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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경건설교 18편

목회의 목표는 "성도의 경건" 딤전6:1~21

by 【고동엽】 2022. 2. 26.

목회의 목표는 "성도의 경건"       딤전6:1~21     

 

딤전6장은 디모데전서의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합니다.

 

6:1~2 –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하여

6:3~5 -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6:6~19 - 부자들에 대하여

6:20~21 - 교육받은 자들에 대하여 

 

 

◑적용 :  목회의 목표는 "성도의 경건"              

 

▲서론 / 디모데전서는 '경건 godliness' 이라는 주제가

처음 1장부터 끝 6장까지 꾸준히 흐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딤전1장에서 '교훈(설교)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신실한 믿음' 이라면서  1:5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십계명에 기반한 계명들을 가르쳤습니다.  1:9~10

즉 이런 것이 '복음이다' 라고 가르친 것이죠. :11

 

즉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계명'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경건치 아니한 자에게 계명(율법)을 가르치라'고 하더니   *1:9

 

2장에서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하다가  *2:2, '경건함'

 

마침내 3장에 와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3:16 

 

'비밀'이란 뜻은, 소수의 사람들만 깨닫고, 나머지 다수는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4장에는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4:4

 

그러다가 본문 딤전 6장에 와서는 '경건'이란 말을, 4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경건'은 영어로 godliness 인데, '하나님을 닮은 삶' 입니다.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설교의 목표와 방향이 경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6:3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따르지 아니하면'
위 구절에서 '말씀'과  '경건'이 동격처럼 쓰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도, 결국은 '경건에 관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주제 

 

종말론을 강론하더라도, 종말론을 똑똑히 이론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약간 틀린다 하더라도) '경건'으로 결론지어져야 합니다. 종말을 대비하는 삶이 중요한 거죠. 

 

성령론을 강론하더라도, 성령론을 성격적으로 올바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성령론이 약간 무식하다 하더라도) '성령충만'한 삶, 즉 경건한 삶이, 이론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딤전6장에 가장 길게 나오는 말씀은 '물질'에 관한 교훈입니다.  

6:6~19절까지, 사실 본 장의 2/3 분량이 '성경적 물질관'입니다. 

 

바울이 '물질'에 대해, 이렇게 길게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물질에 관해 신약에서 제일 긴 장)

성도가 경건한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지장이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잘 다스리는 성도가 '경건한 성도이다' .. 이렇게 경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저 물질을 알뜰하게 쓰고, 저축을 많이 하고.. 이런 교훈이 아닙니다.

 

5절에 '경건을 (물질적)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잘못된 경건의 예

6절에 '그러나 (물질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어떤 분들은 기가 막히게 성경을 강해합니다. 탁월하게 성경을 주해합니다. 

성경해석학 적으로 틀림이 없이

신구약 성경구절을 풀어주면서

마치 탁월한 신학교 강의를 들은 것 같고, 그 설교를 통해 책을 몇 권 뗀 것 같습니다.

방대한 지식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경건'이 아닙니다. 그저 '지식 대 방출'입니다.  

 

▲'경건'에 초점 맞추지 않으면 '다른 교훈'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갈1:8

거의 독설을 퍼부었는데,

 

본문 디모데전서에서는 '다른 교훈'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경건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교훈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경건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면,

율법주의자로 오해 받기 쉽습니다.

그것은 '율법폐기론'적인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가 오늘 '경건에 관한 교훈'을 올바로 가르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설교를 듣거나 가르침을 받는 회중들, 구역 식구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저랑 같이 신앙생활한지 1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경건에 진보가 있었습니까?'

 

꼭 안 물어봐도 됩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어느 정도는 압니다.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명절에 서울에서 대전가는 고속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1번 경부선을 타고 가다가

버스가 신갈 교차로에서 강릉쪽으로 가더랍니다. 50번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승객은 '자기가 버스를 잘못 탔다며, 가까운 휴게소에서 내려달라고' 기사에게 요구했습니다.

