 대한 비난이 내 생명과 나의 거룩성을 침범하다가 내가 마침내 거룩함이 하나도 남지 않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죄 덩어리 자체가 됐어요. 로마서 8장 1-3절 읽어보세요. 지금 이때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죄 없던 예수가 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려다가 죄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비난을 자기 몸에 감수함으로 예수 안의 생명 가치 거룩 가치가 점점 훼손되고 결핍되고 소진되다가 예수 육체는 죄밖에 남지 않게 됐다는 말이에요. 다시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과 똑같은 구절이, 고린도후서 5장 21절, 이 두 구절만 오늘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암송된 성경구절만이 신학사상과 예술과 모든 것에 발효작용을 일으킵니다. 암송되지 못하고 찾아봐서 내가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성경구절은 성경 안 가진 인물들입니다. 성경을 가진 인물의 특징은 암송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가지고 성경 선반에만 가지고 있다? 그건 성경 안 가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 말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선반에만 있다가 주일에 양 목사님이 찾아보라니까 게으르게 찾아보는 사람은 No Bible, 바이블 없는 사람이에요. 암송된 그 구절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만이 말씀이 있는 거거든요. 이걸 동시다발적으로 암송하면,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지,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그 마음과 심령에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머리 나쁜 걸 부모님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여러분의 무정함을 탓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요한복음 3장도 반만 기억하고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성경구절로 알고 있고, 이런 것도 성경으로 알고 있고,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출처를 알고, 그 맥락이 어디인지를 알고, 기억하면서 왕성한 발효작용이 일어나도록 암송해야 할 텐데, 나이가 많은 오근재 장로님처럼 연로하신 분은 이해합니다. 창기 대범이 동원이, 이런 사람이 말씀을 모른다, 그건 피눈물 나는 일이죠. 갈릴리에 암갈색 같은 눈물을 뿌리는 일입니다. 정말 가향형제자매들은 말씀 읽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Bibleless people 되지 마시고, Bibleful 한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25절, 저는 이게 암송되기 때문에 늘 기억납니다. 암송이 되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서 말씀이 안드로메다 별자리처럼 성운이 돼서 밤마다 너무나 장엄한 우주를 형성합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면, 머리가 미장원 가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머리는 하나님 말씀을 암송하고, 60조의 세포가 여기 운집하고 있습니다. 성경 암송하다 김회권처럼 하다가 내가 죽겠지, 하는 불길한 자기 암시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안 죽습니다. 성경암송하다 죽은 사람은 아직까지 통계청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발 암송하십시오. 저는 이번에 그래도 암송 안 되는 게 많아서 또 암송합니다. 저는 암송이 안 되는 구절이 있으면, 이런 말씀을 또 내가 몰랐네, 하면서 또 암송합니다. 항상 암송합니다. 저는 이걸 목사 업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북받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합니다. 내가 목사 지도하기 위해서 암송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사랑과 생명을 주시고, 죄와 저주를 대신 졌기 때문에 생명이 소진돼서 죄밖에 남지 않는 상태에서 지극히 연약한 자가 돼서 십자가에 달린 거예요. 교환이 일어난 거예요.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가져가고, 예수님은 만진 바 되면서 불결케 되고 부정케 되고 죽음이 역사하는 현장이 되고, 그래서 죄가 알지 못하는 그가 우리 죄가 돼버렸습니다. 이 맞교환의 원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졌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죄의 장악력으로부터 해방됐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죄, 불순종 의지가 척추가 끊어져버립니다. 머리가 타격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의 임하는 순간 아담의 불순종 의지가 척추가 끊기면서 다시는 불순종할 수 있는 삶이 불가능한 지점까지 와버립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우리가 성화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자마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완전히 전가되었음을 확신시키는 성령의 인지작용이 나를 막 감동시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제로상태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데, 옛날에 우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죄의 효력을 덧입기 전에는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불순종하는 그 일이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유혹을 받고 있는 겁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께 홀로 나아갈 수 없는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 같은 무지혈적 환자가 은혜의 직립인간이 돼서 하나님 말씀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득 참, 이게 바로 죄사함 받은 증인입니다. 