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살리신 예수님 (눅7:11-17)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눅7:14,15)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외아들은 청년
이요, 예수님께서 이 죽은 청년을 살리심으로 예수께서 부활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과부를 위로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울지 말라(11-13)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으로 가셨습니다. 나인 성은
백부장의 종을 고친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의 거리로서 그 옛날 구약에 엘리사가 수넴
예인의 아들을 살려낸 수넴지방(왕하4:8-11) 모레의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에 위치한
곳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인 성(城)으로 가실세 제자들과 수 많은 무리들이 동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나인 성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
습니다.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였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은 이 불쌍한
모자가 살다가 기둥 같은 아들이 죽자 슬퍼하는 과부를 돕고자 장례를 하기 위해서 나왔습
니다. 이 행렬은 죽은 자를 장례하기 위해서 성으로 부터 나오는 행렬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더운 지방이라 당일에 장사를 지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유난스럽게 슬퍼하고, 곡을 하는 자와 피리를 부는 자들
을 고용해서 울고 피리를 붑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우리나와 비슷합니다. 온 동네 행사가 됩니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옷을 찢기도 하고(삼하1;11) 베옷을 입었습니다.(삼하3:31) 또 흙이나
재를 머리에 끼얹으며 곡을 하기도 했습니다.(미1:10) 또 자기의 살을 베어서 상처를 내기도
하였습니다.(렘16:6) 그리고 피리를 부는 자들을 데려다가 피리를 불며 그들의 슬픔을 표현
하기도 했습니다.(마9:23) 장례 때에는 피리 부는 자와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은 상여 앞에
가며 곡을 하고 또 상여 뒤에는 곡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울고, 조가를 부르는 사람
들이 따랐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장례 모습입니다. 여기에 두 행렬을 봅니다. 한 행렬은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이고 다른 행렬은 장례식을 하기 위해 나인 성 밖으로 나가는 행
렬이겠습니다. 이 두 행렬이 성문 부근에서 만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장면
입니다.
그런데 여기 죽은 자가 어떤 자입니까? 그는 어미의 독자입니다. 또 그 어미는 과부였
습니다. 이 여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불
쌍한 사람들은 과부였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고아와 함께 법으로 보호를 받도록 했습니다.
(신16;11) 과부를 구제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과부를 박대하면 벌을 받는 것이 시편 94
편 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여성들은 사회 참여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여자
들은 철저히 가정적이어야 하고, 자녀 교육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직업이었습니다. 오늘 날
에도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여자들의 취업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에게는 경제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부들은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습
니다.(신24:19) 그러므로 유대 여자들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자기 인생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는 말처럼 그 남편 없는 서러움과 아픔은 다
른 사람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데 설상가상으로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외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고난도, 가난도 이겨 왔습
니다. 자기야 고생이 되어도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고생이 고생이 아니고, 고
생이 보람이고 재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 커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결혼도 시키고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보고 행복하게 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 키운 자식에게 무슨 병이 들었는지 병이 들어 시름시
름 앓게 되었습니다.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좋다는 의원에게 다 찾아 가 보았습니
다.. 재산이 있다면 다 팔아서라도 아들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 약이 무효라 아무
런 효험도 없이 이 과부의 외아들은 안타깝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어미는 하늘이 무너
져라 땅이 꺼질세라 제 정신을 잃었을 것입니다. 실성을 해서 헛소리를 하거나 기절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 나라 사람 같으면 '내가 전생애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천벌을
받는가?'고 자학을 하고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우 중 한 어른도 과부로서 외아들을 데리고 사시는데 모든 희망을 이
아들에게 걸고 사시다가 아들이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아들을 병원에 눕혀 놓고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내가 이 아들 어찌되면 나도 갈랍니다" 하시더군요. 아들
없는 세상 더 살아서 뭐 하겠느냐고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직 아들하나 보고 사는데
아들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 나인 성의 과부의 외아들은 죽어 버렸습니다. 큰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이 과부를 위
해서 온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돕기 위해 성에서 나와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은 이 과부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울어 주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은 이 과부를 보고 "친구
야! 실컷 울어라 울고 나면 좀 후련해 질거야" 하면서 위로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의 위로가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친한 분이 오면 더 섧고 더 눈물이 납니다. 참
된 위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했습
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여인의 남편 잃음과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하실 수 있
습니다. 참된 위로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위로 자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밖에 없음을 배
우게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말씀으로 살리시고 그 살아난 아
들을 그 어미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진정한
위로 자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 같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울지 말라"하시는 주님
의 위로의 음성을 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큰 어려움과 슬픔을 당하면 사람들
로 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참된 위로가 없습
니다. 괜히 주위 사람들로 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다가 상처만 받습니다. 거기는 참된 위
로나 동정이 없습니다. 없는 곳에서 찾으려고 하니 더 허탈함과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므
로 참된 힘과 위로가 되는,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
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나의 기쁨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약한 자의 강함과 눈 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
과 죽은 자의 부활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시며 멸망 자
의 구원이 되십니다.(찬송가 94장)
Ⅱ.청년아! 일어나라(14-17)
예수님께서 과부의 슬픔을 위로하신 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14절를 보십시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 율법에 죽은 시체나 무덤을 만지는 것은 금
지 되었습니다.(미19:11-19, 레22:4) 죽음은 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에 아무도 관에 손을
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율법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들은 관에 뚜껑을 덮지 않고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
으로 덮었습니다. 이런 장례 행렬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먼저, 가까이 오셨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죽음은 죄의 결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관이나 시
체를 만지러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으로 시체에 닿으면 부정하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습니
다. 그래서 무덤에도 회칠을 해 놓고 닿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는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뛰어넘어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지금도 내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시려 가까이 다가오사 친히 손을 내미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시간도 손 내미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둘째, 손을 대시었습니다.
