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inger는 단지 Zwingli의 후계자(Nachfolger)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Bullinger를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아첨한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를 Zürich 뿐 아니라 온 유럽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소” (Berchthold Haller 1535, Hollweg, Hausbuch, 9).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Zwingli 대신에 젊은 감독, 아주 귀중한 사람, 경건하고 바르고 박학하고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람,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설교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는 설교를 통하여, 밖에 있는 모든 기독교 안에서는 문서를 통하여 은사를 넘치도록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입증되었습니다” (Konrad Pellikan 1544, Hollweg, Hausbuch, 10).
“우리의 가장 좋은 아버지” (Calvin, Hollweg, Hausbuch, 14).
“Zürich 사람들에게, 스위스의 다른 개신교 신앙인들에게, 또한 독일사람들에게, 불란서 사람들에게, 영국 사람들에게 사도라고 불린다” (Beza, Hollweg, Hausbuch, 15).
I. 성장기 (1504-1522)
Bullinger는 1504년 7월 18일에 Bremgarten (현재의 스위스 Kanton Aargau). 아버지는 사제인 Heinrich Bullinger였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시의회 의원의 딸인 Anna Wiederkehr였다. Bullinger는 5살부터 초등학교(Grundschule)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12살에 Emmerich에 있는 라틴어 학교 (Stiftschule)에서 수학을 하였다. 여기에서 Bullinger는 Devotio moderna에 영향을 받았다. 1519년 여름에 Via antiqua가 주도하는 Köln 대학으로 감. 1520년에 학사 (Baccalaureus), 1522년에 문학석사 (Magister artium). 대학에서는 Via antiqua가 주도하지만 교수들로부터 인문주의를 배웠고 개신교로 개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지만 신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교회사교수인 Gratian과 Petrus Lombardus를 거쳐 라틴 교부와 그리스 교부 연구에 도달하였고, 이들을 통하여 성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Erasmus, Melanchthon, Luther의 글을 통하여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게 되었다 (17세). Bullinger는 Luther처럼 양심에 깊은 고뇌를 느끼지 않았고, Calvin처럼 급작스런 회심을 체험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경의 부요함을 깊이 연구하면서 침잠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였다 (Hollweg, Hausbuch, 8).
2. 활동초기 (1523-1531)
Bullinger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1523년 초 Zürich의 남서쪽에 위치한 Kappel에 새로 건립된 Zisterzienser (시토) 수도원의 학교의 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거기에서 1529년까지 자신이 배운 인문주의의 방식으로 Trivium (문법, 논리,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는 Zürich에 Prophezey가 개원하기 2년 전에 공개강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넓은 대중을 향하여 바울서신을 해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시토 수도원이 종교개혁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Zürich로 이양되는 것을 도왔다.
Bullinger는 1523년에 처음으로 Zwingli를 만났다. Zwingli는 Bullinger의 재능을 곧바로 알아보고 친구와 상담자가 되었다. 1525년에 Zwingli는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21세의 Bullinger를 여러 차례 대동하였다. 그 해 12월에 Bullinger는 이 논쟁들에 근거하여 “세례에 관하여” (Von dem Touff)라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Bullinger는 언약신학을 바탕으로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에 대한 가시적인 표식으로서 유아들에게도 할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아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이후로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대한 새로운 표식으로 세례를 주셨다.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언약의 표식이며, 이 언약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표식하는 것이다 (Müller, Bullinger, 26). 따라서 할례와 마찬가지로 세례도 유아들을 포함해야 한다.
1527년에 Bullinger는 Zürich에 체류하면서 5개월 동안 연구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때 Bullinger는 Zwingli의 설교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크게 인정을 받았다. Zürich 정부는 Bullinger에게 Bern의 토론 (Berner Disputation)에 참가하게 하였다 (1528년 1월 6-26일). 이 회담은 스위스의 동맹도시들과 남부독일의 도시들이 초청되는 것으로서 신앙의 기초, 성경해석, 칭의, 미사, 성자숭배, 성직자의 독신생활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 회담은 동맹도시들의 일치와 확립에 이바지하였다. 여기에서 Bullinger는 Martin Bucer, Berchtold Haller, Guillaume Farel 같은 개혁주의 인물들을 만나 활발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때 Zwingli는 Bullinger를 가리켜 “세상의 문학과 하나님의 글에 아주 박학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Zwingli는 예레미아서 주석에서 Bullinger를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젊은이”라고 불렀다 (Hollweg, Hausbuch, 8). 후에 Bullinger는 Kappel과 Hausen의 목사로서 Zürich 노회에 영입되었다.