버스기사는 잠시 난감해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 여기저기서 '나도 잘못 탔다, 내려야 되겠다'며 승객들이 막 일어서는 것입니다.

알고봤더니, 버스 기사의 잘못이었습니다.

 

강릉으로 가는 버스 기사가, 대전행 버스에 올라타서 운행을 한 것입니다. 

버스기사는 즉시 버스를 돌려서, 대전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설교자가 '경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승객들을 모두 엉뚱한 종착역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거죠.

사실 세월호 사고 때도 (2014년) 선장 책임설이 크게 대두되면서,

목회자들이 스스로 한 번 각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방향타 잡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거죠.

 

며칠 전에 저녁 운동을 하다가, 동네 어르신 세 분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지나가다 듣게 되었습니다.
'성당에 신부님이 새로 오셨다면서요?' 
'골수 ㅈ파, 정ㅇㄱ ㅎ이래요!'  

그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한숨 쉬며 걱정을 하더라고요.

저는 잠시 빙긋하며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승객들이 운전수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승객들이 기장이나 선장을 걱정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6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게 무스 뜻인가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으로 크게 얻는 게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6:8

 

그러니 바울은, 족한 줄로 알고, 욕심 내지 말라고 합니다.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먼저 구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경건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물질욕, 또는 물질근심'이라는 거죠.

 

사람들은 보통 '자족'하지 못합니다. 늘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경우 '늘 쪼들린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돈이 궁하다'고 느끼며 삽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성도들에게 바울은 가르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으로 크게 얻는 게 많다' :6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빌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느 사역자가, 주님께 늘 '돈이 궁합니다' 하고 기도를 했는데도, 좀처럼 응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필요한 것은 채워주셨지만, 거의 '광야의 만나' 수준이었고, 늘 '나는 쪼들린다'고 생각하다가

오래 자기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니까.. 자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채워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빌4:12절 대로 한 번 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든지 비천이든지 일체의 비결을 한 번 배워보자!'

기도의 방향을 바꾼 것이지요! 

 

결과는, 주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주님이 자기 가정에 '적게' 주시는 게 아니라,

'적당하게' 주시며, 절약하며 살아보니까 심지어 매달 얼마라도 저축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천에 처해서 살아보니까 (절약해서 살아보니까)

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식사하고, 디저트 카페 출입을 가급적 줄이니까

물질만 절약한 게 아니라, 건강까지 챙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가 쓸 돈이 풍족해서 매일 외식하고, 매일 커피를 두 세 잔씩 사서 마시고

디저트 카페에서 빵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매일 즐겼다면,

젊어서는 그래도 되지만, 중년이 되면 건강을 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긴축 재정' 정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산다면,

6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으로 크게 얻는 게 많다'는 뜻입니다.

 

늘 쪼들린다,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주님이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라고 믿으며, 거기에 맞춰서 사니까

경건한 삶을 추구하게 되며 (물질 추구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니까요)

'경건으로 얻는 게 많은' 것입니다! 

 

이 비결을 빨리 터득하면 좋습니다. 

죽을 때까지 '모자란다, 쪼들린다, 부족하다'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신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빌4:18 

라고 고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진짜 풍족하고 넉넉해서 그렇게 고백했다기 보다는,  바울은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는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이었습니다.

 

 

◑절별 해석

 

 

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 '종들'의 헬라어 '둘로이'는 글자 그대로 '노예들'을 말한다.

당시 로마에는 많은 수의 노예들이 있었는데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로마는 전쟁을 통하여 패전국으로부터 노예를 확보하거나, 주위의 약소 국가들로부터 노예를 사들이기도 하였다.

 

또는 로마의 자유민 중에 빚을 청산하지 못하거나, 죄를 짓고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많은 경우 노예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노예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노예들에게 후한 대우를 해주었으며 그중에는 요리사, 이발사, 주치의 등

전문적인 일을 하며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노예들도 있었다.

