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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입으신 말씀(요한복음 1장 10절~14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다시 성탄(聖誕)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2천 년전의 그날, 첫 번째 성탄의 아침을 생각해봅니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 여관방, 그리고 마구간을 생각해봅니다. 그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해봅니다. 하필이면 왜 마구간입니까? 무변광대(無邊廣大)의 천지가 그다지도 좁았더라는 말입니까? 인심이 그다지도 나빴더라는 말입니까? 세상이 그다지도 어두웠더라는 말입니까? 만왕의 왕께서 어찌하여 하필이면 마구간에 오셨더라는 말입니까? 요한복음 1장 11절에 한마디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당시의 정황을 말해주는 간략하면서도 명확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영접받지 못하셨습니다. 당신을 영접지 아니하는 백성에게로 오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환영은커녕 오히려 당신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백성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이 무엇입니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하는 천사들의 메시지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십니다. 그 시각, 들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 전해집니다. 하늘로서 천사들의 영광송이 울려 퍼집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성탄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우리의 개인적인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가정적인 소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평화를 원하는 우리에게 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저 베들레헴의 비천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 깊은 뜻을 거듭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탄의 주제는 '임마누엘(Emmanuel)'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성탄인 것입니다. 보다 자상한 설명을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성탄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탄은 사랑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은 음식물을 먹고살고, 우리의 정신은 진리를 먹고삽니다. 진리를 먹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병들고 맙니다. 또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삽니다. 우리는 한 점 티없이 깨끗한 인간 본연의 모습, 그 원초적인 본성을 아기에게서 찾습니다. 그들의 몸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혹은 우유를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어떻습니까? 사랑으로 자라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 이 믿음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당장에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병이 듭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결에도 손을 뻗어 어머니가 있는가를 확인하지 않습니까? 제 손에 어머니가 만져져야만 안심하고 다시 잠을 잡니다.
순간 순간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 재확인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넉넉하게 먹고라야 몸도 건강하고 인격도 온전하게 성장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 :19,20)."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 사랑 받는 자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는 자가 그 사랑을 알고 느끼고 감격해야 하고, 마침내 결단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사랑의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거듭 생각해보십시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 받지 않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 받지 않고 성장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사랑 받지 않고 살아남을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혹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을 둘러보아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도 사랑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량이니 불효자식이니 하는 일탈자들이 그렇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정신적으로 버려진 존재입니다. 여기서부터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나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모릅니다.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적어도 30여 년이 지난 후, 제가 자식을 낳아 그 자식에게 사랑을 쏟게 되어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큰사랑을 받아왔구나.' 그리고 마지막, 죽을 때에 가서 더욱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세상에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더 큽니다. 세상에 환난이 있고 재난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고 놀라워서 이 시간에 우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주도적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사랑, 그 사랑의 언어가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일찍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수많은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때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같은 징계를 통하여, 때로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을 통하여, 때로는 전쟁과 재해와 기아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저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형통함과 기적과 구원과 여유와 풍요함을 통하여도 사랑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종말론적 방법을 택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몸소 오시는 방법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역사 안에 오셨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탄을 일컬어 '인 브레이킹(in-breaking)' 이라고 하는 어려운 표현을 합니다. 'break'는 '깨뜨리다' '부수다' '파괴하다'라는 뜻이요
'in'은 '들어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in-breaking,' 곧 굳게 닫힌 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영접하기나 했습니까? 알아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리가 아닙니까? 그 높고 튼튼한 성 같고 담 같은 '벽'을 깨부수고 들어오셨습니다. 성탄의 사건이 이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성탄을 참으로 엄청난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역사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심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의 문화로 옷 입으심입니다. 이를테면, 어른들만 살던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보십시오. 어느 겨를엔가 온 집안사람이 어린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살고 있습니다.
끼니때에도 "진지 잡수세요" "식사하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던 식구들이 하루아침에 "맘마 먹자"라고 하는가 하면 "엄마 맘마" "어부바"라는 말들을 서슴없이 씁니다. 유치해지고 맙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언어이며, 사랑의 언어는 나의 문화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내가 이해하여 그의 언어로 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빌어서 나의 말로 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습관, 나의 고정관념,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심입니다. 히브리, 헬라 문화권에 오셔서 그 문화와 생활풍속, 제도와 규범을 모두 받아들이시면서 우리 인간의 역사와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육신을 입으셨다'---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고 인간의 한계 안에 들어오심입니다.
한편으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나셨다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시각, 그 장소에서 예수 아기가 태어났다, 단지 이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곧 예수님의 33년이라는 생애 전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생애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 편에서의 자기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한가운데서 성탄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저주와 조소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성탄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그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로 오셨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인간에게로 오셨습니다. '네가 나에게로 오라'가 아니라, '너 있는 곳으로 내가 가마'였습니다. 몸소 공간을 옮기십니다. 이 사건이 바로 주님의 오심입니다.
둘째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waiting God'이 아니라 'seeking God'입니다. 찾아오십니다.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많은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탕자의 비유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비유에서는 모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탕자의 비유에서만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아 헤매는, 동전 한 닢을 끝까지 찾는----찾으시는 하나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성탄 사건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되심입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becoming,' 헬라말로는 '호로고스 사드칸 에게네토'----존재의 바뀜입니다.