1527년 Bullinger는 Anna Adlischweiler와 약혼을 하고 1529년에 결혼을 하였다. (Müller, Bullinger, 28-30 참조할 것).
Bullinger는 Kappel에서 6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미 풍성한 문서를 작성하였다. 30편의 라틴어 문서와 22편의 독일어 문서를 저술하였고 많은 편지를 썼다 (Müller, Bullinger, 23). 그러나 보존된 것은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인쇄된 것은 더욱 없다. Bullinger가 유난히 논쟁을 벌였던 문제는 미사와 성찬이었다. Bullinger에게 성찬은 유카리스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억 (Gedenken)이며 감사 (Dankbarkeit)의 잔치를 위한 교회의 소집이다. 성찬은 제사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아니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실제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이런 생각은 Bullinger가 1524년에 처음으로 Zwingli와 토론했던 것으로서 Zwingli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Bullinger에게는 남다른 강조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모든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유월절 양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위한 가시적인 표식이듯이, 단 한번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죽음도 모든 인간에 대한 언약의 표식이다. 따라서 더 이상 미사는 필요하지 않다. Bullinger는 성찬을 설명함에 있어서 언약사상을 도입하였다 (Müller, Bullinger, 24).
1529년에서 1531년까지 Bullinger는 Bremgarten에서 아주 존경받는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Kappel 전투 (Zwingli가 1531년 10월 11일에 전사) 이후에 이 곳을 떠나 Zürich로 도피하였다.
3. 후계자 (1531-1575)
1) 취임
Bullinger는 1531년 12월 9일 Zwingli의 후계자로 선정되었다. 이때 Bern, Basel, Appenzell에서도 초빙이 있었지만 Zwingli와의 우정 때문에 Zürich에 남기도 했다. (1531년 8월에 Zwingli는 마지막으로 Bullinger의 집에서 머물렀다. Bullinger는 Zwingli가 길을 떠나면서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전해준다: “Zwingli는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째로 나와 작별을 하면서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Heinrich, 하나님께서 그대를 지키시기를 원한다. 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충성하라 (Gott bewahre dich, und sei treu am Herrn Christo und seiner Kirche)” (Hollweg, Hausbuch, 9).
그러나 초빙과 함께 Bullinger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Zwingli의 개혁을 계속 수행하되 영적인 일을 정치적인 일에 혼합시키기 말라는 것이었다 (Campi, "Der Nachfolger", 2).
Bullinger는 나흘간 목사가 인간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1531년 12월 13일에 Zürich 교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약속을 제시하였다. 신학자들은 국가의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설교를 확립 받을 것이며, 교회는 종교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속권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의회는 백성을 치리하는 데 교회가 융화력이 되는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의회의 결속에 대한 사상 배후에는 한편으로는 Bullinger의 언약사상이 있다 (Büsser, TRE 7, 377). 교회의 예언과 의회의 권세로부터 기독교 공화국 (Respublica christiana)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Bullinger가 Zürich의 정치 지도권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할 것을 이해했다는 데 있다 (Büsser, TRE 7, 378). Bullinger는 소위 Fürträge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문서적 외교조치)를 통하여 의회에 교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들을 제안하게 되었고 공고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Büsser, TRE 7, 378).
Bullinger는 치리는 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독교 정부에 의해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사상을 1532년 1월 28일에 “선지자의 직분에 관하여” (De prophetae officio)라는 지침 연설 (eine programmatische Rede)에서 발표하였다. 이 연설에서 Bullinger는 선지자 (목사)의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목사는 신중하게 설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사람들을 우리의 엄격함 때문에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damit wir nicht diejenigen durch unsere Strenge verlieren, für die Christus den Tod auf sich nahm", Müller, Bullinger, 33에서 재인용). Bullinger는 교회의 엄격한 치리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Zwingli와 마찬가지로 Bullinger도 교회와 국가는 밀접하게 양립해야 한다 (ganz nahe beieinander)고 생각하였다. 교회는 인간의 행복과 교양에 관심해야 하고, 국가는 안녕과 질서를 도모해야 한다. Bullinger는 Luther의 “두 국가론” (Zwei-Reiche-Lehre)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Müller, Bullinger, 34). 교회와 국가의 일치에 대한 사상은 시민과 교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Bullinger는 Zürich를 새 예루살렘으로 실현시키려고 했다.
