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비전의 사람 (마태복음 17:1-8)

by 【고동엽】 2021. 11. 19.
 
전체 목록가기 비젼 목록 돌아가기
   

 

비전의 사람  (마태복음 17:1-8)


이용호가 전국적으로 뜨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에 온통 이용호로 인하여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제 이름 관리가 대단히 어려워졌습니다. 이름은 이미지가 따라 오고 또 인격이 따라옵니다. 단순한 호칭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존재 가치와 삶의 무게가 그 이름에 다 실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땅 위에 살면서 많은 이름을 가집니다. 직책을 가집니다. 명함에 빽빽이 직함을 써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면 그 모든 이름은 다 없어집니다. 오직 하나의 이름만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광스러운 이름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삶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자신을 믿고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는 메시야적 비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 산은 다볼산인지 혹은 헐몬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높은 산입니다. 그 산에 올라가셔서 주님은 변형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나며 놀라운 환상의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대화하는 환상이 그 산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본 세 제자는 넋을 잃었습니다. 평소에 상상하지 못했던 환상이 그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을 본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로 등장하는 비전의 개념은 성경에 있는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비전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비전이라는 말을 매우 애용합니다. 비전을 가지라, 비전의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비전이 아닌 것을 비전으로 가르치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장면을 관찰해보면 비전이 아닌 것이 두 가지가 있고 비전이 한 가지로 나타납니다.

   환상은 비전이 아니다

   2, 3절에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엘리야와 모세로 더불어 대화하고 있는 그 환상 자체는 비전이 아닙니다. 환상은 비전이 아닙니다. 꿈은 비전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도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미국의 인권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디씨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수많은 흑인들을 모아놓고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연설 가운데 구호처럼 등장했던 말은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I have a dream)는 말입니다. 킹 목사는 흑인들 앞에서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꿈은 성경이 말하는 비전이라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왜 꿈이 비전이 아닌가? 왜 환상은 비전이 아닌가? 거기에는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꿈은 책임이 없습니다. 여러분, 꿈에서 무엇을 하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할 책임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어디로 가 보라 했다 해서 거기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꿈은 책임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꿈은 행동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꿈은 결과가 없습니다. 김삿갓 시에 보면 몽답등산 하되 각불고라(夢踏登山脚不苦)는 시가 한 구절 있습니다. 꿈에 등산을 했지만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꿈에 돈 다발을 주어도 깨고 나면 돈 다발이 없습니다. 결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꿈은 세 가지가 없습니다. 책임이 없고 행동이 없고 결과가 없습니다.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상도 그 세 가지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상과 꿈은 비전이 아닙니다. 비전은 반드시 책임이 따라옵니다.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되고 반드시 결과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전의 개념입니다.  
   조선족이나 중국인들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을 찾아옵니다. 얼마 전에 밀 입국 하다 잡힌 한 조선족의 이야기가 실감납니다. 그가 밀입국을 하기 위해서 지불한 돈이 중국돈으로 이만원이라고 합니다. 한화로 이백만원 정도입니다. 이만원이라는 돈은 굉장히 큰돈입니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은 한국에 가서 300만원만 벌자, 300만원만 있으면 집을 한 채 구하고 먹고 살 수 있는 가게를 하나 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300만원은 잘 벌리면 일년 안에 충분히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코리안 드림의 내용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던 그들이 정말 꿈을 이루었습니까? 그것이 정말 그들에게 인생의 답이 되었습니까?
   한국인들도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태평양을 많이 건너 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비전이 아니라 하나의 망상이었던 것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망상을 안고 가서 패가망신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했던 교민들 가운데도 처음에는 허망한 꿈을 가지고 가서 초기에는 비참한 실패를 맛보고 그것을 디디고 비전을 새롭게 수정한 다음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꿈과 환상은 비전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야망은 비전이 아니다

   야망은 비전이 아닙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기발한 아이디어 맨입니다. 그 빛난 환상을 보고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께 드리고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우리는 하산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주여, 우리도 거기 끼여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라는 욕망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야망은 비전이 아닙니다. 야망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듭니다. 현대인들은 모두가 야망의 노예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단운동들이 천년왕국을 가지고 야망을 좇아갔으며 재림의 환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했는지 모릅니다. 회교도의 가장 큰 명절은 하지입니다. 하지 때가 되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이백만명이 해마다 모여서 금식기도를 합니다. 거기서 이슬람의 왕국을 외칩니다. 이슬람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테러입니다. 그래서 이 테러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이 있는 한 테러는 그치지 않습니다. 테러는 이슬람의 꿈을 성취하는 하나의 수단인 것입니다.  
   19세기초 클라크 박사가 패망한 일본에 와서 농업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후에 좌절감에 빠져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향하여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Boys be ambitions!(소년들아, 야망을 가지라) 이 설교가 일본 젊은이들을 정신적으로 일깨우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구호가 미국으로 역수입되었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클라크 박사의 이 구호를 붙잡고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세계의 젊은이들이 클라크 박사의 이 말을 구호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망은 비전이 아닙니다. 야망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야망은 이기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도 야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8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비전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보이는 거기에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비전의 개념을 우리 가슴에 새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곧 나의 비전이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기 원하는 소원을 내가 품을 때 그게 나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의 성구가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런데 이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소원이 나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 라는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소원을 이루기 원합니다. 그 소원을 내가 깨닫고 붙잡을 때 나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비전은 곧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 뜻을 이루어 드릴 뿐 아니라 내가 이 땅 위에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전입니다. 이 비전의 사람으로 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산 사람

