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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판단 예화모음 54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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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나라로 가던 도중 양식이 떨어져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걷다가 어느 마을에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공자가 깜박 잠이 든 사이에 안회가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습니다. 공자가 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니 안회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공자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는 안회가 몰래 밥을 먹는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공자는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이었습니다.

안회는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부끄러워하며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을 후회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너희들은 알아두거라.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남을 판단합니다. 내가 본 것은 확실하며, 내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 없고,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며, 나의 판단은 솔로몬의 것과 다름이 없다는 듯이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게 있지 아니하고 나의 정당성은 큰 소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떨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콜럼버스를 보는 관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잠 24:1)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 11:10)

얼마전 미국에서 출간된 브렌트 보우어스의 '1천년, 1천인' 은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1천명을 선정해 순위를 매겼습니다. 이에 따르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발명해 서적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인류가 활동하는 지리적 공간을 확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의도적 노력의 결과인 반면 콜럼버스의 발견은 착각의 산물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며, 자신의 항로가 신대륙에 '가로막힌' 줄 몰랐습니다. 후에 아메리고 베스부치에 의해 신대륙임이 밝혀졌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은 축복의 땅이었지만. 신대륙 원주민 입장에선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상륙한 1492년 25만명이던 에스파뇰라섬 인구는 1538년 5백명만 남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신대륙 발견 후 원주민 1천6백만명, 그리고 같은 숫자의 아프리카 흑인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지난해 10월 12일 '콜럼버스의 날' 온두라스에서 흥미있는 재판이 열렸는데, 현지 인디오들이 주관한 이 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야만행위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으로 기소됐습니다. 재판 결과 극형이 내려졌고, 궁사 (弓士) 들은 콜럼버스의 초상화를 향해 화살을 쐈습니다. 미국 뉴욕 타임스가 세계 석학들을 대상으로 지난 1천년간 20개 분야에서 '최고' 를 조사한 결과 '최악의 사고' 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었습니다. 같은 역사도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눈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 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것도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칭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편견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편애는 관계를 망치게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분과 느낌은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한 기준이 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 즉 편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고르게 사랑하십시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식 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세를 쥐고 있다. 당신 손에 있는 권세로 세계의 역사와 운명이 좌우된다. 당신은 노련한 전문가인 수많은 보좌관을 데리고 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그 많은 보좌관들이 제각기 자기의 전문적인 지식을 당신에게 말할 것이고, 당신은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된다.
당신은 당신을 보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판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가슴 곳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을 들어라." 우리의 마음은 보좌관입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수학적이고 논리 정연하고 사회학적이며 통계적인 것들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판단을 내릴 때는 영이 해야 합니다.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영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판단을 얻어서 행하게 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로버트 리 장군이 동료 장군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듣고 한 병사가 깜짝 놀랬습니다.“장군님,당신이 극구 칭찬한 그 사람이 당신의 가장 악한 원수중의 한 사람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을 중상모략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그러나 나는 그에 관한 나의 견해를 질문받은 것이지 나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질문받은 것이 아닐세”하고 리장군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판단하겠는가?
 
우리는 성경 중에서 어느 것은 빼고 어느 것은 고르고 할 처지가 아니다.
"나는 이것은 믿겠는데 저것은 못믿겠다"고 할 처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는 평가를 내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라고 아무리 말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성경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그 죄를 심판하신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결코 이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받아 들이든지 둘다를 거절하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 저기서 나에게 맞는 모양만을 골라서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화려하고 힘있는 메시야를 원했고 자기들에게 다가온 마음에 들지 않는 메시야를 죽이면 그 소원이 이루질 것이라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거나 변경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잘못된 해석
 
한 과학자가 벼룩의 특성을 살피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벼룩을 관찰하고 있었다.
벼룩의 한다리를 끊어 내면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그 벼룩은 즉시 펄쩍하고 뛰었다.
한 다리를 더 끊어 내며 다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벼룩은 또 뛰었다. 이 과학자는
이같은 명령을 계속하며 여섯번째인 마지막 다리만 남겨 놓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벼룩이
뛰기가 좀 힘들어졌다. 하지만 뛰어보려고 애를 쓴다. 과학자는 드디어 마지막 다리까지
잘라버리고 또 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벼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과학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명령을 했다. "뛰어!" 여전히 벼룩은 반응이 없었다. 세번째로 과학자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다. "뛰어!" 그러나 불쌍한 벼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다. "벼룩의 다리를 모두 제거 해버리면
벼룩은 청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성급한 판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가정의 짐, 직장에서의 짐, 혹은 육체적인 짐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좀더 자상하고 덜 비판적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나는 내가 목회하던 한 교회에서 겪었던 부끄러운 경험을 기억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중의 한 사람이 자기 반은 열심히 가르쳤지만, 교회의 봉사에는 충실치 못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하여 담당자에게 심한 몇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당신은 이 교회에 얼마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의 집을 방문해 보십시오. 그 후에 판단하십시오.”
나는 방문을 했고 내 마음은 깨졌습니다. 그 사람 집에는 병든 자식이 있었습니다. 너무 가엾은 처지였습니다. 지금은 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존경합니다. 그를 사랑할 수 있었고 인정하며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겪는 고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 이러한 격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성급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얼마나 빨리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고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쿠키 채가는 사람
 
한 부인이 비행기의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는 동안 신문을 읽고 있었습
니다. 그 여인은 자리에 앉기 전에 대합실에 있는 간식 파는 상점에서 비행기에 탄 뒤에
먹으려고 한 봉지의 쿠키를 샀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옆눈질을 해 보니 자기 곁에 앉아 있
는 신사가 그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내려다 보자 그녀가 산 쿠키 봉지가 열려서 그
신사가 그것을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그 신사가 남의 쿠키를 먹을 만치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자기의 쿠키를 그 사람에게 다 빼앗길 수가 없어서 봉지에 손을 넣어 자기
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신사가 계속해서 쿠키를 갖다 먹는다는 사
실이었습니다. 더욱 안달이 나서 부인의 봉지 속의 쿠키를 하나만 남겨 놓고 모드 한 주먹
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 때 옆에 앉은 신사는 손을 넣어 마지막 쿠키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먹기 전에 하나
를 반으로 쪼개어 그 반 조각은 남겨 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자 이 부인
은 더욱 화가 나서 반 조각이 남아 있는 빈 봉지를 낚아채서 그녀의 가방에 쑤셔 넣었습니
다.
그러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가방 속에 열지 않은 쿠키 봉지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
한 것입니다.

