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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경건설교 18편

경건한 양육 엡6:1~4

by 【고동엽】 2022. 2. 26.

경건한 양육                 엡6:1~4               

 

 

마틴 로이드존스

 

 

우리는 부모들에게 주는 사도의 권면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자녀를 성나게 하거나 분개하게 하거나 화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양육(養育)하라.” 이 말은 “성숙하기까지 먹이고 기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부모들이 해야 할 제1차적인 일은 자녀들에 대한 자기들의 책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조하였듯이 자녀는 우리의 사유물도 아니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속하지도 않았으며, 잠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자들인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 때문입니까? 우리가 그들에게서 기대하는 어떤 것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나

단지 우리 자신들의 기쁨을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이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길러져야“하고 ”양육을 받아야“하고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권면들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위대성을 상기시켜줍니다.

오늘날 세상에 있어서 대중들이 그처럼 엄천난 생명의 위대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프고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한 개인들로서 존재해야 하고 살아야 하는 것 -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우리가 가정과 가족의 영역을 생각할 때의 생(生)은 훨씬 더 놀랍기만 합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과 그 부모권(父母權) 에 대해 사도의 교훈이 제시하는 개념은 얼마나 위대한 개념입니까!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 아이들이 주어진 것은 마땅히 우리가 그들을 기르고 훈련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신분들은 사람들이 다양한 유의 동물들을 기르기 위해서 또는 돌봄과 보살핌을

우리들에게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말이든 개이든 기타 어떤 동물이든지 그렇습니다. 그것은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식단(食單)을 생각해야 하고, 운동시키는 일을 계획해야 하고,

알맞은 잠자리가 준비되도록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동물을 여러 장애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필요합니다.

그 동물이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도록까지 기르고 양육하려면

거액의 돈가 많은 시간과 생각을 투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자녀들을 기르는데 주어지 시간이나 관심이나 생각이

아주 극소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오늘과 같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시대에서 날카로운 사회문제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쓰는 신경을 동물이나 꽃을 기르는 것만큼만 썼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책을 읽고 다른 문제들에 대한 좌담을 듣고 그들이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기 원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이 커다란 문제를 생각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쏟았습니까?

“어찌되었든 다 좋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도의 권면을 이행하려 한다면,

잠시 기대앉아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해 보아야합니다.

 

자녀가 생길 때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안내자요 보호자다.”

그 얼마나 무서운 책임입니까! 사업이나 직업 전선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결정들을 내려야 할 때

그들에게 부과된 큰 책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해야 할 책임이 무한하게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그들은 과연 거기에다 쏟는 관심과 시간 만큼만이라도 자녀를 기르는 문제에 쏟고 있습니까?

그들이 다른 영역에서 느끼는 책임감과 같은 문제 만큼만이라도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 일을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사업으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취급하고 당면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과제로 여기라고 강력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거기에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을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위에서 사도가 채용한 두 말씀은 흥미진진합니다.

 

“교양(nurture)”이란 말은 “훈계(admonstion)”란 말보다 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를 기르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모두를 통털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일반적인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위자들이 요점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의견을 같이 하는 바와 같이

그 말의 강조점은 행동에 있습니다.

 

 

 

두 번째 말, “훈계”는 말로 하는 “타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양”은 보다 일반적인 용구이며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을 갈고 닦는 일반적인 면에서의 전과정을 포함합니다.

도덕과 도덕적인 행실과 이론의 전반적인 품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것은 자녀를 돌아보고 보살피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룰 때 같은 어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한다고 하는 말씀 속에서 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훈계”라고 하는 말은 말로 하는 것이라는데 더 큰 강조점을 두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같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두 국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행위와 실제 행동으로 해야 할 일이요,

다음은 그에 더하여 용기의 말과 권면의 말씀과, 꾸짖는 말과 책망의 말로 해야 하는 훈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요구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르쳐주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지적해 주고 용기와 권면을 할 때 실제 말로써

자녀들에게 가르쳐야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훈계”란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훈계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 그리스도인들인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감당할 때

믿지 않는 모든 부모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이 점에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에 대한 이 호소는 단지 일반적인 도덕성과 착힌 태도,

또는 일반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행실을 하도록 자녀들을 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하지요. 비기독교적 부모들도 그러게 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들은 착한 태도와 일반적인 착한 행실, 악한 일을 피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정직하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줄 알고

존경받을 만하게 행동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도덕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출발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좋은 질서에 관심이 있는 이교적인 작가들마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그러한 원리를 가르치라고 늘 원합니다.