Bullinger의 “선지자의 직분에 관하여” (De prophetae officio) 지침 연설은 Zwingli의 오랜 동료인 Leo Jud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Jud는 Bullinger를 반박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Jud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도 시민이 될 수 있고 시장이 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복음을 대적할지라도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Müller, Bullinger, 34에서 재인용)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서신교환으로 논쟁이 개진되었으나 Jud가 1532년 여름에 이 문제를 설교로 공개화함으로써 결국 의회가 조정에 나서게 되었다.
Bullinger는 같은 해 Zürich 의회의 결혼재판을 변호하였다. 이것은 후에 교회의 치리실행에 대한 Calvin의 견해와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2) 제도확립
Bullinger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지 않고, Zwingli가 시작한 교회 기구들 (Genf의 것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델)을 적극적으로 확립시켰다. 이 교회 기구들 가운데 하나는 노회 (Synode)이다. 이것은 일년에 두 차례 모이는데 시장 (Bürgermeister)와 대표목사 (Antistes)가 의장이 된다. 이것은 교회를 돌보는 도구가 되었으며, 설교자의 위임, 교훈, 생활을 책임졌다.
또한 Bullinger는 학교들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1525년에 Zwingli가 설립했던 “예언” (Prophezey)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후에 현재의 Zürich의 신학부를 위한 모체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Zürich는 1530년과 1580년대에 유럽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Bullinger는 신학도들에게 한편으로는 고전어와 예술을 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해석을 위한 언어학과 수사학을 요구하였다 (그의 저서 Ratio studiorum에서 이런 요구가 잘 드러난다).
3) 주석편찬
Bullinger의 신학사상은 성경과 교부들로부터 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성경학자이며 교부해석자라고 불릴 수 있다 (Campi, "Der Nachfolger", 3). Bullinger는 1532년에서 1546년까지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을 낱권별로 바울서신, 공동서신,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순서로 모두 주석하여 출판하였고, 결국은 모음집으로 출판하였다. Bullinger의 주석은 16세기말까지 수 차례 판을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Bullinger의 주석방식은 Luther와 Melanchthon를 따라 인문주의가 발견한 수사학을 사용하여 종교개혁의 성경해석에 이바지 한 것이었다. Bullinger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오해되는 것을 방지하고 성경의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원문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문맥을 비교하며, 본문에 들어있는 기본개념들 (Loci)을 추출해냈다. Bullinger는 그의 주석으로 종교개혁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일을 충실하게 도왔다. Calvin은 빼어난 학문성과 이해하기 쉬운 면 때문에 Bullinger를 Melanchthon 그리고 Bucer와 나란히 당대의 가장 뛰어난 주석가로 평가를 하였다.
4) 설교
주석작업은 Bullinger에게 신학발전을 형성시켰을 뿐 아니라 Zürich에서의 엄청난 설교사역에도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Bulliger는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체험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Müller, Bullinger, 4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였다 (Müller, Bullinger, 39). Bullinger는 임기동안 매주 규칙적으로 세 번 (주일, 화요일, 금요일) 도합 약 7500번 정도 설교를 하였다. 그는 Zwingli의 모범을 따라 연속강해 (lectio continua) 방식으로 모두가 알아듣기 쉽게 성경 전체를 해설하였다. 아직도 그의 설교문은 거의 연구가 안된 상태이다. Bullinger의 설교사역은 그가 공사간에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믿음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졌던 것이다.
Bullinger는 주제별로 설교를 조직신학적으로 10편(Dekade)씩 묶어 5권을 출판하였다 (1549). 전집이 라틴어로 7개, 독일어 4개, 화란어 10개, 불어 3개, 영어 4개로 출판되었다 (Müller, Bullinger, 41). Dekaden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Büsser, Heinrich Bullinger, Bd. 1, 265-296).
Dekade 1 신앙에 관하여
Dekade 2-3 율법에 관하여
Dekade 4 복음에 관하여
Dekade 5 교회에 관하여
5) 저술
(1) 하나님의 단일하고 영원한 언약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unico et aeterno 1534)
Bullinger는 창세기 17:1-14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해석함으로써 언약사상을 전개한다. 먼저 언약 (testamentum, foedus)에 관한 개념을 정리하고, 첫째로 언약의 당사자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자손들), 둘째로 언약의 조건 (“내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라”), 셋째로 언약의 시간성 (영원한 언약), 넷째로 언약의 의식 (피의 의식: 할례)을 설명한다.
