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 (눅6:39-49)

by 【고동엽】 2022. 10. 6.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 (눅6:39-49)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치 못하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눅6:48,49)


오늘 말씀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 배워서 소경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신 말씀이겠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철저히 순종하는 그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믿음이 되
기를 바라는 바람에 우리 역시 말씀을 듣고 투쟁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소경된 인도자(39-42)

저희들이 어릴 때는 잘못을 하면 어머니는 "오늘은 점심밥 없다""저녁밥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밥이 귀할 때이니까 밥을 못 얻어 먹을까봐서 겁이 나서 말씀에 순종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도리어 꾸짖으면 자식이 "나, 밥 안 먹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이 밥 안 먹으면 어떻하나
도리어 겁이 나서 밥그릇을 들고 따라 다니면서 먹입니다.  이러니 교육이 제대로 될게 뭡니까?   가
르침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거기서 무슨 열매를 기대하겠습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평지의 보훈>을 말씀하시는데 그 중심은 <사랑>이었
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8,29)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37) 하셨습니다.  이제 남
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소
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릅니다.  자기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
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소경은 소경을 인도하는 목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
는 소경은 누구를 가르키는 겁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될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이 말씀을 근거해 볼
때 위에서 말한 소경의 인도자는 장차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
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막 부르심을 받고(6;12-16) 사도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
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쫓아 살던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떴다고 해도
아직 소경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은 한 없이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직 영적인
지도자로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전케 된 자"란 영어로 "Everyone Who is Felly Trainde"입니다.  곧 "충분히 훈련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성경에는 "학생이 선생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완전히 다 배우고 나면 그 때는 선생과 같이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
씀을 잘 순종하고 따르고 충분히 배우고 훈련을 받으면 좋은 지도자 목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제자(disciple)는 "배우는 자"란 뜻입니다.  잘 배우고 훈련을 받으면 좋은 인도자가 되는 것입
니다.  제자들은 현재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훈련을 받으면 훌륭한 인도자, 즉 목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신 말씀이겠습니다.  
소경에도 여러 종류의 소경이 있습니다.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심청이 아버지와 같은 봉사가 있습
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앞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습니다.  이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바리
새인과 서기관들(요9:40-41, 요3:19)처럼 본다고 하나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눈은 떴으나 실제로
볼 수 없는 소경들이 있습니다.  또 사뜨기라는 사팔뜨기입니다.  이쪽을 보는 것 같은데 저쪽을 보는,
바로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운다고 배우나 철저히 배우지 못하면 소경도 되고 당달봉사도 되고 사팔뜨기도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는 소경이 됩니다.  그래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
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배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전체 말씀은 지금까지 말씀
한 <평지의 보훈>을 잘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16-17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
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가 베드로의 차례가 되어 베드로
에게 갔을 때,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하자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발을 씻긴다고 해서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이 되는 것도 아닙니
다.  섬기는 자가 오히려 더 높아지고 존경을 받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로만 지식을 배우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되어 외식하기 쉽습니다만 가슴으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삶을 배울 때 온전케 되는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눈이 밝아져야함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자기 눈도 성치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다가는 남의 눈을 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눈은
성치 않으면서 남의 허물과 약점은 기막히게 잘 봅니다.  남의 허물과 약점을 잘 보고 비판하는 이는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못 보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 속에는 대들보와 같은 허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남의 약점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외식 하는 자"곧 위선자
(hypocrite)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유대인의 죄를 책망할 때, 로마서에서 이렇게 책망했습니다.(롬
2:17-24)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
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
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 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 물건은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
게 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밝히 보고 남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 속에 들보를 두고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기
눈을 밝히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남을 가르치거나 '이렇게 하십시오,저렇게 하십시
오'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철저히 배우며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대로 순종할 때 내가
영접하고 순종하고 체험한 것은 확실하게 분명하게 쉽게 가르칠 수 있고 양이나 자녀들도 잘 따라 합
니다.  자기도 영접하지 않고 순종해 보지 않은 것은 어렵고 모르기 때문에 소경의 인도자가 될 뿐입
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성찰하고 selftraining을 잘 감당하여 온전케 되기 위해 투쟁하야 합니다.  "제
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영국의 아이들이 담배를 일찍 피우기로 유명합니다.  7,8살부터 피우기 시작합니다.  어른들은 계속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들에게는 피우지 말라고 강요를 했을 때, 그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피우고 또 피우고 하루에 여러 번 피우는데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나도 일찍부터 합시다"
라고 하더랍니다.  사실 어른들은 열심히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먹거나, 거짓말을 잘 하면서 아이들에
게는 하지 말라는 것처럼 설득력이 없고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또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 아버지가 답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놈아! 아브라함 링컨은 너만 했을 때, 고학을 하며 연필 살 돈이 없어서 숯 덩어리로 공부를 했단다"고
하며 일장 연설을 하니까 아이가 아버지를 처다보며 대답하는 말이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만한 나이
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어요"하더랍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만 서 있었지 자기 자신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른들은 TV를 보면서, 화투를 해가면
서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항상 동시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가르
칠 때, 자기 자신도 가르쳐야 됩니다.  자기는 잘 못살아놓고 무슨 좋은 열매를 바라는 겁니까?