순종할 수 있는 능력과 순종하고 싶은 희열 열망으로 가득 찬 상태가 됨, 이게 바로 구원을 받은 겁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레위기 26장 13절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이 바로 율법의 요구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의 요구를 따라 행하는 성령의 인도함 받는 생활을 가능케 합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누구든지 육신을 쫓으면 죽음이 되지만 영을 쫓아 육신을 영으로서 죽이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면 영구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됩니다. 언제 누구에게 이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는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선택받은 자입니다. 38년 된 병자,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행각에 누워 있던 많은 병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일방적인 접근과 주목을 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찾아오심 외에는 다른 아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온 사람에게 구원이 나타납니다. 나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발로 가향을 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잘 보시면 내가 내 발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앞선 이끄심이 있고, 앞선 인간관계의 맥이 있었고, 내가 가향 또는 하나님 말씀 또는 교회로 인도함 받는 관계성의 고리가 계속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의 시발점에 하나님의 앞선 결단이 있었고, 앞선 행동이 먼저 있었던 겁니다. 이것 때문에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적 구원이 보편적으로 똑같은 정도로 개방돼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분명히 감춰져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이건 신비이자 해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더 좋은 마음씨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닫혀 있고 어떤 사람은 열려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먼저 이끌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선행적인 이끄심을 받은 사람도 먼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기만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구원이 오래 그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제물이 됐다는 걸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오전에 했기 때문에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만 들으면 확실하게 중심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교리교회학> 두꺼운 책의 핵심입니다. 만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 정확하게 이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과정을 잠깐만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 갈라디아서 3장 13절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율법의 저주스런 죽음을 받게 되는 과정, 제가 말씀드렸죠? 생명의 모든 가치가 다 빠져나가고 죄만 남아 있는 몸이 됐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저주스런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참여한 인간 당사자를 먼저 보겠습니다. 예수님 누가 죽였어요? 가장 쉬운 대답, 예수님은 누구의 미움을 받았어요? 대제사장, 맞습니다. 바리새인, 열심당원, 서기관, 장로, 이들은 시기심, 신성 모독적 모욕감, 또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실제로 넘겨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빌라도,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먼저 공격을 당했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신발 벗고 먼저 공격했습니까? 누가 선제공격했습니까? 바리새인이 먼저 선제공격했어요? 예수님이 부단히 선제공격했어요? 예수님께서 제명대로 사시려면 어떻게 사셔야 했습니까? 계속 대패를 깎고, 목수처럼 살아야 해요. 예수님이 선제공격했으니까 예수님 자신이 죽음을 초래했다고 봐야 해요. 즉 예수님의 극히 거룩하고 도발적인 언동, 예수님이 왜 성전에서 막 뒤집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고 난동을 피우셨죠? 분명히 예수님도 뭔가 한 성깔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다가 아니었다면 베드로가 터트렸을 수 있죠? 유다가 저 사람이 예수다 아니다 하면, 예수님이 베드로가 오른팔이었으니까 제사장이 가서 보면, 로마 군병이 실수로 누굴 잡아갑니까? 로마 군병이 베드로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아닌가봐, 다시 예수 잡아라, 그러면 복음서가 아주 이상해집니다. 복음서가 30장 되겠죠? 베드로를 죽이고 나서 진짜 예수를 잡으러갔다, 이렇게 나올 텐데요. 유다가 예수님을 고발했으니까 유다도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힐 때 일개 성전경비대랑 한바탕 싸움을 해서 예수님을 당장 구해낼 수 있었는데 제자들이 안 구해냈으니까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책임이 있죠? 