이 논문 가운데서 언약의 조건들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자.
이제 우리는 언약의 조건들을 살펴보자. 언약들로 맺어진 사람들은 어떤 규정에 참여함으로써, 당사자 각자가 그 의무, 다시 말하자면 한 당사자가 상대편에 대한 책임이 무엇이며, 반대로 한 당사자가 상대편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들과 언약 안에서 자신을 제공하심
그러므로 첫째로 이 언약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만큼 신성을 표현하며 제시하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번에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가 하기에 적당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엄숙한 말씀과 위대한 권위로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는 충분히 전능한 하나님, 풍요의 뿔이라”.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인간을 충만하게 하는 능력이며 선이시다.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시며, 움직이시며, 신적인 동력 그 자체로 행동하신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다이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이 이름으로 주님은 놀랍고, 복되고, 자세하게 자신의 통일성과 전능성과 도덕적 탁월성과 선성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너무 간략한 설명은 일반적으로 불분명으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설명을 덧붙이신다: “내가 나와 너와 네 뒤의 네 자손 사이에 내 언약을 세우리니, 나는 너의 하나님과 네 뒤의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심지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을지라도,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만물의 창조자가 네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보답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히 11장), 그것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자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보답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언약의 백성에게 생생한 예를 덧붙이신다: “내가 너와 네 뒤의 네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로 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창 17:8].
고대인들을 위한 약속은 모두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관해서 약속된 것들이 물리적으로 실현되었을지라도 (왜냐하면 주님은 현생에서 필요한 것들에 관련된 일들에서도 역시 그의 선하심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여러 면에서 영원한 유업, 특히 하늘에서의 삶에 관하여 제시된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주님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데에다 다른 더 큰 영적인 선물들과 유익들을 포함시키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이 무엇인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들에게 계시하기를 원하셨다. 또한 다른 약속들도 이에 대한 설명이 된다: “내가 너를 복 주며, 너의 이름을 크게 만들 것이니, 네가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창 12:2-3]. 또 다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될 것이라” [창 15:1]. 또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고 너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삼을 것이라” [창 15:5].
이 모든 약속들로부터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선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 안에 제시된 약속들과 조건들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영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16]에서 설명한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 받았다는 것이다. 그 안에 모든 충만, 의, 거룩함, 생명, 구속, 구원이 들어있고 (고전 1:[30]), 그분의 충만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받으니 은혜 윙 은혜이다 (요 1:[16]). 왜냐하면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십자가에 흘린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과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골 1:[19-20]). 이 동일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영원한 언약을 믿는 자들에게 남겨진 유업 그 자체이시다. 그 언약을 요약하면 (만일에 어떤 사람이 그 요약을 찾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다: 가장 높은 영원한 능력과 위엄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만물이 존속하며 운동하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기에 충분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다. 그렇게 하여 지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능력과 힘을 약속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 동맹자, 구세주가 되셔서, 그렇지 않으면 영과 육에 있어서 연약한 인간들을 강하게 하실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직분과 이 언약에의 참여와 관련이 있다. 그분은 가나안 땅을 이용하여 축복 받은 자손인 우리에게 풍요의 뿔과 하늘의 모든 보화로 나타나셨고, 온 인류를 초청하여 이 축복을 누리게 하신 (사 55장) 하나님이시다. 이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시는지 들어보자.
인간의 의무와 하나님께 해야 할 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 너와 네 자손이 대대로 그리하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이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 이것은 “너는 모든 상황에서 너의 필요를 위하여 오직 나를 신뢰하라, 너는 네 온 마음으로 나에게만 신실하라”. 왜냐하면 모세가 신명기 13장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따르라,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들으라. 그를 섬기고 그를 의지하라”. 그 다음에 언약의 실제적인 말씀에서 뒤따라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앞에서 행하라”. 이 말씀보다 더 간결하고, 더 분명한 말씀은 없다. 히브리어 용례를 따르면 “행하다”라는 어구는 “살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우리는 그것을 관용적으로 “올바르게 행하고 살도록 준비하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내 앞에서”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이것은 “내 뜻과 기쁨을 따라”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이렇다: “네 삶을 모든 면에서 내 뜻에 맞추어라”. 그래서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덧붙여진다.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떻게 행할 수 있는지 설명하신다. 인생의 순수함과 순결함에 더하여 신앙의 견고함과 신실함을 위해서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온전함과 바른 길이다. 그래서 모세는 신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냐”. 또한 미가서 6장 [8절]은 말한다: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주관자이시므로 믿음으로 굳건하게 한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며, 그의 기쁨을 위하여 인생의 순결함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이 사실들을 무시하고, 거짓 신들을 찾으며, 부끄럽고 불경하게 살고, 삶의 진실한 거룩함보다는 의식과 외적인 것들로 하나님을 섬긴 자는 언약에서 제외하고, 박탈되고, 거절될 것이다.
