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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타락 예화모음 16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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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주제별 예화모음)

 

▣ 교회의 타락

 

요즘 교회에 대한 시비가 많다. 엄격해진 잣대는 교회에 대한 기대와 책임 때문이다. 교회가 가난할 때는 우호적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지금 더 이상 양해 받을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교회는 마치 부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교회의 타락은 거룩함보다 물질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연약함보다 힘을 숭상하고, 가난보다 부유함을 선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홀히 여기게 된 까닭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 2:5)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 프로이드의 슈퍼에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이 통하던 옛날에는 도둑에게도 도둑질할 때 '과부나 고아의 집은 털지 않는다. 효자, 열녀의 집은 털지 않는다. 신당, 절간은 털지 않는다' 는 도도삼강(盜道三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둑이라 할지라도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고아과부, 하늘이 지킨다는 효자열녀, 신이 있는 신당절간을 건드리는 천벌 받을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천심(天心)을 무서워하는 양심이 도둑에게까지도 살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양심이 천심(天心)을 무서워하는 초자아(超自我)를 가리켜 수퍼에고(superego)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수퍼에고의 타락을 문명이나 인간타락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에 비추어 오늘날 이 사회의 타락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서운,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엄위와 위엄을 '착한, 용서하시는,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약화시켜버린 교회가 타락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타락한 만큼 나라도 타락하고 사회도 타락하고 인간도 타락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누가 하나님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최용우

 

 

 
 
 

 

 

▣ 타락(墮落)

 

 

타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타락이라는 말은 원래 화살을 쏘았는데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을 때 쓰는 말입니다. 타락한 삶을 살지 않으려면 먼저 흔들림 없는 인생의 과녁이 필요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과녁을 향하여 온 신경을 집중한 다음 화살의 끝을 과녁의 중앙에 조준하고 화살을 날려야 합니다. 과녁이 어디인지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데나 쏘아대는 화살은 그것이야말로 타락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고달픈 삶은, 고된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헛된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고 선명한 인생의 과녁을 찾으세요.

 

 

 
 
 

 

 

▣ 교회 안에 하수가?

 

교회의 배관에 문제가 생겨 하수가 흘러넘친다면, 성도들은 분명 그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처럼 교회 업무를 계속할 수 없어 예배 장소가 바뀔 것이고, 직원들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초과 근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보건상의 위험 때문에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하수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회 안에 느헤미야 시대의 도비야(느 2:10, 19)가 살고 있다. 음욕, 탐욕, 물질주의, 분노, 이기심, 교만, 육욕, 이혼, 불경건한 오락, 세속적 철학 등….

우리는 조금씩 경계를 늦췄고, 하나님의 공인된 원수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것들을 교회 안으로 맞아들여 안방까지 내주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길을 잃고 타락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너무 노력한 나머지 죄의 회개도, 삶의 변화도, 하나님의 임재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마음과 가정에서 더러운 것을 철저하게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하지 못한 교회가 흥청망청 즐기다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성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느헤미야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품, 거룩함」/ 낸시 레이 드모스

 

* 기도: 신앙의 모양만 있고 열매 없는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진 신앙이라면 모두 뽑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신실한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우게 하소서. 사회가 타락하지 않도록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생명의 삶

 

 

 
 
 

 

 

▣ 타락과 두려움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수치와 죄책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수치와 죄책감, 두려움은 왜 생겼을까요? 아마도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수치와 두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동산에서 하나님과 종일토록 함께 하는 삶이었으므로 그곳에 무슨 부족함이나 두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한 후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창3:10)

아담이 느낀 두려움의 근원에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타락하게 된 인간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타락과 두려움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자원 속에서의 삶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게 된 관계의 단절이고 상황의 변화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제한된 자원.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는데, 더구나 자기가 가진 자원은 너무나 부족한테.. 당연하게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그나마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원을 확보하려는 본능과 욕망이 생깁니다. 문제는 자원의 제한성입니다. 이 세상의 제한된 자원을 서로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인간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본 타락과 두려움의 내용입니다. 두려움으로 우리 모두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분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타락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 타락과 두려움이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삶속에 깊이 침투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의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벼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는 현재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엄연한 힘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얕보다가는 큰코 다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미 이 싸움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가 완전히 이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담대하지 못할 대가 많습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우리를 주무르는 주된 무기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커다란 영역에서 심지어는 교회와 교인들에게서도 사탄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담대해져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자원은 무한합니다.