또 예수님의 소문을 낸 무리들도 문제가 되죠? 다윗이 사울에게 왜 미움을 받았죠? 자매님들 때문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스라엘의 기쁨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기쁨조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사울 왕이 돌아버린 거죠. 예수님께 치료를 받고 병이 나은 무리들이 너무나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했죠? 그게 예수님을 위태하게 만들었죠. 이 모든 궁극적인 책임이,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보고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사랑과 연민을 느끼면서 불쌍한 사람만 보면 고쳐주고 싶은 마음을 즐겁게 주신 분이 누구에요? 성령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시죠. 결국 예수님을 이 엄청난 태풍의 눈으로 만들어서 십자가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막 붙잡힌바 되고, 그 살 만져짐을 당하고 질병과 죽음의 세력과 생명의 막중함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결국 하나님 때문이죠.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의 궁극적인 가장 중심책임이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십자가 죽음까지 길이 많은데도 길을 만든 결정적인 것은 예수의 사랑이죠. 예수님의 무한추궁적인 사랑이죠? 무한책임적인 목자의 마음이죠. 목자의 마음 때문에 죽었고, 그 목자의 마음을 심어준 분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였죠? 예수님은 사고사로 죽었습니까? 빌라도의 오판으로 죽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물로 예수를 의도적으로 바쳤다고 봐야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 아들이고, 선한 목자로 만드신 그 사건 자체가 예수님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절한 죽음의 99% 책임은 누구한테 있나? 하나님 아버지께 있고 하나님 아버지 그 뜻에 아무 대꾸 없이 어린 양처럼 순종해버린 예수 자신에게 99%가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 두 분이 당신의 죽음을 예비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죄인의 저주를 대신 받기 위한 죽음이었고, 죄인들이 입고 있는 죄의 운명을 근원적으로 예수님이 제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죠. 십자가의 효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신 효력, 세리 죄인 삭개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38년 된 병자,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 죄사함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이 박히기 전에 앞당겨 가져와버렸죠. 앞당겨 이용한 거죠. 십자가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발된 사건을 앞당겨 활용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을 육체로 못 만난 사람들은 사도의 증언을 통해서 육체의 예수가 접촉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나오는데, 그 사도의 증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거예요. 여기서 세 가지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요한복음 14장 26절, 요한복음 16장 7절, 사도행전 2장 32-34절, 요한복음 19장 34절, 요한일서 2장 5-8절 등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저주가 죽음으로 종료된 겁니다. 저주받은 예수의 죽음이 죽음으로 종료됐기 때문에 예수가 대신 짐 지는 저주, 그 죄가 용서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죽었어야 돼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가져갔어요. 문둥병도 가져가고 혈루병도 가져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지고 간 저주가 해결됐고 용서됐다는 확신을 못하죠. 예수님이 그 저주받은 죽음을 죽고 살아나셨기 때문에,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 죽으심에 내어줌이 되고, 우리가 죄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선포하기 위하여 살아나셨어요. 제가 38년 된 병자에게 네 죄 사함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죄 사함 받았다면 일어나야 되죠? 안 일어나면 내 말이 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죄 사함의 권세가 없는 거죠. 일어났다가 5분 이후에 눌러 앉으면 마술을 한 셈이 되죠. 오해 받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항구적으로 일어남으로써 일어난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면 내 죄 사함의 선언이 진짜 실현이 된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저주를 가져가셔서 저주어린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가 죄 사함을 선언한 모든 것들은 무효화됩니다. 앞의 것은 눈속임이 됩니다. 예수님이 저주어린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적용 가능한, 유통가능한 죄 문제 해결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만일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시간 바깥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부활이라는 말은 시간 바깥으로 일어난 거거든요. 죽음의 사건은 십자가에서 시간 안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부활해서 문 열고 닫고 하는 건, 부활하셨잖아요. 