(2) 일기 (Diarium 1541년부터)
(3) 기독교 신앙의 대요 (Summa Christlicher Religion 1556)
Bullinger는 많은 사람들이 Dekaden이 너무 방대하여 접근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그 내용을 압축하는 기독교 신앙의 대요를 정리하였다. 이것은 모두 10항목으로 되어 있다.
1. 성경
2. 하나님과 하나님의 활동
3. 죄와 형벌
4.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 해설 포함)
5. 은혜와 칭의
6. 신앙과 복음의 말씀 (사도신경 해설 포함)
7. 기도 (주기도문 해설 포함)
8. 성례
9. 선행
10. 죽음과 종말
6) 신앙고백서
(1) 첫째 스위스 신앙고백 (Confessio Helvetica prior 1536)
1536년에 Bullinger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구별되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 Bern, Basel, Schaffhausen, St. Gallen, Mühlhausen, Biel과 연합하여 첫째 스위스 신앙고백 (Confessio Helvetica prior)을 작성하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방대하지는 않지만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다. 우선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고백한다. 여기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부자유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택되었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회에 관하여 가르치면서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고백서는 예배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속정부와 결혼을 다룬다. (cf. Wälchli, "Bullinger, das erste und das zweite Helvetische Bekenntnis", 94f.).
(2) 성찬합의 (Consensus Tigurinus 1549)
Bullinger는 Zwingli의 성찬론을 따라 기념과 교제라는 상징적 의미와 은사와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사상 (Zwingli가 1529년부터 가지게 된 견해)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언약신학적인 의미와 구원의미를 발전시켰다. Bullinger는 성찬론에서 Luther와 합의하는 것에 실패하고 Calvin과 협상하게 되었다.
1547년과 1549년 사이에 Bullinger와 Calvin은 서신교환. Calvin이 세 번 Zürich를 방문함. 1549년에 협상이 성사되었다. Bullinger는 신비한 연합 가운데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인정하였고, Calvin은 성찬의 구원효력을 위한 근거로서 신앙을 강조하였다 (Müller, Bullinger, 48).
성찬합의서는 모두 26조항으로 되어 있다. 먼저 1-6조항은 기본적인 신학을 제시한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며 설교와 성찬을 통하여 증거된다. 7조항은 핵심으로 한편으로는 Zwingli의 입장을 수용하고 (성찬은 기독교 신앙고백과 교제의 표식이며... 감사와 의무에 대한 격발이다), 칼빈의 입장을 수용한다 (하나님께서 성찬을 통하여 그의 은혜를 증거하고, 실현하며, 인장한다 besiegelt). 8-9조항은 표식과 사실과 은사의 영적 수용을 구분한다. 10항은 성례와 결부된 약속은 신앙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11-15조항은 성찬은 스스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역사한다고 고백한다. 16조항은 단지 피택자들만이, 18조항은 단지 신자들만이 은사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17조항은 성찬이 은혜를 수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리에 반대한다. 19조항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성찬 이전에도 성찬 밖에도 존재한다고 말하며, 불신자의 성찬참여는 아무런 효력도 없다고 말한다. 20조항은 성찬의 유익이 성찬수용의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21-26조항은 성찬의 잘못된 사상들을 배격한다 (21: 그리스도의 육체적 공간적 임재, 22: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 23: 몸과 피의 본질을 우리의 것과 혼합하는 것, 24: 화체설 및 그리스도를 떡과 결합시키는 것 (루터에 반대), 25-26: 천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공간적 제한을 가르치며, 떡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 배격한다). (cf. Saxer, "Bullinger, Calvin und der 'Consnesus Tigurinus'", 91f.).
