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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공설교 79편

승자의 저주 막14:32~42

by 【고동엽】 2024. 12. 31.

승자의 저주                           막14:32~42                     출처

 

‘Winner's Curse,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기기는 이겼는데, 이긴 결과가.. 좋지 못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승자의 저주’가 나타나는 이유가 뭡니까?  

‘긍정 오류 False Positive’ 라고 이야기 합니다.

긍정 오류란, 사실은 참이 아닌데, 참으로 오해 해버리는 겁니다.

 

▲도입 예화  주1)

 

더 쉬운 예를 들어봅니다.

집에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있는데,

 

 

장난감 때문에,

큰 애가, 작은 애랑 싸워서, 장난감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애가 울자,

아빠가 큰 애를 야단치고 혼냅니다... ‘승자의 저주’인 셈이지요.

 

그런데 인류역사상 가장 큰, 우주적인 ‘승자의 저주’가 있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긴 것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서도 ‘물질, 성공’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승자의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놀라고, 슬퍼하셨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유명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이 겟세마네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제가 느끼는 점이 있어요.

 

33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놀라셨다니.. 대체 주님이 무엇에 놀라셨을까요?

 

34절에 주님께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마음에 고통스러워하시는 이유가

십자가에서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구절에서

‘죽게 되었으니’라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죽을 지경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실 것에 대해서

인간이시기 때문에 괴로워하신/두려워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마음의 고통이 무척 커서, 죽을 지경이셨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돌을 들고 와서 내리찍는 거예요, 돌로 친다는 의미는.

 

그렇게 돌로 치는 데, 그 맞는 고통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고통에 80%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이, 천사와 같은 얼굴로,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며 죽습니다,

 

스테반은, 주님처럼,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내일 아침 참수형이 결정되었을 때.. 정말 깊이깊이 잠이 듭니다.

정말 만감이 교차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 그때가 30세 즈음입니다.

80세가 넘어서, 인생을 다 살았으면.. 아마 깊이 잠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 (아마 결혼도 아직 못 해본) 30대 청년이,

내일 죽는다는데도.. 그냥 깊이 잠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죽음과 비교해보면,

스테반,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그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게 될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34

 

물론 십자가사건이 말할 수 없이 괴롭지요.

우리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박혀도 괴로운데 말할 것도 없지요.

 

십자가 고통의 100분의 일도 당해보지 않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닙니다만

 

스테반이 죽는 모습, 불에 타서 순교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평강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시는 것은.. 이상하다 이겁니다.

 

또 예수님은, 보통 순교자들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민하시며 괴로워하시는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심히 놀라셨다’ :33

왜 놀라시는 겁니까?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고,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심히 놀라신 이유는

다 이해하고 계시고, 다 알고 계셨지만

실제로 인간들이 처한 상황, 그 저주 속으로 던져지셨기 때문입니다.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주님의 이 지상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통 가운데 계셨고,

 

아버지께서도 주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실 때,

주님께 잘 들리도록, 천둥소리와 같은 말씀으로 해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성령님을 통하여 천국과 주님의 마음이 교통하고 있었고,

천국의 기운 안에 있었고, 아버지 앞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심히 놀랐다’는 얘기는,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집니다,

갑자기 천국의 기운이 차단됩니다.

 

갑자기 주님의 마음이, 저주 속으로 던져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깜짝 놀라신 겁니다. 거의 죽게 되신 겁니다.

 

머리로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지만,

실제로 저주 속에 던져지자/아버지와 관계가 차단되자..

깜짝 놀라버리고 마십니다.  ←핵심 주제 단락.

 

그리고 주님의 이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은 사흘 뒤에 부활하실 것을,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통이 극심해도, 3일 뒤에는 끝납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토록 괴로워하신 이유는

주님이, 아버지와 관계가 단절되고, 그래서 저주로 떨어져버리신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난리를 치시는 겁니다.

 

제 아이가 3~7살 되었을 때,

제가 아이에게 벌을 주는 방법이 두 가지였는데,

매를 들고 때리든지

아니면 반성하라고 방에 혼자 넣고, 문을 닫아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를 방에 가두었을 때,

그 아이가 방에 갇혀진 상태에서 울고 발악할 때는 제가 무섭습니다.