서기 2천 년 안에만 매인 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건 빌라도 총독 특정 치하에서 못이 박혀 죽었지만, 예수님은 시간 안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지만 부활할 때는 시간 바깥으로 튀어나가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부활을 했다는 말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문을 안 열고 닫고도 들어오신 거예요. 매우 우리한테는 힘든 상황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매너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벽을 뚫고 들어오고 난리를 치신 거예요. 예수님도 스트레스 받으셔서 나중에 귀신이랑 나랑 차이점이 무엇이게? 하면서 생선도 잡수시고 온갖 난리를 피우셨어요. 예수님 자신이 초래한 고난이에요. 왜냐하면 문 안 열고 들어오는 건 귀신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문도 안 열고 들어오시고, 바다에 머리 풀고 다니시고, 예수님도 생선을 드시면서 어쭙잖게, 왜 이리 많노? 아주 익살스러운 분위기, 예수님의 부활이 시간 바깥에 일어난 사건임과 동시에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죄 사함의 복음은 만민이 들어야 할 복음이 돼버리고 만민을 죄 사하시는 공식이 돼버린 거예요.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공간 안에 매이는 부활을 했다면 그 주변 사람에게만 확신을 심어주는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보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걸 가장 몸서리치게 많이 임상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사도와 바울입니다. 그중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만민에게 무차별 죄 사함의 효력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이방 땅에 가서 예수님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전했더니 마귀가 축출되고 병이 낫는 것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사건은 사도행전 3장 사건입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오후 3시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이건 아주 정확하게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사건과 유사합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게 바로 죄 사함의 공식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죄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지금 걷지 못하고 무기력 상태에 있는 것, 하나님께 은혜의 직립인간으로 뚜벅뚜벅 걷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인데 죄 가운데 있는 그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대입을 했더니 그걸 믿는 순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성전에 달려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주 예수의 복음이 만민에게 무차별적으로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은혜의 복음이 됐다는 걸 증명합니다. 사도바울이 수리아 안디옥부터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온 유럽 아시아를 다니면서 주 예수의 죄 사함의 복음을 전했을 때마다 듣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 말할 때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빌립보에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전할 때마다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그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가리키느냐면, 바울 같이 성령 충만한, 성령의 매개자가 될 만한 인물 일당들이 구축한 성령공동체가 죄 사함을 선포했더니 죄 사함이 일어나고 귀신이 물러가는 걸 볼 때, 죄 사함의 복음은 만민에게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통하는 죄 문제 해결의 공식이 됐다는 말인 걸 알게 됐습니다. 파푸아뉴기니, 캐나다의 선교사 돈 리차드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서 <화해의 아이>가 있습니다. 남태평양 몰로카이라는 섬의 신부님이 성 다니엘 신부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일기를 모았던 <전능자의 그늘>, 이런 많은 책을 보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순간 이방인들이 듣고 양심에 격앙을 하면서 죄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데이비드 브레이드너의 일기>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드너의 일기>는 그레벨 펜실베이니아 뉴욕에 있는 인디언들이 인디언 말로 하는 <데이비드 브레이드너의 일기>를 듣고 나서 죄를 뉘우치고 죄 사함을 받고 악령이 물러가는 기록이 많습니다. 1907년에 우리나라 길선주 장로님이 주도했던 평양대부흥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을 악마적 구속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죄를 , 성령이 임하면 곧 죄 회개가 일어납니다. 죄를 회개하면 성령이 임하지 않고, 성령이 임하면 죄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거룩한 사람들이 매개한 성령이고 부리는 성령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일련의 거룩한 공동체가 현존하지 않으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건 100% 사실은 아닙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없으면 성령은 꿈에 나타나서 역사하십니다. 이슬람과 회교도들은 이스라엘에 가 있는 양병문 선교사, 일산두레교회가 지원하는 선교사가 그런 말을 합니다. 