(3) 둘째 스위스 신앙고백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이것은 “바른 신앙과 옳은 기독교의 보편적 교훈에 대한 고백 및 간단한 설명” (Bekenntnis und einfache Erklärung des rechtgläubigen Glaubens und der katholischen Lehrsätze der aufrichtigen christlichen Religion)으로서 전체 30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 고백서는 성경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임을 말한다. 신론에서는 성자숭배를 배격한다.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표명한다. 예정은 구원과 유기를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구속주이시다. 구속과 관련하여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회와 목회자에 관한 가르침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다르다. 성례는 단지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한다. (cf. Wälchli, "Bullinger, das erste und das zweite Helvetische Bekenntnis", 95ff.).
7) 서신
Bullinger는 모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Campi, "Der Nachfolger", 3: "Sein vergleichsweise wenig abenteuerliches Leben verlief (die längste Reise während seiner Amtszeit führte ihn nach Basel"). Bullinger는 거의 Zürich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행동반경은 겨우 Grossmünster, 의회, 집이었다 (Müller, Bullinger, 33).
그러나 Bullinger는 서신교환으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발휘하였다. 그는 12000편의 서신을 교환하였다 (Bullinger가 쓴 편지 2000편, 받은 편지 10000편). (Luther 4000편, Calvin 4300편, Melanchthon 7500편). 700명 이상과 서신교환 (Hollweg, Hausbuch, 13). “이렇게 종교개혁의 지도자들 사이에 전체적인 네트웍이 형성되었다” (So entstand ein ganzes Netzwerk unter den führenden Reformierten, Müller, Bullinger, 46).
4. 나가는 글
Bullinger는 1575년 9월 17일에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Beza는 그를 가리켜 종교개혁의 첫 번째 황금시기에 남은 유일한 사람 (der einzige, der übriggeblieben ist aus jener ersten goldenen Zeit der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Hollweg, Hausbuch, 15). 그는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싸웠다. Bulliger는 스스로 이렇게 말을 했다: “신앙에서는 순수하게, 영혼으로는 선명하게, 마음으로는 견고하게,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다” (Im Glauben rein, im Geiste klar, im Herzen fest, werden wir die Sache der Wahrheit verfechten" (Hollweg, Hausbuch, 13).
Zürich 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울릴 정도로 Bullinger의 영향력이 그렇게 지대했던 까닭은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 (Seelsorger)였기 때문이다. Zürich 교회의 지도자라는 위치, 명석한 지성, 많은 사람을 동료로 만든 원만성과 함께 온화하고 평온한 마음이 그의 영향력의 동인이었다 (Campi, "Der Nachfolger", 4). 그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과 (신앙의 이유로) 도피자들을 돕는 일에 힘을 썼다.
Bullinger는 칭의를 외적인 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성화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삶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칭의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 (adoptio)일 뿐 아니라 생활의 변화 (vivificatio)라고 생각하였다 (Campi, "Der Nachfolger", 4f.).
그는 1523년 이후로 거의 모든 저술의 겉장에 마태복음 17:5를 기입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으로 순종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Campi, "Der Nachfolger", 4).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Bullinger는 Zwingli의 후계자 (Nachfolger)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 (Nachfolger)이다.
5. 참고문헌
F.Blanke, Der junge Bullinger, Zürich 1942
F.Büsser, Heinrich Bullinger. Leben, Werk und Wirkung, Bd. 1,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2004
E.Campi, "Der Nachfolger", in E.Campi, H.U.Bächtold, R.Weingarten (Hg.), Der Nachfolger: Heinrich Bullinger (1504-1575),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2004, 2-5
W.Hollweg, Heinrich Bullingers Hausbuch. Eine Untersuchung über die Anfänge der reformierten Predigtliteratur (BGLRK 8), Neukirchen Kreis Moers: Verlag der Buchhandlung des Erziehungsvereins 1956
Ph.Wälchli, "Bullinger, das erste und das zweite Helvetische Bekenntnis", in E.Campi, H.U.Bächtold, R.Weingarten (Hg.), Der Nachfolger: Heinrich Bullinger (1504-1575),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2004, 94-98
E.Saxer, "Bullinger, Calvin und der 'Consnesus Tigurinus'", in E.Campi, H.U.Bächtold, R.Weingarten (Hg.), Der Nachfolger: Heinrich Bullinger (1504-1575),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2004, 90-93
C.P.Venema, Heinrich Bullinger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Author of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Baker 2002
조병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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