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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대가 (창세기 37:1-11)
1963년 8월 27일에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이십 오만 명의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오늘 나는 꿈을 갖고 있다(I have a dream today) 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에서 킹 목사님은 "오늘도 내일도 곤란은 첩첩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사남매가 피부의 색깔로써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된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꿈만 놓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가득 차 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킹 목사님이 부르짖었던 오늘 나는 꿈을 갖고 있다는 이 용어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비전이라는 말로 우리가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헬렌 켈러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눈으로 보면서도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비전은 단순한 야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포함된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소원을 우리 가운데 두시고 우리의 소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에 곧 하나님의 비전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 비전은 우리의 생애 속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비전에 따라오는 고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요셉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형님과 부모님들 앞에서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이 했던 꿈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꿈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담겨있는 꿈이었습니다. 곡식 단 이야기를 통하여 그는 꿈 이야기를 합니다. 들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형들의 곡식 단이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라는 말에 형님들이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내게 절하더이다 라는 꿈을 들은 형님들도 분노를 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려느냐. 형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한다는 꿈 이야기는 형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꿈 이야기를 마음에 두었더라고 합니다. 요셉의 꿈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해석이 됩니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내용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막연한 설계와 계획이 아닙니다. 비전은 내용이 있고 목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과 목표가 진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허망한 비전이 아니고 진실에 근거한 비전이라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에 보면 그의 생애는 진실로 이어져 가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꿈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과 요셉의 생애에 있어 진실은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전이라는 것은 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십계명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해야 될 것을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 이 두 가지 죄를 극복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것은 해야 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이 성립되는 데서 진실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진실이 깨뜨려집니까? 마땅히 할 일을 안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용납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진실이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요셉의 형들은 진실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셉의 형들은 진실이 결여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형들의 허물을 아비에게 고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요셉의 형들이 양을 치면서 게으름을 피웠는지 모릅니다. 어떤 진실하지 못한 행동도 얼마든지 있었다고 봅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실하지 못한 것에 그냥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고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자질의 의미가 아니라 요셉은 어릴 때부터 형님들의 부정직함, 게으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실이 싹터가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고 결국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요셉은 자기 꿈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이 고난 당했던 그 측면만 가지고는 비전을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셉은 버림을 받았고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투옥을 당합니다. 요셉이 겪었던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당한 것은 모두가 누명이고 오해였습니다. 그가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버림을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가고 감옥에 투옥되고 떨어질 만큼 다 떨어져 버린 희망이 없는 골짜기로 요셉은 내려갑니다.
믿음으로 진실을 증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요셉은 그와 같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가는데 그냥 단순한 비법으로 헤쳐 가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진실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요셉이 가진 비전이 이루어져 가는 속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진실을 지탱하게 하는 비전의 대가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생애를 엮어 가는 이 저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얼마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앞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진실을 말할 때 우리 입으로 스스로 변명해서는 진실의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진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의 요셉의 진실이 바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찬송, 기도, 설교할 때도 믿음이라는 용어만큼 많이 듣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야 하는 말임과 동시에 많이 들려질지라도 대단히 무게 있는 말씀으로 들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살자 라는 말은 생각없이 들으면 매우 추상적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도 생각없이 들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추상적인 말로 들려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게 아니라 '살리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야 증거되는 은사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살면서 그 믿음을 증거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강조가 우리의 믿음을 무게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믿음은 부도난 믿음입니다. 교회는 부도가 제일 많은 곳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의 부도, 사랑의 부도가 다른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음으로 살 수 없는 지경을 돌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에 극한적인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서 믿음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살기에 대단히 어려운 환경을 거듭 거듭 직면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부딪쳐 오는 고난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요셉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믿음은 우리 가운데 부조리와 모순과 장애물을 뛰어넘으면서 믿어야 됩니다. 그것을 설교자들은 교회적 모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표현합니다.
