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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칭의와 성화 (박영선 7강)

by 【고동엽】 2021. 12. 6.
 
 
◑칭의도 은혜로, 성화도 은혜로 이룬다.


※아래 설교문은 '성화도 은혜로 이룬다'는 명제는, 소위 '개혁주의 성화론'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비되는 개념이 '웨슬리적 성화론'(성화의 자기 노력)입니다.


참고로, A는 맞고, B는 틀리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가 불충분한 부분을 보완해 준다.
서로 모순된 A와 B를, 상호 보완적으로 둘 다 받아들인다.. 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다만 '성화가 은혜다'는 측면을, 인간 상식으로는 쉽게 깨닫지 못하는데,
개혁주의 신학이, 이 간과하기 쉬운 내용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로마서 5: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 그 다음에 살아나심으로 인한 구원,
앞에 것을 칭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뒤에 것을 성화, 부활 사건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구원을 얻은, 구원을 허락한 그의 백성들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
이 둘을 다 합쳐서 구원입니다.


▲로마서 6:5절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 부활에 연합되었다는 것은,
죽으심의 연합만큼 우리 한국교회가 아직 이해의 정도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부분들 좀 더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니까,
교회에 관한 예, 성화에 관한 예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4:25절을 보시면 구원을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다 동일하게 구원을 설명할 때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두 국면에 걸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사역을 논하고 있고,
이 둘을 다 합쳐서 구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확인하려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 구원을 논할 때 칭의와 성화의 이해에 있어서, 그 관계가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로마서 4장, 5장, 6장에 걸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이 칭의나 성화가 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사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우리에게 결과 될 선물이요, 성취될 하나님의 의지의 목적이기 때문에
우린 이것을 양쪽 다 은혜라고 합니다.


이 둘은 구원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칭의가 성화의 근거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칭의가 은혜이듯이, 성화도 은혜라고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십자가로, 성화는 부활로 이루셨기 때문이라 합니다./주)


자칫 잘못하면 칭의는 은혜고 성화는 우리의 책임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 조심해야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성화의 실패가, 칭의의 실패가 아닙니다.


구원파는, "성화의 실패는, 칭의의 실패"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칭의란, '결단주의, 값싼 은혜를 뜻하지는 않습니다./주)


그러니까 더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보면, 칭의의 신분적 영원한 변화가
성화까지 단번에 변화된 것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성화의 실패가 칭의의 실패, 좀 더 크게 오해해서 구원 자체의 실패,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화의 실패가, 칭의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화의 성공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가 있거나, 분별이 있거나, 결심을 한 것이..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사실 자주 말하면서도, 정작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데요..


▲우리는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칭의가 단번에, 영원히 확정되는 것과 달리
성화는 점진적이고, 과정이 있고, 훈련이 필요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칭의와 성화)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를 그 몸으로 불러 교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확인했다시피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라’ 라는
그런 식의 요구(성화의 자기 노력)들이
성경에, 서신서에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 했습니다.


그럼 좀 더 분명하게 성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자주 오해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외 없이 칭의는 은혜고, 성화는 책임으로 이해하는 식의 오해가, 성도들에게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주셨는데
내가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신실하게 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하는데 대한 죄책감
또는 그것으로 인한 절망, 이런 것들이 신자들의 현실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성경적으로 제대로 이해를 못하면, 성도들을 제대로 위로하거나 가르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성화에 대한 명령을, 인간의 책임으로 요구하는 듯이 보입니다.
1) 빌립보서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에 걸맞은 신앙의 반응, 책임들을 요구하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2) 에베소서 4: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자답게 살아라, 이런 요구가 성경에 어느 곳에서나 발견됩니다.


3) 우리 대표적으로 많이 쓰이는, 권면하는 성경구절로 로마서 12:1~2절이 있죠.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런 성경에 분명하게, 성도들의 책임 있는 신앙을 요구합니다.


