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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멜랑(히)톤 (Philip Melanchthon, 1497-1560) (독일)

by 【고동엽】 2021. 11. 13.
독일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 멜랑톤은 1497년 2월 16일 독일 바덴의 브레텐(Bretten)에서 쉬바르체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터보다 14세 아래였고 칼빈보다 12세 위였다. 그는 신학적으로 루터와 칼빈의 중재자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 외조모에게 교육받았고 150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했고 14세때 문학사를 받았으며 16세때 튜빙겐 대학에서 문학석사(M.A)를 받았다. 21세에 비텐베르그 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갔으니 고전과 어학에 대한 그의 실력을 알 만하다. 그는 철학강의가 전공이었으나 신학 강의가 더 인기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신학강의에 뛰어났다. 그는 인문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강의하여 루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루터의 함께 대학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라이프찌히 논쟁에 참여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해 하였으며, 칼쉬타트와의 논쟁에도 참여했고 종교개혁론의 최초신학서인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 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은 멜랑톤의 첫 조직신학작품이며 루터교의 최대 걸작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비견된다(1521년에 출판하였으나 1559년에 마지막 판을 출판하였다). 이후 성서번역과 주석작업에 몰두하면서 비텐베르크 소요, 농민전쟁,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논쟁, 쉬말칼덴 논쟁 등의 혼돈기에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보수적 전통적 형태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을 기초하여 종교개혁 교회 형성에 공헌했다. 1530년 황제 찰스5세가 정치적 화합을 목적으로 아우구스부르터크 회의를 소집했다. 루터가 이 회의에 참석하지못하게되자 문서 작성의 책임은 멜랑톤에게 쥐어졌고 그는 이 일로 인해 <아우쿠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다. 그외 많은 성경강의(로마서 강해는 7차에 걸쳐 시행)가 있다.


그는 겸손하고 예절바른 행동으로 그의 속사람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보여주었다. 신학박사학위를 거절하기도 했던 것이다.그러나 멜랑톤은 결정적인 주요신학논쟁(즉,쯔비카우 예언자들의 성령신앙소동,아우구스부르크 고백협상,쉬말칼드전쟁시의 종교담화)에 실패함으로서 지도자적 위치를 상실하게되었다.자기주장적 성격결여와 인간적 나약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멜랑톤은 루터가 전쟁의 사람이라면 평화의 사람인 것이다. 멜랑톤은 친절하고 부드럽고 절제를 잘하였다. 루터는 번개와 천둥처럼 분노를 터트렸으나 멜랑톤은 루터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서 루터의 부족을 메꾸어주는 조력자로 보내어주셨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주요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신인협조설-그는 성경과 초대교부들을 계속 공부하다가, 처음에는 루터처럼 인간의지의 노예상태를 인정했으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스토익적 운명론과 결정론의 위험을 발견하게되었다. 그리하여 멜랑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크게 강조하는 크리소스톰적 신인협조설을 받아들이게되었다. 그러나 이렁한 사실이 루터와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못하였다.(주:웨슬레도 크리소스톰적 신인협조설을 받아들임).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을 말하였으며 알미니안주의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선행적 공로사상은 비판한다.


영적임재설(성찬에 있어서)-주의 만찬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육체적 임재설과 쯔빙글리 의 상징설의 중간에 있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1560) 비텐베르그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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