모순을 넘어서서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모순은 예수 믿고 나면 교회 밖에서 실망하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실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인들이 예배당 안에서 실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상처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교회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을 넘어서야 합니다. 교회가 나를 실망시킨다고, 교회 안에 누군가가 내게 괴로움을 준다고 내가 교회를 등질 수 없고 예수님을 등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마음에 안드는 개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성도들은 모두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된 어떤 개인 때문에 교회 전체를 매도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큰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드는 개인은 있을 수 있어도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어떤 것 때문에 교회를 매도하시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 비록 상처를 경험해도 그 상처를 붙잡고 믿음으로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나를 만족시켜줄 교회는 이 지상에 없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 내 갈등이 해결될 줄 알고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선 갈등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 믿기에 유리한 환경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마음놓고 섬기라고 놔두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편리할 지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 편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은 너무도 장애물이 많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이기고 잘못된 방법이 통하는 거짓과 모순의 세상을 탓하면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고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를 괴롭혀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겪는 환경을 보면 누가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요셉에게 부딪쳐 오는 환난을 보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믿음으로 그 고통을 극복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모순을 넘어서야 됩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모순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적격자입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오염된 존재들이고 부적격자들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목회자를 제일 괴롭히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오늘 이 강단에서 회개하라, 순종하라, 사랑하라, 믿으라고 설교를 해야 되는데 제가 그 말씀을 전할 자격이 안됩니다. 내 안에 모순이 많은 이 더러운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까?' 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때문에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의지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고 설교 듣는 자에게 기름 부어주셔서 저의 입술도, 여러분의 귀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내가 말할 자격이 있고 여러분이 들을 자격이 있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못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못났다고, 내가 이렇게 부조리가 많다고 주님을 등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갈등을 견디면서 임마누엘 믿음으로 비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임마누엘의 믿음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여러분들의 비전을 이루게 하는 대가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인내로 진실을 증명하다
두번째는 인내의 덕입니다. 요셉은 인내의 덕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많이 듣는 말이 '인내'라는 말입니다. 참아야 된다, 기다려야 된다는 말들을 교회에 오면 많이 듣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내는 헬라어에서 두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에는 참는다, 견딘다는 말이 같은 뜻이지만 헬라어에서는 다른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관적인 인내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욕구를 참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환경적인 인내로써 객관적인 인내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바깥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교통사고, 천재지변, 홍수 등 바깥에서 오는 환경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참아야 됩니다. 안으로도 참고 나에 대해서도 참고 바깥에서 충돌하는 것에 대해서도 참아야 인내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이 두 가지 충돌은 극심했습니다. 요셉은 누구보다도 울분을 많이 토해야 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겪었습니다. 그에게 부딪혀오는 걷잡을 수 없는 환경도 요셉은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인내는 제일 먼저 현실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오는가? 반항을 해서는 인내가 되지 않습니다. 당한 것은 도리가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서 이중으로 고난에 처하면 안됩니다. 인내는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인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고를 당했다는 그 자체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사고 당한 그 고통에서 견뎌내고 버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기뻐하고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사고를 당한 불행 중에서 절망해 버리면 이중사고입니다. 그것은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인내는 이중으로 절망을 하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했으면 당한 현실을 붙잡고 견뎌야 되지 거기서 절망해 버리면 안됩니다. 인내가 안되는 사람은 대부분 포기의 상태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당해도 절망하면 안됩니다. 고난 당한 이 시점에서 나는 소망이 있다, 여호와로 인하여 나는 일어설 수 있다는 그 소망을 붙잡고 기도하는 데서 인내가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 인내를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요셉은 종살이로 떨어졌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감옥에 투옥됐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인내의 덕이 필요합니다. 인내의 자본이 곧 우리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진실의 자본으로 증명하다
세번째는 진실의 자본입니다. 진실의 자본이라는 것을 요셉의 생애에서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요셉의 영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은 영향력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는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고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를 정리를 해 보니까 그는 다섯 가지 단계로 굉장한 영향을 나타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요셉의 믿음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 믿음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향력을 끼쳐야 됩니다. 요셉의 진실은 원수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9장6절에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였더라"고 합니다.
둘째는 요셉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면 보디발이 가정의 총무직을 맡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총무직을 맡은 요셉은 주인 보디발 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보디발 부인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9장22절에 "전옥이 다 요셉의 손에 맡겨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감옥에 떨어진 요셉은 그 감옥 안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영향력을 나타냈습니다. 요셉의 진실은 뭇 사람들에게 영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바로왕에게 발탁되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의 진실은 보디발의 집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넷째로 마침내 애굽을 흉년에서 구출하는 국가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요셉 자신의 승리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마침내 요셉은 아버지와 가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로 발전을 합니다.
다섯째로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비전은 이렇게 대가가 요구됩니다. 시각을 바꾸는 믿음, 연단을 이루는 인내, 영향력을 미치는 진실이 함께 하는데서 그리스도인들의 꿈이 성취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단순히 기도라는 용어로만 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투자되어야 하고 인내가 투자되어야 하고 진실이 투자되어질 때 우리 기도의 열매가 맺어지는 줄 믿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은 삶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시각의 변동현상이 많습니다. 외형적으로 다 갖춘 것 같은데 시각이 다 틀립니다. 그 시각이 틀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 여야가 성명을 반대로 발표하는 것은 정치논리가 있고 으례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지만 우리들은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요셉이 가지고 있던 그 믿음과 인내와 진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비전에 맞게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엔더슨이 뉴욕 지하철을 탔는데 한 30대 사나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탔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지하철 안에서 떠들고 장난치고 돌아다니면서 신문 보는 사람의 신문을 툭 치는 등 난장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되는 사람이 그것을 간섭도 하지 않고 눈을 지긋이 감고 조는 듯이 무방비로 있는 것입니다. 승객들이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들을 말리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모두가 불쾌해 했습니다. 그래서 엔더슨이 그 아이들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이봐요, 젊은이, 아이들을 좀 말리시오. 저렇게 장난을 치고 돌아다니는데 말려야 되지 않소" 라며 정중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나이가 엔더슨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애들과 나는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얼마 전에 병으로 앓던 저 아이의 엄마가 죽었습니다. 지금 나와 저 애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엔더슨이 이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구나 하고 "아하, 그러세요. 제가 잘못 보았군요. 힘을 내십시오" 하고 자리에 가 앉았는데 그 때부터는 애들이 떠드는 것이 달리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미웠던 애들이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장난치는 저 애들을 바라볼 때 너무도 불쌍하고 가엽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시각을 흩트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영적인 시각으로 볼 줄 아는 시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어떤 문제가 부딪칠 때도 그것을 영적인 시각으로 볼 줄 아는 시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꿈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 뿐 아니라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비전이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영향력과 같이 10년, 20년 후 앞으로 아름다운 영향력으로 열매를 맺어 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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