*적용

때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사실은 자신을 비판하고 비난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6:37에서 성경은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
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
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 남을 잘 알아 보지도 않고 너무 빨리 판단
한 적은 없습니까? 우리가 그런 일을 하면 경거망동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거나 결국 당
황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모든 사실을 잘 알아보고, 의심나는 것은 물어보고, 잘 들
어 본 뒤 의심난 것을 유리하게 이해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타수
 
한 어린 소년이 거드름을 피우며 야구 방망이와 공을 가지고 운동모를 쓰고 뒤뜰을 걸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 들렸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수야."
그러면서 공을 공중으로 던지고는 방망이로 쳤는데 헛쳤습니다.
"스트라이크, 원 스트라이크 노 볼."
그는 소리쳤습니다. 기세가 꺽이지 않은 채. 그는 공을 주우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수야."
그는 공을 또 위로 던져서 내려 올 때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이번에도 헛쳤습니다.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노 볼."
그는 소리쳤습니다. 소년은 한동안 동작을 멈추고 야구 방망이와 공을 잘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뱉고 비볐습니다.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 한 번 더 소리쳤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수야."
또 한 번 공을 위로 올려서 내려 올 때 공을 쳤습니다. 그런데 또 헛쳤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야!" 

 

 

 
 
 

 

 

구명보트
 
(이것은 실화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애니는 덩치가 크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그녀는 뚱보였습니다.
청년회원이었던 애니는 규칙적으로 거의 대부분이 성경공부와 고등부 활동에 참석했었습니다.
하루는 고등부 모임을 할 때에 인도자는 "구명보트"라는 상황극을 하게 했습니다.
인도자는 12명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구명보트의 좌석과 비슷한 모양으로 의자를 갖다 놓고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열두 사람은 배가 파선해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들입니다. 여러분만 겨우 이 구명
보트까지 헤엄쳐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꼭 열 한사람만을 위한 장비만 가지고 있고 또
열 한 사람 밖에 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열 두명이 모두 배를 타게 되면 모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열 두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서로 멍하게 서로만 처다보고 있다가 열띤 토론을 시작했습니
다. 그들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 한 사람이 희생 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이 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회원들은 그 한 사람을 찾아내는데 '꼭 살아남아야 하겠다.'고 생각되는 가치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가려내기로 했습니다. 먼저 가장 힘이 세고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희생될 수 없다고말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배를 저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회원들은 가장 예쁜 처녀를 상어 밥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애니만 빼고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희생되어 서는 안될 사람이 가려졌습니다. 머리가 좋거나 재능이 좋거나 인기가 좋거나
해서 하나씩 희생자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드디어 애니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력은 없었지만 눈치없는 처녀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뛰어 내리지 뭐."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건 안돼."
학생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왜 그녀가 남아야 되느냐고 따져 묻자, 아무도 대답할 말이
없어 다 입을 다물었습니다.
게임이 끝났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
습니다. 인도자느 이런 구명보트의 상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애니는 이미 스스로 교훈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애니는 정말 뛰어 내렸습니다. 고등부회원들은 그녀가 자기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라고 느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의 "친구(?)"인 고등부회원들을 당황하게 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살아야 할 그렇게 많을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찾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겉만 보고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그 밑에 숨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
다. 사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가치를 겉모양이나, 인기나, 가진 것이나, 또는 능력만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이 중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후)." 라고 말합니
다. 크리스천들은 사람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주신 타고난 그대로를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각 다른 은사를 받아 하늘 나라를 섬기도록 해주셨습니다(고전 12장 참조). 애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른 판단
 
(이 이야기는 벤 패터슨의 기다림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나이 서른 둘의 약관에 은행장으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이 진급은 그의 야망을 훨씬 앞지른 것이어서 그를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이 많은 이사회의 존경하는 이사장을 만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은행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자문을 받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행장 직분을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사장에게 물었습니다.
"바른 판단을 하시오."
이것이 이사장의 간단한 대답이었습니다.
젊은이는 한참 그 답을 생각하고 있더니 말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매우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점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제가 어떻게 하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존경받는 이사장은 대답했습니다.
"경험하십시오."
좀 화가 난 행장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장님, 제가 자문을 구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까?"
이사장은 말했습니다.
"틀린 결정을 내리는 것이요."

*적용

영적인 성숙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많은 실수 뒤에 오게 됩니다. 바로 지금 기독교인으로 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헌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현신이란 비록 여러분이 실수하고 또 실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그 실수로 부터 인생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인물이 준수하고 리더십이 있는 대학생이 있었다.그러나 그는 열등의식이 강해 자신감이 없었다.어머니에게 받은 깊은 상처가 있었다.어릴 때부터 형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형을 좋아했다.그러나 자기는 아침에 겨우 일어나 밥먹고 학교에 가기가 바빴다.“너는 왜 형처럼 부지런하지 못하고 게을러빠져서 매일 늑장만 부리냐” 그가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그 결과 자존감이 약해졌다.

그의 형은 아침 사람이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고,그는 밤 사람이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을 뿐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그는 얼마전 한 목회자와의 대화 속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아,내가 형보다 게으른 것이 아니었구나”라며 얼굴이 환해지며 무슨 큰 진리나 깨달은 듯 기뻐했다.

이제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다.게으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사람들은 남을 늘 판단한다.판단은 주관적 해석이다.판단하는 사람은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백만달러를 거부한 양심
 
한 대학교 총장이 학교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을 완성하는데 1백만달러가 모자랐다. 어려운 사정으로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그의 말은 2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1백만달러를 희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그가 사인을 하게 되면 고위관리에게는 3백만달러가 생기고 총장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1백만달러가 생기는 일이었다.



그런데 총장이 그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만든 위조서류였다. 총장은 고민에 빠졌다.‘눈을 감고 사인을 두번만 하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아무에게도 손해를 주지 않고도 학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 고위관리는 사인을 해도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냥 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장은 결국 거절했다. 이 사실은 그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이었다.


몇초만에 1백만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양심에 의해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경건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습이다.
“자족하는 마음과 경건이 있으면 큰 유익이라”(디모데전서 6:6) 

 

 

 
 
 

 

 

겉만 보고 판단하는 잘못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가 큰 곰을 만나 위기에 처한 두 사냥꾼이 총까지 내팽개치고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났다. 그 중 한 사람은 나무에 기어 올라갔고 다른 사람은 근처 동굴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속으로 도망갔던 사냥꾼이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밖에 있던 곰을 보자 다시 동굴로 급히 뛰어들어 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가 이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나무 위에 피신해 있던 친구가 소리쳤다. “아니,자네 죽으려고 작정했나! 동굴속에 가만히 숨어있지 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야?” 그러자 그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네. 동굴 속에 또 한 마리의 곰이 있거든!”