 

신약성경에 노예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초대 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노예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전 7:21-24, 12:13, 엡 6:5-8, 골3:11, 12, 벧전 2:18)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본 구절은 바울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혹자에 의하면 바울은 외형적으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여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사회적 부작용을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점진적인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삼았다고 본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노예 신자들에게 상전을 공경(恭敬)하라고 권면한 주된 이유는

노예 제도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의 가르침에 손상을 입히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1절이 일반적인 모든 노예들, 특히 불신자를 주인으로 둔 노예들에게 적용된 것이라면

본절은 믿는 상전을 둔 노예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 믿는 노예들은 자신의 주인이 동등한 신자일 경우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여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혹자는 믿는 노예들 가운데 교회의 장로가 된 자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유익을 받는 자'는 '주인'을 가리킬 수도 있고 '노예'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문맥으로 보아 전자로 해석한다.

 

이들은 믿는 신자인 동시에 '사랑을 받는'(아가페토이) 자들이었다.

혹자는 이 단어가 상전이 노예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는 하나님과 다른 신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자의 견해가 문맥상 더 적합하다.

 

이처럼 믿는 노예들이 섬기는 상전들 역시 믿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들일 경우 믿음을 가진 노예들은 그 상전을 더욱 잘 섬겨야 한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른 교훈을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테로디다스칼레이'가

1:3에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가리키는 것에 반해

여기서는 '이단 사상'을 가리킨다.

 

당시 헬라 세계에는 '소피스트'(Sophist)라고 불리는 궤변론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웅변과 변론술을 가르치고 돈을 받았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이 이단 사상을 교회에 끌어들여 초대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이 '바른 말'속에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 사도들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투기(시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 이와 같은 것들은 '변론과 언쟁'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들이다.

불필요한 변론에 치우치는 것은 사람들을 의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다툼이 일어나느니라'

4절에서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함'으로써 생기는 악한 열매 네 가지가 열거되었다.

본절에서는 마지막 다섯번째 결과로 '다툼'이 언급된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 '이익'은 '경제적인 이익'을 뜻한다(financial gain, NIV).

진리를 떠나 다른 교훈을 좇는 자들은 '경건'(유세베이안) 즉 '종교'라는 이름으로(Scott)

'그들의 거짓된 교훈'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사례를 요구하였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현자란 지상의 행복과 불행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금욕주의적인 경건에 도움을 줄지언정

참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이단 사상을 전파하는 자들이 추구하였던 만족은 그 원천을 마음속에 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두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과 대조적으로 오직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족'(아우타르케이아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족의 마음을 소유한 자는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둠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된다(빌4:11-13).

그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구약 지혜 문학에 나오는 내용의 인용으로 보이는(욥 1:21, 전 5:14, 15). 본절은

두개의 문장이 접속사 '호티'('왜냐하면')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다.

 

이것은 태어나는 것보다 죽는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긍극적으로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정당한 부의 축적마저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만을 취하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는 권면이다(마 6:33).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 '부하려 하는'에서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로메노이'는 '의도하다', '갈망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은 부자가 되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유사한 의미를 갖는 단어를 중복시킴으로 물질의 지나친 추구가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빠지게 하는'의 헬라어 '뷔디주신'은 '배가 바다깊이 침몰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눅 5:7).

 

바울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혹자가 지적한 대로

바울은 결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물질의 획득에

지나친 관심을 두어 거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잘못된 삶의 형태이다.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랑함'의 헬라어 '필라르귀리아'는 '탐욕'(covetousness)을 의미한다.

돈 그 자체는 악하지 않으나 그것에 탐욕을 품게 될 때 악이 발생한다.