회교도와 힌두교 안에는 하나님의 직접선교가 부쩍 일어납니다, 선교사가 손을 못 대는 곳에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주요한 영적 지도자들을 개종을 시킨답니다. 그래서 세계선교학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선교라고 합니다. 옛날의 Missio Dei 와는 다른 겁니다. WCC지도자들이 했던 하나님의 선교 말고요. 옛날에 하나님 선교라는 말은 민주주의 혁명도 하나님 선교다, 민중운동도 하나님 선교다, 생태운동도 하나님 선교다, 이런 포괄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옹호하는 운동도 전부 다 하나님의 선교라고 봤던 그런 개념 말고, 그런 걸 Missio Dei 라고 해요. 그걸 하나님의 선교라고 해요. 지금은 하나님 직접 선교라는 말을 쓰는데, 하나님 직접선교는 예외적인 것이고 대부분은 거룩한 영에 사로잡혀 공동체를 구축한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활동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 영적지도자가 성령을 부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이 영적인 인물들을 부려서 활동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이 공동체가 절대로 지루하거나 정태적으로 고여 있지 않고, 성령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사에 involve되고 계획되고 연루가 되고 계속 성령께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역사가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영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게 됩니다. 가향공동체 중에서 영적공동체가 있는 것을 발굴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계속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 공동체에 지속되면 신유의 은사가 가진 사람이 나타나고, 안수할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나고, 미래를 통찰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만지면 병이 낫는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 성령의 의하여 부림을 받는 공동체가 발생하면 그 공동체가 사람들을 그렇게 강력한 성령의 운동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마무리 짓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도의 증언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도바울의 선교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 뒤 2천년 동안 계속된 세계선교사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가향공동체의 짧은 선교역사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바로 정확하게 시간 바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십자가의 피 보혈을 통하여 저의 죄를 전가하시기로 약속하셨고, 저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을 때는 우리 가문에서 제가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유교가문에서 기독교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 이후 계속 되어 왔던 성령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가 일어나면 매일 영적분투를 할 필요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사함 받았다고 완전상태로 순간 고립을 시키지 않고, 천국의 무한 상태로 인도하시지 않고 왜 아직도 불안한 세상에 우리를 방치하십니까? 왜 예수 믿자마자 우리가 순간이동으로 천국 바로 가지 않고, 아직도 내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냉각시키는 세상 한복판에 노출돼야 합니까? 그렇죠. 구원의 감격이 있지만 구원의 감격대로 살지 못하고 바깥에 나가면 내가 구원 받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만큼 내 몸이 떨어지고 내 마음이 강퍅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받은 자 맞습니까? 맞습니다. 구원받은 자 맞은데, 구원받은 감격을 상실하고 구원의 기억을 망각할 만큼 이 세상은 지금 너무 악합니다. 로마서 8장 8-11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죄악된 자아의 지배력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겁니다.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 속에 삽니다. 그걸 이렇게 씁니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는’ 라는 말은 육신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악된 자아에 휘둘리지 않고 영에 있나니, 즉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 속에 사나니,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 속에 산다고 해서 내가 마약을 먹은 것처럼 죄를 전혀 지을 수 있는 판단력도 흐려집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았지만 또 한 번 우리는 더 큰 악령의 감화 감동 앞에 노출될 때는 내가 받은 감화 감동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상대적인 겁니다. 12-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의지적 결단을 끊임없이 해야 할 사명이 우리한테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어떻게 완성하느냐?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상의 분투를 통해서만 죄 사함의 감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의 분투를 통해서만 죄 사함의 감격을 유지하지 않으면 내가 죄 사함 받은 감격을 다 잃어버리고 죄를 사함 받지 않았다는 생각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이건 사람을 분별해봐야 합니다. 