우리는 상대방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상대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매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던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는 총장과 악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혀를 찼다. “참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이 학교는 4년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하고서 4년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우리의 판단은 빗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만 우리 인생을 공평하게 판단하신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
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
느냐”-약 4:11,12.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
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어느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싣고 길을 걷다가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말았
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가 소리를 쳤습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연못에 좀 빠졌다
고 뭘 그리 엄살이냐 ! 나는 너보다 몇 십 배나 몸집이 작지만 연못에서 헤
엄치고 논다 !”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개구리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표준으로 삼고, 자신과 다른 언행을 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 써버립니다. 참으
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네가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
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은 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주님, 오직 주님만이 사람을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단 한가지가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는 것이다.
일을 한다는 말은 돈을 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먹는다는 것은 돈을 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속담은 열심히 돈을 벌고, 쓰기를 더디하라는 뜻입니다.
내일 일을 오늘 한다는 것은 오늘 할일을 다 하고, 내일 일까지 하는 것이니, 두 곱의 돈을 번다는 뜻이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는다는 말은 돈을 되도록 적게 쓴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사 26:8,9.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2,4.

당신은 당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교회를 판단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완벽한 곳이어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가 불완전하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잘 잊어버리고, 문제 덩어리이고, 구원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쁜 습관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완벽을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이상이자 욕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해와 달의 주장
 
어느 날 해와 달이 만났다.
해가 달을 바라보며 "나뭇잎은 초록색이야"하고 말했다. 그러자 달이 나뭇잎은 은빛이라고 우겼다.
이번엔 달이 먼저 말했다. "사람들은 늘 잠만 잔다." 그러자 해가 달에게 잘못 알고 있다며 대답했다.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인다구."
해의 말에 달이 의문을 가졌다.
"그러면 왜 땅은 늘 그렇게 조용한 거지?"
그랬더니 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 그러니? 땅은 언제나 시끄럽기만 한데."
어느새 해와 달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때 바람이 나타났다. 바람은 둘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너의들은 쓸데없는 다툼을 하고 있구나."
"낮에는 해의 말대로 나뭇잎은 초록색이란다.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땅도 시끄럽지. 그러나 달이 뜬 밤에는 모든 것이 변해 땅은 고요해지고, 사람들고 잠을 잔단다.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은빛이 되지. 늘 우린 이렇게 자기가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우길 때가 많단다" 

 

 

 
 
 

 

 

그릇
 
매우 총명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얼굴만은 못생긴 어떤 랍비가 어느날 로마 황제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황제의 딸은 랍비를 보더니 '그토록 총명한 지혜가 이런 못생긴 그릇 속에 담겨져 있군'하면서 비웃었다. 그러자 랍비는 황제의 딸에게 궁중 안에도 술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공주는 술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못생긴 랍비가 물었다.
[공주님, 궁중에 있는 술은 무슨 그릇에 담아 둡니까?]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항아리나 술병 같은데 담아 두지요.]
그러자 랍비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 로마의 공주같이 높고 훌륭하신 분께서 금이나 은이나 만든 그릇도 많을텐데 그런 싸구려 그릇을 쓰십니까?]
그러자 공주는 과연 랍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쓰던 보통 그릇들을 모두 금과 은그릇으로 바꾸었다. 물론 술도 금과 은그릇 속에다 옮겨 담았다. 그러고 나자 술맛이 옛날과는 달리 아주 이상하게 바뀌었다. [누가 술맛을 이렇게 만들었느냐?]
로마 황제가 크게 화를 내자 공주가 대답했다.
[싸구려 그릇보다 귀한 그릇 속에 술을 담아두는게 낫다고 해서...]
공주는 황제에게 꾸중을 듣고는 랍비를 찾아갔다.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잘못된 일을 하라고 했소?]
[나는 다만 공주님에게 아주 값지고 귀한 것이라 해도 보잘것 없이 헐한 그릇에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자기문제가 더 크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롬 2:1)

찍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그의 철학의 명제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문제에 성실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지금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야 한다고 온갖 용어를 동원하여 떠들고 있지만 네 눈에는 들보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역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찢어진 예복
 
한 가난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지휘를 하느라 지휘자의 낡은 예복이 그만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지휘자는, 한 곡이 끝나자 얼른 예복을 벗어버리고 셔츠 바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귀족 한 사람이 입고 있던 웃옷을 소리 없이 벗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웃옷을 벗었고, 그날 음악회가 감격적이고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탓하거나 조롱하기보다 감싸줄 수 있는 마음, 아름답지 않습니까? 
 

 

 

 
 
 

 

 

착각증
 
어떤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단어와 그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르시스라고 하는 소녀가 살았는데 숲 속의 은빛 고요한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거기다 대고 사랑을 고백했지만 물론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만 물 속에 빠져서 죽고 수선화가 되었다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자애병, 이것을 나르시시스즘이라고 한다 라고 설명을 했더니 어느 여학생 하나가 하는 말이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병에 걸린 것인가 봐요.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 예뻐요. 너무 예뻐서 거울을 떠날 수가 없고 때로는 내 얼굴을 내가 들여다보면서 아주 미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애병이 아니라 착각증이란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자신을 안다는 것, 이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다는 것, 그것처럼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잠깐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 운명의 시점이 어디까지 왔는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걸 생각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파생됩니다. 

 

 

 
 
 

 

 

외모의 함정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새로 채용된 접객주임이 하인들에게 청소를 시키며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깨끗한 고급 의자에 인상도 그리 좋지 않고 옷차림도 지저분한 늙은 남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행여나 이런 훌륭한 호텔 분위기가 저런 누추한 사람 때문에 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하인을 시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나가 줄 것을 요구하는 쪽지를 건네주어 그를 밖으로 내쫓게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접객주임은 호텔에서 쫓겨났다. 그 누추한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호텔의 경영주였던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했던 접객주임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옷이 먹어야할 음식
 
검소한 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초청장이 날아왔는데 장관이 초대한 파티였다.
그는 파티가 열리는 날에 평소대로 검소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파티 장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티는 으리으리했다. 오색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입구를 막아 선 문지기가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으나 다행히 아는 사람을 만나 들어갈 수 있었다.