 

 

 
 
 

 

 

▣ 성적 타락의 위기

 

역사학자 제임스 언웬은 몽골제국,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등이 왜 멸망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여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대개 제국이나 나라들이 성적으로 타락할 때 국가가 멸망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스와핑'이라는 부부교환 섹스가 독 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는 실태이다.

법적으로 처벌할 조항도 없고, 본인들의 양심으로 전혀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있다. 음란한 행위 이면의 저들의 마음의 자세들이 더욱 심각하다. 제임스 언웬은 '사람들의 마음의 정욕의 불길을 잡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구약성경 속의 역사를 살펴 볼 때 노아홍수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원인도

결국 도덕과 윤리적 타락에 기인한다.

사이버시대를 맞아 인터넷을 통한 음란의 물결은 과히 홍수 사태를 당하고 있다. 성적 타락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고, 사회와 국가가 무너지는 위기를 우리는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음행을 제일 싫어하시고, 용납치 않으신다.

예전에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타락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신 흔적이 지금의 사해(Dead Sea)이다. 한번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라!!

 

 

 
 
 

 

 

▣ 도덕적 타락과 심판

 

본문: 이사야 5: 22- 30

 

1. 도덕적인 타락과 그릇된 술 문화(22-23)

놀랍게도 오늘 성경에서는 마치 지금 우리 사회의 술문화를 연상케 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가 타락하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술문화가 급격하게 발전하고 그 문화가 과격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더 자극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온갖 술을 섞어 마시는데 능한 자들이 된다는 것을 이사야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타락한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은 뇌물을 즐기며 뇌물로 자신의 부를 만들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판결을 해야 하는 자들은 그 판결을 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지적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타락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지를 바라보며 이 사회의 마지막 희망된 우리가 얼마나 바르고 정직하고 이 사회에 살지만 사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 성도들은 영성을 잘 관리하고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 묵상: 나는 이 사회에 속하였지만 그 문화와 구별된 삶을 사는가?

2. 하나님의 심판(24-30)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계속해서 죄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하심은 분명하며 공의로우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 심판은 너무 무서워서 그 앞에서 온전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은 그들이 좋게 여기는대로 살지만 아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조심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야 합니다.

* 묵상: 하나님 앞에 날마다 거룩함을 위하여 힘쓰는가?

 

 
 
 

 

 

▣ 타락한 인간 부르신 하나님

본문: 창 3 :7 - 13

오늘 본문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버려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7-8절까지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난다. 9절에는 인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난다. 10절에는 하나님 면전에 인간의 태도가 나타난다. 11절은 하나님이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의도가 나타난다. 12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책을 전가하여 변명하는 변질된 인간의 마음이 나타난다.

1. 타락한 인간.

1) 눈이 밝아졌다.

죄를 아는 지혜가 열려 죄짓는데 지혜로웠다. 하나님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사단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어 버렸다. 즉 사단을 닮은 것이다. 죄를 보는데 행하는데 지혜로운 것이다. 인간은 사단을 닮았기에 죄를 보는 눈이 밝고 죄를 행하는데 지혜롭다 그러기에 죄는 배우지 아니해도 가르치지 아니해도 연구하지 않아도 선보다 더 발달한다 선은 장려하고 가르치고 연구해도 악을 앞서지 못한다. 인간의 영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2) 벗은 줄을 알았다.

수치감에 사로잡혔다. 타락 이전의 모습은 아음다웠다. 심히 선하게 보였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사단의 조소로 인하여 추하게 보였다. 수치감에 서로를 부끄럽게 여겼다. 타락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범죄한 모습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미움의 그림자이다.

3)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려 하였다.

죄를 자신이 가리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 것이다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죄를 범하면 감추려고 애를 쓴다. 나무 입으로 자기를 감추려 한다. 즉 인간의 행위의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자기를 가리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가리우지 못한다. 일지석인 것이다. 결국은 다 드러난다. 하나님 면전에 드러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은 가리우려 한다.

4)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

동산 나무 아래 숨었다. 어리석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 했다. 이들의 생각은 둔해 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은 죄를 지으면 감추려 하고 숨기려 하고 피하려 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피할 수 없다. 시139:7-10.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 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 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지라도 곧 거기서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리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피할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기에 회개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심판을 믿지 않은 사람이든지 불신앙인이다.

