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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마틴 부처 (Martin Bucer, 1491-1551) (스위스)

by 【고동엽】 2021. 11. 13.

마틴 부처는 1491년 11월 11일에 독일 알사스지방의 슈레트슈타트(Schlettstadt)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터보다는 8세 연하였고 칼빈보다는 18세 연상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지역의 라틴어 학교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수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만났고 새로운 이상을 배양할 수 있었다. 그는 르네상스의 실천적인 면에 관심이 깊어 독일 인문주의 학자이며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를 깊이 공부하였다. 1506년 15세 때에 도미니칸 수도사가 되어 하이델베르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을 배웠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으로 수도회의 교수로 불리워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1518년에 루터의 글 "자유의지론"을 접한 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던 루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루터에게 개혁사상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였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처는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 사상을 받아들이고, 152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받고 있던 은급을 거절하고 수도회를 떠났다. 1523년에는 이전에 수녀였던 엘리자베스 실버라이즌(Elisabeth Silbereisen)과 결혼하였는데 그것은 개혁가들 중 가장 먼저 치뤄진 결혼이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25년간 교구 목사로서 종교개혁을 이끌며 개신교 학교들을 세워 개신교 신앙에 입각한 교육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성만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루터의 공재설 보다는 스위스의 개혁가 쯔빙글리의 기념설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양자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1529년에 열린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양자가 성만찬 이론의 차이를 극복하기 못한채 갈라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1530년에 "Confessio Tetrapolitana"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스트라스부르크, 콘스탄쯔, 메밍겐, 린다우 등 4개 도시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었다. 부처는 96개의 논문을 썼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시편강해와 "Deregno Christi"이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3년간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물며 부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부처는 바젤에 기거하던 개혁자 칼빈을 스트라스부르크로 불러들였다.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 2년간 이곳에서 부처의 도움을 받으며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536년 비텐베르크 회의에서 개인적으로 루터를 만났고, 부인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윌리브란디스 로젠블라트라는 여성과 재혼한 후, 1549년에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초빙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로 봉직하였고, 그곳에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549년에 성공회 예배 예식서인 "Book of Common Prayer"의 증보판 발간에 참여함으로써 성공회 예배의식 개혁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부처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포도주를 주는 것과 성직자의 결혼을 인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신교 신앙의 거의 모두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1549년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맺어진 개신교도와 카톨릭교도 사이의 잠정 협약(Interim of the Diet Augsburg)을 거부하였다.

 

부처는 1551년 2월 28일 캠브리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대학교회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3000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운집하였다. 후에 개혁가 리들리, 라티머 그리고 크랜머 등을 화형시킨 바 있는, 피의 여왕이라고 불려지는 카톨릭 신봉자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 유해가 파헤쳐져 주검이 나무기둥에 묶인 채 불태워졌다. 그러나 메리 튜더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후 그의 무덤은 가묘로 복구되었다.

 

부처의 이름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다른 개혁자들만큼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개혁가였으며 개혁자들을 중재하여 교회일치를 이루려는 열망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성서주석은 후대의 주석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 신학형성에 있어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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