   비전의 사람이라 하면 우리는 선뜻 구약의 요셉을 추천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요 비전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열 한 형제 가운데 막내로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형님들의 곡식단이 자기보고 절을 했습니다. 형들의 별이 자기보고 절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해와 어머니의 달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꿈 이야기를 형들 앞에 하다가 형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 팔려 가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설명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꿈을 붙잡고 산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요셉은 꿈을 기억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요셉은 꿈에 매여서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종살이와 옥살이를 13년간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풍년 7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20년입니다. 풍년 후에 흉년이 7년 더 들었습니다. 그 흉년기간에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와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약 2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요셉은 형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곡식을 사러 온 젊은이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곡식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느냐. 우리는 가나안에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냐. 예 우리의 아버지는 야곱이시고 우리 형제 열 둘이 있었으나 하나는 실종이 되었고 우리만 이렇게 살아 있는데 막내는 아버지 집에 있고 이렇게 우리들이 왔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틀림없는 자기 형님들입니다. 22년만에 보는 형님들입니다.
   창세기 42장 9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와서 살면서 자기가 꾼 꿈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형님들이 자기 앞에 와서 무릎꿇고 절하면서 곡식을 달라고 애걸하는 그 모습을 보자 22년 전에 꾸었던 그 생각이 그때서야 났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이지만 꿈을 기억하지도 않았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감옥살이, 종살이 13년 동안 꿈을 붙잡고 산 사람이면 절대로 인내하지 못합니다. 꿈은 좋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종살이를 하나, 꿈은 좋았는데 내가 왜 옥살이를 하는가, 그 꿈에 얽매여 꿈을 자꾸 추억하면 종살이도 견디지 못하고 옥살이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창세기 39장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종살이 중에 꿈을 붙잡은 게 아니라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옥살이 중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총리가 되어 형통한 때에도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했고 여호와를 붙잡았지 꿈을 붙잡고 25년을 산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헛된 꿈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습니다. 형들을 만나서 화해하고 실컷 울고 나서 요셉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비장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보내어 그의 아비와 형제들과 그의 집을 흉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애굽 백성들을 흉년에서 구원코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야 요셉은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따라 산 사람들

   주여, 초막 셋을 지읍시다. 거기 지하 방이라도 좋으니까 우리도 거기 끼여 삽시다. 이런 철없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직업 속에 예수가 보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가 보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원 속에 예수가 보이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비전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빛을 받고 거꾸러졌습니다. 3일간 먹지 못하며 회개하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음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람이 출세를 하려면 로마로 가야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제일 먼저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로 가는 사람들은 이미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출세를 하려면 로마로 가야 되는데 그는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그렇게 13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인정을 받는 공식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가든지 로마로 가야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을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찾아와서 나와 함게 안디옥에 가서 교회를 섬기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바나바를 따라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방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으며 갈라디아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계 만방에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두신 소원은 로마로 가는 게 아니라 먼저 아라비아의 훈련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을 내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 비전의 사람에게 여호와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비전을 품은 사람은 세 가지 특징적인 삶을 삽니다.  

   비전을 품고 사는 삶

   첫째로 비전의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충실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내가 일하는 그 일 속에 하나님의 소원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의 현장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은 일 속에서 깨달아야 됩니다. 일하면서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비전의 사람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오늘에 충성합니다. 오늘에 충성해야 내일도 충성합니다. 오늘이 살아야 내일도 삽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는 시간을 도적질하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책임을 묻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오늘을 충성합니다. 오늘을 살립니다.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세번째로 어떠한 고통 앞에서도 소망을 붙잡고 인내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에는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사탄의 방해가 있습니다.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질 때 이것이 내게 축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고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부딪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소망을 놓치기 말기 바랍니다.

   맺는 말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 1년10개월 동안에 150만부가 팔렸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속으로 한 서너 번 아주 진한 울음을 느껴 보았습니다.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다움이라는 열 살 짜리 애가 백혈병이라는 독한 병을 만나서 투병을 하는데 가시고기 아빠가 그 아이를 간병하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이 아이가 독한 항암치료를 받으며 주사를 맞으면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의사 민 과장이 다움이에게 다가가서 "주사가 많이 아프지, 조금만 더 참아" 이렇게 위로를 할 때 이 애가 이런 말을 합니다. "선생님, 얼마나 더 아파야 죽게 되나요. 이제는 그만 아팠으면 좋겠어요. 이만큼 아팠으면 죽어도 되잖아요. 죽으면 아픔이 끝나잖아요." 이렇게 울부짖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만큼 고통을 당하면 이제 죽었으면 하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주 예수를 여호와를 붙잡고 소망을 가지기 바랍니다. 이것이 비전의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포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야 됩니다. 야망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비전입니다. 우리 모두가 비전의 사람으로 축복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