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 그리고 부활 창3:17~19
오늘 설교는 좀 벅찬 내용입니다.
사실 피하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었던 내용인데
그렇게 하기 싫었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도 마음이 힘들고 버겁습니다.
그러나 통과하지 않으면, 극복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같이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이겨서
이 ‘죽음’이란 현실을 승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죽음이 임하고, 땅이 저주받게 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수고,
농사를 지어도 엉겅퀴와 가시가 함께 나는..
그런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3:19
‘너 결국 죽는다!’고..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변경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히9:27절을 제가 자주 인용하는데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한 번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한 번 죽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미리 미리 일찍부터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잘 통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 다른 길은 결코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상 모든 사람들이 통과했고,
에녹 한 사람만 죽음을 겪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통과하고 지나가야만 합니다.
그 외 빠져나갈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으면 저도 거기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죽음은, 죽는 것은, 인간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혼자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까봐
동행하여 주십니다.
‘너 혼자 무섭지? 가기 힘들지?
혼자 가기엔 버겁지? 그러니 같이 가자!’
그러고 손을 잡고 우리를 건네주십니다.
그리고 통과하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죽음의 길을, 우리 손 붙잡고 통과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람처럼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친히 죽으심으로써, 죽을 우리 손을 붙잡고
그 죽음의 길을 같이 통과해 주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예수 안에서 나의 십자가와 부활이 된 신자는
결국은 통과하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소망, 영생,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졌습니다.
▲죽음이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이었을 때(남의 일이었을 때)
저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또한 평생 설교하며 목회자로 살아왔는데..
주님의 부활, 십자가와 부활을
다 알았기 때문에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무섭지는 않아! 무서워햘 필요 없어!’
이렇게 큰 소리 탕탕 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게 암 발병을 통하여
죽음이 객관적 일이 아닌, 죽음이 제 주관적 인식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제 일이 되었습니다. 폐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죽음이 바로 제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무섭고, 당황스럽고,
두렵기도 하고,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가끔 절망도 찾아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그런 것입니다.
주관적인 인식(내가 겪는 일)과
객관적인 인식(남이 겪는 일)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잘 이겨 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겪어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쉽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고사하고,
암 투병 과정!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지고, 약해지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못 이깁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 이깁니다.
특히 죽음의 싸움은!
주님 손을 붙잡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손을 붙잡아야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손을 꼭 붙잡으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뚫고 나갈 수 있게 하십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여러분의 배짱으로
여러분의 각오로, 여러분의 힘으로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 이끌려서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길, 고난의 길, 저주의 길을
통과해 나가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믿음이고, 그게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승리는, 죽음을 피함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안 죽나요?
죽음은 다 정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죽고, 안 믿는 사람도 죽습니다.
믿음의 승리는 죽음을 피함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함입니다.
통과함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 앞에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남다른 용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배짱이 좋아서 그랬을까요?
그래서 순교까지 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고...
사람으로 치면, 바울도 두렵지않았을까요?
바울의 힘으로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울의 힘은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십자가를 믿었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을 믿었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망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15: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정말 성경 전체에서 굉장히 강력한 믿음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이 외침과 고백이, 우리의 외침과 각오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설교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투병 중에 있지 않았으면
죽음을 코앞에 두지 않았으면
객관적으로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암투병 중에 있는 우리 암환우들,
그 보호자들,
암 발병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선뜻 선뜻 놀라는
약해져있는 우리 믿음의 친구들에게
뭔가 믿음 안에서 힘과 용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설교였지만,
숨기고 넘어가고, 다른 말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지만,
이 시간 담대하게 여러분과 이렇게 나눕니다.
이 말씀 말고도, 전할 수 있는 말씀이 많은데
하필 투병 중에 있는 환우들에게
정말로 죽음, 십자가, 부활을 얘기한다는 것은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믿어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신앙과, 바울의 믿음과
죽음까지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손을 붙잡고 매달리면
이 주님이 정해주신 길을 통과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승리하고,
부활의 영광으로 감격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60장입니다.
1.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후렴)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2. 우리를 주께서 구했으니 이전에 행하던 악한일과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온전히 버렸네
3. 나 지금 죄에서 사함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유신 장막을 벗을때도 겁날것 없겠네
4. 우리가 이세상 떠날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 함께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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