여기서 바울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한 것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유일한 근원임을 말한다기보다

재물을 지나치게 탐하게 될 때 일어나는 극단적인 결과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근심'의 헬라어 '오뒤나이스'(*)는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또한 '찔렀도다'의 헬라어 '페리에페이란'은 '꿰뚫어 관통하였다'는 뜻으로(pierced, KJV)

주로 고기를 쇠갈고리로 꿸 때 사용되었던 말이다. 결국 돈에 지나친 탐욕을 품은 자들은

신앙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신앙을 잃고 방황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극심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절의 핵심은 <피하고>와 <따르라>이다. 
 그럼 뭘 피하라, 멀리하라는 것인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피하라는 것이다. :10

그리고 뭘 따르라, 추구하라는 것인가? :11
6가지를 이야기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말했다. 

 

이것은 인생의 선택과 집중의 원리다.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무엇을 추구하고 살 것인가?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 일직선의 삶을 살게 된다.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는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하나님의 사람'(안드로페 데우)이라는 호칭은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이 말은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나 특별한 인물들에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모세(신 33:1, 시 90:1), 다윗(대하 8:14), 선지자들(삼상 2:27, 9:6), 엘리야(왕하 1:9),

하나님의 사자들(왕상 12:22) 등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호칭이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일반 신자들(딤후 3:17)이나 디모데와 같은 복음 사역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을 열거한다.

'의'(디카이오쉬넨)는 법률 용어로 '공의'(公義)를 뜻한다.

'경건'(유세베이안)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경외심을 간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벧후 1:3).

 

'믿음'(피스틴)에 대하여 혹자는 '이것은 주관적인 믿음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런데 렌스키(Lenski)는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즉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인데

처음에 열거되지 아니하고 세번째 나온 것으로 보아 이것은 신앙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의 미덕(美德)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가 타당하다. 본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미덕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덕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아가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하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핵심 요소이다(요일4:10).

'인내'(휘포모넨)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살전 1:3, 5:14).

'온유'(프라위파디안)는 신약성경 중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온순'(meekness, KJV)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가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위를 제공하고

대인 관계에 있어서 늘 여유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마11:29, 고후 10:1).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싸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조마이'는 올림픽 같은 운동 경기에서

'시합하다', '시합에 이기기 위해 애쓰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선한 경기에서 경쟁하라."

혹은 "선한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애쓰라." 결국 이말은 믿음이라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을 권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을 취하라' - '취하라'의 헬라어 '에필라부'는 '꼭 붙잡다'라는 뜻이다(take hold of, NIV).

바울은 '영생을 시합에서 이긴 자가 얻는 상급에 비유하여 그것을 꼭 붙잡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한편 본절의 '영생'에 관하여 몇가지 해석이 있다.

1) 모든 싸움이 끝나고 죽음 이후에 최종적으로 하늘 나라에서 얻게되는 영광이다.

2) 이것은 믿는 신자가 이미 소유한 것으로서 죽음 이후에 완성된다.

3) 여기서 '영생'은 '끝없는 생명'이란 양적 의미보다는 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과 사랑, 평안, 기쁨 등에 함께 참여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을 말한다.

 

이상의 세 견해는 근본적으로 서로 배치되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클레데스)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증거하였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안'은 침례받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다'의 뜻이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행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바울이 하나님을 '만물을 살게 하신' 분으로 언급한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디모데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믿음을 부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해야 할 증거와 역사적으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비교하여

디모데에게 엄숙히 권면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선한 증거'란 '고백'을 의미한다는 것에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이 고백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요18:36, 37).

 

그러나 고백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빌라도 앞에서도 꿋꿋하셨던

그리스도의 담대함이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파네이아스'는

중요한 인물의 '출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이 말이 '그리스도의 현현'(the Epiphany),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파루시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명령'(엔톨렌)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마 28:20에서 예수께서 '내가 네게 명한모든 것을 지키라'고 말한 것과 그외 다른 복음서(요 14:15, 21, 15:10)

에서도 같은말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명령'은 '예수의 말씀'을 가리킨다.

 

2)디모데가 침례받을 때 서약한 의무일 것이다.

