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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공설교 79편

실용적 예수를 버려야, 보배 예수가 보인다 막14:66~72

by 【고동엽】 2024. 12. 31.

실용적 예수를 버려야, 보배 예수가 보인다     막14:66~72     출처

 

 

▲도입 예화/ 이순신 장군의 칼

아산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 장군의 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칼은 길이가 거의 2미터니까, 사람의 키보다 큽니다.

칼이 2미터이면, 평소에 일상적으로 쓰던 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너무 커서 불편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장군의 위용이나 권위를 나타낸다든지,

또 그런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제가 독일 유학 시절에, 식칼을 산 기억이 납니다.

그 유명한 독일의 쌍둥이 칼이었습니다.

 

독일에서 5년 넘게 머무른 그 기간 동안에,

집에서 요리해 먹은 음식은, 모두 그 (작은)칼 밑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 칼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 칼도 자꾸 새것으로 바꾸잖아요.

 

그러나 아산 현충사에 이순신 장군의 칼을 생각할 때는,

이런 실용성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 칼로 무를 썰겠습니까? 배추를 썰겠습니까?

전혀 실용성과는 관계없는, 실용성 제로의 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칼입니다.

 

주제를 미리 말씀드리면,

그 실용성 있는 칼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실용성 제로’인 이순신 장군의 칼은,

박물관에 남아서.. 대대로 길이 보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득이 되지 않지만,

아니 득보다는 손해가 많을 것입니다.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가라니까요!

 

그러나 그 ‘실용적 예수’를 버릴 때 ..

비로소 ‘보배이신 예수님’이 발견되어지고, 내 마음속에 길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 두려움 때문만 아니라, 실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 사건을 쉽게 생각합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잘못되었고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렇다 치고요,

그런데 그것과 아울러 좀 색다른 관점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 죽음을 향해 가시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단순히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든지

겁이 났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실용성이 제로인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겁니다.

 

베드로 말이 맞아요, 71절에 보면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며 부인합니다.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을 향해 걸어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런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제로 잘 모릅니다.

그런 예수님은 상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을 것을 예고하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예수님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과거에 베드로는 상상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예수님을 따라다녀 본 적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자기가 예수님의 실용성을 고려해서, 자기 인생을 설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향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 인생을 얹어놓은 그 예수님이

자기가 착각한 지도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이 세상 안에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쓸모가 있는 예수님인줄 알고 있던

그 착각에서 벗어나서,

 

자기 현실의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예수님인 걸 알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을 부인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땅 위에서 출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소원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나라의 독립을 꿈꾸고 소원하고 있는데,

그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실용성이 제로입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고, 인생을 명예롭게 살고 싶은데,

그러한 내 인생의 꿈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무 도움이 안 되십니다.

 

부자로 살고 싶은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아무 도움이 안 되십니다.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을 베드로는 부인한 것이에요.

 

※당연한 말이지만 <실용성>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고, 성령을 받고, 신령한 지혜와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달리 총명해지고, 현실적 삶에 있어서 <실용적>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실용주의>는, 기독교의 본래적 목적을 다 제치고,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회에서는 당연히 <실용주의>를 추구할지 몰라도, 교회와 신앙이 최고로 추구할 가치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부수효과로, 총명해지고, <실용적>인 스마트한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근데 참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 자신의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을 위한 실용성이

완전히 다 제거되었습니다.

이젠 예수님이, 자기 현실에, 아무 도움이 안돼요.

 

그런데 자기 마음속에, 예수님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마치 무 하나 썰지 못한 채, 배추하나 썰지 못한 채

유리 상자에 담겨서 아산 현충사에서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칼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속에 '깊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한 거예요, 신앙이라는 게.

예수님의 실용성이 없음을 발견하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돼요, 쓸모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삶에 실용성이 없음을 알게 되면서, 실망하면서, 

비로소 그 예수님의 본질이.. 내 마음에 보존이 됩니다.