 

사회는 어느 시대고 모든 면에서 원리와 법과 질서가 조금도 없어서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것만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고유하고 특별한 기독교적 사상과 교훈이 개입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부모들 마음에 맨 상층부에는 자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아는 지식 가운데서

양육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예수 믿는 부모들이 소명받은 교유한 임무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최상의 임무만은 아닙니다. 그들 기독교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최대의 가르침과 야망은 그들의 자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요, 주로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바라는 주된 욕망이 그러합니까? 그것이 처음에 옵니까?

그들이 예수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

그것이 자녀들에 대한 제일의 소망입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이제 이 일이 어떻게 행해지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절박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그 자체 안에는 자녀 훈련에 대해 굉장한 강조가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명기 6장의 말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말년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녀들은 머지않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들의 기업된 땅에 들어갈 때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일러줍니다. 다른 일들 가운데서

 

그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들이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식에게 전수해서 주어야합니다.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야하고 율법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한 장에 그 권면을 두 번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신명기 11장에서도 나옵니다. 구약을 통해서 그 교훈은 여기저기서 빈번히 발견됩니다.

그것은 신약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서 모든 부흥과 재 각성의 시대마다 바로 이 문제가

언제나 다시 나타나고 크게 두드러져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들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문제는 크게 두드러져 있습니다.

퓨리탄들은 그 문제를 더욱 더 두드러지게 하였고

그 백년전의 복음 부흥운동의 지도자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많은 책들이 그 문제를 다루었고, 그 문제에 대해서 많은 설교가 행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될 때

그것이 그들의 전체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이고 사적(私的)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혼 관계에 영향을 미쳐 비기독교인들 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론이 훨씬 줄어듭니다.

 

그것은 역시 가정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들과 가정에 영향을 줍니다.

영국이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대는 언제고 종교적인 각성,

참된 종교의 부흥 다음에 뒤따라오는 시대입니다. 사회전체의 도덕적인 분위기도 상승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까지도 그것의 감화와 영향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외하고서는 사회의 도덕적 문제들을 다룰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건하게 될 때 그들은 그들의 원리들을 모든 국면에서 적용하고

크게는 의(義)가 국가 안에서 보여 지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이유 때문에 그 문제의 바로 이 국면이 슬프게도

현 세기에 무시를 당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과 도덕과 가족 관계, 가정이나 삶의 다른 국면들 가운데서 생각하고 있는

파멸의 일부입니다.

 

그 미친 듯한 상황에 의해서 우리 모두가 이처럼 많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한 가지 또는 다른 이유에서 가정이 옛날부터 그래왔던 식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전처럼 중추적 역할이 되거나 연합체가 되지 못합니다.

 

 

 

가정생횔에 대한 전체사상이 어쨌든 밑으로 처져 있습니다.

이것은 안타깝게도 기독교 내에서도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언급했던 위대한 모든 시기에서 발견되는

가정의 중추적 중요성은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가정은 그 전처럼 관심을 받고 특별한 배려를 받지 않게 되었고,

그 점은 우리들이 이 국면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원리들을 발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만듭니다.

 

 

 

▲맨 먼저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내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학교로 넘겨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학교가 훌륭하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제일차적이고 가장 진수가 되는 의무입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책임입니다. 부모들은 이 책임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 현세기 동안에 갈수록 더 많이 일어나는 일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그들의 책임과 의무를 학교로 떠넘기는 일을 많이 해 왔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깁니다. 가정의 영향보다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근본 단위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한 가정에 태어나 가족의 일원을 구성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영역을 갖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가르쳐지는 교훈입니다.

궁극적으로 사회가 하락하는 것은 가정에 관한 사상들이 하락되기 시작하는

소위 문명 세계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기숙사제 학교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조심스럽게 숙고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입니다.

정말 자녀들을 그런 제도적인 생활에 일임하여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들 가정을 떠나 매년 반년 이상을 가정만이 줄 수 있는 그 고유한 영향을 받지 못하고

생활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것이 성경적인 교훈과 조화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긴박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그럴만한 여유가 있는

거의 모든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관례와 실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교훈은 자녀의 복지, 자녀의 영혼은 언제든지 우선적인 배려를 받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모든 위신이나 - 모든 용어는 어느 것이든 사용하지 말라 - 모든 야망은 엄격하게 배제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영혼의 지식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1차적인 배려는 반드시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여야만 합니다.

기숙사제 학교 교육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혼의 복락을 해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한 쪽으로 제쳐져야 합니다.

