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3세는 섹소니(Saxony)의 선제후(1486-1525)로서 지혜로운 프레드릭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Ernest이고 그의 어머니는 뮌헨(Bavaria-Munich)의 공작이었던 Albert의 딸 Elizabeth이었다. 그는 토르가우(Torgau)에서 출생하였으며 148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섹소니의 선제후가 되었다. 그는 섹소니 공국을 잘 다스려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후일 그의 후임이 된 그의 동생 존(John 1468-1532) 역시도 섹소니공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합스부르그 왕가의 황제이며 인문학의 옹호자였던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zimilian Ⅰ)의 옹호아래 종교개혁을 힘있게 추진했던 선제후가 바로 프레드릭 3세이다. 그는 1500년에 '제국 통치 평의회'(Reichsregiment)의 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궁중목사요 친구였던 게오르그 스팔라틴(Georg Spalatin)에게서 공부하였는데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며 1502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을 창설하고 루터와 멜랑톤을 대학교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1493년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의 기사라는 칭호까지도 얻게 되었다. 비록 그의 전생애 동안 카톨릭교로 남아 있긴 했지만 그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당시 국제정세가 조금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터키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로 커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비엔나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며 로마 카톨릭은 이들 침입자들을 물리칠 자금모금을 위하여 독일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독일은 로마가 부과한 세금액수의 수준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독일 내 모든 성직과 수도원직을 로마가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더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의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후계문제가 복잡하였다. 로마 카톨릭은 황제선출권을 가졋던 독일의 선제후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프레드릭 3세는 독일 선제후의 우두머리 격이었기에 선제후의 옹호아래 있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적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20년 프레드릭은 루터의 저작들을 불에 태워버리고 루터를 감금하여 로마로 보내라는 로마교황의 교서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1521년 열린 보름스 회의에 루터가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보호하였고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1519년 막시밀리안 황제가 죽었을 때 로마카톨릭의 책략과 매수에 의해 거의 모든 선제후들이 넘어갔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선제후였으며 찰스5세(Charles Ⅴ)를 황제로 모시는데 앞장섰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채 지금의 오스트리아 아나부르그(Annaberg) 근처의 로하우(Lochau)성에서 1525년 5월 5일 죽었다.
선제후 프레드릭은 자신을 비텐베르크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수도원 교회의 제단에 (비텐베르크의 城敎會)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멜랑톤은 장례식 전날 저녁 라틴어로 된 조사를 했고 루터는 독일어로 장례식의 설교를 했다. 당시 토르가우(Torgau)의 목사였던 츠빌링(Zwilling)은 이 설교를 훌륭한 것으로 평가했다. 프레드릭의 개인비서이며 친구요 궁중목사였던 스팔라틴(Spalatin)은 이 설교가 기독교적이었으며 매우 흡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루터는 살전 4:13-18을 중심으로 설교하였는데 선제후의 신앙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그가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을 가졌으며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선제후의 공적에 대하여,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치하하고 있다. 그는 독일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으며 광신주의자(Schwarmer)들을 타파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설교하였다.
합스부르그 왕가의 황제이며 인문학의 옹호자였던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zimilian Ⅰ)의 옹호아래 종교개혁을 힘있게 추진했던 선제후가 바로 프레드릭 3세이다. 그는 1500년에 '제국 통치 평의회'(Reichsregiment)의 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궁중목사요 친구였던 게오르그 스팔라틴(Georg Spalatin)에게서 공부하였는데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며 1502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을 창설하고 루터와 멜랑톤을 대학교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1493년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의 기사라는 칭호까지도 얻게 되었다. 비록 그의 전생애 동안 카톨릭교로 남아 있긴 했지만 그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당시 국제정세가 조금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터키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로 커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비엔나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며 로마 카톨릭은 이들 침입자들을 물리칠 자금모금을 위하여 독일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독일은 로마가 부과한 세금액수의 수준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독일 내 모든 성직과 수도원직을 로마가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더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의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후계문제가 복잡하였다. 로마 카톨릭은 황제선출권을 가졋던 독일의 선제후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프레드릭 3세는 독일 선제후의 우두머리 격이었기에 선제후의 옹호아래 있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적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20년 프레드릭은 루터의 저작들을 불에 태워버리고 루터를 감금하여 로마로 보내라는 로마교황의 교서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1521년 열린 보름스 회의에 루터가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보호하였고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1519년 막시밀리안 황제가 죽었을 때 로마카톨릭의 책략과 매수에 의해 거의 모든 선제후들이 넘어갔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선제후였으며 찰스5세(Charles Ⅴ)를 황제로 모시는데 앞장섰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채 지금의 오스트리아 아나부르그(Annaberg) 근처의 로하우(Lochau)성에서 1525년 5월 5일 죽었다.
선제후 프레드릭은 자신을 비텐베르크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수도원 교회의 제단에 (비텐베르크의 城敎會)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멜랑톤은 장례식 전날 저녁 라틴어로 된 조사를 했고 루터는 독일어로 장례식의 설교를 했다. 당시 토르가우(Torgau)의 목사였던 츠빌링(Zwilling)은 이 설교를 훌륭한 것으로 평가했다. 프레드릭의 개인비서이며 친구요 궁중목사였던 스팔라틴(Spalatin)은 이 설교가 기독교적이었으며 매우 흡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루터는 살전 4:13-18을 중심으로 설교하였는데 선제후의 신앙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그가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을 가졌으며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선제후의 공적에 대하여,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치하하고 있다. 그는 독일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으며 광신주의자(Schwarmer)들을 타파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설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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