 

 

 
 
 

 

 

2. 찾아 주신 하나님.

1) 아담을 부르셨다.

그러나 사단은 이들을 죄를 범하게 하고서는 떠나가 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두려워 떠는 이들을 사단은 위로하지 않았다. 버려 놓은 인간은 더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스스로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죄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저녁 써늘할때까지 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기다리다가 찾아오셨다. 그리고 불러 주셨다.인간을 천사보다 사랑하셨다. 천사가 타락했을 때에는 불러주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독생자도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에게 불러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찾아 주신 것이다.

2)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 네가 어데 있느냐” 하셨다. 한 번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여러번 부르셨다. 어디에 있는 줄을 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시면서도 부르셨다. 그들은 주어진 자유로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이셨다.

3) 선악과를 먹었느냐 물었다.

이 말은 스스로 자기 입에서 범죄 하였다고 고백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책망하시지 않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에 숨었느냐 이 말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뜻이다 네가 숨어 있어야 할 인간이 아니며 나무 아래 있어야 할인간이 아니다 왜 네가 가까이 올 수 없느냐 하는 말씀이다. 이는 스스로 자백하게 하려 함이다. 타락한 신앙은 하나님 면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마음에 멀게 느껴진다. 귀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말씀을 깨닫지도 못한다 아무리 말씀을 들려주어도 감동이 없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다.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멀리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숨기려 애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징계에만 두려워한다. 그리고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마음에 아픔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고백이 없는 신앙이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먹으면 죽으리라 하였는데 사단의 말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선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숨기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아픔이 없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모두 숨기는 본능이 있다. 교회에나 오면 죄인뿐이고 교도소에 가면 의인뿐이라고 한다. 재판소에 가면 모두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판사나 왕이나 선지자 모두 죄인이라고 한다.

4) 누가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너의 벗었음을 고한 자가 나냐 너희들이냐 누구냐 너희 벗었음을 고한 자가 사단이 아니냐 내가 너희더러 벗은 것을 말하느냐 왜 사단은 숨기고 조는 숨기고 너희 몸이 벗은 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느냐 언제는 벗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면서 이들의 벗은 것을 말하심이 아니다. 그들이 벗은 결과를 말씀하심이다. 왜 따 먹었느냐가 아니다 과일을 먹었느냐 물어보시는 음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정직한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다. 회개를 유도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먹은 것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물으신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물어보신 것이다. 진실한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다.

 

 
 
 

 

 

3. 타락한 변질된 인간의 태도.

우리는 아담의 태도를 보면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배운다. 이들의 대답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여자 그가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 그리고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 하였다. 교통하고 난 사위가 자기용 사준 처갓집 탓하는 격이 된다. 죄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이다. 즉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주셔서 그 여자가 꾀기에 먹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잘못했지만 그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도 책임이 있고 여자는 더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책임 전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원수로 말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책임을 지려 한 것이다. 여자가 꾀고 뱀이 꾀었기에 자신들을 별로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아담 자신에게 하였던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신앙이 그릇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타인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핑계한다. 핑계는 징벌을 자처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지혜롭게 핑계하는 자보다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핑계하는 이들에게 형벌을 선언하신다. 고로 죄를 지어서만이 아니라 핑계하여 이중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계명을 어기게 죄를 범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핑계하고 사랑을 거부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는 수 없이 징벌을 해야 했었다.

 

결 론

왜 인간이 멸망하는가? 왜 신자가 징벌을 받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사단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핑계하였기 때문이다. 핑계는 징벌을 자처하는 행위이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도 책임을 거부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였기에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율법을 어긴 죄는 사랑의 법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거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 타락(墮落 the fall)

 

1. 타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왕상11:9)

2. 타락은 처음 사랑이 식어지거나 처음 사랑에서 떠나는 것입니다.(계2:4)

3. 타락의 외적인 원인은 - 탐심(창13:10), 두려움(마26:70-74), 거만한 마음 (잠16:81), 이기심(잠14:14), 우상숭배(출32:8), 불순종(삼상15:11), 금과 은과 옷을 사랑함(여호수아7:1-24), 돈을 사랑함(요13:29), 외국 여인들(느13:26), 권력에 대한 야망(행8:19), 세상을 사랑함(딤후4:10), 사회(창19:26),

4. 타락의 내적인 원인은 -기도하지 않을 때(잠16:18), 성경을 읽지 않을 때(딤후2:15),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때(히10:25),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을 때 (엡4:30),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못할 때(마10:33, 롬10:9), 빛 가운데서 행하지 못했을 때(요일1:7)

5. 타락하게 되면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잃게 됩니다.