 

영혼의 복락을 촉진하는 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안”에 있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들의 제 1차적인 임무와 의무를 형성합니다.

 

 

 

구약에 보면 아버지가 그 가정이나 가족 중에서 제사장이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가 대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도덕과 행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책임도 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강조는 어디서나 이것이 부모들의 제 1차적인 임무와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이 큰 강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그 근본적인 단위들, 결혼, 가족,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팽팽하게 하거나 늦출 수가 없습니다.

기숙사제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듯이

 “누구나 이렇게 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적이 교육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오직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성경적이냐, 그것이 기독적이냐,

그것이 자년의 영혼의 현재적이고 영원한 유익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영성과 도덕을 회복하는 길은 바로 이 노선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번 그 나름대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과거에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척자(pioneer)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비그리스도인들이 뒤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떠나서 생활케 하는 기숙사 제도가 이 나라의 도덕을 파탄에 빠뜨린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져야 하는지 깊이 숙고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어떤 특정한 죄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그들의 가정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휴일을 즐기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가정을 그저 그들의 휴일을 보내는 장소로 밖에는 생각지 않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마땅히 그들이 자녀들을 훈려시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잠시 동안 집에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모든 것을 눈감아 주고 맙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훈육이나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에 관한 전체적인 개념이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환경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논박할지 모릅니다.

 

특별한 환경이 그렇다면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환경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내가 진술한 원리가 철칙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한 환경이란 거의 드문 경우입니다. 가정과 부모들이 제 1차적인 일은 아주 분명합니다.

 

 

 

부모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모들은 교회의 교훈을 보충시켜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한편의 설교로써는 아주 조금 밖에는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적용되고, 설명되고, 확장되고 보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맡은 분야는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언제나 바르고 중요하다면

이전 어느 때보다 오늘은 말할 나위 없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마 이전의 어떤 부모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큰 임무를 지고 있습니다.

다음의 이유 때문에 그러합니다. 학교에서 자녀들이 배우는 것을 숙고해 보십시오.

 

유기적진화론(有機的進化論)에 관한 가설이 아이들에게 하나의 사실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 이론이 부각될 때 증명되지 않는 단순한 가설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실이요. 과학적인 학식과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신 나간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과 부딪혀야 합니다.

 

성경의 고등비평(高等批評) 역시 아마 “확실한 결론”일 것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20, 30년 전에 출판된 교과를 사용하고 있는 학교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고등 비평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악한 것을 배우고 있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너 나쁜 것들을 듣고 보고 있습니다.

 

온통 반 하나님, 반정통 기독교, 반이적, 반초자연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결을 누가 막을 것입니까? 그 일이 바로 부모들의 할 일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를 반대하는 세력이 그처럼 크기 때문에,

오늘의 부모들에게 더 큰 노력을 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 강력한 반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어려운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 반세력은 우리의 자녀들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못박아 둡니다. 내가 두 번째로 바라는 것은 실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하면 이뤄지지 않겠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나의 아주 위험천만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유익보다는 오히려 더 크게 해만 끼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며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것은 결코 기계적인 추상적인 방법으로써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그것이 일종의 연습인 양 수리적(數理的)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약 10년 전에 이 일에 관련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과 만나 함께 있을 예정으로 갔습니다. 내가 어느 곳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중에

그 가족의 어머니인듯한 부인이 아주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인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 부인의 고통의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 주간에 거기서“자녀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법”이란 주제로

어떤 부인이 특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했습니다!

그 부인은 5남매인가, 6남매인가 하는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녀의 가정과 자기의 생활을 어떻게나 조직적으로 관리하였든지

9시에 집안 일을 끝내고 여러 기독교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자녀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쉽고 놀라왔습니다.

 

 

 

두 이이를 가지고 고통하는 그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완전히 실패했구나 하고 느끼며, 정말 좌절감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해야겠습니까?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요, 그 부인의 자녀들이 몇 살이나 된답니까?”

 

나는 급기야 해답을 알게 되었고, 그 고민하는 부인도 알았습니다.

그 자랑하는 부인의 아이들은 다 열여섯 살을 넘지 못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난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리고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부인에게 자기 아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부인이 필요한 것은 규칙적으로 실행할 계획표를 짜는 일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야기는 수년 내에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절말 불행하게도 몇 년 내에 이야기는 달라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자녀들 가운데 여럿이 공개적으로 비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기독교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는 자녀들을 기독교인 되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라도 그것은 모두 임시적인 것입니다.