파티장에 들어선 학자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술을 권하지도 않고 식사를 내주지도 않았다.
학자는 머쓱해져서 나와 버렸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가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다시 파티 장소로 갔다. 그러자 좀 전에 그를 밀어냈던 문지기가 재빨리 거수 경례를 했다. 그는 쉽게 입구를 지날 수 있었다.
파티장에 들어서자 이번엔 장관과 모든 참석자들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장관은 그를 가장 좋은 자리에 앉혔다. 고급 식사가 나오고 술도 아주 비싼 것으로 나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옷을 벗더니 음식과 술에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옷아, 이것들은 네가 먹어라. 사람을 보고는 주는 음식이 아니라 옷을 보고 주는 음식이니까...." 

 

 

 
 
 

 

 

믿음의 시금석
 
국어사전에 시금석이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의 가치 능력을 시험해서 알아보는 기회나 사물’이라고 합니다. 시금석은 광물질로 황금의 품질을 판정하는데 쓰입니다. 자석은 쇠를 좋아합니다.금도 은도 필요없습니다.
쇠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때는 자석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쓰시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시금석으로 금을 판정하듯 주님도 우리가 쓰기에 합한 사람인지 믿음의 시금석으로 우리를 판정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돈 많고 많이 배우고 외모가 출중한 사람을 1등급으로 판단합니다. 성경에서도 고린도전서 1장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우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미련하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사역하실 때 이러한 자들을 친히 직접 찾아 다니셨습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멸시받는 세리와 창녀,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선택하시어 복음의 현장에 투입하셨습니다.

오늘의 일부 교회는 똑똑하고 많이 가지고 잘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는,믿음의 시금석으로 판정할 때는,또 영혼의 가치로 따져서는 별로 귀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대단한 것으로 봅니다.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레마르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 아마 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영화도 나왔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범국인 독일이었습니다. 독일 소년, 아주 어린 소년 일곱명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자원해서 일곱사람이 전쟁에 나갑니다.

3년 동안 이 어린 소년들이 무자비하게 군인으로서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을 하다가 여섯사람이 죽고 한사람이 남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한때에 적과 마주서서 총을 쏩니다. 총공격을 합니다.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합니다. 한참 쏘다 보니까 조용해졌어요.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다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가서 시체들을 돌아보니까 지금 죽어가는 사람, 비참한 사람,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거기서 그가 절규를 합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당신들이 나와 꼭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노라."
너희들이 죽은 것처럼 나도 죽을 수 있고, 당신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당신들을 보내면서 괴로워했고 지금도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고, 당신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나도 있고, 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소.
당신들도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당신들도 용서를 바라는 사람이요 나도 용서받을 사람이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게 클라이맥스입니다.
여러분, 내가 총을 쏘아서 저 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과 나와 다릅니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석가의 재채기
 
어느 날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설법을 듣고 있던 수행승들이 입을 모아 "세존이여, 오래 사십시오"라 고 말했다. 옛 인도사람들은 재채기를 한 사람에게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석가는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하면 정말로 오래 살게 되는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인가?" 수행 승들은 대답하기를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재채기를 해도 '오래 사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이렇게 석가가 일렀다. 이리하여 수행승들은 사람들이 재채기를 해도


"오래 사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재가의 신자들이 여기 반대했다. 그들은 수행승들이 재채기를 하면 으레 "오래 사십시오"라는 축원을 했다.
그게 당연한 예라고 그들은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그런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공평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석가가 생각하기에 이런 재가측의 항의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석가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재가의 사람들이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경우에 너희들이 그들을 따라 '오래 사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인정하겠다."

석가처럼 큰 인물도 이따금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그리고 또 그것이 그릇된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이를 고치는 데 주저치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론과 실제에는 항상 틈새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 틀림이 없는 원칙이라도 현실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때에 원리, 원칙을 고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석가도 재채기를 하는 사
람에게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 서도 자기가 내린 지시를 번복했다. 그렇다고 석가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판단하지 못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틀렸을 때 이를 재빨리 알아 낸다. 그리고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데 주저하지를 않는다. 헛 똑똑한 사람은 그러지를 못한다.
생각을 바꾸면 마치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자기 권위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 기도하다. 자기가 만든 정책들이 잘못된 줄 충분히 알만도 한 사람 들이 고쳐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까닭도 이런 데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정책의 궤도 수정은 없이 그저 용두사미만 있다. 

 

 

 
 
 

 

 

아무 쓸모 없는 늙은 참나무
 
어느 날 나무꾼이 자기 손자를 숲으로 데리고 갔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파는 참나무를 고르고 베는 법을 손자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나무꾼은 길을 걸어가면서 나무의 자연적인 생김새에 따라 소용되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곧게 자란 나무는 갑판에 까는 널빤지로, 알맞게 흰 나무는 배 밑바닥의 늑재로, 곧고 크게 자란 나무는 돛대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각 나무들의 생김새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특성을 분별해 내는 경험을 쌓으면 언젠가는 이 숲 속의 훌륭한 나무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숲 속에 난 오솔길에서 손자는 늙은 참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그 나무의 줄기는 짧고 여기저기 옹이가 박혀 있어 널빤지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또 흰 상태도 적합하지 않아 배를 만드는 데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저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쓴다면 최소한 우리에게만이라도 유익을 줄 수 있잖아요?"
"지금은 배 만드는 사람들에게 보낼 나무를 배러 가야 하니까 나중에 들러보자."

몇 시간 동 안 커다란 나무들을 베느라고 지쳐버린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잠시 동안 나무 그늘에 가서 쉬자고 청하였다. 나무꾼은 손자를 데리고 아까 지나쳐 왔던 그 늙은 참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고는 휘어진 가지 밑의 시원한 그늘에서 손자와 함께 나무에 등을 기대고 휴식을 취하였다. 한참을 쉬고 난 후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이 숲에 있는 것들은 물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다.
"얘야, 항상 주의를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본래의 목적들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해. 이 참나무가 늙었다고 해서 너는 성급하게 땔감으로밖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지 않니? 모든 것을 겉보기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인내심을 가지고 주의를 집중해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다른 사람에 대한 패러다임
 
오랫동안 유럽에서 생활하던 친구 하나가 남아프리카로 돌아오는 길에 런던의 헤스로우 공항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커피 한 잔 사들고 쿠키 한 봉지를 손에 든 그녀는 무거운 짐을 끌고 빈 테이블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그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신문 너머로 보니 말끔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자기 테이블에 앉아 쿠키를 자기 것인 양 먹고 있었다. 아연실색한 그녀, 그와 얼굴을 맞대기 싫어 팔만 쭉 뻗어 쿠키를 하나 집어먹었다. 1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가 다시 쿠키를 먹고 있었다.


