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레벤 출생.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구리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카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여덟째 중 두 번째 아들이었던 마틴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에르푸르트는 인문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서, 루터가 비록 인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 운동의 열정을 공유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장차 고대언어, 특히 헬라어 연구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작에 근거한 스콜라신학의 비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어진다.
1505년 7월2일,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전설이나 설화처럼 전해지는데, 솔직히 이 이야기는 좀 과장되고 왜곡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틴루터는 옆에서 떨어지는 낙뢰를 무서워 땅에 엎드리며, 성 안나(Anna)"에게 "도와준다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전해지나, 루터는 낙뢰에 대한 과학적이며 자연적인 지식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옆의 동행하는 친구가 낙뢰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 아니며 과장인 듯 하지만, 루터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그 두려움이 그를 서원을 강요하게 하여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쨌든 루터는 그의 서원에 따라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만큼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루터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를 수도원으로 부르셨으며, 그는 그곳에서 엄격한 훈련과 과정을 통하여 성경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또 루터의 수도원생활에 대한 기록도 상당부분이 과장되어있고 신비화되어있고 전설화되어있다. 그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수도원의 삶에서 학식과 능력을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석강의에 착수하게 된다. 1515년 그는 수도원의 연구책임자가 되고 동시에 11개의 수도원을 관리하는 교구장이 됨으로 인하여, 그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는 수도원의 생활을 성공적으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번민하였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고해성사를 함으로서 그의 담당사제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에게 죄가 남아있음을 알고 번민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한때 명상과 같은 신비주의에 몰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미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1515-1516년 사이에 루터는 죄인이 오직 믿음만으로, 즉 대가없는 용서의 복음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그의 강의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마침내 로마서 1장17절의 성경말씀에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사상을 그는 깨닫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의, "수동적인 의"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훗날 저서에서 "그 때에 나는 전적으로 거듭났으며, 열린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17년 루터는 갈수록 심해지는 교황청의 악폐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표명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미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를 지지하는 모든 교수들의 선두주자이었으며 명실상부한 대표자가 되어 있었다. (훗날 이 대학은 루터 종교개혁의 선봉이 되어진다)
교황 레오10세는 브란텐부르크의 알브레호트에게 마인츠의 대주교 직분과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직을 주었으며, 동시에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 관습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의 주교직까지 수행하는 승인서를 주었다. 알브레흐트는 이러한 파격적인 겸직을 교황에게 받아내면서 아우그스브르크의 은행으로부터 거액을 빌려 교황에게 지불하게 되는데, 그 대신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의 자기 구역 판매의 절반을 차지하기로 교황청으로부터 허용을 받았던 것이다. 이 판매를 위하여 웅변에 능한 요한 테첼이라고 하는 도미닉의 수도사가 면죄부의 효력을 과장하기 시작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마틴루터는 1517년 10월31일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의 정문 앞에 붙였고,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사실 이 95개 조항은 라틴어로 씌여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학문적 토론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교황이 이것을 소상히 알게 되면 이 악폐들을 수정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씌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잉골슈타트 대학의 신학교수이며 루터의 친구였고, 유능한 "요한 마이어 엑크"에 의하여 논문의 응답을 받게 되며,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어진다. 루터는 이 유능하고 논쟁적인 적대자에게 "면죄부와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자기 입장을 응답하였고, 1518년 초에는 교황청으로부터 겸직 직분을 받아낸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닉의 수도사들에 의하여 공식적인 고소가 로마에 제기되어진다.
1518년 8월 초, 루터는 60일 이내로 로마로 출두하도록 소환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마틴루터는 그의 영주이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면, 그는 곧 정죄를 받게 되며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언제부터 마틴루터를 대견스럽게 생각하여 그를 보호하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기를 거절하게 된다.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였던 막스밀리안은 곧 죽을 것 같았고, 황제선출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교황 레오10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로서 스페인의 챨스나 프랑스의 프린시스가 후보로 나서는 것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였고, 차라리 프리드리히가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즉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총애하는 교수, 마틴루터를 적극적으로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세 가지의 저서였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은 독일어로 씌어져 독일전역에 퍼졌다. 이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 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뜨리며, 개혁을 위한 참된 공의회에 대해서 언급되어지게 된다. 두달후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진다. 그때 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잇었으며, 교황을 "이리 속의 양"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며, 1520년 12월10일,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령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운다.
마침내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 손자 챨스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진다. 새 황제는 독일의 통치를 조정해야 했고, 부분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프랑스와 스페인의 세력싸움을 준비하기 위하여, 1521년 1월 보름스 국회를 소집하는데,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무적인 일도 많았지만 특히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황제를 설득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루터는 이미 정죄 되고 파문되었으므로, 이 판결만 유효하게 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챨스 황제는 상당히 망설이게 되었다. 루터는 이미 폭넓은 대중적인 지지를 갖고 있었고, 그의 통치자인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외교가이었으며, 몇몇 독일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루터가 자기 의견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의회 앞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제는 독일인의 감정을 거스리면서까지 루터를 반드시 정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결코 아니었다. 결국 황제의 안전운행증을 가진 루터는 황제와 의회 앞에 출두하게 된다. 루터에게 자기의 책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적인 여유가 주어졌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절대권력 앞에 서있었고, 자신의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 하루의 시간적 여유을 받는다.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는 결국 "성서적 논증과 명확한 추론"에 의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진리에 대해서 위대한 역사적인 증언을 말하게 된다. 결국 황제는 그의 토론을 중단시키고 만다. 그러나 방청자의 판단은 두 가지의 분류로 나누어진다. 많은 독일귀족들은 호의적인 인상을 갖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루터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외로운 개혁자 루터는 황제 앞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그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추방되어 곧 체포되고 처형되고, 그의 책들은 모두 불태워져야만 했다. 그는 결국 제국으로부터 추방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제후이며 현자(賢者)인 프리드리히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보낸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앙통치방식이 아직 독일에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고,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 ·설교 ·저작 ·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 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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