 

   무 하나 썰지 못하는 이순신 장군의 칼이.. 나라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상하게 내 인생의 실용성을 다 제거해 버린 예수님 자체,

 

   그런데 그 실용성을 다 예수님에게서 제거하고 났는데

 

   예수님이 내 마음에 딱 남아 계시면서,

   아산 현충사에 이순신 장군의 칼처럼.. 내 마음에 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 보물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껴안고

베드로가 지금 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베드로를 만나서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내가 이 땅 위에서의 네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도,

지금 네 마음 안에는 내가 보존되어 있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주님이 아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참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께 실망하고서야..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실용적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인되어야 돼요.

그런 타이밍을.. 성도는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 사업의 도움이 되고, 내 자식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고,

내 건강에 도움이 되고, 내가 승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 실용적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인되어야 됩니다. 실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실용적인 예수님이 완전히 부인 될 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하여 부인 될 때,

그 실용성이 완전히 제거돼 버릴 때,

순수하게 예수님 그 자체가, 내 마음에 보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비실용적이지만... 

저희 집사람도 부엌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칼이 바뀌어요.

실용적인 칼들은 쓰다가 버립니다.

 

근데 실용성 제로의 이순신 장군의 칼은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한 남아서 보물로 남아있을 거예요.

참 희한한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실용적인 예수님 내 삶에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제는 쓸모없는 예수님입니다.

(영생에는 쓸모 있고, 현재 하나님 나라의 삶에는 크게 유용하지만)

현재 먹고 살고, 출세하고, 내 야망을 성취하는 데는.. 예수님이 쓸모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베드로가, 나보다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부인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왜 우리가 부인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교리화 시켜 버리고, 몇 마디 말로 다 처리해 버립니다.

 

    근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실 때,

    자기 인생을 예수님 위에 설계했다가 그 예수님 위에 설계한 자기 인생 전체를

    다 상실하는 그 아픔 속에서,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이 땅 위에서 나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겁니다.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크게 실망하는 겁니다.

 

▲실생활에는.. 실제적 도움은 되지 않는 십자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게 믿음인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한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는 데에.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실용적인 예수님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해 버립니다.

이제는 실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실용적이다 이겁니다.

이 세상 살고 있는 내 인생에 여전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러운 거죠.

왜요?

실용적인 예수님,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꼼짝 못하는 예수님을.. 내가 바라보면서 부인해야 됩니다.

(그런 예수님께 대해 실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이 내 마음에 보물이 됩니다.

물론 부인하고, 다시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기 까지는, 

상당한 진통과, 고통의 시간이 요구될 것입니다. 

 

▲실용적 예수를 버릴 때.. 비로소 예수가 보배임을 발견됩니다.

자, 베드로의 삶을 보면,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면서

십자가 이전의 자기가 꿈꾸었던 삶을, 머리터럭 하나만큼도 이루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뭐라 그래요?

 

‘네가 젊었을 때는 네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이제는 남이 너에게 허리띠를 띄우고 끌고 갈 것이다’

무슨 얘깁니까?

 

베드로가 실용적인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 부인하고 예수님자체,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그 예수님을

마음의 보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이 된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인생에 대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실용성 있는 존재>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신앙생활 합니다.

 

아니에요.

먼저, 예수님이 전혀 실용성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해야 됩니다.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아산 현충사의 칼처럼.

그때 예수님이 내게 보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때 아산 현충사의 칼이,

사실은 무를 썰지 못하고 배추를 썰지 못해도

독특한 차원이 다른 실용성을 갖고 있어요.

 

그 칼은, 이순신 장군의 나라를 구한 충성이 담겨져 있고,

그 칼은, 나라 전체의 보존과 존립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새로운 차원의 실용성>의 칼로 바뀐다는 겁니다.

 

무 썰고 사람 죽이고 배추 써는 그런 칼이 아니지마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보물이 되실 때,

말로만 듣던 천국이, 실제 지금 현재 내 것으로 마음에 부딪쳐 온다는 거예요.

 

말로만 듣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 내 아버지로서 내 마음을 터치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쓸모 있는 존재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쓸모 있는 존재로 붙잡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참 신앙으로 나가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실용적인 예수님으로서 볼 수가 없습니다.

 

실용적인 예수님, 내 인생에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하고서야

예수님 그 자신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 웁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그 실망과, 부인을 과정을 지나서 

다시 사랑하는 눈물의 신앙을 거쳐서

보배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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