잘 모릅니다. 그러면 막연하게 교회만 다니면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회중이 있는 교회를 다녀야만 신앙의 감격을 유지할 수 있고, 구원의 감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8장 13-14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게 무엇일까? 참 중요합니다. 몸의 행실이라 것은 죄악된 자아와 같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마음, 몸의 행실 아닙니다. 먹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한 몸의 행실이지만 내가 먹어야 하는 그 욕구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하는 겁니다. 너무 안 먹어도 엘리야처럼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몸의 행실은 과잉된 욕망, 나의 비인간화시키는 욕망, 나에게 필요 없는 욕망충족, 나를 형제자매와 갈라놓는 욕망충족, 이것이 몸의 행실입니다. 20대 처녀가 연애하는 것은 몸의 행실 아닙니다. 절대로 여러분께서 이런 말 줄 치지 말아야 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형제들이 그걸 잘못 읽어서 자매 자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선남선녀는 서로를 잘 봐야 합니다. 그래야 지속적인 관찰이 일어나서 애정이 싹틀까 말까 하는데, 일단 눈은 감으면 안 됩니다. 기혼 남자가 음욕을 품고 자기 아내를 버릴 마음정도까지 가지면서 빤하게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걸 반대하는 것이지, 미혼청춘 남녀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미혼청춘 남녀가 한 명 사귀어놓고 또 한 명을 쳐다보는 건 몸의 행실입니다. 한명이면 족합니다. 밥을 900kcal 아침에 먹는 것은 몸의 정당한 욕구지만 2400kcal를 먹는 것은 몸의 행실입니다. 내가 웬만한 옷을 입는 건 몸의 행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옷을 엄청 두껍게 입고 비싼 옷을 입어서 내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돈을 소진시키는 것은 몸의 행실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건전한 건강한 의무를 위해서 성과를 내는 것, 그건 몸의 행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자매 또는 직장동료의 명예, 직장동료를 불행에 빠뜨릴 만큼 과도하게 성과를 내서 그를 해고까지 몰아갈 정도의 열심은 몸의 행실이에요. 그럼 이건 어떤 걸까요? 매학기 내내 장학금을 혼자 독차지해서 2등에게 한 번도 양보하지 않는 것도 제가 볼 때 몸의 행실입니다. 양보 가능하면 양보해야 합니다. 혼자 장학금을 다 타버려서 나머지, 특별히 가난한 집 자녀가 장학금을 못타면, 성령 충만하면 분명히 다른 방법으로 역사해요. 아예 받아서 반 주던지, 우리가 영으로써 죽이는 몸의 행실은 정당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삶에 대한 집념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기를 비인간화시키면서 자기를 동료인간과 원수와 불화상태로 몰아갈 정도의 죄악된 자아에 치우친 삶을 영으로 죽이는 겁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게 왜 어렵지 않느냐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을 옆에서 가만히 따라서 그 사람대로만 하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적게 먹는 날은 적게 먹고 하면 되는데, 이런 환경이 전혀 없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데 전혀 도와주지 않는 고립된 개인들에게는 이게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 일은 성령 충만 받았다고 해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그런 수고도 필요 없지 않느냐? 오히려 정적인 몽환상태에 이르지 않느냐?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야 말로 정적인 몽환상태에 빠지지 아니라 동적인 분투를 합니다. 성령 충만하기 때문에 몸의 행실을 죽이고 욕망을 이겨냅니다. 그런 책을 읽게 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 사람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 옆에 있고 싶습니다. 성령 충만은 결론적으로 일회적인 영단번의 죄 사함의 확신을 선물로 주시지만 내 죄 문제가 완전히 끝났다, 일회적으로 영단번에 once and for all. 한 번에 죄 사함 끝났어, 죄 사함이 완료됐다는 확신을 주는 반면에 매일 죄와 함께 분투하여 일상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 미분적이고 일상적인 죄 극복을 가능케 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한 번 죄 사함의 확신을 일상생활에서 누리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죄 사함의 문제는 완료된 사건임과 동시에 진행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좋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이것, day motivation, 매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써 내 죄악된 자아의 습관들을 조금씩 깨 나가는 경험을 축적하라,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네 마음의 최고 소원으로 자리 잡게 되리라, 아주 중요합니다. 나의 최고 소원과 하나님 기쁘신 뜻이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충돌이 없게 됩니다. 내가 추구하는 소원이 하나님 기쁘신 뜻과 충돌할 때 문제인데,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지상적 열매는 무엇일까? 하나님 기쁘신 뜻은 나에게 소원의 형태로 와서 내 소원성취가 하나님 기쁘신 뜻의 성취와 일치함으로 말미암아 성공이 100% 보장됩니다. 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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