‘아이가 저러다가 정신이 이상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이도 방에 갇혀서,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주님이 지금 그런 경기를 일으키고 계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지는 것, 이게 바로 저주 아닙니까!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고 천국의 기운이 가려진 것,

이게 바로 저주인데,

그 저주 속에 던져진 상태가

주님께서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신 상태가 됩니다.

 

주님이 바로 그런 상태가 된 겁니다.

지금 주님의 심리상태가 미쳐버릴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차단되고 천국의 기운이 차단된 상태,

이게 바로 저주의 상태지요.

 

◑적용

 

우리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좋아하기까지 하는 이 세상의 형편,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얼굴 뵙지 못하고

천국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 상태,

 

우리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끼고

모든 인간이 이 속에서 행복하기를 원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고 일등 하기를 원하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주님께서는 단 3일을 견디지 못해서

정말 마음이 미쳐버릴 정도로 괴로워하시는 상태이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그 상태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등 하는 게 잘사는 거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게 잘사는 거다!

-이게 ‘승자의 저주’일 수 있습니다.

  아니 ‘승자의 저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등했고, 승리했으니까..

뭐가 잘 된 것 같지만..

그래서 ‘영생과 천국’에서 탈락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이지요!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께 물어봅니다.

‘주님, 뭐가 그렇게 괴롭습니까?’

이상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희박해도 이렇게 편한데…

 

이렇게 편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좋은데,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도, 천국을 모르고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게 잘사는 거고,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면.. 잘살고, 행복할 줄로 알고,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 얼굴이 안 보이고,

천국의 기운이 끊어진 상태를 어느 정도로 괴로워하시느냐 하면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시는 그런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해가 되지요.

바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면서 왕이 된 자와 총독이 된 자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합니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

아그립바 왕, 이 세상에서 승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승자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승자의 저주’처럼 보이는 거예요.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 (카리스매틱 무브먼트)’은

기독교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끼치고 있습니다.

 

긍정적 영향은..

말 그대로 ‘성령 운동’을 통해

신앙에 활력을 주고, 더욱 뜨겁게 신앙생활 하도록.. 선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영향은..

‘성령운동’이 ‘현세적 기복신앙’과 연결되어서,

‘성령충만 받고서, 사업 잘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자’는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상태에 있습니다.

 

이제 성령운동은, 전세계적으로,

개신교 내에서 가장 큰 주류 물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숫자적으로

그 내용을 뜯어보면 ‘부자되고 성공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들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급속하게 파급되었습니다.

 

제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진짜 성령을 받으면,

천국을 느끼게 되고,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천국에 푹 빠져서.. 오히려 현실 세상을 등지게 될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오늘날의 성령운동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일부 성령운동은

‘저주에서 벗어나, 부자되고 성공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게 어떻게 ‘성령충만’과 매치가 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천국을 본 자들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령운동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더 부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십자가 복음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질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얼굴이 차단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을

단 3일 동안도 견디지 못하셔서 괴로워하시면서

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무서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지긋지긋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얘기하면서

그러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겟세마네의 주님은,

단 3일을 못 견디십니다.

그리고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실 것이고,

아버지와의 교통이 다시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3일을 못 견디셔서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까지 말하시는데,

우리는 이 상황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 거라서

‘이 세상에서는 무병장수가 복이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나라에 ‘레저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제 주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강가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거기(오토캠프장)서 한적한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국이 인터넷이 되니까,

거기서 조개도 캐고, 생선구이도 하면서,

야구중계도 봅니다.

 

그런데 텐트를 보면, 아주 작은 것은,

땅바닥에 가마니 2장 덮어놓은듯한, 작고 납작한  텐트도 있습니다.

텐트를, 자전거 등 뒤에 메고 와서, 해가 지면, 거기 쏙 들어가 자는 것입니다.

 

반대로, 2층짜리 큰 텐트도 있습니다.

또한 개인 샤워실을 갖추거나, 샤워실이 딸린 텐트도 있습니다.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급 저택에 살든지,

아니면 달동네에 살든지,

그거 캠프장에서, 텐트 자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가 거할 영구한 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우리가 아무리 크고 넓은 집에 산다고 자랑해 봐야..

그거 강가에서 ‘텐트 자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억울한 사람, 텐트 2층짜리로 큰 것 하나 사십시오.

그거 얼마 비싸지 않을 것입니다. 고작 해봐야.. 텐트니까요!