쿠키가 마지막 하나 남았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쿠키를 반으로 쪼개 반쪽은 그녀쪽으로 밀어 놓고, 나머지 반쪽은 자기 입으로 가져간 후 일어서더니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비행기표를 꺼내려 핸드백을 연 그녀, 핸드백 안에는 쿠키 한 봉지가 들어있었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녀는 그 남자의 쿠키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고, 꼬리표를 붙이고 확고한 입장을 만들지 말라. 

 

 

 

 
 
 

 

 

판단의 우선순위
 
어느 날 포수가 새를 잡으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메추라기 어미새를 만났습니다. 그 새는 포수에게 새를 잡기는 잡되 예쁜 새는 잡지 말고 가장 볼품없는 새만 잡으라고 했습니다. 포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를 잡으러 갔습니다. 한참 후에 그 어미 새가 사냥꾼을 만났을 때 사냥꾼의 손에는 메추라기만 잔뜩 잡혀 있었습니다.
메추라기 어미새는 "아휴, 미운 것만 잡으라고 했더니 모두 예쁜 내 새끼들만 잡았군요" 하며 땅을 치고 울었답니다. 메추라기는 꽁지가 없기 때문에 새 중에서는 가장 볼품없는 새입니다. 그런데도 어미새의 눈에는 자기 새끼가 제일 예뻐보였기 때문에 그와 같이 자신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 대한 평은 아주 부드럽고 좋게 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평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자신을 엄격히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척도 앞에서 자신을 엄격히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2-3),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웰링턴의 지도자다운 판단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대군을 격파한 영국의 장군 아더 웰링턴이 하루는 부하들과 함께 여우 사냥을 나갔다. 여우가 한 마리 나타나자 웰링턴은 여우를 좇아가고자 급히 말을 몰았다. 그런데 여우는 도망을 가다가 담을 넘어 농장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농장의 담은 너무 높아 말을 타고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농장문 앞으로 가서 문을 지키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어서 문을 열어라 !"
"안됩니다."
여우를 잡기 위해 말을 카고 농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농작물의 피해를 의미했기에 소년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다.
"빨리 열라니까 ! 여우가 도망가 버리잖아 !"
"안됩니다. 아버지께서 절대로 사냥꾼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웰링턴은 여우를 놓칠 생각에 화가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열어라 ! 웰링턴 장군의 명령이다 !"
이 말에 소년의 얼굴을 굳어졌고, 고개를 숙여 장군에게 절을 하였다. 웰링턴은 소년의 변화된 태도에 이제야 문이 열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의 대답에는 바뀌어진 것이 없었다.
"안되겠습니다.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말이지 !"
"예. 저의 아버지께서 농장의 담을 높이 쌓은 까닭은 장군님 같은 사냥꾼들이 우리 농장을 사냥터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장군님이 저희 농민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농장문을 열라고 명령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
웰링턴 장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에서 내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옳다. 오늘 네게 좋은 교훈을 배웠다. 이 교훈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도록 하겠다. 너도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웰링턴은 역시 위대한 지도자답게 의로운 판단을 내리고, 자신을 깨우쳐준 소년에게 감사를 표했다.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에게는 특히 공의가 요청된다. 오늘날 세상의 영적 지도자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에 따라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을 때 선하신 분으로 나타나시며, 우리가 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을 때 두려운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7:1-5, 눅6:37, 38, 약2:12, 13, 겔33:20 
 

 

 

 
 
 

 

 

잘못된 질문
 
아스퀴스 부인이 벤자민 조웨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죠웨트 박사님, 당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웨트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부인,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입니다."
시35:24-28, 요8:4-8 

 

 

 
 
 

 

 

선긋기를 망설인다
 
사람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는 수많은 아름다운 점을 찾아보고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는 수많은 죄와 허물을 찾아본다.
하여 나는 그 양자 사이에 선 긋기를 망설이는데 하나님도 역시 선을 긋지 않으신다.
* 금언:마7:1,2, 눅6:37, 요7:24, 롬13:3,4

교부 터툴리안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판단과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그분을 믿고 섬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져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속에 자신을 드러냅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할 길 없으며 그의 길은 알 수 없도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판단을 내릴 때엔 과감하라
 
그대는 판단을 내릴 때에 결단력을 가지고 대담히 판단하라.
그러나 거기에 이유를 달지 마라.
그대의 판단 중에 열에 아홉은 옳은 것이다.
그 까닭은 판단은 경험 위에 입각하여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이유는 때늦은 변명일 뿐인 것으로 아마 잘못된 것이리라.

시119:7, 146:7, 사58:2, 겔18:8 

 

 

 
 
 

 

 

늑대와 염소
 
늑대가 높은 벼랑 언저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보고, 그런 곳에서는 염소한테 가까이할 수도 없으므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주지 않겠느냐 그렇게 눈이 핑핑 도는 높은 곳에서 발을 잘못 헛디디면 안 되니까, 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또 이 아랫쪽이 훨씬 풀이 맛있고 훨씬 많이 있단다."
하고 늑대는 말했다. 그러나 염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초대해 주는 것은, 뭐 내게 먹여 주려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먹기 위해서겠지요?"
* Judge not of men or things at first sight.
사람이나 사물을 첫눈으로 판단하지 말라.

 

 

 
 
 

 

 

세 사람의 직공
 
머지않아 포위 공격을 받게 될 것으로 기다리고 있는 도시가 있어, 도시의 방어를 굳히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 방법을 토론하기 위해 회의가 소집되었다.
벽돌공은 그 목적을 위해서 어떠한 물자도 벽돌 앞에는 당하지 못한다고 그 의견을 말했다.
목공은 재목 쪽이 훨씬 좋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피혁공이 일어나서 말했다.

"여러분, 뭐니뭐니해도 세상에 가죽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 Every man is best known to himself.
누구나 자신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솝우화에 보면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한 짐 싣고 연못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귀 앞발이 미끄러져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 좀 살려주세요"하면서 물 속에서 발버둥치면서 이 가련한 나귀는 외쳤습니다. 나귀는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가 물에 빠져 일어서지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 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원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군. 물에 약간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치다니, 우리는 항상 물 속에서 사는데-. 네가 이 물 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무슨 소리를 할테냐?" 물 속에 사는 개구리가 물에 빠져 쩔쩔매는 나귀를 나무라는 말입니다.
개구리는 자기들이 물 속에서 사니까 나귀도 자기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너무 일방적인 판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남을 판단합니다. 남의 결정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피상적으로 사건을 보며 그 내용은 보지 못한 채 남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남을 정죄하기 전에 모든 일에 나 자신부터 살핍시다.