Ⅱ.나무와 열매(43-45)

43-45절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
씀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
느니라"  여기서 "못된 열매"란 고약한 맛을 내는 열매 혹은 썩은 열매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먹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아무짝에도 못쓰는 열매를 가르킵니다.  좋은 나무가 이런 못된 열매를 맺을 리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4절을 보십시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볼 때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본질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열매는 정확합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고
찔레나무가 포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활 속에 맺혀진 열매를 보고 자기가 그런
나무임을 겸손히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
수님이 가르쳐 준 말씀 안에 거(居)할 때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요15:3,4)  말씀대로 살려고 투쟁해야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쁜 열매를 맺어 놓고는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증가합니다.  예컨대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서 좋지 못한 열매가 맺히면
남의 탓을 하거나 우리 아이는 본래 그렇지 않은데...친구를 잘 못 만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니올시
다.  본래 그런 나무라서 제대로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따려면 환경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며 회개를 가지는 천주교 미사 때처
럼 생활 속에 회개의 심정을 가지며 말씀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
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
니라"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Ⅲ.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치 않는 자(46-49)

46-49절은 <평지의 보훈>의 결론으로 마태 :21-27의 병행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전자는 <평지
의 보훈>의 결론이고 후자는 <산상 보훈>의 결론이겠습니다.  다 같이 앞선 나무의 비유를 밝히고 이
어서 집의 비유로 순종 자와 비순종 자의 결과를 밝혀줍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하시며 책망
을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마태복음 7:15절을 근거하면 거짓 선지자를 가르키며 또 여기 말
씀을 듣는 제자들이 말씀을 잘 듣도록 주시는 말씀이겠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에 "주여! 주여! 말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또 22절에 "주여! 주
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한 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했습니다.  불법을 행했기 때문에 "나를 떠나가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를 만나셨습니다.(마태 8:28-29)  또 예수께서 안식
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도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막1:23,24) 소리 하기를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우리보다 더 잘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알기는 알지만 순
종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기야 귀신들이 더 잘 알지요.  그러
나 순종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알면서 순종하지 못하면 누구와 같습니다.(귀신 들린 자, 서기
관, 바리새인, 외식자)
47절을 보십시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
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높고 집을 지은 사람 같아서 비
가 오고 큰 물이 나서 탁류가 부딪히되 요동치 않는 것은 말씀을 듣고 잘 지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듣고 행치 않아서 그 기초를 파지 않고 기초 없이 그냥 흙 위에 -마태
는 모래 위에- 지은 연고로 비가 오고 큰 물이 나서 탁류가 부딪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분류에 속한 사람인 것 같습니까?
지혜로운 건축자에 가깝습니까?   어리석은 자에 가깝습니까?
저 구약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했을 때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고 했습니다.(창6:22)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 그 방주
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이며 거기 창들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
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3층으로 할지니라"(창6;14-16)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
기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가 6:22절에, 7:5절에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은 방주의 설계를 노아에게 맡기시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설계 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
만이 비가 얼마나 오고 물살이 얼마나 세며 홍수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
다.  또 물은 틈만 있으면 스며 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처럼 철저하고 섬세하다는 것이겠습
니다.  노아가 이 대홍수를 피하려면 하나님이 설계한 그대로 준행해야만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앞으로 물심판보다 더 큰 불심판이 남았습니다.  이 불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설계에 절대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주 하나님의 설계도에 그대로 내 인생의 집을 지어
갈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