 

그런데 ‘텐트 비싼 것’ 샀다고.. 자족하고, 만족하다가

‘영원한 도성’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지 않고 산다면..

이 ‘텐트 촌’에서 아무리 잘 살아봤자,

그거야말로 ‘승자의 저주’인 셈이지요!

 

과거에 미국선교사님들 중에,

열악한 한국의 월세방이나, 연립주택에서

연탄불 때면서 사시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저 분들, 저기 열악한 데서 어떻게 사시나?’ 걱정하지만,

그게 아니예요.

 

미국에서, 넓은 저택에서, 냉난방 다 되고, 그림 같은 호숫가, 숲속에서

다 살아보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영원히 거할 곳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미국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과거의 한국적 형편이, 그리 편한 곳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시 지내는 곳’이니까,

그럭저럭 버티며,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선교사들도 마찬가집니다.

아프리카의 오지, 동남아의 정글

거기서 그럭저럭 견디고, 버팁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영원히 살 집이 아니니까요!

 

돌아갈 한국이 있고,

영원히 거주할 천국이 있으니까,

‘잠시 지내는 곳’에서는,

불편한 점이 있어도, 참고 견딥니다.

 

그런데 ‘잠시 지내는 이 세상에서, 너무 편하게 살 것을 염두에 두다가’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그런 것이 ‘승자의 저주’가 되는 셈입니다.

 

▲정리하면

나는 주님의 임재로 인해.. 즐거워하고, 만족해 합니까?

나는 주님의 부재로 인해.. 본문의 예수님처럼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을 지경입니까?’ 막14:34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께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교리일뿐이지

진짜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을 힘입어서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를 느껴본 보거나, 교통해본 적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그저 아직도 이 세상에서 뭔가 잘살아보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있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이셨지만

천국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고 계셨던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3일 동안을 아버지를 못 보시고

천국 기운이 끊어진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땀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살아보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겠다고, 성공하겠다고, 형통하겠다고.. 젖먹는 힘을 다해 뜁니다,

그것이 ‘승자의 저주’인 것도 모르고…

 

물론 신자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but our sufficiency is of God! 고후3:5

 

만약 신자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된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승자의 저주’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만족은 어디서부터 나오고 있습니까?

반대로, 나의 불만은 어디서부터 나오고 있습니까?

 

이것 훈련이.. 10년 이상 된 가운데서, 제가 말씀을 전하면..

여러분께 더 큰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만,

저도 아직 10년은 되지 못했지만.. 계속 훈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증거하는 ‘만족’은

‘성공하고 부자되는 데서 오는 만족’이 결코 아닙니다.

그 만족은 ‘주님의 임재/동행/내주’에서 오는 만족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라고 합니다.

 

다만 그것을, ‘진정한 평화’로 내가 느끼기 까지는

오랜 ‘경건의 훈련’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

 

주1)

 

이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경위를 잠깐 살펴보면,

1950년대에 미국 멕시코 만의 석유개발 사업을 놓고

수십 개의 미국의 석유종합개발회사들이 입찰경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보신 분들, ARCO라고 하는 주유소 보신 적 있으세요?

 

 

Atlantic Richfield 라고 하는 회사가 그 과열된 경쟁을 뚫고 시추권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1971년에 이 회사에 속한 세 명의 엔지니어가 논문을 하나 발표하게 됩니다.

 

그 동안 속사정을 몰랐었는데 20년이 지나서 발표된 논문 속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가 하면,

1950년대에 이 ARCO 회사가 멕시코 만의 시추권을 따낼 때만 해도

석유매장량을 측정하는 기술이 그렇게 발달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과열된 경쟁 속에서 그 당시 돈 2천만 불을 시추권 입찰비용으로 제시해서 따냈는데,

정작 개발을 하고 보니까, 다 해봐야 1224개 중 불과 18%에 해당되는 곳 외에는

석유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 18%에서 천만 불 어치의 석유매장량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2천만 불을 들여서 입찰에 성공하여 시추권을 따냈는데

개발할 수 있는 맥시멈이 천만 불 어치였으니까 천만 불이 그냥 날아가 버린 겁니다.

 

 

 

이 상황을 이 세 명의 엔지니어가 자기들의 논문 속에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승자의 저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 후에 이 얘기가 경제계에서 아주 유명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경제학자에 의해서 <승자의 저주>라고 하는 책도 나오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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