입으로 짓는 죄는 가볍게 보이나 실로 큰 죄입니다. 또한 남을 판단하는 그만큼 우리도 판단함을 받는 다는 그 원칙을 잊어버리지 맙시다(약 4:11-12, 롬 15:2-3). 

 

 

 
 
 

 

 

판단에 대한 금언
 
0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 알았느냐?(눅19:22)
0 시금석은 금을 시험하되 금에 의해 시험되지 않는 것처럼 올바른 판단의 기준을 가진 사람은 남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다. (에픽테투스)
0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에 편견을 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말이나 행동이 잘못된 자로 재어지게 될 것이다. 마치 횡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것처럼. (필립 시드니 경)
0 사람은 얼굴, 습관, 외모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특성, 대화, 행위에 의해 판단된다. 다른 사람의 말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칭찬하는 것이 낫다. (로저 레스트렌져 경)
0 당신 스스로를 성실하게 판단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관용을 갖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죤 메이슨)
0 판결은 항상 불변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 의해 내려지는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그의 나이, 국가, 신분, 기타 우연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면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가장 관대한 사람이 가장 공평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버트 사우티)
0 둘 다 승리를 바라고 있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결코 그들 사이의 심판관이 되지 마라 낯선 사람이나 원수가 소송 당사자 일 때 한쪽 편을 들으면 친구를 하나 얻게 되나, 소송의 당사자가 친구이면 그 중 한 명은 잃게 된다.(제레미 테일러)
0 판단은 경험에 의해 강요된다.(사무엘 죤슨)
0 판단은 저울과 같고, 증거는 저울추와 같다. 그러나 균형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달라지므로 많은 경우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가벼운 것을 무겁게 보이도록 하는데 충분하다. (리챠드 위틀리)
0 사람은 일반적으로 인류의 속성상 좋은 특질과 나쁜 특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윌리엄 센스톤)
0 우리는 본대로 판단하게 된다.그러나 두 사람의 판단이 똑같은 경우는 없으며 각자 자기의 판단을 믿는다. (알렉산더 포프)
0 실제의 것을 바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드물며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내린 성급한 판단을 누가 맞게 고쳐줄 것인가? (로버트 사우티)
0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느낌에 의해 우리 자신을 판단하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해놓은 것에 의해 판단한다.(헨리 웨이즈워드 롱펠로우)
0 사람의 판단은 그의 큰 재산의 일부분이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0 당신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을 판단력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쪽에 무게가 더해질 때마다 저울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의 저울이 나쁘다는 증거인가?(마리아 에즈워드)
0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보다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 격언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여 경험을 통한 확인도 필요치 않다(주니어스)
0 모든 사람이 자기의 기억력이 나쁜 것에 대해 불평을 하나, 아무도 판단력이 나쁜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현명한 사람은 일에 대한 진지함으로 판단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압박에 대한 감수성으로 판단되며, 고매한 사람은 가치 없는 권력의 남욕에 대한 경멸과 분개로 판단된다. (에드먼드 버크)
0 이웃을 볼 때는 고양이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기를 볼 때는 두더지 같이 먼 눈으로 본다. (쟝 드 라 퐁테느)
0 지식은 머리에 있고, 지혜는 마음에 있다. 옳지 않다고 느껴지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윌리엄 해즐리트)
0 우리는 그 사람 자체보다는 우리와의 관계에 의해 판단한다.(스베친 부인)
0 어리석은 사람은 행동을 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고, 현명한 사람은 행복을 하기 전에 미리 이성과 공정성을 가지고 그것을 평가한다. 전자는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결과를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싶다.(리챠드 힐)
0 내가 어떤 좋은 의견을 택하고자 할 때 내 마음 속에서는 사람에 관련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곤 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했을 때마다 나는 심하게 후회하곤 했다. (바트홀트 니버)
0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 할 수 없다. 아무도 그 자신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유머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우리의 의견에 일치하거나 동의할 때는 그들을 칭찬하곤 한다. (토마스 브라운 경)
0 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논박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권리를 거절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0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헛된 고생을 하고, 자주 실수를 하며, 쉽게 죄를 지으나 자기 자신을 판단할 때는 유익한 결과를 얻는다. (토마스 아 켐피스)
0 나는 그 사람의 이해가 관계되어 있는 한은 그의 판단을 믿지 않는다.(웰링턴 공작)
0 인간관계를 판단 할 때 광학의 법칙이 전도된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는 것을 가장 희미하게 보곤 한다. (리챠드 위틀리)
0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용기가 성공의 면류관을 쓰게 되면 영웅적 행위가 되고, 실패의 구름에 가리면 무모함이 된다.(칼렙 C. 콜턴)
0 볼록 거울이나 오목거울 같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받아들인 것을 반사하되 결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세프 주베르)
0 인성은 매우 구조적이어서 자신의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일을 보다 잘 판단하고 이해한다. (테렌스)
0 어리석은 사람은 악에 대한 심판이 늦다는 이유로 정의는 없으며 오직 우연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악에 대한 심판은 종종 며칠 혹은 몇 세기 늦춰진다. 그러나 그것은 삶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확실하다 (토마스 칼라일)
0 인간의 판단은 루터의 술 취한 농부처럼 한쪽으로 쓰러지는 것을 구하면 다른 한쪽으로 넘어지곤 한다.(주세페 마치니)
0 우리가 보통 신사라고 부르는 사교적인 사람의 가장 필수적인 재능은 훌륭한 판단력이다. 이 점에서 완벽한 사람은 동료들 간에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는 보통 사람이 맹인보다 10배나 되는 힘의 유리함을 가지는 것만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리챠드 스틸 경)
0 사람은 자기 고장에서는 평판에 따라 판단되며, 다른 고장에서는 옷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0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을 평판이나 재산으로만 판별한다. (둑드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그의 생각을 표현할 때까지 판단을 미룬다.(에르느스 딤네)
0 명심하라. 판단이 약세일 때는 편견이 강하다(케인 오하라) 

 

 

 
 
 

 

 

현명해진 비결
 
지혜가 뛰어나기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서 물었다.
"선생님, 그렇게 현명해지신 비결이 무엇입니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세. 나는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해 왔네. 그런데 올바른 판단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지. 또 경험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면 바로 잘못된 판단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네."
* 욥28:12, 욥38:36, 잠3:18, 골1:9