▲이런 인간의 책임을 의식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데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짐승하고 다르죠. 기계하고 다르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었느니 당연히, 당연히 받은바 은혜에 대한 보상을 해야
인간된 자격과 체면이 서지 않겠냐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내려가 보면, 여러분 모두도 그 경험을 하셨겠습니다만,
구원을 얻은 감격과 희열과 헌신과 각오를 너무나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신앙의 현실을 경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래도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니까 이 경험이 덜 하실 수도 있습니다.
표정을 봐서는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에 있어서, 이건 예외 없이 겪는 경악스러운 경험입니다.
구원이 희미해서도, 구원에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고
구원의 분명한 확신과 확인과 헌신과 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승리가 기대만 못하다는 이 경험은, 사실 누구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성도가 해 볼 수 있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받은 구원이 취소되면, 내가 한 경험이 가짜인가는 근본적인 의심과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자면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어떤 규칙들이나 기준을 정해서 그걸 시행하면서,
예를 들면 성수주일을 한다, 술, 담배를 안 한다, 십일조를 낸다, 하는 최소한의 기준과 규칙을 만들어서
그걸 행하여 내가 신자가 맞지, 내가 구원을 얻은 게 맞지.. 라고
자신을 추스르는 그런 행위가 율법주의를 양산하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을 많이 만났고, 제가 그 경험을 직접 해서, 이 부분에 대하여 아주 깊은 이해가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내가 신자인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뭔가 믿지 않은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야 되는데,


그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을 근거를 삼아서라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라는 자기 확인을 스스로 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는 나중에 자랑으로 가는 폐단이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자기 자랑으로 가기 위해서 율법주의로 들어가기 보다는
이 현실적인 괴로움, 자신에 대한,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난처함, 확인되지 않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몸부림이, 이런 율법주의를 만들어 내는 줄을 압니다.


이때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적 요구와 비평을 많이 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그런가? 싶어서 말이죠. 옆 사람을 자꾸 꾹꾹 찔러서 너도 가짜지?
너 진짜면, 그 사람이 진짜면 큰일이 나죠, 왜냐면 난 안되는데 옆 사람이 된다 그러면, 희망이 없거든요.


어떻게 해서든지 물귀신이 돼서 끌어내려서 공범을 만드는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생깁니다.


저는 해봤습니다. 저는 쭉 교회에서 자랐고, 청년기에,
나는 도무지 소원만큼 신앙생활이 영리되지 않아서
훌륭하게 신앙생활 하는 동료들이나 선배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혹해서
같이 동질을 만드는 그런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신비주의로 가는 이유도요,
자기 구원의 감격이나 확신이,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의
현실적 신앙의 승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니까(성화되지 못하니까),
하나님 앞에 구하여, 성령님의 크신 은사나 개입으로 온전한 승리를 얻어서,
자기가 신자인 것을, 구원 얻은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신비주의로 가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많이 퍼져있는 기도 많이 하는 분들, 산기도 가시는 분들은,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신앙생활의 승리, 그리고 구원이
현실적으로 이렇게 성화로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실망과 의심이 있어서,
신비주의로 문을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강의(8강)에 가서 아주 더 소상하게, 더 분명하고, 아주 철저하게 제가 분석을 하겠습니다.
제 평생에 고민거리들이 다 이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예수 믿고 쉽게 헌신하고 승리하는 분들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과 그리고 시샘이 있습니다.


'어떻게 저분들은 저렇게 신앙생활을 잘 할까? 어떻게 저렇게 다 승리할까? 종자가 다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는데,
저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때문에,
이 내용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성화가 은혜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서,
말하자면 성화까지 포함해서 그거까지 구원이고,
성화도,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화가,
칭의와 달리 시간이 걸리고, 과정이 있고,
그래서 시행착오가 있고, 실패와 절망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선 오늘 확인해야 되는 것은
어떻게 성화가 분명한 은혜냐 하는 것을 성경으로 다시 한 번 더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성화가 은혜인가?


▲로마서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절에 이르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신적예정, 신적작정으로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뜻과 계획은, 그 결과가 변개됨이 없이, 실패함이 없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성화를 포함한, 구원의 전 과정이 모두 은혜다.. 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그래서 부르셨고, 구원하셨고, 완성하실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이 구절에 성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칭의와 영화가 있죠.
(성화가 빠져 있지만, 칭의와 영화 속에, 성화가 들어가 있다고 보는 거죠)


왜냐하면 이 내용은 구원의 전 부분을 설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다’를 강조하는 부분이고
그런 차원에서 '의롭다하신 그들을',
의롭다하신 까지는 성도들의 이미 일어난 완료된 사건입니다만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도 완료형으로 기록되어서
아직 성도들에게 일어나지 않은 구원의 완성마저도, 예언적 완료로, 완료시제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또 우린 영화롭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 완료되어있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속에 성화는 생략되어 있지만, 칭의/영화와 아울러.. 완료된,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죠)