소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요, 지위와 명예를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참사랑'이라고 하는 '존재'를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어려서 성현들의 전기를 많이 읽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을 따라 이 사람 저 사람의 전기집을 가리지 않고 손에 들리는 대로 많이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성 다미안이라고 하는 분의 일생이 저에게는 아직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요, 더욱이 귀족이고 학자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문둥병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 섬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눈 코며 손 발이 썩어 문드러진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그들을 보고 돌아와서는 자신의 일생을 그들을 위하여 쓰고자 결심하고 다시 그 섬으로 들어갑니다. 가진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문둥병 치료에 바칩니다. 선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인간적으로 어루만져주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끝까지 저들은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으로서 병든 사람을 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취미요 도덕적 향락주의다, 당신은 우리를 돕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다 한들 우리의 이 절망과 좌절을 알기나 하겠는가--이러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엄청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문둥병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가 문둥이가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국 그는 문둥병에 걸립니다. 문둥이가 된 그가 이제 그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전합니다. 마침내 그들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의 소통이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말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 때, 나의 나됨을 버리고 상대방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사람이 되어지고 죄인이 되어지고 약자가 되어지고 가난한 자가 되어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거기서만 사랑의 언어가 소통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가난과 고난과 배척을 받으심입니다. 이는 주는 사랑, 되는 사랑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 한 분이 뉴욕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미국 시민권으로 북한을 몇 번 들어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과 가까이 지내는 장로님 가운데 원산이 고향인 분이 있었습니다. 원산에서 결혼을 하여 살다가 혼자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재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고 잘사는데도 고향생각이 간절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백방으로 수소문해보니 놀랍게도 부인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꼭 만나보아야겠다'하여 그 목사님한테 간청을 해서 어렵게 그 목사님의 평양행에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부부가 만났습니다. 헤어진지 40여 년이 지나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만난 것입니다. 그 장소에 목사님이 입회를 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디다. 만나서 처음 10분간은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더랍니다. 그러다가 부인 쪽에서 먼저 용기를 내어 입을 엽니다.
"이 영감태기, 입이 열 개라도 내게 할말이 없을 거외다." 사정을 알고 보니 이렇습디다. 전쟁이 터지자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나간 남편이 그 길로 배를 타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북쪽에 남아 아이 셋을 키우느라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10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쪼글쪼글 늙어 꼬부라진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살겠다고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내려간 남편은 잘먹어서 피둥피둥하니 그 모습을 본 이 할머니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마구 대들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해서 헤어진다. 흔히들 말합디다마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사랑에는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함께 있어야 사랑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여야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욥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친구 셋이 찾아와 위로하려 하지만, 욥을 본 그들은 너무도 기가 막혀 입을 닫아 버립니다. 칠일 낮과 밤을 그와 함께 땅에 앉아 울며 고난을 참습니다. 마침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자 저들도 각기 한마디씩 말을 시작합니다. "잘 생각해보아라. 공의의 하나님께서 아무 죄 없는 너로 하여금 고난 당하게 하시겠느냐? 무엇인가 너에게 비밀한 죄가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이 소리 저 소리를 주워냅니다. 욥이 견디다못해 그들을 보고 말합니다. "제발 입 좀 다물어라. 그 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여러분, 말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말로써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마십시다. 입 다물고 조용히 그 자리에 잊읍시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 오셨고,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강하시면서 약한 자가 되셨고, 능력 많으신 분이 능력 없는 자가 되시어 갖은 조소를 받아가며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 죄인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문선명 집단을 이단으로 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예수는 십자가에서 실패했다. 나라를 구하려고 하다가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인 되심과 저주받으심과 자기희생을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에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고 이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상 외는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재림하신다.' 하나님 되심을 믿는 데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미천한 마구간의 구유에 오셨다고 하여 '요셉은 아내의 출산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장가는 왜 갔느냐?' '마리아는 출산할 날이 가까웠는데 왜 먼 여행을 떠났느냐?' '세상이 왜 그리 각박했느냐?'----인간이 어떻다느니 사회가 어떻다느니 정치가 어떻다느니, 이러한 이야기나 하는 것은 성탄의 의미를 무시하는 불손한 언사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시고, 고난 당하는 자 가운데 가장 고난 당하는 자로 말구유에 오셨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윈 부인이 홀로 아들을 키워 그 아들이 장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서인지 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방탕하고, 무던히도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안하무인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개가(改嫁)도 하지 않고 평생 수절하며 너를 키웠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러나 이 말에 대한 아들의 대꾸가 어머니를 더욱 괴롭힙니다. "누가 어머니한테 수절하라고 했습니까? 내가 시집가지 말라고 했어요? 날 위하여 수절했다고 그것을 지금에와서 나에게 보상받겠다는 것입니까?" 빤히 쳐다보는데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급기야 아들은 대대로 귀중하게 여기는 가보까지 들고 나갑니다. "이 녀석아, 그것만은 안된다." 말리면서 쫓아나가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집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갑니다. 팔아서 실컷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비로소 그 아들은 회개를 합니다. 어머니의 허리를 꺾어놓고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부릅니다. '내가 진작에 정신을 차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해도 이제는 도리가 없습니다. 허리가 부러져서 자리보전하고 누운 어머니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다시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 성탄을 어떠한 의미로서 맞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탄 사건의 계시성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사랑이 확증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내게 향한 존재의 의미가 거기에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동시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가치의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깨달은 자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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