 

3)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부과된 모든 의무를 말한다.

 

4)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명령을 가리킨다.

 

2) 와 3) 의 견해는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전후 문맥상 4)가 가장 타당하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그의 나타나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복 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여기서부터 16절까지는 하나의 '영광송'(doxology)이다. 이 영광송에 관해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의 회당 의식에서 모방한 초대 그리스도인의 찬송이었을 것이다.

2)이것은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서 하는 신앙 고백을 회상하여 한 말이다.

3) 바울 자신의 독자적인 말이다.

4)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특히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기서의 영광송과 유사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딤전 6:15~16 구약의 병행 구절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신6:4, 시41:13, 사40:12-31, 단4:35
만왕의 왕이시며 겔26:7, 단2:37, 스7:12
만주의 주시요 신10:17, 시136:3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시36:9, 사40:28, 단4:34
가까이 가지 못한 빛에 거하시고 출24:17, 34:35, 시104:2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출33:20, 신4:12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느8:6, 시41:13, 72:19, 89:52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8-10절에서 언급된 교훈은 '부하려는 자들에게' 준 교훈인 반면,

본절에서 19절까지는 당시 '이미 부자인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 당시 에베소는 부유한 도시로서 부자 교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바울은 부자들을 향해 재물로 인해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 것'을 제일의 교훈으로 권면하고 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정함이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테티'는 '불확실성'의 뜻을 갖는 말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으므로 믿을 것이 못 된다(눅 12:13-21).

 

잠 23:5에도 "정녕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기록 되어 있다.

한편 '소망을 두지 말고'는

'불확실한 재물을 신뢰하지 말고'라는 뜻이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은 후하신 분으로 그의 자녀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시 37:25, 행 14:17, 약 1:17).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리게'하셨다.

 

'누리게'의 헬라어 '아폴라우신'은 '즐기다'(enjoyment, NIV)의 의미를 갖는다.

혹자는 바울이 그의 마음속에 영지주의자들을 의식하고 이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금욕주의적인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쳤으나(4:3) 바울은 금욕주의를 반대했다(4:4).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경계한 것은 과도한 재물욕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악한 요소들이었다.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7절이 하나님께 대한 부자들의 태도에 역점을 두었다면

본절은 타인들에 대해 그들이 지녀야할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 '동정하는'의 헬라어 '코이노니쿠스'(*)는 '함께 나누다', '공감하다', '교제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말은 그리스도인인 부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물질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까지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교제해야 함을 의도한다(행 2:42-44, 4:34-37).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NIV에서는 본 구절을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장래에 자신들을 위한

하나의 견고한 기초로서 보화를 쌓게 될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마 6:19-21의 말씀, 곧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와 의미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본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부탁한 것'의 헬라어 '파라데켄'은 '기탁물'(deposit)로 번역된다.

디모데에게 위탁(委託)된 건전한 교리, 혹은 교훈을 잘 지킬 것을 말한다.

디모데에게 맡겨진 건전한 교훈은 본서 전체에 걸쳐 언급된 것이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 - 이는 당시 영지주의자들(Gnostics)의 가르침이나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망령되고 헛된 말과 반론을 피하라'

'망령되고'(베벨루스)는 '신성을 더럽히는'의 의미이며(레 10:10, 딤후 2:16),

'헛된'(케노포니아스)은 '공허한'을 뜻한다(1:6).

'반론'의 헬라어 '안티데세이스'는 '반대', '대조'(antithesis)를 뜻한다.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본절은 20절에서 바울이 권면한 것을 유념해야 할 이유를 말한 것으로

디모데가 그의 교인들을 향하여 해야할 경고이다.

 

'좇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팡겔로메노이'는 '단언하다', '주장하다', '고백하다'(profess, NIV)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것'은 20절의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란 영지주의나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주장하며

그들의 신앙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로서

1:6의 '헛된 말에 빠진 자들'이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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