 

 

 
 
 

 

 

판단에 관한 성경말씀
 
1. 하나님의 판단의 특징
1) 정직하심(시9:8, 시119:137)
2) 공정하심(시67:4, 시96:10)
3) 진실하심(시96:13)
4) 공의로우심(시35:24, 시48:10.11, 시72:2, 시98:9, 시103:6, 롬2:5)
5) 큰 바다와 같음(시36:6)
6) 측량할 수 없음(롬11:33)
7) 편벽되지 않음(대하19:7)
8) 행위대로 판단하심(벧전1:17)
9) 인간의 의와 성실함을 보심(시7:8)
10) 보편적임(대상16:14, 시82:8, 시94:2, 시105:7)

2. 그리스도의 판단의 특징
1)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심(사11:3)
2)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심(사11:4)
3) 참됨(요8:16)

3. 판단과 관련된 교훈
1) 외모로 판단하지 말 것(신16:19)
2) 뇌물을 받고 판단하지 말 것(신16:19)
3) 공의로 판단할 것(요7:24)
4) 남을 판단하며 같은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롬2:1-3)
5) 하나님이 받으신 형제를 판단하지 말 것(롬14:1-3, 롬14:10-13, 약4:11,12)
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함(고전2:15)
7) 주의 재림 전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 것(고전4:5)
8) 교회내의 분쟁은 자체적으로 판단할 것(고전6:1,2)

4. 기타 관련 성구
1) 성도가 세상을 판단함(고전6:2,3) 

 

 

 
 
 

 

 

닭의 생각과 판단
 
닭과 개가 서로 상대방의 행실에 대하여 평가하고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개가 닭에게 말합니다.
"야 너는 요사이 왜 아침마다 꼬끼옥하고 울지 않느냐"
"너는 직무 유기다."
닭이 답변합니다.
"무슨 직무유기냐"
"사람들은 전부다 자명종이나, 핸드폰, 전화써비스를 통하여 아침에 일어나는데"
"내가 아침마다 목 터지게 울어봐야 고개 까딱하지도 않아"
"하긴 그래"
이번에는 닭이 개에게 말을 합니다.
"야! 그런데, 너는 왜 도둑놈이 너희 집에 들어오는데 짖지 않는 것이냐"
"너야말로 직무유기로 거시기 탕집에 가야 하지 않냐!'
"맞아"
"내가 할 일은"
"도둑놈이 집에 들어오면, 무섭고도 사납게 짖어대서"
"도둑놈을 좇아내고 내 주인의 재산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지"
"그럼"
"그런데 나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지"
"무슨 고민"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아"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고"
"우리 집 주인이 도둑놈인데 내가 어떻게 짖어되냐고"
... ...
( 닭의 생각과 판단: '그래도 개는 짖어야 한다')

 

 

 
 
 

 

 

판단의 기준
 
어떤 기차의 차장이 승객의 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기차를 잘못 탔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차표 검사를 해 나갈수록 잘못 탄 손님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차 안이 온통 수라장이 되었을 때 손님 한 사람이 차장에게 "차장님, 실례지만 혹시 차장님께서 기차를 잘못 타신 것 아닙니까?"
알고 보니 정말로 차장 자신이 기차를 바꿔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이 차장처럼 내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고 지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군요.
내가 누구인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먼저 아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진리의 말씀을 믿고서
 
중국의 유명한 목사 니 토쉥은 "적은 무리 운동(liffle Flock Movement)"을 창설한 분으로서 공산당에서 붙잡혀서 옥고를 겪었다.
니 목사는 일찍이 롬 6: 6의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란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걱정하였다.
그는 " 어떻게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며 금식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아침 이층 서재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고 깨달았다. 그는 생명을 얻고 찬송하였다.
그리고 또 한번은 그가 병으로 앓아 누워서 많이 고통하는 중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신유의 말씀들이 생각났으며, 또 그 말씀을 믿었다.
그러나 열은 더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란 성귀가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자기 병의 모든 증상들(열이 오르는 것, 고통스러운 것, 잠이 들지 않는 것)을 모두 다 거짓으로 판정하였다.
"두통도 거짓이다, 고열도 거짓이다, 불면증도 거짓이다" 라고 그는 선언하였다.
그 후 5분만에 그는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그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니 토쉥 목사가 그 질병의 증상을 거짓으로 판정한 심리를 누구나 가져야 할 표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은 것만은 확신하다. (요17:17)

 

 

 
 
 

 

 

판단을 내릴 때 주의할 점
 
그리스도인들이 판단을 내리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우선이 되어야 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어떤 일을 할때 그 일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철저히 검토해야 합니다.
셋째, 상황이 자연스러운지 아닌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정황에 맞는 적절한 결정을 내리도록 인도하십니다. 

 

 

 
 
 

 

 

육체를 따라 판단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재미도 없거니와 영적인 일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치 소 귀에 경을 읽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공회원이요 선생이었지만 중생하지 못한 니고데모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생각과 충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도 판단치 않으십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판단이 아닌 무한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길을 안내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을 깨닫기 위해서 육체의 판단을 의지하지 받아야 합니다.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일을 사랑과 용서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판단하면 판단을 받습니다
 
옛날에 한 공작새 부부가 예쁜 외동딸 공작새를 곱게 키워 숲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집 간 딸이 얼마 되지 않아 잔뜩 풀이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왔습니다.
엄마 공작새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까 딸이 하소연을 했습니다.
"엄마! 숲의 새들이 다 저를 따돌려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남편도 이해 못해요."
노련한 엄마 새는 마음속에 집히는 것이 있어서 물었습니다.
"너 숲 속에서 아무 때나 꽁지를 활짝 펴서 다른 새들 앞에서 뽐냈지. 내 말 맞지!"
딸이 깜짝 놀라 말합니다. "엄마! 우리 꼬리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조금 펼치면 어때요?"
엄마가 말해줍니다. "얘야!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남을 부끄럽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냐!
골프 치는 사람들에게 '젠틀맨 골프 상식'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하는 좌중에 골프 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골프 얘기를 안 꺼내는 것이야! 그 의미를 알겠니?"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집으로 날아가서 그때부터 숲의 새와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같이 어울려 사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면 결국 혼자가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한 존재입니다. 영원한 원고도 없고 영원한 피고도 없습니다. 그저 다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인 줄 알고 서로 격려해주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남을 격려하기보다는 남을 비판 잘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디 가도 비판하고, 어떤 사람도 비판하고, 칭찬할 것도 비판하고, 심지어 자기도 비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비판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저 자기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사랑과 격려가 넘쳐야 할 가정에서도 비판하고, 교회에서도 비판합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교회를 비판하고, 교인을 비판하고, 교회 일꾼과 중직들을 비판합니다.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예수님도 비판할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
 
미국의 개척 당시에 수우족 인디언들에게는 이러한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 부족중에서 잠시 다른 곳을 여행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는 출발 전날 여행자는 그들의 추장과 함께 모닥불가에 앉아 모닥불이 회색제로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러한 기도를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다른 사람의 신발로 2주일을 걷기 전에 그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알아보기 전에는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관습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좋은 이야기인것 같다. 