혈우병 가진 여인은 자기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가를 만져 병고
침을 받았지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가까이 오사 친히 관에 손을 대어 살려 주셨습니다.
그 관 안에는 죽은 시체가 들어 잇습니다.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창조주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카오스(Caos) 상태에 있는 것을 손 대시듯 손을 대시는 것
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게 하신 주님께서 궁창이 있으라 하시매 물 가운데 궁
창이 있고 물과 물이 나뉘고 땅이 있으라 하시매 뭍이 드러나고 물은 한 곳으로 모였습니
다. 그 분이 말씀 하시는 대로 되었습니다. 죽은 시체는 자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
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할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
습니다.(겔37장) 이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가죽이 덮히게 하시고 그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셔서 큰 군대를 삼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이 죽은 청년에게 손을 대시었습
니다. 이 죽은 청년에게 손을 대시던 주님께서 이제 무기력한 여러분에게도 손을 대시기를
기도합니다.
신학적으로 죽음이란 분리입니다. 영과 육이 분리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참 영
혼의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
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분들은 전부 죽은 자들입니다.(요5:25) 죽었기 때문에 끌고 가는 대
로, 메고 가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청년들은 본능적인 정욕이 있고, 혈기가 있고, 불
신이 있고 독주를 마시는 오만한 자리로 네 명의 상여꾼들이 메고 가듯이 죄의 자리로 운구
되어 갑니다. 쾌락과 교만, 고집과 사악한 곳으로 죄악이 요구하는 대로 메고 갑니다. 이렇
게 속절없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상여에 손을 대어 멈춰 서게 하시던 예수님께서 나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
는 놀라운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상여에 손을 대시니 장례 행렬이 멈춰
서듯이, 멈춰 세우시며 살려 돌려 보내는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3)셋째,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에 죽었던 자를 살리신 사건이 3곳이나 나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경우(눅
8:49-53)와 오늘 본문의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과 요한복음11장에 나사로를
사리신 사건입니다. 야이로의 사건은 죽은 즉시 살리셨고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은 장례
도중에 살리셨고 나사로의 경우는 죽은지 나흘만에 살려 주셨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
은 야이로의 딸은 아이였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청년이었고, 나사로는 장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는 어떻게 살려 주셨습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이라는 사실을 강조 하셨습니다. 할아버
지가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참 일할 때 무기력하게
청년이 관 속에 누어 있는 것이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청년의 때는 힘이 넘치고 생명
력이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힘차게 일하고 성장해야 할 청년이 관 속에 누워 있습
니다. 전도서 12: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했습니다. 이는 청년의 때 주의 일을 하라는 말
씀이겠습니다. 일 할만한 때 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살았으나 관 속에 누워 있는 청년과 같은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 전
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기독교의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죽음의 상태
라 일컫습니다. 죽었으니까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고, 죄 된 자리, 오만한 자리로 메
고 가도 그냥 그냥 실려서 가듯 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주께서 보시고 상여를 멈춰
세우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죽었던 죄 된 자리에서 일어나라,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그 자리에 누워 있느냐 하시며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운명주의 관 속에 드러 누워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허무주의 관 속에 드러 누워
허무하다며 한숨만 쉽니다. 어떤 뿐은 열등의식의 관 속에 드러 누워 무기력하게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향하여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외아들이 일어나면 누가 제일 좋아 합니까? 그 어머님이 제일 좋아합니다.
이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죄 된 자리와 좌절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면 얼마나 좋습니
까! 주님은 절망을 주는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이 나인 성을 어떻게 찾아 오셨습니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아니올시다. 주님의 일방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낙심하고,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드러 누워 있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인 성을 들어 오셨고, 아무 것도 할 수 없
는 나에게 손을 대십니다. 말씀을 주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영접하고
일어 나십시다.
요사이 우리 교회 고넬료 회원들이나 청년 회원들이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예배를 예
사로 빠집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지금 누워 있는 죄의 자리와 절망의 자리와 주를 떠난 자리에서 떠나는, 소생의
은혜를 덧입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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