▲그래서 그 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이 일을 작정하셨고, 하나님이 이 일을 목적하셨으니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실패케 하려면, 하나님을 대적해야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선택이나 우리의 책임 이전에, 하나님의 작정을 무너뜨려야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구원의 작정(칭의, 성화, 영화)을,
어떤 의지, 어떤 열심으로 했느냐를,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작정의 의지, 열심에 관한 열쇠입니다.
그 아들까지 주었는데, 무엇으로 그 열심을 막겠는가, 그 작정을 취소시키겠는가,


그래서 33절도 보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우리(성도)를 반대하려면, 하나님을 반대해야 합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 메시야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열심, 그 의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
그 분, 그 주인공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 구원의 모든 것에 대한 근거가 은혜 위에 있고
하나님의 작정 위에 있음으로 .. 내가 받은 구원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화라는 것이. 책임이라는 말의 뜻도 우리가 성경적으로 잘 이해해야 옳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많이 좋아하시는 구절들이 나오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의 뜻을 십자가에만 국한시키시면 안 됩니다.
교회로 연결하시고, 궁극적인 승리,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작하시는 구원이
신적 작정에 의한 것이라서,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변개될 수 없다는 걸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런 일들은, 로마서 5장에도, 성화에 관한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롬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구원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죠. 구원을 얻었고, 영광을 바라는 그런 위치가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이미 얻었고, 완성을 바라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될 수 없습니다.


▲확인한 대로. 그 구원을 얻고 영광을 바라는, 완성을 바라는 그 사이, 현실은 어떠냐 할 때
5: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지난 시간 우리가 공부를 했었습니다. '환란이 우리를 경험으로 이끈다' 했습니다.
인내는 경험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가 가지는 신앙상의 각오들, 감격들, 이런 것들이 경험(인내) 속에서 다져지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그 본질이 모습을 만들어가고 완성되는 것을 그리고 있죠.
우리의 신앙현실, 그리니까 성화가 이루어지는 그 기간은, 그 과정은,
환란으로 대표적으로 묘사되듯이


외적환란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환란,
그러니까 완성되어있지 않는 우리의 죄의 본성과 싸우는 과정이라서
환란이라는 것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시련으로, 절망으로 또는 불안으로, 의심으로,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 일들, 이렇게 환란으로 인하여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소망을 이룬다 함은,
여기서 소망이라는 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을 말하고 있죠.


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데 5절에 이렇게 덧 붙쳐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우리가 이 문제, 구원 얻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구하는 현 시점에서
그 영광의 자리까지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자면 준비해 놓으신 성화의 완성의 과정들, 환란으로 대표되는
그래서 고민하고, 훈련되어야 하고, 시련을 극복하여
인내와 연단으로 가서 완성되는 이 일이, 실패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이 일에 결국, 이 일에 목표가 실패될 수 없음은
그래서 뭐가 나오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일은 실패될 수 없다. 이 소망은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이 목표가 실패되어, 체면을 구길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나 성도들의 신앙의 승리로나. 그러면서
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는 8절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다.’
라는 말은,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유가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하고 나서 나중에 한 번씩 정신 차리면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왜 내가 이 사람하고 했을까?’, ‘눈에 뭐가 씌었지’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 이야기면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는 사람한테 넋이 빠져 있었더라 이거죠?
사랑이라는 말을 성경이 도입하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란 이유가 없고, 원인이 없고 사랑을 하는 자의 열심과 정성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뭐로 확인할 수 있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란 말이죠.


죄인이었을 때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아닙니까?
가치 있는 조건정도가 아니라, 반대로 우리는 원수고,
우리는 미움의 대상이고 형벌의 대상이었지, 하나님 앞에 좋게 보일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주셨으니까,
어떻게 실패가 있을 수 있나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과 승리가 실패될 수 없는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가 되어 시작된 것이요, 그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유가 되시고, 당신의 열심과 의지로 시작하고, 결과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실패될 수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중에 로마서 8장 28절에서 봅니다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는 선언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요,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 인도받는 구원의 영광된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도 이해해야겠고,
성경에 증거를 충분히 붙잡아야 되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 시련들, 이 어려움들,
거기서 확인되는 우리 신앙의 힘없음이, 구원 전반에 걸친 혼동과 의심과 불안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제가 이렇게 증언하는 것만으로 되어있지 않고, 아래에 더 중요한 증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봅니다. 4절부터 읽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여기 등장하는 이 징계라는 말은 ‘파이데이아’라는 헬라어입니다.
‘파이디온’(어린아이들)에서 나온 파생된 말입니다.