나는 다른 장소에서 그 강사가 같은 강의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장소에 그에 대해서 약간의 만족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연설을 듣더니 어떤 부인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훌륭한 평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강의장을 나가면서 친구에게 하는 말이 “저 여자가 내 어머니가 아닌 걸 하나님께 감사했어!”

그것은 웃음거리입니다. 동시에 거기에는 비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논평이 의미하는 바는 그 방법엔 어떤 사랑도 어떤 따스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전적으로 “수리적”으로 기계적으로 그것을 행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얼마나 훌륭한 어머니입니까!

이 다른 여자는 거기에는 사랑도 진정한 이해도 자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할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자녀는 기계가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 일을 기계적으로 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일이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강제적인 투로써 행해져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녀들에게 종교적이 되는 것이 비참해지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거나

또한 신앙을 하지 않아야 할 것과 계속적인 압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그들을 마귀와 세상의 세력으로 몰아넣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전적으로 부정적이거나 강압적이지 마십시오. 나는 이런 국면에 빠진 끊임없는 비극을 목격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후 내게 와서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

20여년 동안 이 교회당에 출석했지만 오늘 같은 예배는 처음이예요.”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들이 자라온 종교의 가혹함과 강제적인 성격에 진저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는 종교나 거짓된 청교도주의였습니다. 불쌍합니다!

 

아직도 참된 퓨리타니즘을 서툴게 모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말입니다.

그들을 퓨리타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것만을 보았지 긍적적인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자녀들을“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위선자로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나는 역시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건한 문구를

쓰는 것을 듣는 것은 내게 있어서 구역질나고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들은 자랑이 대단합니다. “저 아이들이 하는 말 좀 들어 보세요.

어때요,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립니다. 나

는 많은 아이들이 설교놀이를 하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한 어린 아이들의 행실을 이해할만 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그것이 놀랍다고 생각한다든지,

어른들이 감탄하며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도록 아이들을 종용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정말 신성 모독입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에게 극히 해로운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어린 위선자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부정적인 면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어린 아이에게 어떤 결심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얼마나 큰 고통과 폭동이 일어납니까! 부모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때요, 굉장하잖아요? 내 어린 건 믿음이 이러니 저러니 말이예요.

어린 것에 불과한 그것이 글쎄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다니,”

 

집회에서 압력이 가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이의 인격을 묵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물론 그것은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일을 결정하도록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들은 그렇게 할 세력과 수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것이며 비기독교적이고 영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너무 직설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지나친 감정은 금물입니다.

 

 

 

만일 아이가 영적인 문제를 얘기해 주는데 불안해하거나,

어떤 다른 아이에게 말하고 있는데 그가 불안해한다면, 당신의 방식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입니다.

아이가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아이가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너무 직설적이었다든가. 아니면 너무 흥분해 있다든지,

너무 압박을 가하고 있다든지 그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일은 그런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역시 이 방면에서 몇 가지 진정한 비극을 알았습니다.

특별히 15,6세가 아직 되지 않은 두 소녀의 경우를 회상해 봅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언제든지 그들을 앞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소년들의 어머니가 자기의 자녀들에 관해서 글을 쓰곤 했는데,

그 글 속에는 그녀의 아들들이 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들 두 소년들은 오늘까지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고 그것의 필요를 전혀 인정치 않습니다.

기독교 부모들은 자기들이 한 생명, 한 인격, 한 영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신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여러분의 자녀들에 압박을 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느끼는 걱정을 압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적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적이고, 성령에 충만해 있다면 결코 한 인격을 손상하거나

불공평한 압박을 자녀에게 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훈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든지 너무 감정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녀들이 부모들에 대해서 불신을 느껴 신앙을 가지겠노라고 할 정도의 그런 태도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참된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몇 가지 제안을 하려 합니다.

한때 사람들이 집에는 “그리스도는 이 집에 머리이니라”는 문구가 액자가 벽에 결려있는 것을 봅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경우를 발견합니다.

 

나는 그런 것을 내거는 것을 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엔 약간의 좋은 점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문설주에 주의 말씀을 기록해 두라”고 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망각하기를 잘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런 이유에서 교회당의 벽 한 쪽에 십계명을 써놓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든 않하든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는 그 집의 머리라고 하는 인상을

언제나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상은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주로 여러분의 일상적인 행실과 모범으로써 입니다.

부모들은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라고

자녀들이 항상 느낄 정도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사실은 그들이 행실과 행위에서 확실해집니다.

그보다도 사랑의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에 충만하라.” 이 말씀은 이상의 모든 특별한 경우에서처럼

이 면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본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라랑니다.