6. 타락하게 되면 불평과 어두움이 우리의 앞길을 가리우게 됩니다.

7. 타락하게 되면 공력을 잃고 해를 받게 됩니다.(고전3:15)

8. 타락했더라도 하나님은 다시 부르십니다.(렘3:22)

 

 
 
 

 

 

▣ 중세교회사의 타락한 모습

교황과 제왕, 교권과 왕권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중세 교회사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싸움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다스릴 때는 교황권이 신장될 때였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권을 견제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짓밟아버렸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자 황제는 눈이 오는 겨울에 알프스의 험한 고개를 넘어 파문을 풀어달라고 카노사에 찾아왔다. 그러나 교황은 아예 모르는 척해버렸다. 삼일이 지난 다음 교황은 눈 위에서 맨발로 삼일 동안 벌벌 떨고 있는 황제에게 들어오라고 명령한다.

황제는 얼어붙은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발에 키스를 했다. 교황의 발에 키스를 하고 해벌을 받은 황제는 알프스를 넘어 돌아간 뒤 복수의 칼을 갈면서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는 이탈리아로 진군해 로마를 점령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도망가 1년 후 객사하고 말았다.

중세 교회사의 이런 타락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김의환<성복중앙교회 목사>

 

▣ 타락

 

 
 
 

 

 

을 멈추게 하는 최고의 묘약

 

장로교 목사제임스 맥그레디의 설명에 의하면, 18세기 말 켄터키 주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제임스 목사는 1799년 겨울 내내 교인들과 함께 켄터키 지역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다음 해, 미국의 켄터키에 대 부흥이 일어나 1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하신 말씀대로 주를 믿는 자들이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 회개하고, 주위 사람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904년 영국의 웨일즈에서는 판사들이 자신들의 흰 장갑을 반납했는데, 이는 별로 재판할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간 사건도 없었고, 횡령이나 착복도 없었으며, 강도와 살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의 십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고, 수많은 광부들이 변화를 받아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자 조랑말들이 그들의 지시를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음주가 반으로 줄었고, 레드놀셔 주와 메리오네셔 주의 사생아 출산률도 44%로 하락했다. 이것이 바로 회개와 중보 기도의 능력이다!

-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기도」/ 준 두니

 

 

 
 
 

 

 

▣ 편안함과 타락

 

C S 루이스가 쓴 책 중에 풋내 나는 조카마귀와 노련한 삼촌마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카마귀가 교회를 공격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애를 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조카마귀가 교회를 공격하면 할수록 성도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로 뭉쳐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심지어 핍박과 박해를 주었을 때에는 순교하는 성도들이 나오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더 강건해져 갔다. 그래서 조카마귀는 삼촌마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삼촌마귀는 조카마귀에게 묘책 하나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가만히 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교회는 가만히 두면 힘을 잃는다. 편안하면 무릎 꿇는 시간도 짧아지고, 기도의 간절함도 줄어들고, 영성도 사라진다. 고여 있는 물이 썩는 것처럼 인간은 편안하면 타락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시지만, 그 편안함에 머물러 썩어가기를 원하시지는 않는다.

/김은호 목사(오륜교회)

 

 

 
 
 

 

 

▣ 타락한 백성과 근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슬퍼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두 가지 의문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주의 때문에 근심하신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버림 받으셔서 괴로워하신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자조적인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주신다 해도 그분에게 부족함이 생기는 일은 없다. 우리는 그분에게 조금도 보태 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때문에 고통을 느끼시며 그리움에 사무쳐 우신다. 그분은 그분의 고통을 외면하는 교회, 그분의 눈물 젖은 눈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는 교회, 전에는 그분을 향해 불타는 사랑을 느꼈지만 이제는 어색한 냉랭함만 느껴지는 교회를 향해 우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 말구유에 누우신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배반한 백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분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일이다. 그분의 고통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고통이 아니라 타락한 백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고통이다.

- 「금송아지 예배자」/ 존 화이트

 

 

 
 
 

 

 

▣ 타락에 관한 성경말씀

 

[예레미야 14: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찌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예레미야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 49:4] 타락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로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오리요 하느냐

[다니엘 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히브리서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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