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는 굶주려 있다. 사랑에, 미에, 의미에, 항구적인 도덕과 법에 굶주려 있다. “죽음의 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풍성한 위로자에 대한 가지시 않는 갈증이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 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애1;16).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위로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만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의 의의를 잊었기 때문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복음주의와 정통신앙권 안에서는 사람의 목적을 말할 때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해한 성경 교훈의 뜻은 완전히 바뀐다. 성결대로 충실히 대답하려면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하고 완전하게 인용해야 한다. 이 후반부 답이 인생에 대한 관점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명을 절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관련된다.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고, 그분에게 채우심을 받고, 그로써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방관자에게도 기독교가 염세 교리를 믿는다고 결론 짓도록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시는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환경이 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궁극적이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우리 인격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에 채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 파괴적인 지성주의가 존재하긴 하나, 이것이 말하는 지식이란 참된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전인이 채움을 받아야 한다. 즉, 사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지만 이들에게서 기독교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삶의 기쁨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전인이 채움을 받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한 채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등을 돌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 옛 유대인들은 탈기독교 세계를 사는 현대인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상들을 찾아갔으나, 그래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문화를 건축하였다. 물론 그들의 신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물질주의를 전부로 삼고 모든 모든 것을 질량, 에너지, 운동으로 축소시킨 우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우리 세대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에게로 갔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그 이후 민족들도 거짓된 신들에게로 갔으나, 그들은 우리 세대만큼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지는 않았다. 결론으로 다음 사실을 이해하자. 인격적인 위로자만이 인격적 존재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존재하시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 즉 유대-기독교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이 일을 넉넉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충분한 위로자이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애1:18). 히브리 성경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입”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생의 진정한 해답,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는 명제적 계시- 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의 시대 상황이나 탈기독교 세계의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했다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 아래 놓여 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도 거기서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그분과 분리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 역시 충분한 위로자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도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애1:19). 탈기독교 세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 이 문화가 성경적인 종교개혁 사상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그 진리를 외면해 왔으므로 다시 진리로 돌아서는 일이 없이는 도시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될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문화를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할 말은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하는 오직 한 자기밖에 없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고, 오늘 우리 시대가 또한 그러하다.
어떤 죽음인가? 인적이 끊긴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죽음이다. 인격성이 자취를 감췄다. 비슷하게 무섭고 소름끼치는 고독을 그린 호퍼 같은 미국 화가들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토대로 교회와 문화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시의 죽음은 점차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우리 문화가 기독교라는 기반을 내동댕이 친 뒤에도 예전처럼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충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에게 등을 돌렸으므로, 여러분의 도시에는, 여러분의 문화에는 죽음이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역사 안에 들어와 일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일하신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그냥 군사나 경제상의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우리 세대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 교리들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지만,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역사의 실재들에 관해 보여오신 교훈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 관점을 갖고 있다면 싸구려 해결책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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