 

가정이 성령에 의해서 맺은 사랑의 분위기로 충만해 있다면 가정의 거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함을 받습니다.

직적적인 억압과 호소로써가 아니라,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그 일을 해내십시오.

 

 

 

그 밖의 또 무엇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가 있습니까? 보통의 대화 가운데서 입니다.

식탁에 앉아서나 어디서나 일반적인 대화는 가장 중요합니다.

아마 라디오에서 뉴우스를 듣고 그것에 관해 얘기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커다른 사건이 이야기 됩니다.

 

아주 국제적인 사건 정치적인 사건, 산업상의 문제 등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는 그런 일반적이 대화에서 조차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독교적인 관점을 나타내야 합니다.

 

자녀들은 그같은 사건들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걷고 있는데 두 사람이 집안에서 토론했던 바로 그 사건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을

듣게 될지 모릅니다. 즉시 그들은 한 큰 차이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전체적인 접근방식이 가정에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인 관점은 반드시 삶 전체 속에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사건이나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개인적인 문제나 사업상의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을 때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모든 것은 반드시 기독교의 이 보편적인 방향 아래에서

숙고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행해질 때 자녀들이 무의식적으로 부모들의 삶에 있어서

지배적인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에 관한 것이 불신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과 모두 다르다고 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전체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으로든 자녀들은

기독교적인 관점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목적 달성은 그러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일단 그것을 분잡기만 한다면 문제는 더욱 쉽게 됩니다.

 

 

 

다음 문제는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믿는 부모들은 큰 기회를 얻습니다.

그것은 극히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20절에 그 문제가 소개된 방식을 나는 퍽 좋아합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급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다시 말해서 자녀들이 이것에 관해서 문제될 날이 이르게 될거라는 것입니다.

"왜 부모들은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지 않지요?

내 어린 친구의 부모는 안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왜 그렇습니까?

그 점에서 여러분은“주의 교양과 훈계로”자녀를 양육할 기회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기회를 포착하려 한다면 바른 대답을 알고 있어야 하념 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과 그 교훈을 알지 못하는 한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우를 말할 수 없으며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양육할 수 없게 됩니다. “왜 아버지는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은 안하지요?

내 친구들 부모들을 보면 밤 시간을 나가서 지내는데요.”

 

그런 식의 질문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그들의 질문에 성의없이

“네가 보다시피 네 엄마 아빠는 달라.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원래 마음으로는 다 같은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보다 본래 더 훌륭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죄 속에서 태어났다.’ 태어났다. 본질적으로 죄의 노에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나쁜 것이 있다. 우리 안에는 모두 악한 씨가 있어서 아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너도 알다시피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깨우쳐서 어떤 것들이 얼마나 나쁜가를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여전히 네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같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 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얘기해야 할까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의 연령에 따라 조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답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분이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 까닭을 정확하게 알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그에게 강제적으로 떠 맡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그 앞에 설교조로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거든 아주 간다하게 대답하십시오. 나

이를 먹어갈수록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나 언제든지 질문들에 답변할 준비를 하고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을 아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세우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나눠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의 독서에 대한 안내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좋은 전기(傳記)를 읽을 수 있도록 하게 하십시오. 전기는 그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될 것입니다.

여러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독서를 안내하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바른 향으로 잡아주고,

실제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영광에 친밀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항상 조심하십시오.

음식을 들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바라십시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일들은 드뭅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언제나 듣게 되고 축복을 원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것입니다. 매일 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둘러앉아서

소위 가정 제단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십시오.

 

아버지는 그 집의 머리로서 성경을 봉독하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길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가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십시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규적으로 듣게 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물으면 대답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훈계도 하십시오. 지혜롭게 슬기롭게 하십시오.

그것을 지루하거나 혐오할 만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들이 그것을 기다릴 정도까지 되어야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재미있다고 느끼게끔 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요약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적인 매력으로 이끌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기독교라고 하는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는 인상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부모님들 같이 되어야겠다는 욕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보고, 우리가 전적으로 감탄하고 있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도 아버지처럼 어른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래야 난 그들처럼 그 생을 누릴 수 있어”라고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방식은 결코 기계적이거나 율법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의 간증이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자고 우리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가장 영광스러운 것에 눈뜰 수 있게 하셨다는 것도 알게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는 최대의 욕망은,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이 지식에 들어가 기쁨에 참여하고,

세상에서 가장 놓은 특권을 가지게 되어 주님께 봉사하고

그의 은혜의 영과을 찬양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책임이 있음을 그들이 알게 하십시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사업이나 직업이나 손노동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양육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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