 

 

 
 
 

 

 

서둘러 판단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술 취한 것을 보았더라도, 그 사람이 심지어 간음 현장에서 잡혔더라도 한 번의 행위는 그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 노아는 한 번, 롯은 두 번 술 취했다.
그러나 그들을 술주정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베드로는 불경스러운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를 불경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어떤 타이틀을 얻으려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 번 본 것에 근거해 누군가를 성미가 급하다거나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심지어 누군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 해도, 그를 그런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몬은 막달라 마리아를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다. 진실하게 회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광대해서 성품을 변화시킨다.

결코 어제에 근거해서 결론을 내리지 말라. 우리가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죄를 책망해야 할 때, 그 죄를 짓는 사람을 가능한 한 용서해 주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긍휼 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파렴치하고 악명높은 죄인과도 터놓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재미있어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 분리론자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해야 한다. 늑대가 양 무리 가운데 있을 때 그 늑대에 맞서 크게 소리지르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외모로 판단하는 잘못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 토마스 로렌스의 일대기이다.
그는 영국의 탐험가요 고고학자요, 군인이었는데, 이미 아는 대로 로렌스는 육군 장교로서의 복무를 그만두고 영국공군에서 항공기 정비병이 되었다. 가끔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 가서 그들 부부와 함께 차를 마셨다.

어느 날 오후 그 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서 돌체스터 시장의 부인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시장 부인은 모욕을 느꼈다.
그래서 시장 부인은 하디 부인에게 "나는 일생 동안 졸병과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신 적이 없다" 고 프랑스어로 말하였다.
이 부인은 이 공군 정비병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로렌스는 예의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담, 죄송합니다만, 하디 부인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통역을 해 드릴까요?"
이 말을 듣고 시장 부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참으로 외모로 사람 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비록 외모와 실제가 다같이 보잘 것없다고 알지라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외모뿐 아니라 소문이나 다른 간접적인 경로를 통하여서 도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다.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한 인 격으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남의 구두를 보름 동안 신어보라
 
캐나다의 자스퍼 국립공원에는 에디트 카벨이라는 영국 간호사의 이름을 기념하는 아름다운 산이 있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부상병을 간호해서 탈주시켰다는 죄로 독일군에게 총살되었다.
그녀의 동상에 새겨진 유언은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무에게도 미움과 쓰라림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이다.

미국 역사상 링컨처럼 비난과 미움과 배신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핸더슨이 쓴 전기에는 “그는 어떤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의 정적들도 다른 사람들만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지위에 적합하면 친구에게 주듯이 그 자리를 선뜻 주었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든가 그의 정적이라는 이유로 누구든 면직시킨 일은 없었던 것 같다”라고 써 있다.
우리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특성을 우리가 타고났다면, 그리고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받은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을 것이다.

“오 신이시여, 우리가 남의 신을 신고 보름 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가게 하소서”라는 숙스 인디언의 기도문을 우리도 외울 만큼 너그러워야 할 것이다.
적을 미워하는 대신에, 저주와 보복심 대신에 이해와 동정, 원조와 용서, 그리고 기도를 베풀자. 

 

 

 
 
 

 

 

하나님의 관점에서
 
잠21: 2"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스미스씨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스미스씨의 아내는 여기저기 점검해보다가 지하실에서 매우 깨끗해 보이는 두 줄로 쌓아놓은 사이다 통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이다 통을 치우려 하다가 보기에는 깨끗하고 텅 빈 통 같아서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통은 2-3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하게 집에서 나방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미스씨 가족은 집에 이런 나방이 생기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나방이 자꾸만 불어날 뿐이었습니다.
카페트, 가구 등을 모두 소독하고 청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원인을 찾다가 마침내 지하실에 놓아둔 사이다 통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거기서 수천 마리의 나방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생각과 자기 말과 자기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결과를 놓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냉철하게 판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와 행동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고, 그렇게 하게 된 마음 속의 동기를 보십니다. 

 

 

 
 
 

 

 

판단(判斷)
 
판단(判斷)

어느 수도원에 수행중인 여러 명의 수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른 수사들로부터 ‘땡땡이 수사’라고 불리는 수사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배 시간에도 가끔 지각하고 기도 시간도 잘 빼먹고 복장도 불량했기 때문에 수사 같지 않은 수사라는 뜻으로 그런 별명을 얻은 것입니다.
 어느 날, 수사들 모두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땡땡이 수사의 점수가 가장 높게 나왔습니다.
그의 평소 행실을 잘 알고 있던 동료들이 부당하다며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땡땡이 수사는 수사가 된 이후 의식적으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쩌다 의견 충돌이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즉시 다른 사람들과 화해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나와 귀를 씻었다.
나는 분명히 성경에 ‘남을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 받지 않으며, 용서하면 용서 받는다’고 했다.
땡땡이 수사는 판단하지 않았으니 판단 받을 것이 없고, 용서했으니 나도 그의 모든 것을 용서했을 뿐, 그에게 특별히 점수를 더 준 것은 아니니라.”

  프랑스의 뤼시앵 레뇨가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를 모아 쓴 <내 연인은 광야에서 산다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의외로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삶 속에도 이런 아픔이 있었습니다.(시편 35:11-16)
그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형제나 부모나 친구처럼 여기고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다윗을 고소하고, 조롱합니다.
자기는 정성을 다해 은혜를 베풀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자기 힘으로 그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좇고 있는 사울 왕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왕이기에 끝까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무고하게 자기를 고소하고, 판단하는 그들을 향하여 끝까지 인내하며 사랑과 관용으로 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는 비결 중의 하나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닌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나에 대하여 비방하고 판단하며 다닐 때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코 던진 나의 말 한마디가 남을 판단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습니다.
우리의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시109:17)”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벧전3:10-12)

주여! 우리 자신이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끝까지 사랑과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평화를 이루어가는 주의 일군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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