이 ‘파이데이아’라는 말은 영어 번역본에는 ‘Discipline’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징계(훈육)’이라는 말이죠.


이 문맥상 이것을 제대로 의역하자면 ‘자식 만들기’라는 뜻입니다. (내다 버리는 게 아니라요)


제가 그렇게 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7절부터 보죠.
“너희가 참음은 자식으로 만들어지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훈련시키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자식으로 훈련 받는 일은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이런 훈련이 없다면 너는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자식으로 훈련하는 일을 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훈련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자식으로 훈련받는 일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뜻이 더 분명해 지셨죠.


우리는 자식을, 우리 부모 된 현실 속에서도 자식을 써먹으려고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훌륭해지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돈 벌어 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식이 훌륭해지길 바랍니다.
지금 이 히브리서 12장이 가르치는 것이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써먹으려고 하기 전에, 우리가 구원이 목표요, 구원의 목적이요,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훌륭함, 여기 식으로 하면, 10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이게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의 훌륭함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일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녀라는 것은 닮아야 됩니다.
그것은 부모 된 책임이며 자식의 훌륭함은 부모의 영광입니다.


우리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라 라는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해라 이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실 우리, 또 그의 아들을 보내어 사랑하여 구원한 그의 자녀가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래서 복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구원한, 하나님이 구원한,
하나님이 목적하고 사랑한 대상의 완성의 영광이
그런 사람과 은혜를 베푼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되는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인격적이고 상품적이고 존재적이죠. 쓸모 있는 것은 그 다음 다음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쪽(하나님 편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 실패되지 않는 구원)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현실 문제/적용
우리는 이 일이 물론, 어떤 일을 시켜 이 훈련이 더 잘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봉사를 시키며 전도를 시키며 규칙적인 신앙생활의 훈련을 요구해야 합니다.
가만 놔두고 훌륭해지라 해서 훌륭해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법을 제시하고 보이는, 보이는 목표를 제시해서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훈련이 유용함, 그 훈련으로 인한 봉사나 구제나 전도로 인한 부산물들의 목적을 가지지 말고
그 훈련이 그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상의 완성의 먼저 쓰임 받는 일이라는 걸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걸, 앞뒤가 틀리면 우리는 성도들을 볼 때 유용성을 근거로 해서 참여를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들어나는 일은 이겁니다. 뭐, 절반쯤은 우스갯소리로 들으셔도 됩니다.


돈 많으신 분이나 세상의 직위를 가지신 분들이 오면 성도들이 기를 써서
그 사람을 신앙을 좋게 만들려고 합니다. 왜 그러죠? 쓸모 있다고 생각해서요.
돈을 가진 사람이 신앙이 좋아지거나 세상에서 직위가, 권세를 가진 이가 신앙을 가지면
훨씬 유용하고 쓸모 있다고 생각을 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그 소원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이나 그 사람이 가진 지위를 목적하고 신앙을 미끼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걸 현실적으로 쓰셔도 됩니다마는 그건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 이런 이야기하면 다들 놀랄,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가난한 사람과, 신앙이 없는 부자인 사람은, 누가 더 쓸모가 있습니까? 교회에서?


물론 신앙이 있어야죠. 그러면 똑같이 신앙이 좋은데,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누가 더 쓸모가 있습니까?
그럼 예외 없이 부자죠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모릅니다.
가진 것으로만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으로도 일하십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셔야 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가고
왜 갑자기 유물론사상이 돼서 역시 있어야 된다 이렇게 가깁니까 정말?


그러나 일로 넘어가는 것은 잠기 잠깐입니다.
우리는 우리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근거, 기반이 창조주 하나님이신거, 그 아들을 보내신 은혜의 하나님이신거,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를 목적하신, 아버지시라는 이 가장 기본적인 근거를 놓쳐서


어느 날 보면 교회인지, 기업인지, 또는 우리가 신앙을 가르치는 것인지 경쟁을 촉구해서
반사 이익을 보려는 것인지도 모를
늘 있는, 기독교 신앙에 늘 방해가 되고 늘 올무가 되는 세상적인 생각,
사람의 생각에 쉽게 말려들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확인한 이 내용들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 허락하신 구원,
사랑하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 이 일이 일어났고 결국이,


운명이, 변개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확고한 믿음위에서
여러분의 목회나 여러분의 지도를 받는 성도들이
우리가 가진 은혜와 믿음에 참 깊은 영혼의 닻을 내리는 감격과 승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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